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때도 느낀 거긴 했지만 낙하산도 이런 낙하산이 없었다. 엔터 쪽이 다른 분야에 비해 학력을 많이 따지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기획사가 작을 때의 얘기였다. 고졸에다 경력 하나 없는 신입인 고결이 입사하기에 한그루 엔터테인먼트의 벽은 상당히 높았다. 우현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입사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기에 더더욱 사실대로 말하고 관둬야 했다. 만약에 이 일자리가 우현이 소개해 준 곳이 아니라면 굳이 밝히지 않고 뻔뻔하게 계속 다닐 수도 있었다. 당장에 나가야 할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거기다 여기에서 잘리고 나면 재취업이 가능할지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 빤히 보였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가시밭길이라는 게.
알량한 양심까지 챙겨가며 살기엔 너무나도 팍팍한 삶이었다. 양심 하나쯤은 모른 척 내버리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자신을 회사에 입사시켜 준 우현이 괜한 오해를 사게 될지도 몰랐다.
오메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취업이 어렵다 보니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브로커한테 돈을 주고 서류를 위조한다거나 심한 경우 아예 타인의 명의를 사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차우현이 친한 후배를 입사시켜주기 위해 기꺼이 서류 위조에 동참했다거나 혹은 그 사실을 알고도 묵인해 줬다, 이런 식의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곤란해졌다. 여러모로 우현의 이미지에 큰 타격이 갈 것이었다.
“결아. 아직 안 씻었어? 나 씻는 동안 너도 씻고 있지, 왜.”
고결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옆쪽에서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결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갔다.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 모를 우현이 샤워 가운 차림으로 덜 말린 머리를 가볍게 털고 있었다. 우현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헐겁게 묶은 샤워 가운의 틈이 조금씩 벌어졌다.
고결은 그 사이로 보이는 우현의 단단한 가슴 근육을 바라보다 조금 급하게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우현의 저런 모습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시각적인 자극이 컸다. 아무래도 열성 오메가라는 판정을 받은 터라 우성 알파인 우현이 그만큼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아… 그게, 저 오늘은 여기서 안 자고 집으로 갈 거라서요. 집에 가서 씻으려고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목소리가 자꾸만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시선은 거실 바닥에 처박혔다.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오후에 종방연 스케줄만 있으니까?”
털썩. 우현의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그와 동시에 방금 막 씻고 나온 사람 특유의 온기와 향기로운 바디워시 향이 훅 끼쳐왔다. 고결은 무의식중에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
“…그것도 그건데… 형, 아까 제가 드릴 말씀 있다고 했잖아요.”
고결의 시선은 이제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로 올라왔다. 하지만 차마 우현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우현을 쳐다보면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애써 다잡은 마음이 흔적도 없이 무너질까 봐 겁났다. 제 쪽으로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는 고결의 옆얼굴을 차우현이 어딘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고요히 응시했다.
“그게 사실은 아까 병원….”
“아, 맞다.”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차우현은 자연스럽게 고결의 말허리를 끊고서 끼어들었다. 행동이 부산스럽지도, 목소리가 크지도 않았지만 고결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까 나도 결이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아까 너 오면 말한다는 걸 까먹었어.”
회사 얘긴가? 아니면 종방연 관련해서 감독님이나 조연출한테 무슨 말을 들었나? 고결은 우현이 할 법한 얘기들을 제 선에서 예측해 봤다. 오늘 현장을 비운 시간이 꽤 되다 보니 여기저기 짚이는 게 많았다.
“아까 또 연락 왔거든. 주영재 씨한테서.”
주영재. 이건 고결의 예측에 전혀 없던 내용이었다. 우현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고결은 마치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줄곧 거실 바닥과 꽃다발에만 향해 있던 고결의 시선이 그제야 우현한테로 옮겨 갔다. 우현은 입매를 살짝 굳힌 채 곤란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영재는 최근 우현이 새로 들어가게 된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를 함께 찍고 있는 남자 배우였다. 주영재는 열성 오메가로 3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3년 만에 그룹이 해체되고 배우라는 새로운 길을 걸어야 했던 점에서 예측할 수 있듯 그렇게 인기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주영재는 최소한 배우로 전향할 수 있을 만큼, 개중에서는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멤버이긴 했다.
연예계에 오메가가 많다지만, ‘남배우’는 예외였다. 오메가인 남자 연예인들은 아이돌로 활동하는 것이 이 바닥의 관례였다. 대체로 예쁘장한 얼굴에, 근육질이나 우락부락함과는 거리가 먼 슬렌더 체형. 그들이 가진 장점은 아이돌을 하기에는 적합했으나 배우와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오메가 남배우가 아예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배우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주영재처럼 아이돌 생활을 하다가 그게 잘 안 풀려서 연기로 넘어온 케이스가 많았다.
아무래도 이성애 작품이 주를 이루다 보니 오메가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으면 남자 주인공으로 발탁되기 힘들었다. 서브 남자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한들 여자 주인공과 같이 있을 때 케미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배역을 얻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진짜로 케미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대중들이 오메가라고 하면 흔히 갖는 편견이 더해진 결과였다. 그래서 오메가 남배우들은 대체로 여자 주인공의 남동생, 직장 동기, 친구, 이런 식의 자잘한 조연밖에 맡지 못했다.
업계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주영재 역시 3년 전 이 바닥으로 왔지만 그동안 제대로 된 역할 한 번 얻지 못했다. 그나마 이번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에서 ‘연우’라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 그의 연기 인생에서 다신 없을 소중한 기회였다. 우현을 헌신적으로 돕다가 결국엔 죽음을 맞이하는, 제법 임팩트 있는 조연이었다. 제작발표회까지 함께 참여할 정도로.
사실 이게 온전히 주영재의 실력만으로 얻은 게 아니라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연예계에서 입김 좀 쓴다 하는, 오직 알파로만 이루어진 무리가 있는데, 그들이 정기적으로 여는 파티에 매번 참석하는 조건으로 배역을 꽂아 준 거라는 얘기가 암암리에 떠돌았다. 흔히들 말하는 스폰이었다.
그 파티라는 게 언제 어디에서 열리는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참석자가 누구인지 등은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배우 외에도 제작자와 투자자 등 꽤나 큰 기업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 파티에 참석하는 조건으로 괜찮은 배역을 따낼 수 있을 만큼 그곳에서 뭔가 엄청난 일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 이 두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원래 세상에 공짜는 없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그만큼을 내놓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그게 인신 공양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졌다. 원하는 배역을 따기 위해 알파들의 굴에 기꺼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오메가. 어쩐지 심청전이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물론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진 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오메가 배우는 오로지 자신이 눈에 띄기 위해서라는 점이 다르긴 했지만. 아무튼 누가 봐도 일반적인 파티와는 거리가 먼, 상당히 뒤가 구린 모임인 것만은 자명했다.
“이번엔 또 뭐라고 연락이 왔는데요?”
“나 오늘 드라마 마지막 촬영인 거 알고 있더라고.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향초 선물 보내 줬어. 자기도 요즘 쓰고 있는 건데 잘 때 피우면 잠이 잘 온대.”
하지만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을 모두 믿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고 그런 헛소문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살이 붙어 본래의 것보다 더 과장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소문은 단지 소문일 뿐이다. 고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주영재를 직접 만나고 나서 항간에 떠도는 얘기들을 그저 질 나쁜 헛소문으로만 치부할 수 없게 됐다.
처음 대본 리딩 현장에서부터 주영재는 속된 말로 엄청나게 들이댔다. 우현의 번호를 알아 가더니 그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해 왔다. 단순히 좋아하는 선배한테 표현하는 팬심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건 누가 봐도 차우현을 꼬시려고 혈안이 된 모습이었다. 우현이 웃으면서 거절하고, 은근히 밀어내도 주영재는 지지 않고 웃는 얼굴로 뻔뻔하게 들러붙었다. 주변에서 주영재 왜 저러냐며 눈총을 주고 수군거리고 욕을 해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받았어요?”
“부담스러워서 받기 싫었는데 선물하기로 보낸 거라 어쩔 수가 없었어. 고맙다고 하니까 그럼 다음에 밥 한 끼 사 달라고 하더라고.”
물론 이런 식으로 우현한테 접근한 오메가가 주영재가 처음은 아니었다. CH그룹을 등에 업고 있는 우현은 그들한테 있어 더없이 좋은 연애 상대임과 동시에 거위였다. 동화 속, 황금알을 낳는 거위.
지난 5년간 고결이 겪은 바에 의하면 그들이 바라는 건 우현의 반려가 되어 CH그룹의 사람이 되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저 우현과의 하룻밤 스캔들. 혹은 그 과정에서 운 좋게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그걸 빌미로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당연히 입막음의 대가도 클 거란 막연한 믿음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