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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15화 (15/71)

15화

하지만 오늘은 이 정도 수확이면 충분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차우현이 바라던 순간과는 괴리가 있었다. 중요하고 소중한 거니까 그만큼 조심히 아껴 먹을 것이다. 고결이 지레 겁먹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조금씩. 천천히. 그래서 자기 자신이 잡아먹히고 있는 줄도 모르게끔.

차우현은 기꺼이 제 품에 있는 토끼를 놔주기로 했다. 어차피 집토끼라 멀리 갈 수도 없었다. 토끼한테는 목줄이 채워져 있다. 그 목줄을 쥐고 있는 건 당연히 우현이었다. 원할 때면 언제고 그 줄을 당겨 토끼를 제 옆에다 둘 수 있었다. 차우현은 다음을 기약하며 뒤로 몸을 물렀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그보단 즐거움이 더 컸다.

“일단은 여기까지만 해 볼까?”

아예 소파 아래로 내려간 차우현이 아무렇지 않게 차분한 얼굴과 말투를 꾸며 냈다. 앞서 보여 준 것들은 전부 다 연기의 일환인 것처럼. 사실 지금 이 모습이 연기인데.

“생각해 보니까 나 숍 가기 전에 회사부터 들러야 할 거 같아서.”

고결은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결은 차우현의 기세에 떠밀려 반쯤 누웠던 상체를 바르게 세워 앉았다. 우현과 거리가 생기자 불안정했던 호흡이 빠르게 안정됐다. 흐릿하게 풀렸던 눈에도 점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뒤늦은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그저 대본 연습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동요한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럽고 민망했다. 우현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고결은 눈을 내리깔고서 괜히 손에 쥔 대본만 만지작거렸다.

“영화 시나리오 들어온 것 때문에 대표님이랑 부사장님이랑 얘기할 게 있거든. 시간 날 때 회사 들러 달라고 하셨는데 까먹고 있었어. 잠깐 회사 들렀다 가도 괜찮을까?”

차우현의 물음에 고결은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차피 종방연은 8시까지라 시간은 넉넉했다. 숍에 가서 헤어와 메이크업 하는 시간을 고려해도 충분했다.

“그럼 지금 바로 가실 거예요?”

“응.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

차우현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고결은 눈치껏 제가 만지작거리고 있던 대본을 차우현의 손에 넘겨줬다.

“연습 도와줘서 고마워, 결아. 네 덕분에 어떻게 연기하면 좋을지 가닥이 잡힌 기분이야. 아무래도 중요한 신이라서 신경 많이 쓰고 있었거든.”

“…아니에요. 제가 뭘 했다고.”

고결의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우현처럼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대본만 따라 읽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거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심지어 뒤에 가선 대사마저 놓쳐 버리기까지 했다. 한심했다.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열성 오메가로 발현했다고 우현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토록 과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이.

“그럼 금방 준비하고 나올게. 조금만 기다려 줘.”

두 눈을 휘며 해사하게 웃은 차우현이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갔다. 후. 길게 숨을 내뱉은 고결이 제 아랫배 부근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 아랫배에서 피어올랐던 이유 모를 열기가 작은 불씨가 되어 여전히 안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고결은 그게 단순한 착각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래야만 허울 좋은 핑계로 스스로를 속여 가며 지금까지처럼 우현의 옆에 있을 수 있을 테니까.

***

한그루 엔터테인먼트.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노른자 지대에 위치한 수많은 사무용 건물들. 개중에서도 지은 지 얼마 안 된 티를 팍팍 내고 있는 번쩍번쩍한 새 건물 앞에 당도한 고결이 부드럽게 핸들을 꺾었다. 신사옥으로 이전한 지도 벌써 2년째였다. 하지만 적응은 아직이었다. 회사 건물은 언제 봐도 참 부담스러웠다. 압도적인 건물의 크기도 크기지만 외벽 디자인 때문에 더 그랬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으나 회사 외벽에는 소속 연예인들의 사진이 쭉 둘러져 있었다. 모두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인들이었다. 고결의 눈에는 그게 사진이 아니라 꼭 선처럼 보였다. 여기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들어올 수 없다고 그어 놓은 금기의 선. 오디션 보러 온 지망생도 아니건만 그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 수많은 연예인 가운데서도 차우현의 사진은 눈에 가장 잘 띄는 건물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차우현이 이 회사의 대표 연예인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위치 선정이었다. 사실 이 동네에 이만한 신사옥을 짓게 된 건 차우현 덕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딱히 특별한 것도 없는 일이긴 했다.

고결은 흑백으로 된 차우현의 프로필 사진에 잠시 시선을 두다 지하주차장 입구로 차를 몰았다. 차우현의 밴을 알아본 건물 관리인이 빠르게 차단기를 올려 줬다. 고결은 창문을 내려 건물 관리인과 짧게 인사를 나누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대표실 말고 곧장 회의실로 올라가면 되는 거죠?”

“응.”

고결이 안전벨트를 풀며 묻자 차우현이 가볍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곧장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계기판을 보니 엘리베이터는 7층에 머물러 있었다. 지하까지 내려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듯했다. 고결은 계기판에 고정되어 있던 눈을 제 옆에 서 있는 우현에게로 옮겼다. 별안간 자신을 쳐다보는 고결의 행동에 우현이 살짝 웃으며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왜?’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며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가 완벽하다 못해 근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결은 차마 차우현을 따라 웃어 주지 못했다. 별로 탐탁지가 않아서 그랬다. 드라마 하나 끝났다고 또 곧바로 들어갈 영화를 알아보는 우현의 행동이.

“형.”

“응?”

“사람들이 그러는데 우리나라에서 소 다음으로 제일 열심히 일하는 게 형이래요.”

고결은 가끔가다 이렇게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곤 했다. 결 나름의 유머였다.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하도 무덤덤하게 말해서 상대방이 유머인 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거였지만.

“뭐?”

그러나 우현은 결과 알고 지내온 세월이 꽤나 길었다.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깜빡인 차우현이 이내 허리까지 앞으로 숙여 가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결의 유머가 제대로 취향을 저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결은 우현을 따라 웃지 않았다. 우현처럼 마냥 즐겁게 웃기에는 그 내용이 좀 씁쓸해서였다.

사람들이 그런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현이 데뷔를 한 건 스물한 살 때의 일이었다. 그 후로 스물여섯이 된 지금까지 우현은 이렇다 할 휴식기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배우가 이처럼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했다. 배우 본인의 역량과 그것을 좋게 봐줄 대중들의 사랑.

작품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 제작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회수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해도 대중들이 원치 않으면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굳이 쓸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매번 발 연기 논란을 달고 다니는 배우도 드라마며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인기만 있다면야.

그런데 차우현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진 보기 드문 배우였다. 웬만한 대형 아이돌 팬덤 못지않은 두꺼운 팬층과 확실한 대중 인지도. 그것도 모자라 그 어떤 역할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뛰어난 연기 능력까지.

그런 차우현한테 작품이 물밀 듯이 들어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그 덕분에 차우현은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남배우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커리어를 쌓게 됐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유명 시상식에서 여러 번 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우현이 배우로서 잘된다는 건, 매니저인 고결한테도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우현이 스스로를 너무 혹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고결은 작품이 끝날 때마다 우현한테 꾸준히 휴식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난 오히려 쉬면 이런저런 잡생각이 나서 힘들더라. 쉬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결이 너랑 같이 현장 다니면서 바쁘게 일하는 쪽이 훨씬 더 좋고 행복해.”

그렇게 말하는 우현의 얼굴에서는 단 한 줌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본인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억지로 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에 고결은 우현을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그 말은 또 누구한테 들었어?”

“들은 게 아니라 봤어요. 어제가 형 저번에 찍은 W 매거진 화보랑 인터뷰 뜨는 날이었거든요. 커뮤니티 반응 확인하는데 그런 글이 올라와 있더라고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고결은 스르륵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먼저 몸을 실었다. 뒤이어 엘리베이터에 오른 우현이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고결을 응시했다. 아. 말하지 말걸. 그제야 아차 싶었다. 고결은 제 얼굴에 꽂힌 우현의 시선을 은근히 피하며 괜히 닫힘 버튼만 꾹꾹 눌러댔다.

매니저란 단순히 운전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맡은 아티스트의 언론 및 대중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는 것 역시 매니저의 기본 업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우현은 고결이 모니터링을 하는 걸 싫어했다. 자기를 따라다니고 관리해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업무량 과다인데, 거기에다 다른 일까지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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