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차우현이 고개를 뒤로 젖혀 기댔다. 페로몬을 쏟아 내듯 하나도 남김없이 풀어 버리면 그다음은 너무나도 쉬웠다. 열성 오메가 하나 발정 나게 하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열성 오메가인 결은 우성 알파인 자신을 죽어도 거부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안 된다고 해도 육체는 절대 그러지 못할 것이었다. 헐떡이며 금방 앞을 세우고, 뒤는 축축하게 젖어 들어 갈 것이 분명했다. 제 성기를 보다 수월하게 삼켜내기 위해서. 그게 지금도 결의 몸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을 피에 새겨진 본능이었다.
피식. 차우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좀 우스워서 그랬다. 본래 차우현한테 있어 우성 알파란 지독한 저주나 마찬가지였다. 남들은 되지 못해 안달이라지만 정작 차우현은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더러운 형질의 값어치를 찾아냈다. 고결이 열성 오메가로 발현했기에 덩달아 자신이 우성 알파인 것에도 의미가 생겼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자신이 우성 알파라서 다행이라는 거지 같은 생각을 한 건. 살아가면서 이딴 생각을 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되리라곤 감히 상상하지 못했는데.
보통의 때를 넘어도 한참 넘은 저주와도 같은 발현이. 독하게 앓고 치러 내야 할 독감과도 같은 불행이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에게는 다신 없을 기회이자 행운이 되기도 했다. 사람이라는 건 이토록 상대적이었다. 그게 사전적으로는 같은 이름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근데 그러고 나서 그다음은?’
언제 웃었냐는 듯 차우현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말끔하게 거둬 냈다. 새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는 두 눈이 건조했다.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무감한 얼굴만큼이나.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각인이 갖는 의미는 컸다. 단순히 이 사람이 내 반려라고 공표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였다. 서로 각인을 맺고 나면 이런저런 제약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각인이 갖는 유일한 장점이라고는 러트와 히트사이클이 안정된다는 것 정도였다.
일단 알파와 오메가 모두 각인 후에는 각인 대상 이외 다른 사람의 페로몬은 맡을 수 없게 됐다. 당연히 관계도 맺지 못했다. 무시하고 관계를 맺게 될 경우 각인된 페로몬의 영향으로 인해 신체에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페로몬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다 보니 형질이 우성이나 열성이냐에 따라 그 고통의 정도가 달라졌다. 열성 오메가와 각인을 한 우성 알파라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 그렇게까지 큰 고통이 뒤따르진 않았다. 하지만 우성 알파와 각인한 열성 오메가가 겪는 거부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거기다 오메가는 각인한 알파와 주기적으로 관계를 갖지 않거나 페로몬 샤워 및 마킹을 받지 못하면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 시도 때도 없이 히트사이클이 찾아와 제대로 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더 문제가 되는 건 각인 후 오메가의 몸은 알파의 페로몬에 지배된 거나 다름없기에 억제제의 효과도 떨어졌다. 억제제만으로는 히트사이클을 완전히 막아 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각인을 한다고 해서 결이가 완전히 내 것이 될까?’
상대가 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을 문제였다. 각인을 당하면 필요에 의해서라도 각인한 알파의 곁을 떠날 수 없다. 이것이 오메가의 숙명이었다. 아무리 알파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하지만 차우현이 아는 고결은 정해진 숙명을 억지로 비틀어 낼 수 있는 존재였다. 고결은 강직하고 또 강했다. 그동안 차우현이 봐 온 그 어떤 사람보다도. 부러지면 부러지지 절대로 휘어지지는 않을 애였다. 그런 고결이 각인을 했다고 해서, 그것도 자신이 원치도 않는 상황에서 한 각인 때문에. 고작 그 이유로 완전히 제 것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고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곁에서 도망치려고 들지도 몰랐다.
그동안 고결이 좋아해 온 것은 차우현임과 동시에 차우현이 아니었다. 그건 연기로 만들어 낸 또 다른 차우현이었다. 이제 와 이런 방식으로 고결한테 진짜 제 모습을 드러내면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할 것이었다.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이 속아 왔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다 못해 어쩌면 두려움까지 느낄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되지. 그래.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물론 차우현한테 있어 고결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차우현은 고결의 감정을 믿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믿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고결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보다 두려워하는 감정이 더 커져서 제 옆을 떠나려고 든다면 그건 문제가 됐다.
‘각인 후에 억제제가 아예 듣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톡. 톡. 톡. 차우현의 기다란 손가락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소파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각인을 하고 나면 억제제의 효과가 줄어드는 거지 아예 소용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억제제를 더 강한 약으로 처방받든. 아니면 섭취 횟수를 늘리든. 이런 식의 다른 방법을 이용하면 알파의 곁을 떠나도 살 수는 있었다. 비록 그게 각인한 알파와 함께 지내는 것보다 훨씬 더 괴롭고 힘들어도. 바로 이 점이 차우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고결은 충분히 그 괴로움과 힘듦을 감내할 것만 같아서 제 욕망을 선뜻 실현할 수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는 사고처럼 위장하면? 갑자기 러트가 찾아왔고 그래서 순간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소파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불시에 멈췄다. 단순히 러트 때문에 각인까지 하게 되면 고결은 분명히 자기 탓을 할 것이었다. 오메가로 발현한 걸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은 잘못이라고. 빨리 얘기하고 형의 옆에서 사라져야 했다고. 형을 속이려 한 탓이라고. 그러니 자신이 전부 다 책임지겠다고. 혼자서 감내하겠다고. 그렇게 말하며 제 곁을 훌쩍 떠나 버릴 수도 있었다. 고결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역시 결이 네가 먼저 날 원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겠지.’
차우현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가려면 절대로 이쪽이 먼저 움직여서는 안 됐다. 먼저 움직여야 하는 사람은 고결이었다. 고결의 쪽에서 매달리도록 해야. 고결이 참지 못하고 제 몸에 손을 대야. 이성을 잃고 제발 안아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해야. 그런 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섞게 돼야. 그 과정에서 각인까지 해야만 차우현이 원하는 보다 완벽한 그림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고결은 아마 책임감과 부채감 때문에라도 제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이었다. 차우현이 아는 결은 그랬다. 자신이 당한 건 제 탓을 하며 기꺼이 감내해 내도 그 반대의 상황이 되면 절대 외면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래.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 상황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 만들어 낼지는 앞으로 차차 고민해 볼 일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고결이 제 손안으로 들어올 날이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이었다.
-2. 연기-
고결이 눈을 뜬 건 오후가 훨씬 넘어서였다. 그마저도 자의로 깬 것이 아니라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깬 것이었다. 그 누군가는 당연히도 차우현이었다. 이 넓디넓은 집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고결과 차우현, 단둘뿐이었으니까.
“일어났어?”
다정한 물음이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차우현은 소파와 거실 테이블 사이, 그 넓지도 않은 공간에 책상다리를 하고서 앉아 있었다. 그것도 한 팔을 허벅지 위에다 올린 채 턱을 괸 상태로. TV 대신 고결을 보고 있는 모양새였다.
고결이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을 떴으니까 일단 신체적으로는 일어난 게 맞는데, 정신은 아직 저 먼 어딘가를 유영하는 중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듯 덮은 고결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곤함을 대변이라도 하듯 목소리 끝이 엉망으로 갈라졌다.
“깨우지 왜 그러고 있어요.”
“그냥. 너무 곤히 자길래.”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어요?”
“얼마 안 됐어.”
“지금 몇 시예요?”
그제야 차우현이 빙그레 웃으며 딱딱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2시 다 되어 가.”
늦어도 12시쯤 되지 않았을까 했다. 근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니. 생각한 것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고결은 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데 너무 갑자기 움직인 탓인지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고결이 뒤로 넘어갈 것처럼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그 불안한 움직임을 본 차우현이 재빨리 팔을 뻗어 고결의 등을 받치듯 감싸 안았다. 졸지에 우현의 품에 반쯤 안기게 된 고결이 목을 움츠렸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팔의 감촉이 어색했다.
“조심해야지. 잠도 덜 깼는데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어떡해.”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저 먼 곳을 유영하고 있던 정신이 빠르게 되돌아왔다. 고결은 어설프게 우현의 어깨를 밀어내며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차우현이 그런 고결을 귀엽다는 얼굴로 내려다보다 자연스럽게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형은 씻었어요?”
“응. 나야 씻었지.”
“뭐 좀 먹었어요?”
“아니. 아직.”
“배고프지 않아요? 대충 뭐라도 좀 먹고 있지.”
고결이 기억하는 우현의 식사라고는 어젯밤 9시쯤 도시락을 먹은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다시 촬영에 들어가느라 반도 채 먹지 못하고 거의 다 남겼다. 나중에 따로 바나나를 챙겨 주긴 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허기를 달래는 용일 뿐, 식사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고결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현이 여태 빈속인 게 제 탓인 것만 같아서. 알람이라도 맞춰두고 잘걸. 이렇게 오래 잘 줄 모르고 알람도 맞춰 놓지 않은 게 후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