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18화 (18/71)

18화

고결처럼 우현 역시 평소에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종방연이라고 해서 과음하는 경우도 잘 없었다. 사실 오늘도 마신 양만 따지면 그렇게 많이 마신 건 아니었다. 그런데 피곤해서 그런 건지 이렇게 취해 버렸다. 일부러 밴에 태우기 전, 미리 사다 둔 숙취해소제를 먹였지만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고결의 키는 177cm였다.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 들을 만한 키는 아니었다. 크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모든 건 상대적인 법이었다. 188cm에 가까운 장신 우현의 앞에서 고결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 됐다. 그런데 지금 그 장신이 제게 몸을 거의 반쯤 기대다시피 한 채 위에서 꾹꾹 눌러 대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키가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후우.”

현관에서 방까지는 또 왜 이렇게 먼 건지. 이게 다 집이 지나치게 크고 넓은 탓이었다.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고결이 우현의 옆구리를 끌어안은 팔에다 조금 더 힘을 실었다. 고결의 딴에는 우현을 단단히 고쳐 안는다고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키도 덩치도 우현이 훨씬 더 우세하다 보니 도리어 그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어 버리고야 말았다. 그것도 상당히 깊이. 제 팔 아래로 쏙 들어가 있는 자그마한 머리를 차우현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취했다기엔 너무나도 멀쩡한 얼굴이었다. 물론 우현을 부축하는데 급급한 고결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방으로 들어간 고결이 우현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혔다. 고결은 당연히 우현이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양팔을 뻗어 뒤통수와 어깨 부근을 감싸 안았다. 그런데 의외로 우현은 얌전히 잘 앉아 있었다.

뭐지? 그새 술이 좀 깬 건가? 아니면 설마 앉아서 자나? 졸지에 앉아 있는 우현을 끌어안게 된 고결이 천천히 팔을 풀었다. 우현의 어깨를 붙잡고서 얼굴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그 순간 갑자기 몸이 앞으로 확 당겨졌다. 고결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차우현이 그 상태로 판판한 가슴에다 제 이마를 기댔다. 갑작스러운 차우현의 행동에 고결은 자신도 모르게 잠깐 숨을 참았다.

“…형?”

고결의 부름에도 차우현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냥 술주정인 건가? 고결이 붙들고 있던 우현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살짝 두드렸다.

“형. 술 깼어요? 아님 속이 안 좋아요?”

이대로 욕실로 부축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차우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결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어어. 작게 휘청인 고결이 얼른 두 다리에 힘을 실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몸이 넘어가 우현의 위로 쓰러질 뻔했다.

“…결아.”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고결을 부른 차우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창을 통해 은은한 새벽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덕분에 불을 켜지 않았어도 우현의 얼굴을 알아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우현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나른해 보였다. 툭. 우현의 턱이 고결의 명치에 닿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그 무게감에 우습게도 숨이 얹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형이랑 같이 침대에서 잘래?”

“…….”

“소파 불편하잖아.”

올려다보는 눈빛이 진득했다. 뭐에 홀린 듯 멍하니 우현을 내려다보고 있던 고결이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우현은 저를 위해 배려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받아들이는 고결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우현과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제대로 잘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분명 밤새 잠을 설칠 것이었다. 우현하고 한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는 거실 소파에서 혼자 자는 쪽이 훨씬 더 편안했다.

“밖에서 잘 거야?”

고결의 고개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고결은 이번에도 입을 열지 않고 고갯짓으로만 대답을 대신했다.

“형이 안 놔주면?”

그런데 별안간 우현이 저런 이상한 말을 해 왔다. 희고 매끄러운 얼굴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엄청난 말을 꺼내놓은 사람치고는 너무 무해하고 또 고상한 얼굴이었다. 부드러운 석고를 조각해 만든 것 같은 예술작품처럼. 고결은 티 나지 않게 입안을 꾹 씹었다. 술버릇이 나빴다. 이런 식으로 구는 것보다는 차라리 토를 하거나 고성방가를 하는 편이 훨씬 더 대하기 수월할 것 같았다.

“형 취했어요. 얼른 자요. 내일도 오후에 스케줄 있는데.”

“나 하나도 안 취했어. 멀쩡해.”

“원래 취한 사람은 자기 입으로 취했다는 소리 안 해요.”

“근데 나 진짜 안 취했는데.”

차우현은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진짜로 취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조금도. 하지만 고결이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형 취했어요. 심지어 고결은 아예 저렇게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피식 웃음을 흘린 차우현이 입술을 얇게 말아 올린 채 순순히 수긍했다.

“그래. 그럼 취한 거로 하고 취한 사람 술주정 좀 받아 줘.”

여기서 뭘 더 어떻게요. 이미 형 지금 저한테 술주정 부리고 있어요. 어차피 취한 사람이니까 이 정도 말은 해도 되지 않을까. 고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푼 차우현이 고결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자연스럽게 손가락 사이를 벌리고 깍지를 껴오는 커다란 손에 고결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우현은 신경도 쓰지 않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고결의 마른 손등을 지그시 눌렀다. 두근두근. 스스로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맥박이 빨라졌다. 빈틈없이 맞닿은 손바닥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형 재워 주고 가.”

응? 재촉하는 듯 덧붙여 묻는 말이 간지러웠다. 재워 달라니. 어린아이나 할 법한 부탁이었다. 확실히 우현은 손이 좀 많이 가는 타입이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았다. 고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차우현이 불시에 붙잡은 손을 아래로 훅 잡아당겼다. 그 압도적인 힘에 고결의 상체가 맥없이 아래로 딸려 갔다.

“같이 안 잘 거면 재워 줘.”

바로 눈앞에 우현의 얼굴이 있었다. 잘못하면 서로의 코끝이 스칠 것 같은, 그런 거리였다. 우현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게 인식하고 나자 또 한 번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가 몸 안에서 뭉근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낮에 그랬던 것처럼.

고결은 차마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그저 넋이 나간 채로 멀거니 우현을 응시하기만 했다. 흔들림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깊고 고요한 두 눈이 꼭 호수 같았다. 잔잔하지만 수심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그런 아득한 호수.

예전에 집안 어른 중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물에는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어서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서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누가 해 준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내용만큼은 똑똑히 기억났다.

자정이 되면 학교의 동상이 움직인다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괴담이었다. 어린 자신을 겁주기 위해서 한 말일 테지만 정작 고결은 거기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던 사촌 누나들이 꺅꺅 소리를 질러대며 이불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그 묘한 괴담이 지금 갑자기 떠오른 건, 순전히 우현의 눈 때문이었다. 만약 그 물이 우현의 눈동자와 같다면 영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지금 당장 우현의 저 눈에 빠져 죽는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재워 줄 거지?”

낮게 속삭이는 말이 꼭 비밀스러운 밀어처럼 들렸다. 아니면 주문 같기도 했다. 절대 거절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고결의 고개가 작게나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자 차우현의 얼굴 위로 부드럽게 미소가 걸렸다.

“그럼 형 씻고 올게.”

소곤거린 우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고결은 얼른 뒤로 물러서며 우현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래 봤자 여전히 손이 붙잡혀 있어서 멀리 갈 수는 없었지만.

“아, 근데 형 씻을 수 있겠어요?”

뒤늦게 정신이 든 고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 물음에 차우현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왜? 씻겨 주게?”

“아니… 그게 아니라….”

형 취했으니까. 뒤로 갈수록 고결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줄어들었다. 그런 고결의 손등을 한 번 꾹 눌렀다 놓은 차우현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 안 취했다고 했잖아.”

다시 한번 진실을 내뱉은 차우현이 방 안에 딸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달칵. 욕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고결이 거의 쓰러지듯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술은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술기운이 오르듯 몸이 더워졌다. 술이 아니라 우현한테 취한 기분이었다.

***

“와아….”

“아, 진짜 대박이다. 역시 차우현은 차우현이구나.”

모니터용 화면 앞에 선 여자 몇몇이 입을 틀어막고서 작게 감탄했다. 모두 본사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 정도의 인원이 나올 필요는 없으나 다들 기를 쓰고 현장을 지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배우 차우현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다.

차우현은 차우현이구나. 고결은 제 귀로 흘러들어 온 그 말에 십분 공감했다. 우현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것도 거의 매일같이 보는 고결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고결이 느끼고 있는 감상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