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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7화 (7/71)
  • 7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이자 우성 알파. 그리고 글로벌 기업인 CH그룹의 사람. 남들은 하나도 갖기 벅찬 수식어를 차우현은 무려 세 개나 가지고 있었다. 알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그야말로 최강의 알파인 셈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차우현은 사람들이 가진 알파에 대한 기본 관념마저 무너트리는 존재였다. ‘사람 냄새 나는 알파.’ 그딴 말도 안 되는 명제가 차우현의 앞에서는 기꺼이 성립됐다. 유일무이한 데다 전무후무했다. 그토록 특별한 차우현한테 대중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혹시 재킷 어디에다 두고 왔는지 짐작 가는 데라도 있어요?”

    고결의 물음에 차우현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아마 지금 머릿속으로 촬영장을 하나하나 되짚는 중일 것이었다. 이럴 때 고결이 해야 할 행동은 딱 하나였다. 고결은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우현의 팔뚝 부근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아니에요, 형.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찾아볼게요.”

    “그럼 나랑 같이 가. 나도 같이 찾을게.”

    “괜히 그럴 필요 없어요. 저 혼자 찾아도 충분하니까 형은 여기 계세요.”

    “아니야. 그래도 한 명보단 두 명이 낫지.”

    고결이 만류했으나 우현은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게 재킷을 잃어버린 미안함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는 고결은 그를 더 말리지 못했다. 결국 고결과 차우현은 함께 있던 사람들한테 양해를 구한 뒤 먼저 촬영장으로 되돌아갔다.

    “저 앞쪽은 촬영 중이라 못 갈 거 같은데. 일단 뒤쪽부터 같이 쭉 훑어볼까?”

    허리를 살짝 숙인 차우현이 고결의 귀에다 대고 낮게 속삭였다. 수많은 스태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촬영장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들리는 거라곤 대사를 치는 서브 여자 주인공의 격양된 목소리뿐이었다.

    “아뇨. 저 재킷 어디 있는지 알 거 같아서요. 일단 거기부터 먼저 가 봐요.”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고결 또한 차우현한테 바짝 붙어선 상태로 작게 대답했다.

    “거기? 거기가 어디인데?”

    “형 의자요.”

    그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차우현이 조금 놀란 얼굴로 고결을 바라보았다. 대다수의 배우는 현장에 개인용 접이식 의자를 들고 다녔다. 확신까진 할 수 없지만 우현의 행동반경을 생각했을 때 재킷은 거기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마 재킷을 벗어 둔 채 의자에서 쉬다가 그대로 두고 왔을 것이었다.

    “와. 결이 너 진짜 대단하다.”

    차우현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모든 게 고결이 예상한 대로였다. 노란색 소품 박스가 어지럽게 놓인 촬영장의 한구석. 등받이에 ‘차우현’이란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접이식 의자 위로 네이비 색 재킷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마도 촬영 스태프 중 한 명이 의자째로 들어 잠시 여기다 치워 둔 것 같았다.

    “형, 이거 입고 있어요.”

    우현한테는 감탄사가 나올 만할지 몰라도 고결한테는 별거 아닌 일이었다. 고결은 태연히 재킷부터 챙겨 들었다. 시간이 늦어져서 그런가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고결의 말에 우현이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 그 상태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고결은 우현한테 재킷을 입혀주면서 손끝으로 옷감의 두께를 대충 가늠해 보았다. 네이비 색 재킷은 보기에는 멋졌으나 옷감이 얇디얇았다. 안 입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딱히 보온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 소재였다. 고결은 우현의 앞으로 돌아가 꼼꼼하게 재킷 단추를 잠갔다.

    “재킷 얇아서 춥지 않아요? 차에서 외투 가져올까요?”

    못 들을 만큼 작게 말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단추를 다 잠근 고결이 의아함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러자 차우현이 기다렸다는 듯 두 손으로 고결의 양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상황 파악이 안 됐다. 고결은 고개를 뒤로 뺄 생각도 못 하고 그 상태 그대로 느리게 눈만 깜빡거렸다.

    조명 같은 게 없어도 차우현의 얼굴은 빛이 났다. 그것도 고고하고 고아하게. 고결은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다. 곧이어 당연한 수순처럼 잠시 숨이 훅 막혔다. 매일 보는 얼굴인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음의 준비 없이 우현과 마주하게 되면 갑자기 몸속의 전원이 꺼진 듯 막막한 기분이 들곤 했다. 참 새삼스럽게도 그랬다.

    차우현은 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만 모으고 담아 혼신의 힘으로 만들어 낸 역작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고귀한 피조물 앞에 익숙해진다는 건, 상당히 오만한 일이었다. 절대 닿을 수 없는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고결은 이게 비단 저 혼자만의 감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취향이야 갈릴 수 있어도 보는 눈이라는 건 대개 어느 정도 엇비슷할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눈이 제대로 달려 있는 이상은.

    “결이 넌 안 추워? 얼굴 차가운데. 밖에 있지 말고 차 안에 들어가 있어. 이러다 몸살 더 심해지면 어떡해.”

    차우현이 두 손을 조금씩 움직여 가며 천천히 고결의 얼굴을 매만졌다. 제가 가진 온기를 전달해 주려고 하는 것처럼. 눈빛이며 말투, 표정까지. 고결한테 쏟아지고 있는 것 중 뭐 하나 다정하지 않고 따뜻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래서 고결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우현 덕분에 추위 같은 걸 느낄 겨를이 없었다.

    본인은 얇은 재킷 하나 걸치고 있으면서 점퍼 입은 매니저 걱정을 해 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우현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라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점점 더 좋아지기만 했다. 이대로라면 아마 10년이 지나도, 11년이 지나도 똑같을 테다. 우현을 향한 이 마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부풀어 오르기만 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너무도 막연해졌다.

    “결아.”

    고결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차우현이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몸속의 전원이 내려가 버린 고결은 그 부름에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난 진짜 너 없으면 하루도 못 살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차우현과는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고결의 대답을 바라고 부른 게 아니었으니까.

    차우현의 두 눈이 고결의 얼굴 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연필 자국 하나 나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 위에다 스케치 없이 단번에 그려낸 것 같은. 불필요하고 잡다한 선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그저 희고, 작고, 단정하고 매끄러운 얼굴. 둘 사이에 강산마저 변한다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결의 얼굴은 그날, 그 골목길에서 봤을 때와 별로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성인이 됐지만 여전히 남자보다는 소년을 연상케 하는 짧은 턱과 부드러운 턱선. 위아래로 크고 동그란 눈. 그 동그란 눈매 안에 콕 박힌, 너무 새카매서 되레 투명하게까지 느껴지는 검은 눈동자. 아랫입술과 비교했을 때 약간 얇은 윗입술. 그리고 아주 미묘하게 위로 살짝 올라가 있는 듯한 입꼬리의 모양.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그 바르고 선한 생김새가 고결이라는 이름에 정말 신기하리만큼 딱 들어맞는다고 해야 하나. 가지고 있는 그 고결한 성정이 얼굴을 통해 다 드러났다.

    차우현은 고결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람들이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짓는 행위에 열 올리는 이유가 뭔지를. 그와 더불어 이름 따라간다, 라는 문장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어쩌면 고결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제법 독특한 그 이름에서 기인한 걸지도 몰랐다. 차우현은 고결이 고결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결이 그 이름에 딱 맞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제 옆에 잡아 둘 수 있게 된 거나 마찬가지라서.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집요하고 끈덕진 시선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바로 앞에서 차우현의 시선을 받아 내고 있는 고결은 그 눈에서 아무것도 읽어 내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우현의 시선에 어떤 의미나 뜻이 있을 거란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재킷 하나 찾아 주고 듣기엔 너무 과분한 말 아니에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고결은 일부러 조금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꾸며냈다. 그 대답에 차우현이 입술을 당기며 환하게 웃었다. 고결도 그런 우현을 따라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재킷도 찾았으니까 이제 그만 가요. 추운데 밴에 가서 대기해요.”

    고결은 뒤로 물러서며,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있는 우현의 손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따스했던 두 볼이 미적지근하게 식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우현이 기껏 전해 준 온기가 사라지는 게 아쉬웠으나 티를 낼 순 없었다. 고결은 아무렇지 않게 접이식 의자를 챙겨 밴을 주차해 둔 방향으로 먼저 걸어 나갔다.

    난 진짜 너 없으면 하루도 못 살 거야. 방금 전, 우현이 전한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튀어나온 보도블록처럼 자꾸만 고결의 발치를 툭툭 잡아챘다. 하지만 고결은 멈추지 않고 앞만 보며 걸었다. 여기에 가만히 멈추어 서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야만 했다. 우현의 옆이 아닌 다른 곳으로.

    ***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컷. 오케이. 감독의 마지막 사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전 3시 43분. 약 5개월가량 이어져 온 드라마 촬영이 드디어 모두 끝났다. 언제 미리 준비를 한 건지 스태프들이 기다렸다는 듯 케이크와 꽃다발을 들고서 슬금슬금 나타났다. 촬영은 끝났어도 메이킹 카메라는 계속해서 돌아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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