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 새끼들이 지금 장난하나. 야. 니들 지금 사람 앞에 세워 두고 뭐 하냐? 그리고 넌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지랄이야. 시발. 예쁜이가 우리한테 돈 주겠다잖아.”
고결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예쁜이. 우습게도 그 세 글자에 시야가 어지러울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결이 차가운 눈으로 피어싱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우현한테서 돈을 받아 가려고 했던 갈색 머리가 조용히 귓속말을 속삭였다.
“야야. 쟤 옷 봐 봐.”
뜬금없는 옷 타령에 피어싱이 고결을 위아래로 느리게 훑었다. 고결이 입고 있는 새하얀 바지는 누가 봐도 도복이었다. 거기다 걸치고 있는 야구점퍼 등 뒤에는 ‘세움고 유도부’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물론 양아치들이 서 있는 위치에서는 그것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갑자기 끼어든 이 불청객이 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그게 어떤 종목인지는 상관없이.
아. 시발. 사람 잘못 건드렸구나. 양아치들의 얼굴 위로 낭패감이 번져 갔다. 아무리 이쪽 쪽수가 더 많다고 해도 운동선수 상대로는 게임이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은밀히 눈짓을 주고받으며 슬금슬금 몸을 틀었다. 타이밍을 봐서 골목 밖으로 내빼기 위해서였다. 고결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그 모습을 예의주시했다. 마치 사냥감한테 달려들기 전, 그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육식동물처럼.
“시, 시발. 뭘 자꾸 꼬나봐. 개새끼야!”
피어싱이 크게 소리쳤다.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양아치 세 명이 앞다퉈 골목 밖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고결은 굳이 그 무리를 뒤쫓지 않았다. 운동하는 사람인지라 일반인과 싸움이 붙으면 이래저래 곤란해졌다. 코치님한테 혼나기만 하면 다행인데, 까딱 잘못했다간 대회 출전 금지령 같은 걸 받게 될 수도 있었다. 우현한테 예쁜이란 단어를 운운한 건 열 받았지만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이대로 넘어가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그리고 자신이 뛰쳐나가고 난 뒤 이곳에 혼자 남겨질 우현이 걱정되기도 했다. 이런 일을 겪은 우현을 혼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저, 혹시 다친 데 있으세요?”
고결은 답지 않게 허둥거리며 우현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저 새끼들한테 맞았냐고. 마음 같아선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랬다간 우현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일부러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
고결의 물음에 차우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고결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덩달아 고개를 숙인 고결이 화들짝 놀라며 얼른 손을 떼어냈다. 거의 불에 덴 것 같은 반응이었다.
“아. 죄, 죄송해요.”
여태 우현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줄도 몰랐다. 사과를 마친 고결의 귀가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차우현은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단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서서히 일으켜 자세를 바르게 할 뿐이었다. 똑바로 허리를 펴고 서자 순식간에 머리가 위로 쑥 올라갔다. 아. 키가 크구나. 멍한 감상이 이어졌다. 무대에서 봤을 땐 거리가 멀어서 이 정도일 줄 몰랐는데 우현은 생각보다 커다랬다. 제가 올려다봐야 하는 눈높이에 고결은 내심 좀 놀랐다. 물론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저기, 그런데 그거 계속 들고 계실 거예요?”
차우현의 손에는 여전히 오만 원권 지폐가 들려 있는 상태였다. 그제야 차우현이 다시 코트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우현이 지갑에 돈을 넣는 동안 고결은 바닥에 떨어진 책가방을 주워 들었다. 검은 가방 여기저기에 보기 싫게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꼼꼼하게 흙먼지를 털어 낸 고결이 가방을 내밀었다. 차우현은 그런 고결을 잠시 바라보다 가방을 건네받았다.
“고마워요.”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을 연상케 하는 고요한 목소리였다. 잔잔하고 깊었다. 무대 위에서 대사를 읊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걸 알지만 심장이 목 끝까지 올라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입을 잘못 열면 심장이 그대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고결은 최대한 조용히 남몰래 호흡을 골랐다.
“저보다 선배님이신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는 1학년이거든요.”
“내가 선배인 건 어떻게 알아요?”
아차 싶었다. 고결은 차우현을 알았다. 그것도 아주 잘. 하지만 차우현이 고결의 존재를 알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했다. 오늘 처음 우현과 제대로 말을 섞어본 것이었다. 그런 주제에 마치 서로 잘 알고 지낸 사이인 양 행동한 것이 꽤나 부끄러워졌다. 차오르는 민망함에 고결은 괜히 멀쩡한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 올렸다. 분명 편의점에서 나올 때만 해도 좀 추웠는데 지금은 더웠다. 목덜미와 얼굴, 귓가로 자꾸만 훅훅 열이 올랐다.
“…그거야 차우현 선배님이니까요.”
저 대답을 하기 전, 고결은 몇 번이나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뭔가 대단한 걸 말하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형편없는 대답을 꺼내 놓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선배님이 축제 때 연극 하는 걸 봤고, 그 뒤로 계속 생각이 나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당사자한테 솔직하게 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차우현이니까, 라는 건 굳이 가타부타 다른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그 자체만으로 완벽한 문장이기도 했다.
차우현은 별다른 대꾸 없이 가방을 둘러멨다. 본인 또한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더는 캐묻지 않는 걸 테다. 짧게 고개를 숙인 차우현이 그대로 고결의 앞을 지나쳐 갔다.
“잠, 잠시만요!”
잠시만요. 진짜로 잠시만요. 염불처럼 잠시만요, 라는 말을 웅얼거린 고결이 갑자기 앞으로 내달렸다. 고결이 달려간 곳은 아까 자신이 내팽개치듯 바닥에다 떨어트린 편의점 봉투 앞이었다. 몸을 접어 앉은 고결이 망설임 없이 봉투를 열어젖혔다. 부스럭거리며 봉투 안을 마구 헤집는 손길에서 다급함이 묻어났다.
“저… 이거요.”
뛰어서 다시 차우현의 앞으로 다가온 고결이 손을 내밀었다. 고결의 손에 들린 건 초코우유였다. 상진 선배가 그토록 염원하던. ‘결아! 형은 초코우유다! 어? 다른 건 몰라도 내 초코우유는 꼭 사 와야 해!’ 체육관을 나서기 전, 제 뒤통수에다 대고 크게 소리치던 상진 선배한테 미안했다. 하지만 나중에 제 돈으로 두 개. 아니, 세 개를 사주면 될 일이었다. 상진 선배보다는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우현이 훨씬 더 중요했다.
“…….”
내민 손이 민망하게 우현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게 뭐냐는 듯한 얼굴로 초코우유를 잠시 내려다보다 고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우현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초코우유의 등장이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고결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어, 단 거. 네. 단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진짜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도저히 그냥 이대로 우현을 보낼 수가 없었다. 크게 내색하진 않아도 아마 많이 놀랐을 것이었다. 그런 우현을 좀 챙겨 주고 달래 주고 싶었다. 이 작은 초코우유 하나가 얼마나 도움이 될진 잘 모르겠지만. 사실 마음 같아선 편의점으로 데려가서 따뜻한 걸 사 주고 싶은데 그러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찾은 타협점이 이거였다.
“그러니까 드세요. 이거.”
말을 마친 고결이 다시 한번 우현의 쪽으로 초코우유 쥔 손을 내밀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깝게.
“그거 나 줘도 되는 거예요?”
고결은 대답 대신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 초코우유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닐 텐데 어쩐지 1초가 1분 같고 그랬다.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흘렀다.
“…고마워요.”
작은 인사와 함께 차우현이 초코우유를 받아 갔다. 하지만 초코우유를 바로 먹진 않고 손에다 쥐고만 있었다. 너무 놀라서 입맛도 없나. 고결은 무던히도 우현의 눈치를 살폈다. 자꾸만 기분이 초조해졌다.
“아, 맞다. 저기… 그, 저번에 연기. 아니, 연극 진짜 너무 잘 봤어요.”
그 초조함은 이상한 소명 의식으로 번져 나갔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나가 이 어색하고 굳은 분위기를 풀어야 한다는. 그래서 튀어 나간 게 연극 얘기였다. 되게 뜬금없는 거 알지만 이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고결은 일단 되는대로 아무 얘기나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저랑 같이 본 친구들도 다 재미있어하고 주변 사람들도 웃느라 정신없더라고요. 아, 근데 이상하게 저는 조금 슬픈 느낌도 들어서….”
그때였다. 투명하다 못해 시린 유리 같은 얼굴로 고결을 바라보고 있던 차우현의 두 눈에 묘한 빛이 감돌기 시작한 건. 계속해서 차우현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고결이었다. 고결은 그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말끝을 흐린 고결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혹시 실례가 되는 말을 한 걸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코미디 연극을 슬프게 봤다고 말하는 건, 그 역할을 연기한 배우한테 있어 기분 나쁜 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지금 실수한 거구나.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우현한테 연극 얘기를 꺼내놓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 근데 그건 저만 그렇게 생각한 거라서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운동만 해서 연극이나 영화 그런 거 볼 기회가 많이 없었거든요. 워낙에 예술 쪽을 잘 몰라요. 그냥 제가 좀 이상….”
“어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