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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29화 (29/71)
  • 29화

    “앞으로 너도 자주 올래?”

    고결의 옆얼굴을 진득이 응시하고 있던 우현이 별안간 저런 질문을 던졌다. 어딜요? 라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뒤이어 나온 우현의 말 때문에.

    “여기가 결이 네 마음에 들면.”

    예상치 못한 제안에 그제야 고결이 대본에서 눈을 뗐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우현이 기다렸다는 듯 올곧게 눈을 맞춰왔다. 우현의 두 눈이 은은하게 곡선을 그리며 휘어 있었다.

    “자주 말고 매일 와도 돼요?”

    “…….”

    “안 되면 그냥 자주 오는 거로 할게요.”

    우현의 침묵에 고결이 조금 다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잠시 굳어 있던 우현이 곧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현이 웃을 때마다 그 작은 울림에 맞춰 심장이 진동했다. 어쩐지 얼굴로 열이 올라서 더 이상 우현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고결이 다시 대본으로 황급히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온 신경은 옆에 앉아 있는 우현한테만 쏠려 있었다.

    “그래. 좋아.”

    잠시 후, 옆에서 웃음기 어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일 와, 결아.”

    우현의 말에 고결은 네, 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대본에다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로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우현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

    그 뒤로 고결은 정말 매일같이 별관 창고를 찾아가 우현과 함께 점심시간을 보냈다. 우현한테 허락도 받았으니까 딱히 눈치는 보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의 그 비밀스러운 밀회는 학년이 올라갈 때까지 지속됐다.

    사실 남몰래 만나서 밀회라고 칭하는 것일 뿐, 실상은 별거 없었다. 고결과 차우현이 하는 거라고는 그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시답지 않은 대화를 주고받는 게 다였다. 고결은 곧 나가야 할 시합 얘기를 하거나 아니면 연극에 관한 것들을 물어봤다. 우현을 처음으로 본 게 연극 무대라서 그런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관심이 많이 갔다. 그래서 괜히 이것저것 찾아보고 알아봤다. 그래 봤자 수박 겉핥기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때마다 우현은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가끔은 재미있게 본 영화나 맛있게 먹은 음식 같은 걸 추천할 때도 있었다. 물론 전자는 우현이 했고, 후자는 결이 했다. 그러다 얘깃거리가 떨어지면 우현은 대본을 읽고, 결은 간단한 운동으로 몸을 풀었다. 같은 공간 안에서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어색하지가 않았다.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굳이 무언가를 같이 하지 않아도 편안한 상대가 있다는 건 꽤나 좋은 일이었다.

    “나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결이 너 토끼 닮았어.”

    다만 가끔가다 우현은 뜬금없는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네?”

    매트 위에 누워 두 다리를 든 채로 상체만 올리며 복근 운동을 하고 있던 고결이 모든 행동을 멈췄다. 제 귀가 잘못됐나 했다. 그 상태로 고개만 조금 돌린 고결이 우현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우현은 언제나처럼 뜀틀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었다. 우현이 고결을 내려다보며 해사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하지만 고결은 우현을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혹시 우현의 시력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봐 심히 염려스러워서 그랬다.

    “형이 말하는 토끼가 자이언트 토끼 뭐 그런 거예요? 그 왜 이만한 토끼 있잖아요.”

    고결은 상체를 바르게 세워 앉았다. 그리고 허공에다 대고 크게 원을 그렸다. 한 손으로는 부족해서 두 손 다 동원해서 그렸다. 그 행동에 우현이 조금 큰 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런 토끼 말고 그냥 우리가 원래 아는 토끼 있잖아. 작고, 하얗고, 귀여운 애.”

    작고, 하얗고, 귀여…. 우현이 한 말을 되새김질하듯 곱씹던 고결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맨 마지막 단어는 차마 끝까지 말하지도 못했다. 단지 속으로 발음하는 것뿐인 데도 소름이 돋아서.

    그래. 하얀 건 인정할 수 있었다. 확실히 고결은 피부가 흰 편이었다. 거기다 약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디에 조금만 긁히거나 부딪혀도 고스란히 흔적이 남았다. 훈련을 하고 나면 언제 생겼는지 모를 상처와 멍으로 온몸이 도배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작고 귀엽다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론 우현에 비하면야 작았지만 그래도 평균 신장을 훨씬 웃도는 키였다.

    “가만히 있어도 닮았는데 특히 지금처럼 놀라거나 당황해서 눈 살짝 크게 뜰 때. 그럴 때는 더 많이 닮았어. 눈이랑 코랑 다 동글동글해서.”

    우현이 아무렇지 않게 고결의 혼란함과 당혹스러움을 가중했다. 아무튼 여러모로 우현은 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우성 알파면서 베타인 자신과 이렇게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내는 것만 봐도 그랬다.

    우현은 서열 문화에 도취되다 못해 찌들어 버린 보통의 알파들과는 달랐다. 다른 애들 위에 군림하려 들기는커녕 오히려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하고자 했다. CH그룹의 우성 알파 차우현이라는 유명세 때문에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이유로 우현을 우습게 보는 애들도 있었다. 사실은 알파가 아니라 오메가인데 검사 결과가 잘못된 거 아니냐는 악질적인 얘기를 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우현의 배경 때문에 앞에서 대놓고는 떠들지 못했지만. 다른 알파였다면 그딴 헛소리를 한 새끼를 찾아서 죽여 버리겠다며 학교를 뒤집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현은 본인의 귀에 질 낮은 헛소리가 들어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긴, 보통 알파 같았으면 애초에 그 골목길에서 그런 식으로 만나지도 못했겠지.’

    가만 생각해 보면 우현과의 첫 만남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때 그 양아치 무리야 세움고 학생이 아니니까 우현이 누구인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우성 알파가 길을 걷다 말고 양아치한테 돈을 뜯기는 일 같은 건 절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왜냐면 대부분의 알파들한테는 딱 봐도 일반인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흔히들 말하는 아우라나 포스 같은 특별한 기운이.

    그렇게 따지자면 확실히 우현도 일반 사람과는 다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관 때문이었다. 우현의 겉모습은 보통 알파라고 생각했을 때 떠올리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아무래도 그래서 사람들이 우현을 더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고결은 우현이 흔히들 알고 있는 알파와 달라서 좋았다. 하지만 그 점 때문에 우현이 무시를 당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형. 혹시 운동할 생각 없어요?”

    “왜? 나 유도부 영입하려고?”

    우현이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우현과 유도부라니. 그런 건 꿈도 안 꿨다. 고결이 다급하게 부정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형도 운동하면 좋을 거 같아서요. 형은 골격이 타고나서 운동 조금만 해도 금방 티 나고 좋아질 몸이거든요. 아마 저보다 훨씬 더 좋아질걸요?”

    이 생각을 왜 지금에서야 한 건지. 얼굴은 어쩔 수 없다지만 몸은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었다. 운동을 해서 지금보다 더 크고 강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사실 따지면 지금도 작은 몸은 아니긴 한데, 그러니 더 효과가 좋을 것이었다. 저 몸에 근육까지 붙으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엄청날 게 분명했다. 혹시 몰랐다. 몸이라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알파의 이미지에 가깝게 변한다면 우현이 뒤에서 저런 질 낮은 소리를 듣는 일이 없어질지도.

    “그래? 결이 너는 그런 게 다 보여?”

    별안간 시작된 운동 타령이 이상할 만도 하건만 우현은 아무것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만약 우현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솔직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형이 남들한테 무시당하는 게 싫어서 몸이라도 키워 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이런 얘기를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해서 그런가 대략은요.”

    고결은 매트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뜀틀에 앉아 있는 차우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은 고결이 우현의 허벅지와 팔뚝을 꾹 쥐었다 놓길 반복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만큼이나 담백한 손길이었다. 그 어떤 의도 따위 느껴지지 않는.

    차우현은 자신의 허벅지를 매만지고 있는 고결의 손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힘을 줄 때마다 도드라지는 손등의 뼈라든가 힘줄. 운동하는 사람치고 의외로 얇고 가는 손가락 마디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진득하게.

    “형 따로 운동한 적 있어요?”

    “아니, 없어.”

    “근데도 이 정도로 단단한 거 보면 타고난 근질도 좋네요.”

    역시 우성 알파는 다르긴 다르구나. 고결은 속으로만 감탄했다. 운동을 해 본 적 없다는 사람치고 우현의 몸은 상당히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형. 앞으로 제가 조금씩 봐 드릴 테니까 저랑 같이 운동해 볼래요? 꼭 거창한 거 아니더라도 저 조금 전에 한 맨몸 운동 같은 것만 해도 확실히 다르거든요.”

    “나야 운동 배우면 좋긴 한데, 괜히 결이 너 방해하는 거 아니야?”

    고결이 당치도 않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우현이 관심을 보일 때 얼른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저 어차피 훈련 가기 전에 몸 풀려고 여기서 운동하잖아요. 그거 형한테 알려 주면서 같이 하는 거니까 방해될 거 전혀 없어요.”

    고결의 말을 들은 우현이 걸터앉아 있던 뜀틀에서 사뿐히 내려왔다.

    “그럼 나는 답례로 호흡법 같은 거라도 알려 줄까?”

    “호흡법이요?”

    “응. 연극 할 때는 복식호흡 해야 하거든. 복식호흡 하면 자연스럽게 배에 힘 들어가니까 결이 너한테도 어느 정도 도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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