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안녕히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르바이트생한테 예의 바르게 인사한 고결이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딸랑. 편의점 문 위에 걸린 자그마한 종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아. 좀 춥네. 얼굴이며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고결은 반만 채웠던 야구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양손이 편의점 봉투로 묵직했다. 고개를 숙인 고결이 봉투를 벌려 그 안을 쓱 훑었다. 먹을 게 한가득이었다. 이 정도면 아까 선배들이 말한 건 안 빠트리고 거의 다 산 것 같았다.
“아, 초코우유 마시고 싶다.”
모든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분 전, 상진 선배가 뱉은 저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고된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넋이 빠져나갔다. 다들 로봇이 아니고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렇게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곤 했다.
“난 크림빵.”
평소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을 말이었다. 그런데 낙법 연습을 하고 있던 찬영 선배가 거기에 조용히 동조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 이후로 훈련 분위기는 순조롭게 개판이 되어갔다. 감자칩, 삼각김밥, 샌드위치, 아이스크림, 초콜릿 등등. 너나 할 거 없이 무질서하게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외쳐댔다. 누가 누가 더 빨리 음식 이름을 대는지 시합이라도 열린 듯한 모습이었다.
원래 17~19세의 남자애들의 식욕은 타의 추종의 불허했다. 거기다 무려 운동부원이었다. 매일 구슬땀 흘리며 힘든 훈련을 받고 대회 전에는 체중 조절까지 해야 하는. 그들한테 있어 음식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화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다들 점심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삼 일은 굶은 사람처럼 눈에 불을 켜고서 음식 얘기에 달려들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코치님이 진저리를 치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유도부원들이 우렁차게 코치님을 연호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별로 반기지 않았다. 누가 간식 사러 갈 건지 빨리 정하기나 하라고 했다.
그 말에 유도부원들은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손을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가위바위보! 총 10번이 넘어가는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그 끝에 나 홀로 편의점행에 당첨된 건, 안타깝게도 고결이었다. 고결은 코치님이 내미는 카드를 공손히 받은 뒤 야구점퍼를 챙겨 입고 군말 없이 체육관을 나섰다.
“너무 많이 샀다고 코치님한테 혼나려나.”
기다란 영수증에 찍혀 있던 무시 못 할 금액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제 와 다시 환불을 받는 것도 웃겼다. 깨져도 어쩔 수 없지 뭐. 고결은 금방 현실과 타협했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고결이 별안간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편의점에서 약간 떨어진 으슥한 골목 안, 딱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벽에 기대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 하나. 그리고 그 사람을 마치 감싸듯이 둘러싸고 있는 세 명. 전후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일단 저 자체가 상당히 위협적인 그림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고결은 골목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아.”
고결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복을 입고 있는 세 명과 달리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사람은 세움고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고결의 성격상 다른 학교 애였어도 당연히 도와줬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걸 알고 나니 괜히 더 마음이 조급해졌다. 고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골목 안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너 세움고 다니는 거면 돈도 많을 거 아니야. 아, 그거 있잖아. 왜 노블 뭐 어쩌고 하는 거. 아무튼 너도 우리한테 그거 했다고 생각해.”
양쪽 귀에 다닥다닥 피어싱을 하고 있는 놈 하나. 밝은 갈색 머리통 하나. 왁스로 머리를 세운 놈 하나. 개중에서도 피어싱을 하고 있는 놈이 저렇게 말하며 기분 나쁘게 비웃음을 흘렸다. 삼류 영화 속 양아치나 할 법한 대사였다. 창피하지도 않나?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내뱉지? 고결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다른 의미로 참 대단하다 싶었다.
피어싱이 그러고 있는 동안 나머지 두 명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아무래도 저 피어싱이 흔히들 말하는 행동 대장인 것 같았다. 기분 나쁘게 웃으며 빈정대는 폼이 딱 봐도 한두 번 돈을 뺏어본 게 아닌 모양새였다.
그때였다. 줄곧 땅바닥만 응시하고 있던 세움고 애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건. 그러자 이런 더러운 골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희고 깨끗한 얼굴이 드러났다. 고결은 그 익숙한 얼굴을 단번에 알아봤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그리던 얼굴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차우현이었다. 이대로라면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졸업할 거라 생각한 그 차우현. 믿을 수 없게도 그 사람이 지금 고결의 앞에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존재와 갑자기 조우하게 된 고결은 멍하니 넋을 놨다.
“…차우현.”
입속말로 천천히 우현의 이름을 발음해 봤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다. 우현을 너무 자주 생각하는 바람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고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환영을 보고 있는 거라든가. 고결의 입장에서는 둘 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차우현을 이런 골목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더 신빙성 있었다.
고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여러 번 반복했다. 근데 벽에다 등을 기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봐도 차우현이 맞았다. 환영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럼 꿈인가? 그걸 확인하려면 몸을 꼬집어 봐야 하는데 짐 때문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고결은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봉투들을 떨어트리듯 바닥에다 내려놓았다. 툭. 든 게 많은 만큼 봉투에서는 바스락하는 소리가 아닌 묵직한 소리가 났다.
“저건 또 뭐냐?”
그제야 고결을 발견한 피어싱이 어이가 없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우현을 둘러싸고 있던 나머지 두 양아치의 시선도 자연스레 고결한테로 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제 허벅지만 있는 힘껏 꽉 꼬집었다. 찬바람 때문에 그새 허벅지가 좀 얼었는지 감각이 둔했다. 그래도 아픈 건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차우현이 있는 게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야, 괜히 껴들지 말고 꺼….”
피어싱의 말을 끝까지 들어줘야 할 필요 따윈 없었다. 고결은 성큼성큼 우현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 대담한 기세에 눌린 피어싱이 말끝을 흐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다른 양아치들의 반응 역시 별반 다를 거 없었다. 다들 고결을 경계하며 몸을 물렀다. 그러나 정작 차우현은 자신한테 다가오는 고결한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현금이면 되지?”
차우현이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러곤 무심한 얼굴로 오만 원권 지폐를 빼냈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을. 눈대중으로 봐도 얼추 30만 원은 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수표는 줘도 못 쓸 테니까.”
양아치들 앞으로 지폐가 내밀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돈을 빼앗는 사람과 빼앗기고 있는 사람으로. 그런데 어째서인지 양아치들보다는 차우현의 쪽이 훨씬 더 당당해 보였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단지 이 상황이 귀찮아서 돈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 대놓고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았을 뿐, 차우현은 행동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 시발. 재수 없는 새끼.”
갈색 머리가 기가 차다는 듯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자존심이 상한 건지 짜증 섞인 욕설을 뱉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돈은 받아 갈 심산인 듯했다. 갈색 머리가 우현한테로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고결이 조심스럽게 차우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주지 마세요.”
그제야 차우현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선 고결을 바라보았다. 고결은 우현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마자 무의식중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날 고결이 본 차우현은 지금의 우현과는 판이했다. 그러니까 같은 사람이긴 한데 풍기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다. 현재 스물여섯의 우현이 부드럽고 따뜻한 봄 같은 느낌이라면 그때 그 골목에 있던 열여덟의 우현은 꽃샘추위였다. 분명히 봄은 봄인데 어딘가 차갑고, 매섭고, 날카롭고, 서늘했다.
마주친 눈동자에서 온기라곤 느껴지지가 않았다. 심지어 잘못 건들면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축제 날 고결이 본 무대 위의 우현은 분명 붉은 벚꽃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게 된 우현은 감정이 없는 인형, 그 자체였다. 그것도 속이 텅 빈.
겉모습은 여전히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흩날리지도, 흐드러지지도 않았다. 이상한 말이지만 우현은 아름답게 말라 죽어 있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결국엔 죽임을 당한 뒤 그대로 박제되어 버린 비운의 생명체를 보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고결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러트 때문에 컨디션이 엉망진창인 날 하필이면 양아치들과 마주치는 바람에 바짝 날이 선 상태라 그런 거였지만.
“…주지 마시라고요, 돈.”
겨우 정신을 차린 고결이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우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입을 굳게 다문 우현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그 몇 초가 아득하리만큼 길게 느껴졌다. 고결의 얼굴에 고정된 우현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네가 뭔데 내 일에 관여해? 그렇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면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