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우현의 미소에 고결 역시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그러자 우현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와 동시에 맞잡은 손에도 조금 더 힘이 실렸다. 하지만 고결은 그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작 그런 것에 신경 쓰기엔 눈앞에 보이는 우현의 얼굴이 너무나도 해사한 탓이었다.
***
[뭐 해? 괜찮으면 나 좀 잠깐 볼래?]
차우현한테서 연락이 온 건 그다음 날, 점심시간의 일이었다. 진짜로 이렇게 바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의외였다. 하교까진 아직 반나절이나 더 있어야 했다. 그러니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달라고 한 연락은 아닐 것이다. 도복으로 갈아입은 뒤 체육관에 갈 준비를 하고 있던 고결은 재빨리 긍정의 답장을 보냈다.
어차피 훈련은 30분 후에나 시작됐다. 평소라면 미리 체육관에 가서 몸을 풀고 있었을 테지만 그것 좀 안 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석우와 영수를 비롯한 다른 유도부원들은 점심시간을 꽉꽉 채워 보낸 후에야 체육관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섰다. 밥을 먹자마자 체육관으로 가는 건 고결 하나뿐이었다. 좀처럼 요령을 부릴 줄 모르는 성격 탓이었다.
[그럼 별관 앞에서 보자. 기다리고 있을게.]
메시지를 확인한 고결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비쳤다. 그도 그럴 게 별관은 상대적으로 자주 쓰지 않는 과학실과 같은 실습실, 그리고 성적이 상위 10%에 드는 학생들을 위한 고3 특별반이 있는 건물이었다. 말이 좋아 특별반이지 정규 수업은 듣지 않고 개인적으로 수능 공부를 하는 독서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까 공부와는 담쌓은 지가 오래된 고결이 갈 만한 곳은 아니란 소리였다.
사실 별관과 인연이 없는 건 일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특별반 애들이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선생님들조차도 극히 일부만 출입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런데 우현이 별관 앞에서 보자고 하니, 고결이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결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더 캐묻지 않고 일단 별관으로 향했다.
“어, 왔어?”
먼저 도착해 있던 차우현이 고결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신기했다. 엊그제만 해도 접점이라곤 하나도 없던 우현이 이렇게 자신한테 아는 척을 해 준다는 게. 분명 말 한마디 못 섞어 보고 졸업할 거라고 생각한 우현이었다. 그런데 그런 우현이 지금 제 눈앞에 있었다. 심지어 저렇게 손까지 흔들어 주면서.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이 평범한 순간이 상당히 벅차게 느껴졌다. 고결은 제멋대로 들뜨려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조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네. 안녕하세요.”
고결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걸 보며 부드럽게 웃은 우현이 거리낌 없이 별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결 역시 그런 우현의 뒤를 따라 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별관 앞에 서 있는 관리인 아저씨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미리 겁먹고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아저씨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우현은 별관에 한두 번 온 게 아닌 것 같았다.
그제야 고결은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소문의 차우현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우현은 자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선생님들조차 출입이 힘든 별관이라고 해도 우현만큼은 예외였다. 차우현이란 그런 존재였다.
“별관 출입은 처음이야?”
고결은 두리번거리며 건물 내부를 구경하기 바빴다. 특별할 거 없는 건물이긴 한데 처음 오니까 신기했다. 그런 고결의 모습에 차우현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 온 티를 너무 냈나 싶었다. 고결이 어색하게 뒷덜미를 문지르며 그렇다고 답하자 우현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좀 민망해져서 고결은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따라와 보면 알아.”
차우현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직접 말해 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고결은 잠자코 우현이 가는 대로 따라갔다. 특별반 학생들은 점심시간에도 공부를 하는 건지, 별관은 상당히 조용했다. 수업 시간 이외에는 언제나 시끄러운 소리로 뒤덮여 있는 본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고결보다 반쯤 앞서 걷던 우현이 1층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문고리 옆에는 굵은 자물쇠가 단단하게 채워져 있었다.
‘설마 이걸 부수고 들어가려는 건가?’
고결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우현과 자물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혹시 힘 쓸 사람이 필요해서 자신을 불러낸 걸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우현은 교복 바지에서 열쇠를 꺼내 아무렇지 않게 자물쇠를 풀었다. 놀라움으로 인해 고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무런 제재 없이 별관에 출입하는 것도 놀라운 마당에 열쇠까지 가지고 있다니. 이 학교에서 차우현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한 일의 영역이 대체 어디까지인 건지, 감히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결아. 너도 들어와.”
문을 연 차우현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오라는 어투가 너무나 여상해서 마치 친구 집에 초대받은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고결은 잠시 머뭇거리다 우현을 따라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 창고예요?”
시선이 닿는 곳마다 꽹과리와 장구, 체육대회 때나 쓸 법한 천막과 의자 등 온갖 물건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구조가 몸에 익을 대로 익은 모양인지 우현은 아무렇지 않게 물건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와 다르게 고결은 최대한 물건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부지런히 우현의 뒤를 쫓았다.
“응. 창고 겸 내 아지트.”
가장 안쪽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춘 우현이 구석에 놓인 뜀틀 위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그 아래로는 푹신한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다. 정신이 사납던 문가와 달리 이 주변은 제법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쉬기 위해 일부러 품을 들여 만들어 놓은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 자주 오세요?”
“응. 거의 매일. 나 점심시간 끝날 때까진 여기에 있거든.”
교실과 도서관, 소강당 등등 여기 말고도 학교 안에 있을 만한 곳은 많았다. 굳이 출입이 통제된 별관까지 와서 시간을 보내야 할 이유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결은 우현한테 왜 하필이면 여기에서 점심시간을 보내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자신의 질문에 우현이 곤란해할 수도, 혹은 우현의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단 생각에서였다.
“여기 좋네요. 쉬기에 좋아 보여요.”
그래서 고결은 자신도 여기에 자주 오던 사람인 것처럼 편하게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댄 고결이 고개를 들어 뜀틀에 앉아 있는 우현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제 아지트에 섞여든 고결을 우현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마주 봤다.
“그렇지? 그래서 일부러 열쇠 반납 안 했어.”
“반납이요?”
“응. 원래 여기에다가 축제 때 쓸 연극부 소품 놔두느라 열쇠 받은 거였거든.”
“선생님이 뭐라고 안 해요?”
“애초에 돌려 달란 말도 안 하던데?”
차우현이 피식 웃었다. 선생님이 우현한테 차마 열쇠를 돌려 달란 말을 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진짜로 까먹고 하지 않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고결은 그저 고개만 조금 끄덕거렸다.
“어? 저거….”
다시 한번 찬찬히 창고를 둘러보던 고결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됐다. 이제 보니까 뜀틀과 벽 사이에 웬 두꺼운 종이 뭉치가 돌돌 말려 끼워져 있었다. 고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 우현이 별거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내 대본이야.”
“대본이요?”
“응. 나 대본 연습할 때 거의 여기서 하거든. 이것 말고도 많은데 볼래?”
차우현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뜀틀에서 내려왔다. 자연스럽게 고결의 옆에 앉은 차우현이 반대편 매트의 모서리를 붙잡아 그대로 들춰냈다. 이것 말고도 많다던 말대로 두툼한 매트 아래에는 대본 몇 권이 더 깔려 있었다. 이걸 이렇게 둬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상당히 특이한 대본 보관법이었다. 사실 이 정도면 보관보다도 방치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근데 대본 이렇게 두셔도 괜찮은 거예요?”
“응. 이미 다 외운 것들이라 별 상관없어.”
차우현이 멍청하게 굳어 있는 결의 앞에다 대본 더미를 펼쳐 놓았다. 고결은 그 사이에서 익숙한 제목을 발견했다.
“…저 이거 봐도 돼요?”
고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망설이다 물어본 게 무색할 정도로 우현은 흔쾌히 대답했다. 고결은 우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뭐에 홀린 듯 대본으로 손을 뻗었다. <나르시시즘>이란 제목이 크게 적혀 있는 대본이었다.
대본에는 손때라 부를 만한 것들이 묻어 있었다. 확실히 여러 번 읽은 티가 났다. 우현이 맡았던 ‘지수’의 대사 위에는 형광펜이 그어져 있기도, 간혹 빨간색으로 작은 글씨가 쓰여 있기도 했다. 대개 ‘톤은 차분하게’, ‘발음 유의할 것’,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시선 처리 주의’와 같은 짧은 지시형의 문장들이었다.
“이거 다 직접 쓰신 거예요?”
“응. 연기할 때 주의해야 할 점 적어 놓은 거야.”
고결은 대본 위에 적힌 자그마한 글씨를 손끝으로 찬찬히 훑었다. 이런 짤막한 문장들이 모여 그날 무대 위의 우현을 만들어 냈다는 게 뭔가 신기했다. 고결은 제 옆에 우현이 있다는 사실도 잊고 오직 대본을 읽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런 고결을 우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했다. 하나씩 뜯어보듯 조금은 집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