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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16화 (16/71)
  • 16화

    따지고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툭하면 해외 투어를 도는 아이돌 그룹의 매니저보다도 고결이 몇 배는 더 바빴다. 멤버 수가 많은 아이돌 그룹은 매니저도 2~3명씩 붙기 때문에 오히려 혼자 일하는 고결보다는 상황이 더 나은 편이었다. 이 회사에서 고결만큼 바쁜 매니저는 없었다. 그건 모두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모니터링은 그냥 회사에다 맡기고 결이 넌 하지 말라니까. 지금 이 스케줄에 모니터링까지 하려면 결이 네가 너무 힘들잖아.”

    일이 아니라 취미로 하는 것이었다. 그냥 자신이 즐거워서 하는 일이었다. 우현이 이럴 때마다 고결은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하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형이 사람들한테 어떤 칭찬을 듣고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 즐거워요.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우현의 앞에서 대놓고 꺼내 놓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우현이 믿어 줄 거란 보장도 없었다. 자신만큼이나 워커홀릭인 고결이 괜히 기분을 맞춰 주려 듣기 좋은 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고결은 워커홀릭 같은 게 절대 아닌데. 단지 우현과 엮인 일이라서 열심히 하는 것뿐인 데도.

    거기다 고결은 그렇게 힘든 편도 아니었다. 진짜로 안 힘들다는 건 아니고 비교 대상을 우현으로 두고 생각하면 그렇단 소리였다. 스케줄을 따라다니는 사람과 그걸 직접 소화하는 사람. 둘 중에서 누가 더 힘드냐를 따져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의 손을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했다. 우현은 엄청난 양의 대본을 외우고, 거의 매일같이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그런 우현에 비하면야 어쩌다 장거리 운전하고 잠 좀 못 자는 것 정도는 힘든 축에 끼지도 못했다.

    저보다는 형이 더 힘들지 않냐고. 저 걱정하는 만큼만 형도 좀 걱정해 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우현이 화를 낼지도 몰랐다.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고결은 고심했다. 네. 앞으로는 안 할게요. 이렇게 대답하는 게 가장 좋다는 걸 알긴 알았다. 하지만 지킬 자신이 없었다. 지키지도 못할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띵. 고결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경쾌한 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다. 고결은 우현한테 뭐라 말하는 대신 그냥 도망치는 걸 선택했다. 고결이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그런 고결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우현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젓다 이내 옅게 미소 지었다.

    “어? 결이 형!”

    고결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우렁찬 외침과 마주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고결을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아주 밝은 목소리였다. 자연스럽게 고결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 행동에 고결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차우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고결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느라 그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 민호야.”

    고결은 금방 제 이름을 부른 상대를 알아봤다. 데뷔를 앞두고 있는 신인 아이돌 그룹 ‘Z’의 멤버, 강민호였다. 단정한 고결의 얼굴 위로 반가운 기색이 빛이 번지듯 잔잔히 퍼져 나갔다. 복도 거의 끝 쪽에 서 있던 강민호가 고결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왔다. 단숨에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무리 같은 회사 소속이라고 한들 매니저, 그것도 연기자 매니저가 아이돌 연습생과 안면을 틀 일 같은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서로 쓰는 층 자체가 다르다 보니 우연히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힘들었다. 이런 이유로 두 사람의 친분은 회사 내에서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친해진 거냐며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때마다 고결과 강민호는 어쩌다 보니까 이미 친해져 있어서 잘 기억이 안 난다는 애매한 말로 일관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강민호가 고결과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의 일이었다. 지금도 어리긴 하지만 그때의 강민호는 고작 열여섯이었다. 또래보다 늦게 변성기가 찾아왔고 그로 인해 강민호는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렸다. 하필이면 주력하고 있는 포지션이 댄스도 아니고 보컬이라서 더 그랬다. 그 당시 강민호는 연습생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레슨에 불참하고 회사 사람들 몰래 사물함에서 짐을 뺐다. 짐을 다 챙기고 나올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내가 의외로 이 일에 절실하지 않았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갑자기 왈칵 눈물이 터졌다. 설상가상으로 다리에 힘까지 풀려 버렸다. 결국 강민호는 그대로 무너지듯 계단에 쭈그려 앉아 한참을 서럽게 울어 댔다. 그런 강민호를 발견하고 말을 건 사람이 바로 고결이었다.

    고결은 좀처럼 감정을 겉으로 크게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매사에 무덤덤할 거란 오해를 자주 사는 편이었다. 하지만 사실 고결은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하며 세심한 사람이었다. 뒤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고 울기 바쁜 자그마한 등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회사 연습생이라고 해도. 고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타고난 천성 자체가 그랬다.

    고결은 강민호를 3층 휴게실로 데려갔다. 울었으니 목이 마를 것 같아서 그랬다. 음료수를 뽑아 건네는 고결한테 강민호는 훌쩍거리며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미래가 보이지 않고 불안해서 꿈을 포기하고 싶다고. 여태껏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한 제 여린 속살을 최초로 드러내 보였다.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왠지 이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될 것 같은 사람이었다. 고결은.

    그런 강민호한테 고결은 10년간 해 온 유도를 그만둔 자신의 얘기를 해 줬다. 좋아하는 일이면 적어도 제 발로 도망은 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상황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직접 겪어 봤으니 알았다. 그런데 꿈을 제 손으로 놓는 것도 그만큼,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힘들지 않을까 했다. 그런 선택을 한 스스로를 원망하고 갉아먹게 될 수도 있었다. 인생 몇 년 더 산 어른 입장으로 이 정도 조언은 해 줘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상대방이 그 조언을 그저 그런 오지랖으로 받아들인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몇 년 후에 음악 프로그램 볼 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거 같으면 지금 포기해도 괜찮아. 근데 연습생 포기한 게 후회스러워서 무대 보는 게 괴로울 것 같잖아? 그러면 조금만 더 버텨 봐.”

    다행스럽게도 강민호는 고결의 말을 단순한 오지랖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 마음을 단단히 다잡는 계기로 삼았다. 몇 년 후, TV 속 연예인들을 질투하며 빠르게 채널을 돌리고 있을 자신의 추한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진 탓이었다.

    그때부터 강민호는 고결을 믿고 따랐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새끼가 어미의 뒤를 졸졸 쫓듯이. 고결한테 우현이 새 인생을 시작하게 해 준 은인이라면 강민호한테는 고결이 그랬다. 팀의 리더까지 맡아 가며 이렇게 무사히 데뷔하게 된 건 전부 다 결 덕분이었다. 결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아무 대학이나 가기 위해 수능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학교까지 그만둔 채 여전히 방황 중일지도 몰랐다.

    “혀엉!”

    강민호가 다짜고짜 고결을 덥석 끌어안았다. 고결은 자연스럽게 강민호의 등을 한 팔로 감싸고서 달래듯 몇 번 토닥거렸다. 원래도 애정 표현에 스스럼이 없는 애였다. 그래서 이 정도 스킨십은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회사도 자주 안 오고. 내가 메시지 보내도 답장도 늦게 하고.”

    대체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건지. 강민호가 고결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은 상태로 은근히 몸을 흔들어 댔다.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섭섭함을 토로하는 강민호의 행동에 고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럴 때면 민호는 사람이라기보단 그냥 덩치가 큰 강아지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딱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까 싶었다.

    “요즘 우현이 형 드라마 촬영 막바지라 계속 촬영장에만 있었거든. 그래서 이래저래 좀 바빴어.”

    우현이 형. 고결의 입에서 나온 우현의 이름에 강민호가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결을 만난 것에 들떠서 우현한테는 아직 인사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 이 모습을 회사 사람 중 누군가가 봤다면 분명 엄청나게 혼났을 테다. 비록 같은 분야는 아니라지만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강민호한테 있어 우현은 하늘과도 같은 대선배님이었다. 이렇게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인.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고결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푼 강민호가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각이 잡힌 인사였다. 예의가 너무 바르다 못해 왠지 모를 군기마저 느껴졌다.

    “네. 안녕하세요.”

    차우현이 고개를 조금 까닥이며 여유롭게 인사를 받아 줬다. 사뭇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강민호와는 완벽하게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허리를 곧게 세운 강민호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연신 차우현을 힐끔거렸다. 본인은 몰래 본다고 보는 건데 안타깝게도 다 티가 났다. 차우현을 훔쳐보는 강민호의 두 눈에서 선망과 동경의 감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차우현은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강민호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도 마냥 오버는 아니었다.

    “저 안 그래도 며칠 전에 그거 봤는데…. 왜, 선배님 나오셨던 <파랑새가 사는 언덕>이요. 그거 제 인생 영화거든요. 진짜 좋아해서 되게 자주 봐요. 볼 때마다 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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