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선배님 진짜 최고세요. 강민호가 수줍게 양손으로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에 차우현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이 영화보다 훨씬 더 근사했다. 와. 미친. 실물 대박. 강민호는 하마터면 튀어 나갈 뻔한 제 속마음을 꿀꺽 삼켰다.
“그래요? 고마워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가벼운 감사 인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직접 들은 강민호한테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저 인사 하나로 강민호는 흔히들 말하는 성덕이 됐다. 그러니까 성공한 덕후.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던 강민호가 다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차오르는 감동을 막을 길이 없어서 하는 행동이었다. 그런 강민호를 고결이 조금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우현의 행동 하나하나에 놀라고, 감동하고. 우현이 무대 인사를 다닐 때에나 볼 수 있을 법한 뜨거운 반응이었다. 여기서 더 소란을 떨었다간 우현이 부담스러워할지도 몰랐다. 고결이 강민호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툭, 쳤다. 진정하란 의미였다. 강민호는 그 손길에 담겨 있는 뜻을 눈치껏 알아들었다. 강민호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으로 다급하게 회의실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와 함께 어색하게나마 대화의 화제 역시 바뀌었다.
“아아, 맞다. 저 아까 전에 대표님이랑 부사장님 회의실로 들어가시는 거 봤는데. 형 혹시 우현 선배님이랑 회의실 가시는 거예요?”
“어. 맞아. 오늘 우현이 형 들어갈 영화 의논하러 회사 온 거거든.”
“아…. 그래요? 그렇구나.”
그렇게 웅얼거리는 강민호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씁쓸했다. 고결이 왜 그러냐는 의미를 담아 의아하게 쳐다보자 강민호가 시무룩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럼 형 나랑 얘기할 시간 내기 힘들겠다.”
반짝거리던 강민호의 두 눈에서 순식간에 빛이 사라졌다. 아래로 살짝 내려간 입꼬리에서는 숨기지 못할 서운함이 묻어났다. 분명 아까만 해도 신나서 꼬리를 휙휙 흔드는 활기찬 강아지였는데, 지금은 비 맞은 강아지가 됐다. 오랜만에 만난 고결이었다. 그러니 그만큼 실망감 또한 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결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있는 우현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사실 고결은 회의실에 들어가도 하는 일이 없었다. 연기할 작품을 고르는 건 전적으로 우현의 몫이었다. 만약 우현이 출연할 작품을 전화나 메시지를 통해 통보 형식으로 알린다 해도 거기에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회사에서 차우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가지는 힘은 그 정도로 막강했다.
그럼에도 우현이 매번 이렇게 작품을 선택하기 전 회사에 들르는 건 어디까지나 대표와 부사장을 위해서였다. 두 사람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남들 눈에는 회의처럼 보일 만한 걸 열어 주는 것이었다. 대표와 부사장의 입장에서는 우현한테 감사의 절을 해도 모자랐다.
“그럼 회의실은 나 혼자 들어갈까? 결이 너는 밖에서 이 친구랑 얘기하고 있을래?”
차우현이 고결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히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차우현은 고결이 뭐라고 대답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 말이었다. 고결의 성격상 그러겠다며 제 제안을 바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아니에요. 같이 들어가요. 어떻게 형만 보내요.”
아니나 다를까. 차우현의 예상대로였다. 고결은 대번에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아무리 내실 없는 대외용 회의라고 해도 우현 혼자만 보내기에는 좀 그랬다.
“난 그래도 괜찮은데?”
“아뇨. 제가 안 괜찮아요.”
단호한 그 대답에 차우현이 강민호에게 사람 좋은 얼굴로 싱긋 웃어 보였다.
“둘이 얘기할 시간 좀 줄까 했는데 결이가 이렇게 나오네요. 근데 이름이 좀 익숙한데…. 혹시 예전에 결이 통해서 사인 받아 가지 않았어요? 결이가 사인 부탁한 적이 몇 번 없어서 이름 기억하거든요.”
“헐! 네, 맞아요! 저 결이 형한테 부탁해서 선배님 사인 받았어요!”
언제 서운해했냐는 듯 강민호가 상기된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현이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운함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간 후였다.
“민호 씨라고 했죠? 데뷔 준비 열심히 해요.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선배님도 활동 힘내십시오!”
강민호가 우렁찬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양손 다 야무지게 말아 쥔 주먹은 덤이었다. 누가 보면 올림픽 선수한테 응원 메시지 보내는 줄 알 기세였다. 그 엄청난 기세에 고결은 참지 못하고 조금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유독 동그랗고 까만 눈이 반달 모양으로 스르륵 접혔다. 그와 동시에 양 볼에 보조개가 움푹 들어갔다. 다만 그 정도가 달랐다. 진하게 쏙 들어가는 왼쪽 보조개와 달리 오른쪽 보조개는 흐릿했다. 원래도 워낙 옅어서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고결이 이렇게 양쪽 볼에 보조개가 다 패도록 웃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럼 형 가 볼게, 민호야. 쇼케이스 준비 힘내고 다음에 밥 같이 먹자. 형이 맛있는 거 사 줄게.”
“네! 저는 완전 좋아요!”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차우현이 한 팔로 은근히 고결의 등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허리에 둘린 팔 때문에 고결 역시 덩달아 다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강민호한테 가볍게 손을 흔든 고결이 차우현을 따라 회의실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고결의 등허리에 둘린 차우현의 기다란 팔은 회의실 문 앞에 도착해서도 풀릴 줄을 몰랐다.
***
숍에 들렀다 종방연 장소로 가니 이미 기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앞에서 차우현은 익숙하게 손을 흔들며 자세를 취했다. 찰칵찰칵. 시끄러운 셔터음이 거리 위를 채우고 쉴 새 없이 플래시가 터졌다. 차우현과 조금 떨어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고결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번쩍이는 빛에 눈이 아팠다.
하지만 정작 그 플래시 세례를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는 당사자 우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였다. 이쯤 하면 됐다 싶은 건지 상황을 정리하는 스태프가 고결한테 손짓했다. 이제 그만하고 안으로 들어가란 뜻이었다. 그 신호에 고결은 차우현을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기요! 우현 씨, 여기!”
먼저 도착해 있던 이진영이 높이 손을 들고서 흔들었다. 그 앞에는 김 감독과 박 작가도 앉아 있었다. 하연주와 윤지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문가에 앉은 스태프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있던 차우현이 고결을 쳐다보았다.
“그럼 나 가 볼게, 결아.”
“네. 형.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요.”
“응. 알겠어.”
고결의 당부에 차우현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원래 주조연 배우들은 감독 및 작가와 한 테이블에 앉는 것이 관례였다. 그 외의 다른 스태프들은 그냥 적당히, 되는 대로 눈치껏 모여 앉았다.
차우현이 테이블로 다가가자 김 감독과 박 작가의 얼굴 위로 웃음꽃이 피었다. 악수까지 해 가며 반갑게 인사를 하는 모양새가 오늘 새벽에 헤어진 사람들 같지가 않았다. 고결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이진영의 매니저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우리 내일부터 사랑할까요?>의 종방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잔 채우셨죠? 자자, 머리 위로 잔 드세요.”
종방연 MC는 활달한 성격의 이진영이 자처하고 나섰다. 이진영의 말에 사람들이 너나 할 거 없이 일제히 머리 위로 잔을 올렸다. 고결은 역시 술 대신 사이다를 채운 유리잔을 들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 매니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운전을 해야 하다 보니 술은 마실 수 없었다. 원래도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라 그게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건배사는 우리 감독님께서 해 주셔야죠. 김 감독님, 건배사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진영의 말에 무슨 건배사냐며 김 감독이 손을 내저었다. 그냥 대충 짠, 하는 거로 퉁치고 싶은 눈치였다. 그래도 이진영은 굴하지 않았다. 에이. 이런 날 건배사가 빠지면 어떡합니까. 예? 김 감독님. 다들 팔 빠지겠어요. 이진영의 넉살에 결국엔 어찌어찌 건배사가 정해졌다.
“우내사!”
“대박나자!”
김 감독의 선창을 필두로 사람들이 크게 외쳤다. 곧이어 허공에서 수십 개의 잔이 부딪혔다. 그 뒤로는 다른 종방연과 비슷했다. 미리 맞춤 제작한 케이크를 자르고 배우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다. 그 과정에서 하연주와 윤지나가 또 눈물을 터트려서 이진영의 놀림을 받았다.
술이 들어가자 금세 분위기가 떠들썩해졌다. 술기운을 빌린 스태프들이 하나둘씩 우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사진 요청을 하기 위함이었다. 다들 이때만 기다리고 있던 듯했다. 술을 마신 상태라 그 요청이 좀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차우현은 거절하지 않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어 주고 성심껏 사인도 해 줬다. 고결은 딱히 그걸 제지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눈치 없고 융통성도 없는 매니저는 아니었다.
저녁 8시에 시작된 늦은 종방연은 당연히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다들 막방 날에 또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아쉽게 헤어졌다. 사실 이 아쉬운 인사도 제대로 내뱉는 사람이 몇 없긴 했다. 모두 술에 취하다 못해 거의 절은 상태라서.
끄응. 고결은 속으로만 앓는 소리를 삼켰다. 무슨 정신으로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게 지금 고결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라고는 딱 하나뿐이었다. 술에 취한 우현을 조금이라도 빨리 침대에 눕혀야 한다. 이것 말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