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꼭 뿌리고 다녀, 결아.”
“네. 그럴게요.”
당부와도 같은 차우현의 말에 고결은 순순히 긍정의 대답을 내놨다. 차우현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
‘아. 또다.’
아랫배가 간질거리며 빠듯하게 뭉치는 듯한 느낌. 도무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는, 불편하고 낯선 감각. 끄응. 앓는 소리를 속으로만 삼킨 고결이 핸들 쪽으로 슬쩍 상체를 숙였다. 곧이어 당연한 수순처럼 하반신으로 열이 몰리며 호흡의 간격이 살짝 밭아지기 시작했다. 고결은 억지로 길게 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상태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며칠 전부터였다. 자꾸 이런 이상한 감각에 휘말리기 시작한 게. 병원에서 준 억제제를 시간마다 잘 섭취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이럴 때마다 고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별거 없었다. 그저 앞으로 상체를 숙이거나 다리를 꼰 채 심호흡을 하며 이 이유 모를 간지러움과 열기가 조금이라도 빨리 가시길 바라는 거 외에는.
“왜 그래 결아? 혹시 어디 안 좋아?”
등 뒤에서 우현의 조심스러운 물음이 들려왔다. 되도록 티가 나지 않도록 움직인다고 움직였는데 아무래도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아… 아까 차가운 걸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배가 조금 아파서요.”
고결은 차우현의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어색하게 대답했다. 얼굴도 평소보다 조금 더 붉게 물들었을 걸 이미 알고 있어서였다.
거짓말인 게 분명한 그 대답에 차우현이 입꼬리를 당겨 옅게 미소 지었다. 얼굴은 숨길 수 있을지언정 열이 올라 붉어진 귓불은 조금도 감춰지지 않았다. 뒤에 앉아 있는 차우현의 눈에는 훤히 다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차우현은 뻔뻔하게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꾸며냈다. 웃고 있는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이질적이었다.
“괜찮아?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잠깐 쉬면 괜찮아질 거 같아요.”
밴 안에 감돌고 있던 묵직하고도 부드러운 향이 조금 더 짙어졌다. 하지만 고결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자신과 우현이 뿌린 향수의 향이 한데 합쳐져 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지난 25년을 베타로 살아온 고결이었다. 물론 학교에서 알파와 오메가에 관해 기본 성교육을 진행하긴 했다. 그 숫자가 적긴 해도 어쨌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다만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하느라 바빴던 고결은 그 성교육조차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페로몬에서는 좋은 냄새가 난다든가, 페로몬에 노출되면 강력한 성욕을 느낀다든가 하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맡고 있는 게 향수 냄새인지. 아니면 일부러 내뿜고 있는 페로몬인지 명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전에 우현이 자신을 향해 페로몬을 흘릴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상대방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신뢰와 믿음은 불필요한 생각이나 의심이 자랄 틈조차 주지 않았다. 지금의 고결이 그러하듯이.
“그래? 그럼 좀 괜찮아지면 말해 줘. 그때 올라가자.”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형.”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안쓰러우면서도 동시에 귀여웠다. 고맙긴. 그렇게 대답하는 차우현의 어투가 다정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향수를 선물해 준 뒤부터 차우현은 고결과 단둘이 있을 때면 은근히 페로몬을 흘렸다. 지금처럼 이렇게. 단 너무 많이 묻혀 뒀다간 그건 또 그거대로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딱 결의 희미한 단내를 가릴 수 있을 정도로만 손을 썼다.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험인 셈이었다.
알파한테 있어 같은 알파는 경쟁 상대였다. 그래서 오히려 오메가보다도 같은 알파의 페로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작동한 결과였다. 혹시 몰랐다. 알파라면 결한테 묻혀 둔 제 페로몬을 알아챌 수 있을지도. 다만 그건 저와 같은 우성일 때나 해당하는 얘기였다. 열성이라면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페로몬을 푼 상태라 타인의 페로몬에도 그만큼 예민하게 반응하는 상태가 아니고서야. 사실 우현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라 제대로 된 데이터베이스가 없어서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긴 했지만.
차우현은 느슨하게 풀어놓고 있던 페로몬을 슬슬 갈무리했다. 그렇게 많은 양도 아니고 약간의 자극이 갈 정도로만 풀었으니 결도 곧 있으면 진정될 것이다. 붉게 열이 오른 결의 귀를 차우현이 눈동자로 핥듯이 느리게 훑어 올렸다. 신기했다. 사람의 신체 일부분이 저토록 선명한 붉은빛을 띨 수 있다는 게.
원래 차우현은 식탐이나 식욕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고결을 보고 있노라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허기가 몰려들곤 했다. 이 세상 그 어떤 진미를 가져와도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결보다 입맛을 당기는 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기대가 됐다. 제발 자신을 안아 달라며 애원하는 결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먹어 치울 그날이.
“형. 이제 올라가도 될 것 같아요.”
잠시 후, 어느 정도 상태가 나아진 고결이 숙이고 있던 상체를 들었다. 여전히 귀는 붉었다. 하지만 온몸의 피가 다 몰린 것 같은 색을 띠고 있던 아까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우현은 읽는 척 펼쳐 두고만 있던 대본을 덮었다. 저를 돌아보는 고결을 향해 싱긋 웃는 얼굴이 언제나처럼 희고 산뜻했다.
“이제 괜찮아진 거야?”
“네. 괜찮아요.”
괜찮다는 고결의 대답을 듣고서야 차우현은 뒷문을 열었다. 거의 동시에 밴에서 내린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오늘은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의 12화 대본 리딩이 있는 날이었다. 본래 대본 리딩은 작품 극 초반에만 하는 편이었다. 배우가 이 역할에 잘 녹아들지. 배역 해석은 잘 했는지. 다른 배우들과의 케미는 어떤지 등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서.
대본 리딩을 하고 나서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배역에서 잘리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배우들끼리 안면을 트기 위해. 드라마 홍보 기사 한 줄 더 내고, 거기에 실릴 사진 한 장 더 찍기 위해 모이는 식이었다. 거의 모든 대본 리딩 현장이 비공개가 아닌 공개로 이루어지는 건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김보연 작가는 달랐다. 김보연 작가는 웬만하면 대본 리딩을 작품이 끝날 때까지 하는 쪽을 선호했다. 전 회차가 어렵다면 절반 정도라도. 당연히 비공개로.
그도 그럴 게 김보연 작가한테 있어 대본 리딩 현장은 활발한 의사소통의 장이었다. 배우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또 본인도 그만큼 의견을 많이 냈다.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대사를 수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크게는 스토리의 흐름이 바뀌기도 했다.
김보연 작가의 작품이 잘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창작자와 그걸 연기해서 현실로 구현해 내는 사람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으니 시청자들 역시 좋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세미나실의 문을 열자 먼저 도착해 있던 배우 및 스태프들이 인사를 해 왔다. 차우현과 고결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둥글게 모여 앉아 있는 배우들 사이로 듬성듬성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분명 누군가 앉아야 하는데 사람이 없어서 비워 둔 모양새였다.
고결의 눈이 세미나실 안을 한 번 쭉 훑었다. 고결은 그 빈자리가 누구의 것인지 금방 알아챘다. 12화 대본 리딩에 꼭 참석해야 하는 중요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병원장 역할을 맡고 있는 최대훈과 연우 역을 맡은 주영재. 그리고 12화에 특별 출연하기로 한 장재준, 이렇게 세 명이.
장재준은 열성 알파로 우현보다는 2년 선배였다. 이 바닥에서는 악마의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했다. 성격 더러운데 연기도 그만큼 더럽게 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거기다 알파답게 마스크까지 반반해서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다들 눈물 머금고 장재준의 비위를 맞춰 가며 그를 작품에 썼다. 아니. 쓰는 게 아니라 굽신굽신 모셔 왔다. 원래 알파 중에서 정신머리며 싸가지 제대로 박힌 놈 없으니까. 그런 정신 승리를 해 가면서. 물론 차우현은 특별한 경우니 논외로 치고.
“최대훈 선생님 조금 늦으실 것 같대요. 도로에서 사고가 나 가지고 꽉 막힌다나 봐요.”
한 감독이 먼저 나서서 세 사람 중 한 사람의 부재를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차우현은 자연스럽게 놀란 얼굴을 만들어 냈다.
“최대훈 선생님은 괜찮으신 거죠?”
“네. 다행히도 최대훈 선생님 차가 사고 난 건 아니라서요.”
한 감독이 특유의 푸근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러다 이내 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우현 씨도 알다시피 이번에 선생님 분량이 좀 많잖아요? 중요한 신도 있고. 그래서 우리끼리 진행하고 있기엔 좀 무리가 있을 거 같아 가지고 그냥 오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거든요.”
우현 씨 괜찮겠어요? 한 감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다른 일정 있으면 중간에 먼저 일어나도 돼요. 뒷말이 조금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그에 차우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어차피 이 뒤에 있는 일정이라고는 헬스장에 들러 운동을 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