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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12화 (12/71)

12화

“나도 조금 전에 일어나서 괜찮아. 그러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서 씻고 와.”

차우현이 자신은 정말로 괜찮다는 듯 고결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얼굴을 봐도 고결의 마음은 좀처럼 가벼워지지가 않았다. 일단 프로틴 바라도 먹고 있으라고 가져다줄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으나 관뒀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빨리 씻고 나와서 우현과 함께 제대로 된 밥을 먹는 게 훨씬 나았다. 그래서 고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군말 없이 소파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형. 점심 먹어야죠. 뭐 드실래요?”

닫힌 욕실 문이 다시 열리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결은 손으로 대충 머리를 정리하며 우현한테 다가갔다. 세수를 하느라 젖은 머리카락에서 축축하게 물기가 묻어났다.

오늘처럼 어쩌다 집에 있는 날에는 대개 간편하게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챙기는 편이었다. 냉장고 안에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물, 탄산수, 맥주 몇 캔이 전부였다. 부엌 찬장에는 그 흔한 레토르트 식품 하나 없이 단백질 셰이크와 프로틴 바만 들어 있고.

웬만하면 식재료는 채워 두지 말자는 주의였다. 집에 들어오는 날이 불규칙하다 보니 뭘 사다 놓으면 결국엔 전부 다 음식물 쓰레기로 전락해 버리는 탓이었다. 심지어 라면조차도 이 집에서는 손쉽게 유통기한을 넘겼다. 그러한 연유로 일주일에 두 번씩 오는 도우미 아주머니께도 딱 청소만 부탁드렸다. 언제 집에서 밥을 먹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반찬을 만드는 건 낭비였다.

“초밥 먹을까?”

“아, 저번에 시켜 먹었던 거기요?”

“응. 우리 초밥 안 먹은 지 좀 됐잖아.”

몇 달 전, 우현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초밥집이 하나 생겼다. 우현은 입이 짧은 편이었다. 고결은 대체로 가리는 거 없이 뭐든 잘 먹었고 굳이 따지자면 개중에서도 해산물을 조금 더 선호하긴 했다. 초밥집의 등장에 고결은 반색했다. 배달도 되길래 시험 삼아 시켜 먹어 봤는데 퀄리티가 제법 괜찮았다. 연어, 광어 전부 다 나쁘지 않았는데 특히 간장새우 초밥이 맛있었다.

“그럼 저번처럼 A정식으로 두 개 시킬까요? 아니면 회덮밥 정식이랑 우동 정식도 있어요. 저번에는 없었는데 새로 생겼나 봐요.”

“A정식 시키고 간장새우 초밥 따로 추가 돼? 추가 되는 거면 하자. 그때 보니까 결이 너 그거 잘 먹던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메뉴를 살펴보고 있던 고결이 잠시 손을 멈췄다. 고결은 대개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크게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었다. 좋아하거나 마음에 드는 음식을 먹을 때

도 그랬다. 그저 속으로 아, 이거 맛있네. 하고 말 뿐이었다. 당연히 표정이 크게 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우현은 그걸 눈치껏 알아채곤 항상 이런 식으로 챙겨주곤 했다. 신기해서 어떻게 알았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우현은 좀처럼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때마다 그냥 싱긋 웃고 말 뿐이었다.

“어때? 따로 추가돼?”

순간 어깨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차우현이 고결의 어깨에다 턱을 기댄 상태로 휴대폰 화면을 응시했다. 불시에 가까워진 거리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이제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하게 넘길 수 있었다. 가까운 사람을 짝사랑하게 되면 누구나 연기 실력이 늘기 마련이었다. 우현처럼 영화나 드라마의 주연으로 출연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런 생활 연기 정도는. 고결은 차우현의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손에 쥔 휴대폰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보니까 간장새우 초밥은 따로 추가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럼 정식을 여러 개 시키면 되지.”

고결의 대답에 차우현이 기다렸다는 듯 대안을 내놓았다. 쉽고 간편한 방법이긴 했으나 고결은 됐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은 둘인데 고작 간장새우 초밥 좀 더 먹겠다고 정식을 3~4개씩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현은 원래도 먹는 양이 많지 않았다. 애초 뭘 먹는 행위에 대해 딱히 흥미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저 죽지 않을 만큼의 영양분을 섭취한다는 느낌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이었다. 고결 역시 운동을 그만둔 뒤로는 먹는 양이 많이 줄어 지금은 남들만큼도 먹질 못했다. 정식을 여러 개 시켰다간 전부 다 음식물 쓰레기가 될 게 뻔했다. 돈 낭비, 음식 낭비였다.

“저 지금은 딱히 배도 안 고파서 이거면 충분해요.”

메뉴를 금방 정한 덕분에 주문도 속전속결로 완료했다. 결제를 마치기 전, 요청 사항에다가 정식 한 개는 와사비를 조금만 넣어 달라고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향이 강하거나 매운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현의 식성을 고려해서였다.

한창 바쁠 점심시간이 비껴간 덕분인지 음식은 생각보다 더 금방 도착했다. 두 사람은 기다란 아일랜드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초밥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젓가락을 든 차우현이 가장 먼저 집은 건 간장새우 초밥이었다. 두 개의 간장새우 초밥은 고스란히 고결의 앞에 놓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형 드세요.”

고결이 거절했으나 간장새우 초밥이 다시 우현한테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차우현이 고결을 보며 옅게 웃어 보였다.

“나 원래 뭐 많이 안 먹잖아.”

“그래도….”

“이따 대본 연습도 해야 하는데 배부르면 집중 안 돼. 그러니까 결이 너 먹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거절하기도 뭐했다. 고결은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 젓가락을 들어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차우현은 아닌 척 눈동자만 조금 움직여 그 모습을 관찰했다. 역시나 고결은 간장새우 초밥 쪽에 손도 대지 않고 다른 것만 집어 먹고 있었다. 차우현의 입가 위로 잔잔하게 미소가 번져 나갔다. 고결은 제일 좋아하거나 맛있는 음식은 꼭 맨 마지막에 먹었다. 정작 당사자인 고결은 전혀 모르고 있는 식습관이었다. 저걸 참을성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귀엽다고 해야 하는 건지. 차우현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고결 몰래 웃음을 삼켰다.

차우현의 입맛에 맞춰 와사비가 적게 들어간 초밥은 하나도 맵지 않았다. 와사비 특유의 알싸한 맛과 향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다. 차우현은 장국을 마시다 말고 다시 한번 고결의 초밥을 힐끔 쳐다보았다. 한 개씩 줄어든 다른 초밥과 달리 간장새우 초밥만은 여전히 처음의 개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차우현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슬쩍 안으로 말아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아서.

고결은 사람을 참기 힘들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참, 여러모로.

***

“결아. 그럼 나 방에 들어가서 대본 좀 가지고 나올게.”

차우현의 말에 고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랑 놀아 줘, 란 말로 우현이 자신을 붙잡은 게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뭘 어떻게 놀아 달라는 걸까. 우현의 얼굴 공격에 넘어가 맥없이 그러기로 하긴 했으나 고결은 내심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한 것이 무색하게 식사를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우현은 대본 연습을 함께 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대본 연습은 우현한테 있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워커홀릭다운 면모였다.

차우현의 매니저가 된 뒤로 대본 연습을 도와주는 건 항상 고결의 몫이었다. 사실 도와준다는 건 그저 말뿐이었다. 고결이 하는 건 별거 없었다. 그저 우현이 연기를 할 수 있게끔 상대방의 대사를 줄줄 읽어 주기만 하면 됐다.

처음에 차우현이 연습을 도와 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고결은 손사래까지 쳐 가며 거절했다.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만 될 것 같아서 그랬다. 우현의 앞에서 로봇처럼 딱딱하게 대사를 읊고 있으면 되레 웃겨서 힘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결이 영혼 없이 대사를 내뱉어도 우현은 전혀 웃지 않았다. 심지어는 눈물 연기 같은 섬세한 감정 연기도 잘만 해냈다. 그 덕분에 고결은 제 앞에 있는 차우현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매번 하는 건데도 할 때마다 놀랍고 신기했다. 그토록 금방 배역에 몰입하는 차우현이.

“자, 결아. 여기 대본.”

방에서 나온 차우현이 고결한테 대본을 내밀었다. 고결은 스스럼없이 대본을 받아 들며 표시가 된 페이지를 찾았다. 대본을 넘기는 손길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차우현 매니저 5년이면 대본을 받아 읽었다. 마치 내 것처럼.

“여기 형광펜 안 칠해진 부분 제가 읽으면 되는 거죠?”

“응. 맞아. 아, 근데 결아. 그 전에 나 눈에 안약 좀 넣어 주면 안 될까?”

고결이 대본에서 눈을 떼고서 제 앞에 서 있는 차우현을 올려다보았다. 고결의 동그란 눈 안으로 빼곡하게 걱정이 차올랐다.

“많이 잤는데도 이상하게 눈이 좀 뻑뻑하네.”

차우현이 민망하단 얼굴을 하고서 왼쪽 눈을 살짝 비볐다. 변명처럼 덧붙여지는 말에 고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평소에 비해 많이 자긴 했으나 그래 봤자 7시간도 채 자지 못했다. 몰려드는 스케줄을 소화하며 쌓인 피로를 풀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고결은 손에 쥔 대본을 잠시 옆에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탁자 아래에 놔둔 백팩으로 팔을 뻗었다. 백팩 앞주머니에는 안약이 네 개나 들어 있었다. 수면 부족 및 과도한 대본 읽기로 혹사당하는 우현의 눈을 위해 안약은 로 들고 다녔다. 떨어지지 않도록 예비용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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