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10화 (10/71)

10화

차라리 저렇게 대놓고 작업을 걸거나 페로몬을 흘리는 건 그나마 양반인 편에 속했다. 개중에는 정말로 미쳐서 우현한테 약을 탄 음료를 먹이려고 한 오메가들도 더러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전부 다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알려진다면 사회적으로 매장될 일이었다. 그러나 가해자보다도 피해자인 우현이 받게 될 타격이 더 컸다. 이유가 간단했다. 우현이 그냥 알파도 아닌 우성 알파이기 때문이었다.

알파가. 그것도 무려 우성 알파가, 오메가가 먹인 약 때문에 원치도 않는 섹스를 했다. 차마 기사화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다들 그걸 알고서 그딴 미친 짓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우현이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라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오메가한테 위협받는 알파. 쥐를 무서워하는 고양이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고결의 눈에는 그게 차우현이 처한 현실이었다. 고결은 우현의 가드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웬만하면 자신이 주는 것만 먹고 마시게 하고, 우현이 혼자 있을 만한 상황은 절대로 만들지 않았다. 혹시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고결이 주영재의 이름에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건, 결코 신경과민이 아니었다. 아닐 것이었다. 아마. 고결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밥… 사기로 했어요?”

“아니. 결이 너한테 허락받고 하려고 아직 답 안 했어.”

후배한테 밥 하나 사는 것도 허락받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짜증스러울 법도 하건만 우현은 그런 기색 하나 없어 보였다. 착한 얼굴에서 나온 착한 대답에 고결은 조금 길게 숨을 내뱉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안도의 한숨이었다. 우현이 고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밥 산다고 할까?”

주영재가 바라는 건 단순히 우현과 밥 한 끼 먹으며 친분을 쌓는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우현이 이 제안을 수락하면 그 근처에 기자를 심어 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같은 드라마를 찍고 있는 배우가 함께 밥 먹는 거야 그렇게까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열성 오메가와 우성 알파일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졌다. 순식간에 열애설로 번져나갈 수도 있었다. 주영재네 소속사 입장에서 봤을 땐 크게 손해 볼 거 없는 일이었다. 분명 엄청나게 화제가 될 테니. 우현이 아니라고 해도 주영재 측에서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면 이쪽 이미지만 이상해졌다. 밥 한번 먹는 거로 유난스럽게 군다고 할 수도 있지만 뭐든 주의하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뇨. 둘이 따로 만났다가 괜히 기사라도 나면 곤란하니까요. 형 곧 있으면 6-7회 대본 리딩 있잖아요. 제가 박 연출님한테 미리 연락드리고 그날 전체 도시락 돌릴게요. 주영재 씨한테는 요즘 스케줄이 바빠서 밥은 못 사고 대신 이렇게 한다고 말하면 될 거 같아요.”

기브 앤 테이크. 우현이 원치 않았어도 일단 주영재한테 받은 게 있으니 뭐라도 돌려주는 게 좋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선물을 줬다간 그게 또 어떤 식으로 잡음이 되어 나타날지 몰랐다. 주영재가 인증샷을 찍어 의미심장한 SNS라도 올렸다간 골치 아파졌다. 고결의 간단명료한 해결법에 우현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역시 우리 결이야.”

“…….”

“진짜 결이 없으면 어떻게 살지?”

‘난 진짜 너 없으면 하루도 못 살 거야.’

둘 다 비슷한 류의 말이라서 그런 건지. 아까 전, 우현이 촬영장에서 한 말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문장이 떠오르자마자 입술이 딱 붙어 버렸다. 우현한테 꺼내 놓기로 결심한 말이 목울대에서만 답답하게 일렁거렸다.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그래. 우현이 형한테는 내가 필요해. 나만큼 형에 관해서 잘 알고, 형을 잘 챙겨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우현한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우현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그것과는 또 별개였다. 이기적이래도 좋았다. 자신이 없으면 단 하루도 안 된다는 우현의 옆에서 고결은 가능한 오래, 되도록 아주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다. 그게 고결의 진심이었다.

형이 내가 없으면 안 된다잖아. 형이 내가 없으면 못 산다잖아. 그런데 어떻게 형 옆을 떠나. 고결은 그렇게 우현의 말을 핑계로 애써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내뱉지 못한 진실이 달그락거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무시했다.

‘일단 약도 받아 왔으니까 며칠만, 딱 며칠만 더 지내보자. 약 먹었는데도 몸 상태가 이상하다 싶으면. 그래서 형이 나 때문에 곤란해질 수도 있겠다 싶으면, 그땐 정말 미련 없이 바로 그만두자.’

결심을 바꾸고 뒤로 미루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아까부터 줄곧 말아 쥐고 있는 손바닥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결은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그건 아마도 욕심이란 이름의 감정일 것이었다.

“근데 결아 너 아까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거요?”

반듯한 고결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차우현은 기민하게 그 변화를 읽어 냈다. 촬영장에 오메가가 있으면 유독 더 경계의 날을 세우는 결이었다. 그런데 주영재는 대놓고 자신을 꼬시려 혈안이었다. 그런 주영재의 얘기를 꺼내면 당연히 먹혀들 거라 생각했다. 고결의 표정에서 차우현은 상황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음을 인지했다. 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이 흡족했다. 차우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응. 이제 결이 네 얘기도 해 봐. 무슨 말인데?”

“…그, 병원 감사했다고요. 생각해 보니까 제대로 얘기를 못 한 거 같아서요. 병원 예약해 주신 것도, 돈 내주신 것도 감사해요. 형 덕분에 잘 다녀왔어요.”

“고마우면 형 소원 하나 들어줄래?”

“소원이요?”

고결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우현의 성격상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마워하냐며 웃고 넘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우현이 이렇게 소원을 대가로 내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늘 가지 마.”

“…네?”

“종방연 가기 전까지 나랑 집에서 놀자. 응? 오랜만에 여유 있는 날인데.”

그리고 그 소원의 내용은 더더욱 상상외의 것이었다. 고결은 멍청하게 굳어선 두 눈만 겨우 깜빡거렸다. 차우현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마른 고결의 손등을 위에서 덮듯이 감싸 쥐었다. 커다란 우현의 손안으로 고결의 손이 흔적도 없이 삼켜졌다. 고결은 그제야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슬그머니 힘을 풀었다. 고결을 바라보는 차우현의 두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나랑 놀아 줘.”

차우현이 결의 쪽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차우현은 알고 있었다. 고결이 자신의 얼굴에 매우 약하다는 걸. 우현이 이런 식으로 얼굴을 가깝게 들이민 채 부탁하면 고결은 매번 속절없이 넘어갔다. 난감함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결국에는 우현이 하자는 대로 했다.

오늘이라고 해서 다를 거 없었다. 얼굴을 무기로 내미는 차우현의 행동에 고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숨을 참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그 고갯짓에 기다렸다는 듯 우현의 눈매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직선에 가까웠던 눈꼬리가 순식간에 곡선으로 변하는 과정을 고결은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럼 얼른 씻고 나와, 결아.”

차우현의 얼굴이 조금 멀어지고 나서야 고결은 참고 있던 숨을 티 나지 않게 몰아쉬었다. 다급하게 옷가지가 든 가방을 챙긴 고결이 서둘러 욕실로 걸어갔다. 차우현의 두 눈이 어딘가 분주한 그 뒷모습을 집요하게 뒤좇았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아까 낮에 의사한테 전달받은 고결의 젠더 검사지 결과를 떠올렸다. 열성 인자 81%. 우성 인자 19%. 젠더 검사지 속 수치는 고결이 열성 오메가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로 발현했을 줄이야.’

지금으로부터 약 이틀 전쯤이었다. 차우현이 고결의 몸에서 희미한 단내를 맡은 건. 짙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느꼈다. 결과 가까이 있을 때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그 희미한 단내는 분명 오메가의 것이었다. 자신과 같은 알파의 피를 끓게 하고, 이성을 잃게 만드는 그 달짝지근한 향은 오직 오메가한테서만 나는 것이었다. 결 같은 베타는 결코 흉내 낼 수도, 흘릴 수도 없었다. 보다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차우현은 곧장 CH그룹의 산하 병원인 CH병원에 연락을 넣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곧바로 자신한테 알려 줄 것을 지시하면서.

‘일단 그만두겠다는 말은 주영재 얘기로 막긴 했는데….’

달칵. 욕실 문이 닫혔다. TV도 켜놓지 않은 거실은 조용했다. 아주 미세하게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거리가 제법 있는데도 불구하고. 차우현은 그 물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 자신의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정면만 바라보고 있던 그 단정한 옆얼굴이 어떤 결심을 굳혔는지.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차우현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결심을 무너트리고 하려던 말을 삼키게 만드는 방법도 같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나 마나 뻔했다.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듣자마자 나랑 회사에 사실대로 알리고 관둘 생각부터 했겠지. 고결이 아닌 차우현을 위해서. 비록 그게 고결한테는 안 좋을지언정 차우현을 위한 일이니까. 그로 인해 앞으로 제게 주어질 모든 불이익은 기꺼이 감내하려 했을 것이었다. 차우현은 고결을 잘 알았다. 차우현이 아는 고결은 그럴 사람이었다.

‘페로몬을 풀고 그대로 각인까지 해 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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