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 사실이 이제야 비로소 피부로 와 닿았다. 그동안은 제가 오메가로 발현한 걸 머리로만 이해했다면 지금은 몸 전체로 받아들였다. 그것도 보다 온전히.
고결은 인정해야만 했다. 이제는 비단 제 마음만이 우현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오메가로 발현한 제 몸도 알파인 우현을 애타게 원하고 있다는 걸. 그 무거운 진실을 힘겹게 인정하자마자 고결은 속절없이 기억의 저편으로 끌려갔다. 우현을 볼 때마다 들었던 이상한 감정의 이름이 뭔지 겨우 알아챈, 그때 그날로.
-3. 발견-
‘세움 고등학교’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문고였다. 고결은 그런 세움 고등학교에 체육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유도 신동으로 이름깨나 떨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결의 입학은 집안의 경사이자 ‘한마음 유도 체육관’의 자랑이었다. 실제로 고결이 다닌 유도장 건물 앞에는 1년이 넘게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렸다. ‘★경축★ 세움 고등학교 체육 특기생 입학 고결’이라는 문구가 고딕체로 대문짝만 하게 인쇄된.
세움 고등학교의 등록금은 웬만한 대학교와 맞먹었다. 고결처럼 전액 장학금을 보장받는 특기생이 아닌 이상 평범한 집안의 애들은 다니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세움 고등학교에는 흔히들 말하는 금수저가 넘쳐 났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알파도 많았다. 대략적인 비율로 따져 봤을 때 한 반 당 알파가 1~2명씩은 꼭 있을 정도였다. 다른 고등학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였다.
고결은 그전에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알파를 자주 봐 온 편이긴 했다. 대회장에 가면 어렵지 않게 알파를 만날 수 있었다. 체격이나 체력 같은 조건이 베타보다 월등하게 좋은 알파들은 당연히 스포츠 쪽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런 고결조차 이렇게까지 많은 수의 알파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한민국에 자기 또래의 알파들이 이렇게나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게 새삼 좀 놀랍기까지 했다.
“야, 우리 학교에 우성 알파 있다던데 얘기 들었어?”
“어. 나도 알아. 2학년 3반에 차우현이라는 선배라며.”
“나 아직 우성 알파는 제대로 본 적 없는데 어떤 사람일까? 포스 쩔겠지? 가만있어도 막 오라 같은 게 흐르려나?”
“나도 우성 알파는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일단 딱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니다 싶지 않겠냐?”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 진짜 궁금하다. 야! 우리 나중에 구경 가 볼래?”
그 많은 알파 중에서도 차우현의 존재는 단연 화제였다.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들 사이에서는 차우현에 관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좀처럼 보기 힘든 우성 알파. 거기에 심지어 대기업 CH그룹의 아들이라니. 신입생들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차우현이라는 선배한테 관심과 환상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거기에서 고결만큼은 예외였다. 고결은 우현에 관한 얘기를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사실 듣는 것도 귀가 뚫려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일 뿐, 청각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만 있다면 그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원래부터 그랬다. 고결은 학교를 떠도는 가십거리 같은 것에 크게 흥미를 두지 않는 타입이었다. 거기다 고결한테 있어 차우현이란 선배는 자신과 이렇다 할 접점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애들은 이동수업 중간이나 점심시간 때 어쩌다 우현과 스칠 기회라도 있었다. 하지만 고결한테는 그런 사소한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유도부인 고결은 훈련을 이유로 다른 애들보다 조금 더 일찍 점심을 먹었다. 수업은 딱 오전까지만 들었고 오후에는 체육관 붙박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우현과는 생활하는 행동반경 자체가 달랐다.
그런 고결이 차우현을 제대로 보게 된 건, 입학하고 나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인 10월 무렵의 일이었다. 고결은 차우현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차우현이라는 존재에 무심하게 굴 수 있었던 건, 그가 제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걸. 그리고 오늘 이렇게 우현을 보게 된 이상 이젠 그게 불가능해질 거라는 것 또한.
***
1년에 한 번 있는 학교 축제 날이었다. 세움고의 축제는 상당히 유명했다. 돈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 다니는 곳답게 규모도 크고 볼거리도 다양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 학생들한테 해당하는 얘기였고, 축제에 참여하지 않는 운동부와는 일절 상관없는 일이었다. 운동부는 축제 날에도 똑같이 훈련을 했다.
평소처럼 훈련을 한다고 하는데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밖에서 축제하는 걸 뻔히 다 알고 있는데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결국에 코치는 딱 두 시간만 놀다 오라며 쉬는 시간을 허했다. ‘감사합니다!’ 유도부원들은 마치 그 말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우렁차게 외친 뒤 일사불란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 니들 달리기 그거밖에 안 되냐?”
원래 고결은 쉬는 시간에도 그냥 체육관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도영수가 아니었다. 댄스부 무대를 꼭 봐야 한다며 도영수는 난리를 피웠다. 그럼 너 혼자 가면 되지 않냐는 고결의 말에도 도영수는 지지 않았다. 결국 그 고집을 꺾지 못한 고결이 도영수한테 끌려 나왔다. 강석우도 같이였다.
“아, 좀 빨리 뛰어! 빨리. 빨리.”
빨리 뛰라고 재촉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도영수는 아예 등까지 떠밀었다. 그 엄청난 적극성에 강석우와 고결은 어쩔 수 없이 달리기에 속도를 더했다. 그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대강당에 도착했다. 체감상 5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하아. 도영수. 너 훈련할 때도 이렇게 좀 적극적이어 봐라. 하, 새끼. 훈련할 땐 제일 먼저 퍼지면서 이럴 땐 겁나 잘 뛰네.”
당기는 옆구리에 허리를 어정쩡하게 구부린 강석우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후우. 크게 호흡을 고른 도영수가 그런 강석우의 얼굴 앞에다 대고 버젓이 셋째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어쩔. 얄미운 말은 덤이었다.
“아오, 이 미친 새끼.”
욕을 뱉은 강석우가 그대로 도영수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열일곱이나 먹었으면서 투닥거리는 수준이 유치원생만도 못했다. 고결은 속으로만 한숨을 삼키며 두 사람을 따라 대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시끄러울 거라고 예상한 대강당 안은 어째서인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심지어 주변의 공기가 무겁기까지 했다. 중요한 시합을 치르기 직전에나 느낄 수 있을 법한 묵직한 긴장감. 그게 대강당 안을 감싸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묘한 위화감에 고결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무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댄스부가 춤을 추고 있을 거라 생각한 무대에는 웬 남자 한 명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조명이 지나치게 환한 건지. 그게 아니면 그냥 얼굴 자체에서 빛이 나는 건지. 순간 눈이 부셔서 고결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마치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공간. 무언가에 홀린 듯 오직 무대 위의 남자한테만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 그리고 그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아무렇지 않게 유유자적 움직이고 있는 남자.
눈부심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됐으나 머리는 아직 아니었다. 고결의 머리는 여전히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장면 하나하나가, 뭐라고 해야 할까. 아득하다고 해야 하나. 이렇다 할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결은 뒤로 조금 물러섰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강당 안이 딱히 추운 것도 아닌데 목덜미가 서늘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 다행이다. 늦지 않고 와서. 연극부 다음이 댄스부 무대거든.”
어느새 벽에 등을 기대고 선 도영수가 들뜬 목소리로 작게 소곤거렸다. 처음 안 소식이었다. 이 학교에 연극부가 있다는 거. 고결은 그저 넋 놓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더 정확하게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남자를 눈으로 좇은 거였지만.
‘사람이 맞나?’
그게 무대 위의 남자를 보고 고결이 맨 처음 한 생각이었다. 기묘했다. 여태껏 그 어떤 알파와 오메가를 보고도 이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무대 위의 남자는 달랐다. 보자마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신과는 아예 다른 종의 사람이라는 걸.
혹시 우성 오메가인 건가 싶었다. 자신 같은 베타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페로몬이 강한. 그러나 고결이 알기로 세움 고등학교에는 오메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말인즉 저 무대 위에 서 있는 남자도 알파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알파라기엔….’
고결은 딱히 미감이 좋거나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속했다. 얼굴 천재니, 뭐니 하는 거창한 수식어를 가진 유명 연예인들을 봐도 별 감흥 없었다. 당연히 엄청나게 잘생겼다거나 예쁘다는 생각 또한 해 본 적이 없고. 그런데 그런 고결조차도 속절없이 감탄하게 될 만큼 무대 위의 남자는 엄청난 미남이었다. 아니. 사실은 미남보다도 미인 쪽에 더 가까웠다.
하얗다 못해 투명한 느낌마저 주는 말간 생김새. 꽃으로 비유를 하자면 따스한 봄날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 같은 사람이었다. 화사하면서도 동시에 깨끗했다. 남자한테 쓰기에는 조금 어색할 수도 있는 청초하다는 단어가 저 사람한테는 그 어떤 이질감 없이 딱 들어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상이 마냥 수수하기만 한 건 또 아니었다. 전체적인 조화와 남자가 내뿜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일 뿐. 오히려 이목구비만 따로 떼어 놓고 보자면 무척이나 화려하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