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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21화 (21/71)
  • 21화

    “그럼 다른 분들은 최대훈 선생님 오실 때까지 여기 말고 다른 데서 기다리는 거예요?”

    차우현의 시선이 맞은편 테이블 위로 향했다. 거기엔 주인 없는 대본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응? 다른 분들? 누구 말하는… 아, 그러고 보니까 주영재 씨랑 장재준 씨가 없네?”

    한 감독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세미나실 뒤쪽을 응시했다. 그 행동에 고결도 덩달아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다른 매니저들과 웃으며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는 주영재 매니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 자리쯤 떨어진 곳에는 웬 남자가 팔짱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장재준의 매니저일 확률이 높았다.

    “매니저들은 다 있는 거 보면 어디 멀리 간 건 아닌가 봐요. 최대훈 선생님 오시기 전에는 오겠죠. 뭐.”

    안 들어오면 전화하면 되고. 한 감독이 한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었다. 주영재와 장재준의 빈자리를 응시하는 차우현의 두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기 결아.”

    “네?”

    “미안한데 혹시 나 탄산수 하나만 뽑아다 줄 수 있을까? 좀 시원한 게 마시고 싶어서.”

    차우현이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부탁했다. 네. 그럴게요. 고결은 흔쾌히 대답했다. 탄산수 뽑아다 주는 게 뭐라고.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금방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고결이 세미나실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 뒤좇고 있던 차우현이 그제야 착석했다. 대본을 펼치는 차우현의 얼굴 위로 뭐라 설명하기 힘든 묘한 미소가 희미하게 번졌다 사라졌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결의 발걸음 소리가 작게 울릴 정도였다. 고결은 익숙하게 자판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판기는 오른쪽 복도 끝에서도 한 번 더 꺾어 들어간 가장 안쪽에 있었다.

    다들 자기 마실 거 가져온 거 같긴 하던데. 그래도 형 것만 딱 뽑아 가면 좀 그렇지 않나? 다른 사람들 것도 뽑아 가는 게 좋겠지? 근데 그걸 혼자서 다 들고 갈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재촉하던 때였다. 비상구 근처에 다다르자 웬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애써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한 언성 같은 게.

    “…라니까요!”

    이게 뭔가 싶어 잠시 멈칫했다. 그 순간 고결의 귀로 높은 목소리가 거의 날아들듯 꽂혔다. 짜증스럽게 외치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고민 따위 할 겨를이 없었다. 고결은 주저 없이 빠르게 비상구의 문을 열었다.

    벽에 양팔을 대고 서 있는 남자. 그리고 벽과 남자의 팔 사이, 그 틈에 갇힌 모양새로 자리 잡고 있는 주영재. 주영재가 그 상태로 눈동자만 움직여 고결을 바라보았다. 열에 들뜬 얼굴이 어딘가 좀 멍해 보였다. 평소와는 달랐다.

    “너 안 어울리게 비싸게 군다? 너 거기서 다리 벌리는 거 이미 소문 다 났….”

    장재준이 말끝을 흐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를 올려다보고 있던 주영재의 시선이 등 뒤로 향한 것을 느낀 탓이었다. 벽을 짚고 있던 팔을 내린 장재준이 몸을 틀었다. 장재준의 두 눈이 문가에 서 있는 고결한테 닿았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방문에도 장재준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살짝 꺾은 채 삐딱하게 물을 뿐이었다.

    “뭐야 넌?”

    역했다. 속이 뒤집히는 듯한 역함이 몰려왔다. 이런 짓을 하는 장재준이 역하다는 게 아니라 지극히 생리적인 역함이었다. 비상구 안을 가득 채운 역한 냄새에 비위가 상했다. 약간 비릿하고 퀴퀴한 데다 톡 쏘기까지 하는. 태어나 생전 처음 맡아 보는 냄새라 어디에 비유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고약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이 불가능했다.

    헛구역질이 올라와서 고결은 잠시 숨을 참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성 알파인 차우현의 페로몬에 계속 노출되고 있던 고결이었다. 우성도 아니고 다른 열성 알파의 페로몬이 기분 좋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주영재 씨.”

    고결은 장재준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주영재의 이름을 불렀다. 상황 파악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비상구에 있는 열성 알파와 열성 오메가. 안 어울리게 비싸게 군다는 장재준의 말. 열에 들떴지만 싫어하는 티가 역력히 묻어나는 주영재의 얼굴까지. 그 모든 것들이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을 금방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한 감독님이 찾으세요.”

    고결은 눈치껏 한 감독을 핑계로 댔다. 주영재한테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런 장면을 보고 모른 척할 만큼의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악감정이 있다고 한들 고결은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건 고결의 성격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

    주영재가 느리게 두 눈을 깜빡거렸다. 아마 사고 회로가 멈추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조금이라도 빨리 가 주면 좋을 텐데. 하. 고결은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삼켰다.

    “얼른 가 보세요.”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다. 고결은 아예 비상구 안으로 들어가 주영재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상태로 슬쩍 잡아당기자 주영재가 눈에 띄게 흠칫거렸다. 몽롱한 눈동자가 단정한 고결의 얼굴을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가요. 고결은 목소리를 내는 대신 입만 벙긋거렸다. 어깨를 움츠린 주영재가 그제야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야. 너 뭐냐니까? 주영재 매니저는 아까 봤으니까 아닐 테고…. 조연출?”

    장재준은 고결을 알지 못했다. 고결 역시 장재준을 실물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지금껏 우현과 같은 작품에 출연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의 엇갈림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장재준도 차우현도 늘 주연만 맡아 온 탓에 서로 작품이 겹칠 일이 없었다.

    차우현이 처음으로 얼굴을 비춘 건 영화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채기광 감독의 작품에서였다. 1000:1이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된 것이었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화려한 데뷔였다. 그 이후로 차우현은 쭉 주연만 맡아 왔다.

    장재준의 경우 차우현처럼 데뷔와 동시에 빛을 본 케이스는 아니었다. 다만 데뷔 후 1년 만에 해외의 권위 높은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며 신인 타이틀을 상당히 빨리 청산했다. 이번에도 김 작가의 드라마니까 특별 출연을 수락한 거지 다른 작가였다면 회사 측에서 먼저 쳐냈을 것이었다. 장재준한테 출연 의사를 물었다간 제대로 된 대답은 고사하고 쌍욕만 들어 먹을 게 뻔하니까.

    “귀먹었어? 사람 말 안 들려?”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제법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고결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하마터면 대놓고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사람 말 안 들리냐니. 기도 안 찼다. 대본 리딩 와서 이딴 짓이나 하고 있는 게 사람일 리가 없었다. 사람 껍질 뒤집어쓴 짐승이면 몰라도.

    아마 다들 그래서 주영재와 장재준이 함께 사라졌어도 그 상황 자체를 별로 특별하게 의식하지 못했을 터였다. 아무리 장재준이래도 설마하니 대본 리딩 현장. 그것도 한 회만 특별 출연하는 남의 드라마에서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오히려 장재준의 입장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더 부담감 없이 행동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자기가 주연인 드라마도 아니고 어차피 대본 리딩 날과 촬영 날, 이렇게 딱 두 번만 나오면 되니까 제멋대로 설쳐도 딱히 타격받을 게 없었다.

    “이거 진짜 귀 병신인가 보네.”

    장재준은 페로몬도 갈무리하지 않고 고결한테 다가갔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이유 모를 악취 역시 심해졌다. 고결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문제라면 그게 장재준한테는 짜증스러움을 숨길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장재준이 짧게 헛숨을 뱉었다. 어이가 없어서 뱉는 헛숨이었다.

    “허. 와, 시발. 표정 봐. 살벌하네.”

    장재준은 고결한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열성 인자가 높아 원래도 희미한 페로몬이었다. 그런데 그걸 차우현이 제 것으로 덮어 가려 놓기까지 했으니 뭘 느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애초에 알파의 페로몬을 맡고 저렇게나 얼굴을 구기는 오메가 따위 본 적도 없었고. 지금 장재준의 눈에 고결은 어디까지나 재수 없는 베타 새끼일 뿐이었다. 갑자기 나타나선 백마 탄 왕자 행세를 한 것도 모자라 제 분수도 모르고 나대고 있는.

    “야. 너 그러다 한 대 치겠다?”

    비아냥거린 장재준이 고결의 어깨 부근을 주먹으로 밀듯이 때렸다. 툭. 툭. 툭. 단단히 말아 쥔 장재준의 주먹이 어깨에 닿을 때마다 고결은 맥없이 뒤로 떠밀렸다. 최대한 숨을 참았다가 몰아쉬느라 폐가 뻐근하게 당겼다.

    “쳐 봐, 씹새끼야.”

    “…….”

    “그러지 말고 쳐보…. 아, 썅!”

    별안간 장재준이 짜증스럽게 욕을 내뱉었다. 고결한테서 묻어 나오는 알파의 페로몬을 이제야 알아챘다. 알파한테 있어 같은 알파의 페로몬은 기분 나쁜 악취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것도 그게 자신보다 더 우위의 형질을 가진 자의 것이라면 더더욱. 장재준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고결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장재준을 바라보았다.

    “시발, 너 뭐야? 너 뭔데 그렇게 알파 페….”

    순간 비상구 안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그와 동시에 장재준이 말끝을 흐렸다. 조금 전까지 호흡하기가 괴로울 정도로 진동하던 역한 냄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대신에 몹시도 익숙한 향기가 고결을 감쌌다. 묵직하고 진하면서도 어딘가 부드러운 향. 그 향을 맡고 있자니 어쩐지 몸에서 힘이 풀렸다. 고결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휘청거렸다. 옆에서 뻗어 나온 단단한 팔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꼴사납게 넘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고결의 허리를 감싸듯 휘어 감았다. 제 허리를 감싸듯 휘어 감는 손길에 고결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향만으로 그 존재가 누구인지를 눈치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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