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24화 (24/71)

24화

그래. 남자는 아름다웠다. 고결이 알고 있는 단어 중 아름답다 이외에는 무대 위의 남자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장미보다도 훨씬 더 붉은. 마치 피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새빨간 벚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아마도 딱 저 남자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고결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빨간 벚꽃을 제 머릿속에다 그려 보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남자와 잘 어울렸다.

“저 사람 누군지 알아?”

무대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결이 속삭이듯 물었다. 용케도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도영수가 대놓고 헛웃음을 흘렸다.

“야, 너 설마 진짜로 몰라서 묻는 거냐? 차우현이잖아. 그 유명한 차우현. 너 여태 차우현 얼굴도 모르고 학교 다녔어? 진심? 너 우리 학교 학생 맞아? 어제 전학 온 거 아니고?”

오랜만에 건수를 잡았다는 듯 도영수가 두 눈을 빛내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고결은 도영수의 쪽으로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아까워서 그랬다. 차우현이라는 저 남자한테서 눈을 떼는 그 잠깐의 시간마저도.

“아무튼 재미없는 새끼.”

고결의 무반응에 도영수가 불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결은 무대 위의 차우현을 따라 부지런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연극은 거의 차우현의 원맨쇼처럼 진행됐다. 단순히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차우현 혼자서 극을 끌어가고 있었다. 어쩌다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기엔 차우현의 존재감이 너무 거대한 데다 압도적인 탓이었다.

차우현이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가 머리로 날아와 박히는 것만 같았다. 강당 맨 끝에 서 있어서 무대와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그런데도 차우현의 얼굴은 신기하리만큼 잘 보였다. 꼭 차우현 혼자만 크게 확대가 되어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상황에 맞춰 차우현의 표정과 대사를 내뱉는 톤이 바뀔 때마다 찌릿찌릿 전류가 흘렀다. 발끝에서 돋아난 소름이 빠르게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이상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이 기이한 감각을 대체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연극부 독백의 <나르시시즘>이었습니다. 수고한 독백의 학우 여러분께 커다란 박수와 함성 부탁드립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연극이 끝나 있었다. 학생회장의 멘트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대강당 안이 커다란 환호성으로 인해 단숨에 시끌벅적해졌다. 반응이 너무 뜨거워서 내부 온도가 훌쩍 높아진 느낌마저 들었다. 그제야 고결은 자신의 몸 역시 조금 달아올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치 부근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괜히 가슴 아래를 손바닥으로 쓱 한 번 문질렀다.

“야. 연극 재미있지 않았냐? 나는 댄스부 무대만 기대했는데, 연극부 완전 기대 이상인데?”

“어. 사실 나도 학교 연극이라 별거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본격적이라서 좀 놀랐어. 심지어 이거 대본도 다 연극부에서 쓴 거잖아.”

강석우가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에 도영수가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헐. 미친. 진짜?”

“응. 전에 박현정이 그러던데? 축제 올라가는 대본도 다 자기네가 쓰는 거라고. 극본팀이라고 아예 대본만 쓰는 애들이 따로 있나 봐. 박현정도 그거래.”

“와. 연극부 완전 능력자들 모임이었네?”

쩐다. 대박. 도영수가 엄지까지 들어 올리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 행동에 강석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저 중에서 제일 능력자는 차우현이지. 되게 의외지 않냐? 안 그렇게 생겨선 연기 진짜 뻔뻔하게 잘하더라. 나 같으면 연기하다 민망해서 중간에 몇 번 터졌을 거 같은데, 어떻게 저런 대사를 하면서 웃지도 않지?”

“누가 아니래. 아까 거울 보면서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다는 둥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조각상인 줄 알았다고 말할 땐 진심 미친놈인 줄. 아, 물론 미친놈 역할을 한 건 맞지만.”

도영수가 제 머리 옆에다 검지를 갖다 대고서 빙글빙글 돌렸다.

“근데 진짜로 잘생긴 사람이 그런 말 하니까 하나도 안 웃기더라. 도영수 네가 했으면 겁나 웃겼을 텐데.”

강석우가 웃는 낯으로 태연하게 도영수를 저격했다. 아이씨. 도영수의 입에서 곧장 짜증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석우 니 뒤질래?”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지랄. 나만 웃기냐? 강석우 네가 했어도 똑같아. 솔직히 말해서 차우현 빼고 다른 놈들이 그 말 했으면 여기 완전 개그콘서트 됐을걸?”

평소 같으면 바로 반박했을 말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강석우는 도영수의 말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긍정했다.

“하긴, 다들 비슷한 생각인지 대사가 그 모양 그 꼴인데 아무도 안 웃더라. 오히려 나중에 나온 간호사랑 정신과 의사 걔네 둘이 웃기지 않았냐?”

“어어. 맞아. 걔네 티키타카 쩔더라.”

두 사람은 킬킬거리며 쉴 새 없이 연극에 대한 평을 주고받았다. 그동안 고결은 차우현의 모습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인사를 마친 차우현이 등을 돌려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뭐가 아쉬운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허전함에 고결은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래 봤자 손에 잡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야, 고결. 너는 연극 보는 내내 한 번도 안 웃더라? 재미없었어?”

신나게 떠들던 도영수가 망부석처럼 정면만 바라보고 서 있는 고결의 팔뚝을 툭 쳤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고결이 느릿하게 도영수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뭐라고?”

답지 않게 맹한 반응이었다. 그 모습에 강석우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멍 때릴 만큼 지루했어? 난 꽤 재미있게 봤는데.”

“참나. 꽤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간호사랑 정신과 의사 싸울 때마다 존나 크게 웃었으면서. 여기서 강석우 네 웃음소리가 제일 컸어. 나 완전 귀먹는 줄.”

도영수가 대놓고 비웃으며 빈정거렸다. 이번에도 딱히 부정은 못하겠는지 강석우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네 웃음소리도 만만치 않았다는 말로 반격에 나섰다.

투닥거리기 바쁜 두 사람한테 고결은 차마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했다. 차우현이라는 선배한테 집중하느라 연극 내용이 웃긴지도 몰랐다고. 오히려 연기하는 차우현 선배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슬퍼 보여서 보는 내내 가슴이 아렸다고.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속상했다고. 그런 말을 했다간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게 불 보듯 뻔해서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주위 사람들은 신나게 웃기 바빴다. 그런데 고결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눌러 참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 빼고는 울어 본 적이 손에 꼽았다. 울고 싶은 날은 되게 많았는데 언제나 속으로만 삼켰다. 누구도 그러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아프시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을 뿐이었다.

가난은 아이를 빨리 어른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고결은 남들보다 빨리 어른이 됐고, 제 감정을 숨기고 누르고 죽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그 감정을 저 차우현이라는 사람이 건드렸다. 고결 스스로도 단단하게 굳다 못해 아예 버석하게 메말라버렸다고 믿고 있던 감정을.

“나도 재미있었어. 중간중간 웃었는데 니들 웃음소리가 하도 커서 묻힌 거야.”

옅게 미소 지은 고결이 제법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도영수와 강석우가 2차전에 돌입했다. 이게 다 네놈 웃음소리가 쓸데없이 커서 그런 거란 이유에서였다.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동안 고결은 입속말로 조용히 차우현의 이름을 발음했다.

‘차우현.’

우현의 이름이 내려앉은 명치가 찌르르하게 울렸다. 고작 세 글자밖에 되지 않는 이름이 가지기엔 이상하리만큼 버거운 무게였다.

그 후로도 고결은 종종 우현을 떠올렸다. 밥을 먹다가, 교복을 입다가, 길을 걷다가 문득 나직하게 대사를 읊던 우현의 쓸쓸한 옆얼굴을 그렸다. 벌써 한 달이 더 넘은 일인 데도 불구하고 그날 대강당 안의 공기, 분위기, 냄새, 온도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무대 위에 선 우현을 처음 봤을 때 느낀 그 생경한 감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래 봤자 자신과 우현은 여전히 어쩌다 스칠 일 한 번 없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물론 우현을 만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현이 보고 싶다면 직접 반으로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우현이 몇 반인지는 몰랐으나 지나가는 애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바로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결한테는 우현을 만나러 갈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아마 우현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졸업하게 될 테다.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전에 자신이 왜 서운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운동 이외의 다른 것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던 고결이었다. 심지어 그게 자신의 감정과 엮인,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해도 그랬다. 스스로한테도 무심한 고결이 쉽게 깨달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가 무대 위의 우현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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