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 그러니까 제가 ‘세아’ 대사를 해야 하는 거죠?”
대본을 읽은 고결의 얼굴 위로 난감함이 스쳤다. 설마하니 이런 장면을 도와줘야 할 줄이야. 우현이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랐다. 우현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가 꼭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응. 거기서부터 이 신 끝날 때까지 쭉 읽어 주면 돼. 대사랑 지문 잘 숙지했는지 확인하려고 하는 거니까.”
하지만 고결의 기대감과 다르게 그건 그저 확답을 얻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소파 등받이에다 한쪽 팔을 올린 채로 고결을 바라보고 있던 차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밀려오는 아득함에 고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당연히 그래 봤자 변하는 거라곤 없었다.
‘세아’는 ‘현재’가 일하고 있는 병원장의 딸로 ‘해리’의 두 번째 목표물이기도 했다. 지금 우현이 연습하려는 건 ‘해리’가 ‘세아’를 유혹하는 장면이었다. 드라마의 전개상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서 그런가 대사마다 아주 자세하게 지문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해리,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세아의 허벅지 위를 간질이듯 느리게 매만진다.’ 하는 식의.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가 공중파가 아닌 케이블에서. 그것도 심야 시간대에 방영되는 건 이런 점 때문이었다. 스토리와 살인 장면도 장면이지만 그보다는 선정성 탓이 더 컸다. ‘해리’는 사람을 홀리는 데 능숙한, 매력적인 사이코패스였다. 역할의 특성상 이런 장면이 자주 연출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결이 아는 우현이라면 대본에 쓰인 지문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그대로 다 할 것이었다. 일에서만큼은 완벽주의자 성향이 짙은 우현은 대본 연습도 대충 하는 법이 없었다. 고결이 아무리 로봇처럼 딱딱하게 대사를 읊어 줘도 매번 진짜 카메라 앞에 선 것처럼 울고, 웃고, 말했다. 그렇게 연습에 매진하다 보면 어느새 우현은 사라지고 없었다. 차우현을 대신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드라마 속의 배역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고결은 금방 체념했다. 이미 대본까지 건네받은 상황이었다. 이제 와 갑자기 연습을 도와주지 못하겠다고 꽁무니를 빼기도 애매했다. 애초에 쓸 수 있는 적당한 핑곗거리도 없었다.
‘그래. 나만 내색 안 하고, 나만 의식 안 하면 돼. 그러면 되는 거야.’
어차피 우현한테 있어 이건 평소와 다를 거 없는 대본 연습일 뿐이었다. 고결은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며 긴장감으로 인해 요동치는 제 속을 진정시켰다.
“…당신. 정말 내가 알고 있는 현재 선생님이 맞아요?”
고결이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게 첫 대사를 뱉었다. 그와 동시에 대번 차우현의 눈빛이 변했다.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에서 왠지 모를 광기 같은 것이 묻어났다. 섬뜩했다. 고결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순간 뒤로 물러날 뻔했으나 그렇게까지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될 것 같아서 억지로 버텼다.
“왜요? 세아 씨 눈앞에 있는 내가 이현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 같아요?”
차우현이 소파 등받이에 올리고 있던 한쪽 팔을 내리며 진득하게 고결을 응시했다. 차우현의 매끈한 입술이 잔잔하게 호선을 그렸다.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비릿한 웃음이었다. 고결은 얼른 눈을 내려 자신이 읽어야 하는 다음 대사를 찾았다. 대본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네. 내가 아는 현재 선생님은 이렇게 오만하고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으니까요.”
“음, 오만하고 경솔하다는 게 혹시 이런 걸 말하는 건가?”
고결의 쪽으로 상체를 조금 더 당겨 앉은 차우현이 허벅지 위로 손을 뻗었다. 스스럼없는 행동이었다. 제 허벅지를 어루만지듯 천천히 훑는 차우현의 손길에 고결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면 이런 거?”
커다란 손이 느리게 허벅지 안쪽으로 넘어왔다. 마치 매끄러운 유리 위를 기어가는 뱀과도 같은 동작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망설임이 없었다.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고결이 떨리는 손으로 차우현의 손목을 살짝 붙잡았다. 물론 이 역시 대본에 포함되어 있었다. ‘세라, 파르르 떨리는 손을 애써 숨기며 현재의 손목을 붙잡고 저지한다.’ 라는 지문이 있어 다행이었다.
“너 누구야? 진짜 현재 선생님은 어디에 있어?”
고결은 애써 대본 읽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다른 것에는 신경을 쏟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자면 허벅지 안쪽에서 느껴지고 있는 미묘한 온기 같은 것들에. 그러나 고결의 노력은 차우현의 움직임 한 번에 우스우리만큼 쉽게 무너져 내렸다.
피식 웃은 차우현이 왼손으로 소파를 짚으며 고결한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오른손은 여전히 고결의 허벅지 안쪽에 머물러 있는 채였다. 우현이 가까워진 만큼 고결은 뒤로 상체를 물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어느새 두 다리가 소파 위에 올라와 있었다. 어떻게든 우현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고결은 무릎을 세웠다. 대본에 지시된 건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최대한 상체를 뒤로 무른다.’였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해요? 내가 이렇게 가까이 당신 앞에 있는데?”
“다른 데로 말 돌리지 마. 계속 묻고 있잖아. 도대체 이현재 선생님은 어디….”
“당신은 이현재를 좋아하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현재는 당신한테 관심이 없고.”
차우현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안쓰럽다는 얼굴로 고결을 바라보고 있던 차우현의 두 눈이 곧 흥미로움을 담아 빛났다.
“그런데 나는 당신한테 관심이 아주 많아서요.”
입안이 말랐다. 고결은 무의식중에 혀로 입술을 살짝 훑었다. 그 순간 차우현이 마치 키스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고결의 두 어깨가 티 나게 움찔거렸다. 마음 같아선 거리를 더 벌리고 싶었으나 이 이상 물러섰다간 아예 뒤로 눕게 될 것만 같았다. 대본 어디에도 눕는다는 지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고결은 팔꿈치에다 무게를 싣고서 최대한 버텼다.
“…그, 그래서?”
“나는 당신한테 이현재가 절대 줄 수 없는 것들을 줄 수 있죠.”
그때였다. 줄곧 허벅지 안쪽에 머물러 있던 차우현의 손이 아예 뒤쪽으로 옮겨가 엉덩이와 허벅지, 그 묘한 경계에 걸친 살덩어리를 마치 터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꽉 움켜쥔 건.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각이었다. 고결은 잔뜩 긴장했다.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꼴사납게 헛기침을 터트릴 뻔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다리로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이런 것도. 아니면 이 이상도. 전부 다.”
차우현이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 이게 고결이 해야 할 다음 대사였다. 하지만 고결은 차마 대사를 내뱉지 못했다. 그랬다간 그대로 우현과 입술이 스칠 것 같은 불안함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얼굴 간의 거리가 가까웠다. 지금 고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것뿐이었다.
“…으읏.”
차우현이 다시 한번 고결의 허벅지 뒤쪽을 움켜쥐듯 힘껏 잡았다 놓았다. 빨리 대사를 하라고 재촉하는 건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손길에 순간 전기가 통한 것처럼 허리가 찌릿했다. 익숙지 않은 느낌에 고결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결아.”
이를 악문 차우현이 나직하게 고결의 이름을 불렀다.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 잔뜩 잠긴 목소리였다. 동시에 상당히 윤습하기도 했다.
귓바퀴를 훑고 지나가는 그 낮은 목소리에 온몸의 솜털이 삐쭉 섰다. 마치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시야가 흔들리고 이내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그와 동시에 아랫배에서는 뭔지 모를 열기가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꼭 작은 장작불을 높이 쌓아다 불을 붙이기라도 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하아….”
한숨을 쉬듯 낮게 숨을 내뱉은 고결이 몸을 조금 뒤척였다. 그와 동시에 희미한 단내가 차우현의 코끝을 간질였다. 유쾌함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걸, 차우현은 꾹 참아 삼켰다. 기대 이상이었다. 노골적으로 페로몬을 푼 것도 아니고 그저 조금 건드린 것뿐인데 이렇게나 솔직한 반응이라니. 확실히 오메가로 발현하게 되면서 몸이 많이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알파의 손길 몇 번에 이렇게까지 달아오를 만큼.
차우현이 제 아래에 있는 고결을 내려다보았다. 당장에라도 고결을 발가벗겨 씹어 먹을 것만 같은 집요한 눈길이었다. 고결은 묵묵히 그 시선을 받아냈다. 애초에 차우현이 지금 어떠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걸 신경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고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아래로 눈을 내리깐 채 색색 밭은 숨을 몰아쉬는 것뿐이었다. 파르르 떨리고 있는 촘촘한 속눈썹이 꼭 초식 동물의 그것 같았다. 애처롭고 가냘프고 그래서 사랑스러웠다.
겁먹은 토끼 같네. 그런 고결의 얼굴 위로 토끼를 겹쳐 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결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토끼가 떠오르곤 했다. 희고, 작고, 부드럽고, 올망졸망한. 비록 차우현이 그 말을 했을 때 고결은 질겁하며 부정했지만.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하지만 차우현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고등학생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성욕 혹은 식욕. 지금껏 그 어떤 오메가의 페로몬을 맡고도 느끼지 못한 지극히 본능적이고 강렬한 욕구들이 차우현을 감쌌다. 입에 저절로 침이 고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