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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8화 (8/71)

8화

절대로 안 울 거라던 하연주는 스태프가 전해 준 꽃다발을 받고서 결국엔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렸다. 서브 여자 주인공인 윤지나 역시 엉엉 울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스태프 몇 명도 함께 따라 울었다. 이따 저녁에 또 볼 건데 뭘 울고 그러냐는 이진영의 장난에 다들 금방 진정이 되긴 했지만.

사전제작 드라마들은 대개 종방연을 두 번 하는 편이었다. 처음엔 드라마 촬영이 모두 끝난 날. 두 번째는 드라마 마지막 회가 방송되는 날. 사실 첫 번째의 경우 종방연보다는 쫑파티의 개념에 조금 더 가깝긴 했다. 두 번째가 종방연의 정석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경우 배우들이 이미 다른 작품에 들어갔거나 스케줄이 있을 수가 있다 보니 참석 여부는 미정이었다. 그때 봐서 올 수 있는 사람만 참여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시청률이 좋으면 대부분 무슨 수를 내서라도 참석했다.

<우리 오늘부터 사랑할까요?>는 이미 6회가 방송된 상태였다. 안정적으로 시작한 시청률은 방송을 거듭할수록 오르며 6회에서 자체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드라마‧비드라마 통합 화제성 1위에 오르고 남녀 주인공인 차우현과 하연주가 드라마 출연자 화제성 1, 2위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며 대세 드라마의 행보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마지막 회가 방송되는 날 모두 또 한 번 뭉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럼 다들 저녁에 봅시다!”

짝.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감독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예정된 종방연은 오후 8시였다. 아직 시간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다. 스태프와 배우들은 후련함과 피로함이 뒤섞인 얼굴로 저녁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형.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고결은 대신 들고 올라온 우현의 꽃다발을 거실 테이블 위에다 슬쩍 내려놓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에 방으로 들어가려던 우현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혹시 급한 얘기야? 결이 너만 괜찮으면 씻고 나와서 해도 될까?”

양해를 구하는 말이 다정했다. 메이크업을 한 상태로 계속 현장에 있었으니 아무래도 찝찝할 것이었다. 고결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꼭 해야 할 중요한 말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우현한테 씻을 시간도 주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고결의 고갯짓을 본 차우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금방 씻고 나올게.”

말을 마친 차우현이 욕실이 딸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우현이 사용하고 있는 안방 외에도 욕실은 두 곳이나 더 있었다. 개중에서도 거실 쪽에 위치한 욕실은 거의 고결 혼자서 사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평소였다면 고결 역시 우현처럼 씻고 나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고결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 우현이 씻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쩌다 보니 고결은 우현과 반동거 비슷한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새벽까지 촬영을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날, 우현의 걱정스러운 말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결아. 피곤할 텐데 오늘은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같이 움직이자. 너 지금 이 상태로 집까지 갔다간 졸음운전으로 큰일 날 수도 있어.”

차우현은 데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인기 배우 반열에 올랐다. 그만큼 우현을 원하는 곳이 많아졌고, 인터뷰와 화보 촬영 요청 또한 물밀 듯이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촬영장에서 밤을 새우거나 차에서 잠깐 쪽잠을 잔 뒤에 다음 촬영지로 가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촬영이 다 끝났다고 해서 고결이 곧장 집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맡고 있는 담당 아티스트를 집에 무사히 데려다주는 것까지가 매니저의 일정이었다. 우현의 집과 고결이 살고 있는 본가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가는 데만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만약 우현의 집에서 잔다면 그 한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거기다 다음 날 우현을 데리러 올 필요가 없으니 여러모로 편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돌 매니저들은 멤버들과 함께 숙소 생활을 하는 편이었다.

사실 고결은 시간보다도 돈 때문에 염치 불고하고 우현의 집에 머무르는 것도 있었다. 여기에 있으면 아무래도 그만큼 생활비를 덜 쓰게 됐으니까. 또 본가에 가면 우리 아들 왔냐며 어머니가 성치 않은 몸으로 자꾸만 뭔가를 해 주려고 하셔서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본가에 가는 대신 우현의 집에서 자는 날이 점차 늘어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우현과 거의 같이 사는 것 같은 수준이 되어 있었다. 우현의 집에 있는 물건은 고결의 것까지 포함해 모두 두 개씩이었다. 칫솔도 두 개. 수저와 그릇 같은 식기구도 무조건 두 개. 본가와 비슷한 수준으로 고결의 물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결아. 우리 그냥 같이 사는 건 어때? 방 하나 비워 줄 테니까 결이 네가 써.”

상황이 그쯤 되자 우현은 아예 동거를 제안했다. 하지만 고결은 한사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마지막 남은 양심 같은 것이었다. 어차피 동거하는 것과 별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고는 해도 그걸 진짜로 받아들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꽤나 컸다. 고결한테는 그랬다.

집이라는 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를 뜻했다. 고결은 잘 알고 있었다. 우현의 집이 자신한테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그저 피곤할 때 잠깐이나마 몸을 누일 수 있는, 딱 그 정도면 족했다. 자신은 이 집에 잠깐 들린 방문객임을 잊어서는 안 됐다. 감히 이 집의 일원이 되길 욕심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침대만이라도 놓자. 응? 결이 너 잘 때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게. 그것도 안 돼?”

고결의 고집에 차우현은 기꺼이 물러서 줬다. 그러나 고결은 그 부탁 같은 말마저도 거절하고 소파를 고집했다. 두려웠다. 편해지면 언제까지나 여기에 머물고 싶어질까 봐. 제 행동이 미련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게 고결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최선의 선 긋기. 하지만 이제 선을 긋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선을 그을 게 아니라 아예 우현한테서 떨어져 나가야 했다. 그게 우현을 위한 일이었다.

워낙에 케어할 연예인이 많은 ‘한그루 엔터테인먼트’는 매니저를 자주 돌려 가며 썼다. 하지만 고결은 우현이 외의 다른 연예인을 담당해 본 적이 없었다. 스무 살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줄곧. 지난 5년간 오직 우현만을 위한 전속 매니저처럼 일해 왔다. 한그루 엔터테인먼트에서 단 한 번도 담당 연예인이 바뀌어 본 적 없는 사람은 고결이 유일했다.

대입 준비로 한창 바쁜 열아홉 여름. 하필이면 그 시기에 유도를 그만두게 된 고결은 그 어디에도 섞이지 못한 채 부자연스럽게 붕 떠다녔다. 마치 먼지처럼. 모의고사 등급이니, 수시 1‧2차 모집이니, 논술이니, 반 애들과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낯설었다. 수능도, 수시도, 하물며 재수마저도 고결한테는 전부 해당 사항이 없는 것들이었다.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더 일찍이 놔 버린 공부였다. 이제 와 석 달 정도 남은 수능 준비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재수를 하자니 딱히 공부에 뜻이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그런 고결한테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나중에 편입을 해도 좋으니 일단 지금은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라면서. 요즘엔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사람 구실을 하기가 힘들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담임 선생님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졸업장 하나 받기 위해 대학을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닐 뿐이었다. 유도야 장학금 등 여러 곳에서 후원을 받아 가며 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고결은 전도유망한 유도 선수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잃어버렸다. 그건 과거의 영광이 됐다. 배움이 짧고 어깨까지 작살난 열아홉 고등학생을 믿고 지지해 줄 곳 따윈 없었다. 그러니 고결이 대입을 포기하고 취업 쪽으로 가닥을 잡은 건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특성화 고등학교라면 또 모를까 인문계 출신의 예비 고졸자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빤했다. 택배 상하차나 공장처럼 몸 쓰는 일 위주였다. 정상이 아닌 어깨가 좀 걱정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좀처럼 끝이 나질 않는 아버지의 항암 치료를 지속하고 집에 쌓인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선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고결은 우선 숙식이 제공되는 공장 몇 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결아. 나 이번에 엔터 회사랑 계약했어. 결이 너만 괜찮으면 나랑 같이 일해 보는 건 어때? 내 매니저로.”

그런데 우현이 갑자기 저런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고결의 졸업식 날, 얼굴을 다 가리고도 남을 만큼의 커다란 꽃다발과 함께 찾아와서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명문대에 입학해 놓고선 갑자기 데뷔라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현의 연기 실력이야 익히 알고 있다지만 이건 너무나 뜬금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고결은 이것저것 따져 묻지 않고 얌전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땐 앞뒤를 재거나 괜한 자존심을 부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우현이 먼저 내밀어 준 손을 내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도 못했다. 거기다 매니저가 되면 앞으로도 우현과 계속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우현이 고결한테 내민 것은 제안이 아니라 달콤한 과육이었다. 보기만 해도 입에 단침이 고이는. 그런 걸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일단 면허 학원부터 다니자. 그래도 운전은 할 줄 알아야 하니까.”

그날 우현은 고결이 다닐 면허 학원까지 직접 끊어줬다. 그것도 자신의 돈으로. 다행스럽게도 한 번에 도로 주행까지 다 붙어서 그나마 우현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 낼 수 있었다. 아주 조금이긴 했지만.

면허증이 발급되던 날, 우현은 고결을 한그루 엔터테인먼트로 불러냈다. 회사에 도착한 고결이 제일 먼저 작성한 것은 이력서가 아닌 입사 계약서였다. 기본적인 신상 외에는 도무지 채워 넣을 게 없는 이력서를 꾸역꾸역 적어 내는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우현이 이미 완벽하게 짜 맞춰 놓은 자리에 고결은 그저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오직 고결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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