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6화 (6/71)

6화

“결아!”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건지 차우현이 아예 크게 고결의 이름을 불렀다. 그 밝은 부름은 고결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했다. 고결은 그제야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던 다리를 움직여 거의 뛰다시피 우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병원은 잘 다녀왔어? 병원에서 뭐래?”

“어머. 병원이요? 웬 병원? 결이 씨 어디 아파요?”

차우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연주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조금 된 일이기는 하지만 한때 출연자 및 스태프들 사이에서 감기가 무슨 역병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지던 시기가 있었다. 좋아질 만하면 서로 옮고 또 옮겨서 한동안 촬영장에서는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그때도 멀쩡하던 고결이 병원에 다녀왔다고 하니 하연주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시기에 감기로 개고생한 다른 사람들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이 한순간에 고결한테로 집중됐다.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이 불편하고 머쓱했다. 고결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어색하게나마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아… 많이 아픈 건 아니고요. 그냥 몸살감기 때문에요.”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원래 고결은 차우현을 만나자마자 자신의 상태에 관해 사실대로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열성 오메가 판정을 받았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들보다 늦게 발현이 된 케이스라고. 그래서 앞으로는 형이랑 같이 일하지 못할 거 같다고. 정말로 미안하다고.

택시를 타고 촬영장으로 오는 동안 고결은 차우현한테 할 말을 미리 정리해서 외워 두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 볼썽사납게 진심이라도 털어놓게 될까 봐 걱정스러워서 그랬다. 예를 들자면 그래도 계속 형이랑 일하고 싶으니까 옆에 있게 해 주면 안 되겠냐는 구질구질한 말 같은 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현과 단둘이 있을 때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영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이렇게나 듣는 귀가 많은 곳에서 자신이 열성 오메가 판정을 받았단 얘기 같은 걸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이쪽 계열에서 일하지 못할 거라고 해도 여기저기 알려져서 좋을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고결은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했다. 이따 집에 가서 우현한테 사실을 털어놓은 뒤 그 김에 아예 제 짐도 같이 챙겨서 나오는 것으로. 사실 버려도 크게 상관없는 것들이긴 한데 그대로 놔두면 우현한테는 쓰레기가 될 것이었다. 그러니 그 전에 제 손으로 알아서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이 온 김에 링거 한 대 맞고 가라고 하셔서 그거 맞고 왔어요.”

병원을 다녀오는 데 걸린 시간만 두 시간이 좀 넘었다. 단순히 몸살감기라는 진단 하나만 받기엔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고결은 묻지도 않은 링거 얘기를 꺼내 놓으며 미리 핑계를 댔다. 만약 우현이 못 미더워한다면 소매를 걷어 동그란 밴드가 붙어 있는 왼쪽 팔뚝이라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피를 빼느라 주사 자국이 남아 있긴 했으니까.

“링거 맞았더니 좀 나아졌어? 어때? 괜찮아?”

하지만 차우현은 고결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다정하게 고결의 등허리를 토닥거리며 저렇게 물을 뿐이었다.

“네. 훨씬 좋아요.”

“그것 봐. 내 말 듣고 병원 다녀오길 잘했지?”

마치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말투였다. 그런데 그게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해사하게 웃고 있는 우현의 얼굴과 아주 잘 어울린단 생각까지 들었다. 고결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우현과 눈을 맞춘 상태로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언제나처럼 올라간 입꼬리를 따라 왼쪽 볼에만 보조개가 쏙 패었다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어떡해. 결이 씨는 저번에 감기 안 걸린 대신 이번에 왔나 보다. 요즘 일교차 심해져서 다시 감기 유행한대요. 다들 조심하세요.”

하연주의 말에 사람들 입에서 너나 할 거 없이 불만이 터져 나왔다. 고결은 대화에 끼는 대신 묵묵히 경청하는 쪽을 택했다.

“안 그래도 요즘 옷 입기 힘들어 죽겠어요. 껴입으면 덥고, 조금만 얇게 입으면 춥고.”

“얇은 옷 여러 개 겹쳐 입는 게 제일 좋다고는 하는데, 사실 겉옷 입고 벗는 것도 일이잖아요.”

“맞아요. 특히 카디건이나 재킷 같은 건 은근 두꺼워서 들고 다니기도 짐스러워요. 그나마 트렌치코트가 좀 무난하지.”

순간 고결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아까와는 달라진 우현의 옷차림새가 문득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분명 차 안에 있을 때만 해도 우현은 네이비 색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재킷 없이 새하얀 와이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 상태였다. 고결의 눈동자가 차우현의 상체를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보기 좋게 핏된 와이셔츠 덕분에 우현의 탄탄한 상체 근육이 상대적으로 더욱 도드라졌다. 감독님이 이편이 더 보기 좋다며 재킷을 벗길 권유한 걸까 싶었다. 하지만 혹시 몰라서 고결은 직접 확인에 나섰다.

“형. 근데 재킷은요? 촬영 들어갈 땐 재킷 벗고 했어요?”

“응? 재킷?”

차우현은 고결의 물음에 대답을 해 주긴커녕 오히려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몸을 쓱 내려다보기까지 했다. 그런다고 해서 사라진 재킷이 다시 어깨 위로 걸쳐지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질 리 만무했다. 분명 어디에다 재킷을 두고 온 게 분명했다. 차우현의 행동에 사람들이 너나할 거 없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 미치겠다. 우현 씨 얼굴 보니까 또 어디다 두고 왔네. 두고 왔어. 진짜 볼 때마다 신기해. 어쩜 사람이 저렇게 한결같을 수가 있지?”

이진영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건지 정말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들기까지 했다.

“우현 씨가 안 까먹고 잘 챙겨 다니는 거라곤 자기 몸이랑 결이 씨. 딱 이렇게 둘밖에 없는 거 같아. 툭하면 뭐 잃어버리고, 깨트리고, 부수고…. 그동안 우현 씨가 부숴 먹은 소품만 해도 꽤 되지 않아요? 내가 본 것만 최소 여섯 번은 넘어가는 거 같은데? 소품 팀이 이젠 우현 씨가 뭐 구경이라도 하려고 하면 막 기겁하고 말린다니까?”

그동안 차우현이 쌓아 온 화려한 전적을 읊는 목소리에서 은은하게 웃음기가 묻어났다. 이진영의 말에 하연주 역시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재빨리 동참했다.

“저는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거 말로만 들어 봤지 실제로 본 건 우현 씨가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너무 신기해요. 그 정도면 손에 자기장? 뭐 그런 거 흐르는 거 아니에요?”

“오죽하면 팬들이 밑 빠진 독을 바꿔서 밑 빠진 손이란 별명을 붙여줬겠어요.”

이진영이 하연주의 물음을 장난스럽게 맞받아쳤다. 둘 다 합이 어찌나 잘 맞는지. 마치 미리 대본을 받아서 외우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사람들 사이에서 또 한 번 크고 작은 웃음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차우현은 거기에 대해 뭐라 반박하지 않고 그저 옅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민망함 때문인지 애꿎은 자신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듯 문지르면서.

빈틈이라곤 하나도 없고, 뭐든 완벽하게 다 해낼 것 같으면서 사실 차우현은 허점이 많았다. 마이너스의 손은 둘째 치고, 일단 자기 자신의 손으로 할 줄 아는 게 몇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딴에는 한다고 하는데 결과물은 안 하느니만 못한 수준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명문대 졸업. 5개 국어 능통. 두꺼운 대본을 단숨에 외우는 것도 모자라 상대방의 대사까지 줄줄 다 꿰는 탁월한 암기력까지. 능력치를 따져 보면 결코 사람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차우현한테는 어딘지 모르게 좀 허술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은 그러한 차우현의 모습에 더 열광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알파란 더 없이 완벽에 가까운, 이상의 존재였다. 평범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나와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사람. 실제로 알파들은 외모, 능력, 집안 등등 모든 면에서 오메가나 베타보다 훨씬 더 우월했다. 그런 알파한테 있어 딱 하나 부족한 점을 찾자면 그건 누가 뭐래도 인성이었다.

일반화의 오류 같은 게 아니라 알파들은 대개 오만했다. 좋은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탓인지,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알파란 이유로 여기저기서 떠받들어진 탓인지. 알파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하찮다는 듯 대놓고 깔보거나 무시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이었다.

고결이 지난 5년간 방송국에서 봐 온 알파들 역시 그랬다. 강약약강과 오만방자함, 이 두 가지에서 크게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참 천편일률적이기까지 한 집단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대뜸 하대는 기본이고, 커피나 담배 심부름 같은 걸 시키기도 했다. PD, 작가, 다른 연예인의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가릴 것 없이 알파가 아니라면 누구한테나 다 그랬다.

심지어 자기 마음에 들면 억지로 술자리에 끌고 간다거나 대기실에서 대놓고 희롱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차피 연예인을 그만둬도 먹고살 길이 충분해서 그런가 알파들은 거리낌 없이 그딴 미친 짓을 저질렀다. 다행스럽게도 고결은 차우현의 매니저란 이유로 그렇게까지 더러운 일을 겪어 보진 않았지만.

그도 그럴 게 차우현은 그들의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우성 알파였다. 거기다 무려 세계 경제를 이끄는 대기업인 CH그룹의 아들이기도 했다. 연예인 차우현과는 척질 수 있어도 CH그룹의 아들 차우현과는 척져서 좋을 게 없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집안의 알파들이라고 해도 CH그룹은 아예 그 급이 달랐다. 유달리 계급에 예민한 알파들은 영리하게 제 몸을 사릴 줄 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