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차우현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명치 아래까지 풀어 헤친 검은 셔츠 사이로 퍼즐 조각처럼 잘 짜인 근육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젖은 머리를 하고서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누워 있는 차우현의 모습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고 고혹적이었다.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오늘은 우현의 화보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pheromone’이라는 세계적인 향수 브랜드의 화보였다. pheromone은 그 이름에 걸맞게 관능적이면서도 유혹적이고 치명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는 브랜드로 유명했다.
사실 관능, 유혹, 치명은 본래 차우현이 가진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에서 시도한 파격적인 연기 변신이 어지간히 인상 깊었던 건지 pheromone의 글로벌 앰배서더뿐만 아니라 뮤즈로까지 발탁됐다. 방송된 거라고는 고작해야 예고편 몇 개가 전부인데.
“사실 저는 차우현 씨 저희 제품이랑 이미지가 잘 맞을까 좀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네요.”
고결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자연스레 말을 걸어왔다. 자신을 pheromone Korea의 이주현 책임자라고 소개한 사람이었다. 현장에 온 본사 사람 중 가장 높은 직급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촬영이 진행되는 내내 여자는 시종일관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현의 화보 촬영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저는 차우현 씨가 이런 분위기도 낼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어요.”
허리를 공중에다 살짝 띄운 우현이 그 상태로 흘겨보듯 카메라를 응시했다. 어우. 우현 씨. 지금 너무 좋아요. 완전 미쳤어. 시선 그대로. 네. 그렇게 계속 길게 빼 주세요. 와. 어떡해. 미쳤다 진짜. 포토그래퍼가 호들갑을 떨며 연속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때마다 커다란 모니터 화면 가득 우현의 사진이 떴다. 아무도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네. 저도요. 하마터면 내뱉을 뻔한 동조의 말을 삼키며 고결은 겨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이번 화보 콘셉트는 그거였다. 섹스 어필. 의상 및 헤어 메이크업과 카메라 구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섹스 어필은 pheromone 화보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 단어이기도 했고.
이런 식의 콘셉트를 소화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우현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화보 촬영을 해냈다. 오히려 기존의 화보보다 이번 촬영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향수를 쥔 크고 굵은 손이 골반 부근으로 내려갔다. 고결은 더 이상 모니터를 바라보지 못하고 조금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어째서인지 우현의 손이 향수가 아닌 다른 걸 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순간 머릿속으로 불손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고결은 그 이미지를 떨쳐내기 위해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헙.”
그나마 다행인 건 그런 생각을 한 게 비단 저 혼자만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숨을 참는 건지 아니면 숨을 들이마시는 건지 모를 이상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돌림노래처럼 들려왔다. 포토그래퍼마저 잠깐 움찔하며 셔터를 누르는 손을 늦췄을 정도였다.
“이제 옆으로도 누워 볼까요?”
그 작은 소란에도 차우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저렇게 물으며 여유롭게 포즈를 바꿀 뿐이었다. 여기에 있는 건 더 이상 배우 차우현이 아니었다. 우성 알파 차우현이었다. 그것도 베타마저 홀릴 엄청난 페로몬을 가진. 그러니 열성 오메가인 자신이 우현한테 끌리는 건. 그를 사랑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고결은 그렇게 스스로를 서툴게 위로했다. 열이 오른 귀 끝이 홧홧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현의 미친 콘셉트 소화력 덕분에 화보 촬영은 예상보다 더 일찍 끝났다. 화보 촬영 내내 포토그래퍼가 가장 많이 한 말이라고는 딱 두 개였다. ‘좋아요’, 와 ‘미쳤다’. 물론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똑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았을 뿐.
화보 촬영 내내 감탄하기 바쁘던 본사 사람들은 굳이 스튜디오 밖까지 따라 나와서 우현한테 인사를 했다. 이번 화보 촬영이 pheromone 역사상 가장 큰 화제가 될 것 같다며 웃는 얼굴에선 한 치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부 장 작가님이 잘 찍어 주신 덕분이죠.”
그러나 우현은 그 공을 전부 포토그래퍼한테로 돌렸다. 어쩜. 본사 사람들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우현을 쳐다보는 여러 개의 눈에 똑같은 감정이 어렸다. 감동의 눈빛이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빙그레 웃은 우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끝까지 매너 있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형. 고생 많으셨어요.”
밴에 올라탄 고결이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결이 너도 고생했어. 평소 같으면 그런 대답이 돌아왔을 텐데 이상하게 아무 말이 없었다. 고결이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갑자기 무언가가 얼굴 옆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깜짝 놀란 고결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친숙한 로고가 박힌 쇼핑백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우현이 화보를 찍고 온 pheromone의 로고였다.
“결이 너도 고생 많았어. 그리고 이건 형이 주는 선물.”
“…선물이요?”
생일도 아닌데 갑자기 웬.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고결은 일단 얌전히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우현이 어서 받아 가라는 듯 쇼핑백을 살짝 흔들어서 그랬다.
“응. pheromone 글로벌 앰배서더랑 뮤즈 된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야. 나 이번에 pheromone으로 향수 바꿨거든. 이거 향 좋더라. 내 거랑 같은 거로 샀어.”
괜찮으면 지금 한번 맡아 봐. 차우현의 말에 고결은 군말 없이 쇼핑백을 열어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원래 고결은 향수 같은 걸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우현이 pheromone의 앰배서더와 뮤즈가 된 기념으로 준 선물인데 거절할 순 없었다.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는 어두운 보라색이 은은하게 감도는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소매를 슬쩍 걷은 고결이 향수를 제 손목 안쪽에다 뿌렸다. 향수를 쓰진 않아도 어디에다 뿌리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손목을 코끝에다 대고 조금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묵직하면서도 진한 향이 올라왔다. 그런데 유명 향수 브랜드라 뭐가 달라도 다른 건지 이상하게 독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가면 향이 부드러워지면서 희미하지만 약간의 달콤함도 느껴졌다.
“어때?”
뒷좌석에서 고결을 관찰하듯 지켜보고 있던 차우현이 물었다.
“향 마음에 들어?”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서 은은한 기대감 같은 게 묻어났다. 고결은 우현의 쪽을 돌아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마워서 그냥 하는 행동이 아니라 정말로 좋았다.
“네.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아요. 고마워요, 형. 잘 쓸게요.”
그 대답에 차우현의 두 눈이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사하게 휘어졌다. 차우현이 고결한테 선물한 건 그냥 평범한 향수가 아니었다. 시중에 나온 향수 중 차우현의 페로몬과 가장 비슷한 향을 가진 향수였다.
고결은 아직 페로몬을 숨기거나 조절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차우현이 먼저 그걸 캐치하고 병원으로 보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성격상 성실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억제제를 먹고 있긴 할 것이었다. 저 몰래 어디에선가.
하지만 그래도 차우현은 불안했다. 이 바닥은 쓸데없이 알파며 오메가가 많아서 더 그랬다. 저만큼이나 기민한 누군가가 또 있을지도. 그 누군가가 결한테서 뿜어져 나오는 아주 희미한 단내를 맡을지도. 그러다 종래엔 그 형질마저 알아챌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 속이 꼬이다 못해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결이 오메가라는 걸 아는 사람이 생겨 좋을 게 없었다. 그랬다가 이상한 벌레라도 꼬이게 되면 짜증 날 테니까.
‘그럼 내 페로몬을 묻혀 두면 되는 일 아닌가?’
차우현의 생각은 거기로 이어졌다. 결은 열성 오메가였다. 열성 인자가 높은 오메가의 페로몬은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쉽게 덮일 것이었다. 아마도.
베타한테는 페로몬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깨질 수 없는 불변의 진리였다. 다만 페로몬을 묻히는 건 가능했다. 오히려 베타는 페로몬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 작업이 더 수월했다. 형형색색의 종이보다는 새하얀 종이에다가 색을 입히는 게 훨씬 더 손쉬운 것처럼.
그러니 만약 누군가 고결한테서 알파의 페로몬을 느낀다면 단지 함께 지내는 자신의 영향을 받았다 생각할 테다. 차우현의 매니저가 알고 보니 열성 오메가고, 누군가 그 사실을 알아챌까 봐 불안함에 차우현이 일부러 제 페로몬을 묻혀 둔 거다, 이런 생각은 감히 아무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결이가 모르도록 해야 할 텐데….’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고결이 자신의 페로몬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 순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게 향수였다.
그때부터 차우현은 자신의 페로몬과 최대한 비슷한 향을 가진 향수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발견한 게 pheromone의 ‘일레븐’이라는 향수였다. pheromone의 1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최고의 수석 조향사가 고심 끝에 만들었다는. 제법 로맨틱하다 못해 꽤나 운명적이기까지 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마침 곧 화보 촬영을 앞둔 pheromone에서 제 페로몬과 가장 비슷한 향을 가진 향수를 찾아낸 건.
본래 우현은 운명 같은 간지럽고 허황된 단어 따위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결이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부터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결과 자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단단하게 엮이고 묶인 운명일지도 모르겠다고. 사실 운명이 아니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운명이야 존재의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것이고 요즘 모든 상황이 제가 원하는 대로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은 맞았으니까. 일단 그것만으로도 우현은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