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고결은 두 손까지 내저어 가며 열심히 뒷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차우현은 그저 조금 다급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그딴 건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그 반응에 고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느리게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네?”
“어디가, 왜 슬퍼 보였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존댓말을 하던 우현이 갑자기 반말을 했다. 하지만 고결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고작 그런 것에 신경 쓰기엔 눈앞에 있는 우현의 분위기가 너무 심상치 않은 탓이었다. 흔들림 없는 우현의 강렬한 시선에 고결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우현과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버거웠다.
“…그냥요. 그냥 왠지 모르게 그랬어요. 안면 인식 장애가 심해진 지우가 나중엔 거울 속의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기까지 하잖아요. 물론 연극의 결말대로 지우는 거울이 있는 한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됐으니 행복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우현이 연기한 <나르시시즘>의 ‘지우’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연극의 주된 내용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지우의 과장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결은 슬픈 기분에 휩싸였다. ‘지우’가 처한 상황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랬다. 어쩌면 우스운 대사를 내뱉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던 우현의 얼굴 때문에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어디에선가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배우는 연기할 때 자신이 해석한 캐릭터의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녹여 낸다고. 주제넘지만 고결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현이 연기하고자 했던 ‘지우’의 감정은 슬픔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건 뭐?”
고결이 말끝을 흐리자 우현이 은근히 대답을 재촉했다. 고결은 자신이 느낀 바를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이럴 땐 남들보다 말재주가 없다는 게 좀 불편했다. 한참 후에야 겨우 적당한 말을 찾아낸 고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런 건 진짜….”
“진짜 사랑이 아니니까?”
고결이 하려던 말이 우현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졸지에 우현한테 할 말을 빼앗기게 되었다. 잠시 굳어 있던 고결이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것도 그렇고 이제 지우한테는 자기 자신마저도 완벽한 타인이 되어 버린 거잖아요. 아무리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게 됐어도 제가 지우라면 조금 슬플 것 같아요. 지우는 결국엔 나를 영영 잃어버리게 된 거니까.”
고결이 말을 하는 동안 차우현은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아, 혹시 그래서 이름이 지우예요? 전부 다 지워 버려서?”
불현듯 강렬한 깨달음이 고결을 찾아왔다. 제가 했지만 제법 합당한 추리 같았다. 그래서 고결은 자신도 모르게 좀 신난 목소리로 묻고야 말았다. 그러자 차우현이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고서 고결을 똑바로 응시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빤히 쳐다보는 우현의 행동에 고결은 적잖이 당황했다.
“어… 아닌가 보네요.”
아무래도 합당한 게 아니라 그냥 망한 추리인 모양이었다. 티 나게 우현의 눈을 피한 고결이 머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거기에 대해 우현은 맞다, 아니다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 대신에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우현이 웃을 때마다 말간 얼굴만큼이나 새하얀 입김이 부드럽게 피어올랐다. 희고 깨끗한 것들이 눈앞에서 아름답게 뒤섞였다. 고결은 그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았다. 방금 전까지 우현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단 것도 잊어버렸다. 빈틈이라곤 하나도 없이 부드럽게 사르륵 접히는 기다란 눈매가 꼭 첫눈 같았다. 기분 좋게 사뿐히 내려앉아선 그대로 깊은 안쪽까지 스며들었다.
우현의 웃는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명치 근처로 뭔가 지나다니고 있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마음 같아선 점퍼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벅벅 긁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해 보일까 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결은 괜히 숨을 참았다. 익숙지 않은 이 감각이 어서 빨리 사라지길 바라면서.
“거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듣고 보니까 말 된다. 이름을 지우로 짓길 잘했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서는 미처 떨쳐내지 못한 웃음기가 옅게 묻어났다. 그때까지도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고결은 우현의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한가롭게 연극 얘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고결한테는 이쪽 얘기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아니, 어쩌면 이쪽이 더 중요했다.
“저, 그런데… 혹시 이런 일이 자주 있는 편이세요?”
“이런 일이라니?”
“지금처럼, 이렇게 골목에서요.”
원래도 이런 식으로 나쁜 놈들한테 자주 돈을 빼앗기냐. 고결은 그 문장을 애써 에둘러 말했다. 지금 고결이 가장 알고 싶은 건 <나르시시즘>의 주인공 이름이 왜 지우가 됐는지가 아니었다. 우현이 얼마나 자주 이런 일을 당하는지였다.
“글쎄.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가끔? 아무래도 이 교복이 돈줄로 보이나 봐, 다들.”
덤덤하게 대꾸한 차우현이 자신의 몸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세움고의 교복을 입고 있다는 건 다른 사람들한테 자신이 상위 계급에 속해 있음을 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게 누군가한테는 부러움의 시선을. 또 다른 누군가한테는 위협의 시선을 받게끔 만든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럼 아까처럼 돈 주는 거예요?”
“그게 귀찮은 일 만드는 것보단 나으니까.”
군더더기도, 망설임도 없는 깔끔한 대답이 이어졌다. 역시 귀찮아서 주는 게 맞았구나. 고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갑에 오만 원권 지폐 수십 장도 모자라 수표까지 들고 다니는 우현이었다. 그런 우현한테 있어 30~40만 원쯤 그렇게 큰돈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일을 겪는 게 당연시되거나 자연스러워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매번 이 길로 혼자 다니세요?”
“아니.”
“그럼 어떻게 다니시는데요?”
“평소에는 학교 앞으로 기사님이 오셔. 그런데 나 혼자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어서 그럴 땐 오지 말라고 미리 말씀드려. 마침 오늘이 그런 날이었고.”
고결은 생각했다. 우현이 집에 혼자 돌아가고 싶은 날이 한 달에 몇 번이나 될지. 그리고 우현이 말한 가끔의 빈도수가 대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서. 입안을 꾹 씹은 고결이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안으로 삼켜 냈다. 사실 빈도수 같은 건 상관없었다. 우현이 반년마다 혹은 일 년마다 한 번씩 이런 일을 당한다고 해도 싫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럼 가끔 집에 혼자 가고 싶은 날에 저한테 연락하실래요? 아니면 저 항상 유도부실에 있으니까 거기로 오셔도 되고요. 역이나 정류장까지 저랑 같이 가요.”
호기롭게 말할 땐 좋았다. 그런데 말을 끝마치고 나니 물밀 듯이 후회가 밀려들었다. 고결의 얼굴이 빠르게 낭패감으로 젖어 갔다. 제 의도야 어찌 됐든 이건 누가 봐도 오버였다. 오늘 처음 대화를 나눈 사이에 할 만한 제안이 아니었다. 모르는 후배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으니, 우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었다.
“아, 근데….”
“여기.”
얼른 수습하려고 했다. 그냥 해 본 소리였다고. 절대 강요는 아니라고. 그렇게 다시 한번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결이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우현이 자신의 휴대폰을 내미는 게 조금 더 빨랐다.
예상치 못한 그 행동에 고결은 멀뚱히 휴대폰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사고 회로가 정지되어 버려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우현이 그 상태로 휴대폰을 살짝 흔들었다. 가져가지 않고 뭐 하냐고 묻는 것처럼.
“할게, 연락. 그러니까 네 번호 알려 줘.”
결국엔 우현의 입에서 번호를 알려 달라는 소리가 나왔다. 고결은 그제야 주춤주춤 손을 뻗어 우현이 내민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숫자 11개 터치하는 게 뭐라고 손이 살짝 떨렸다.
“…여기요.”
휴대폰을 돌려받은 차우현은 곧장 통화 버튼부터 눌렀다. 점퍼 주머니 안에서 짧게 진동이 울렸다. 고결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차우현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넌 이름이 뭐야?”
“…네?”
“너는 내 이름을 알아도 난 네 이름을 몰라서.”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한 적도 없었다. 당황한 고결이 부랴부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고결. 저는 고결이요. 1학년 2반이고 유도부원이에요.”
말을 마친 고결이 몸을 반쯤 틀었다. 세움고 유도부. 제 등 뒤에 인쇄된 그 글자를 우현한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게 너무 과한 행동이라는 건 뒤늦게 깨달았다. 우현의 눈에는 지금 제 행동이 자신의 신원을 증명하려고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 오늘 진짜 왜 이러냐. 또 한 번 후회가 뒤따라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오늘따라 일단 저질러 놓고 후회하는 일들이 많은 느낌이었다. 고결이 어색한 동작으로 몸을 원위치시켰다. 그런 고결을 보며 차우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반가워, 결아. 나는 2학년 3반 차우현이야. 연극부고.”
자기소개를 마친 차우현이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고결은 그 손을 잠시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키가 큰 우현은 그만큼 손도 커다랬다. 손등을 감싸 쥐는 손가락이 꽤나 굵고 또 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