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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트랩-4화 (4/71)
  • 4화

    의사의 말을 듣고 나니 기억났다. 예전에 우현의 기사 모니터링을 하다 그런 비슷한 제목의 기사가 뜬 걸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눌러서 읽어 보는 수고로움까지는 감내하지 않았다. 별일이 다 있네. 제목만 쓱 보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설마하니 그 별일이 자신한테도 일어나게 될 거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지금 고결 님이 겪은 일이 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겁니다. 고결 님도 단지 그분들처럼 남들에 비해 제2의 성별이 조금 늦게 발현됐을 뿐인 거예요.”

    마치 어린아이한테 일러주듯 의사가 제법 친절하게 설명을 끝마쳤다. 그러나 고작 그걸로 고결이 느끼고 있는 혼란함을 완벽하게 잠재우기란 무리였다. 고결은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채였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굳어 있는 고결을 의사가 조금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뉴스 속 사람들처럼 알파로 발현했다면 또 모를까. 스물다섯이라는 나이에 하필이면 오메가로 발현을 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었다. 의사는 제 앞에 있는 환자의 막막함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했다.

    “그래도 60대에 발현된 것보다는 20대에 발현된 게 훨씬 나은 거 아니겠습니까? 원래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그나마 다행이다, 라고 생각을 바꿔 보세요.”

    문제는 바로 거기서 발생했다. 이 환자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렴풋하게만 이해한다는 거. 여태껏 수많은 알파와 오메가를 봐 오고 진찰했어도 어차피 의사한테 있어 그들은 남이었다. 베타인 자신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에 있는.

    의사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고결을 위로하기 위해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이건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한 잘못된 위로였다.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서툰 위로는 오히려 독이 됐다.

    그렇지만 고결은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 진료실을 박차고 나가지도 않았다. 그저 손바닥이 아릴 정도로 힘껏 쥐고 있던 주먹을 펴 애꿎은 얼굴만 벅벅 문질러 댔다. 그 거친 손길에 양 볼이 벌겋게 물들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은 붉다 못해 아예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우성도 아니고 열성이신 데다가 요즘엔 억제제도 상당히 잘 나오니까 병원에서 처방해 드린 약만 꾸준히 챙겨 드신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크게 상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의사가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아까 전의 말과 달리, 이번 건 그나마 좀 위로가 됐다. 어쨌거나 열성 오메가로 발현이 됐고, 그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큰 문제가 없을 거란 의사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뿐이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네.”

    고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의사가 기다렸다는 듯 억제제 복용법에 관해 설명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검사 결과를 보니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지병은 딱히 없으시네요? 약물 알레르기도 없으시고요. 억제제는 식전, 식후 상관없이 드셔도 됩니다. 그런데 위가 약하신 분들은 간혹 가다 속 쓰림을 호소하기도 해서요. 그럴 땐 식후 30분 후에 드세요. 아, 그리고 처음엔 억제제를 가능한 시간에 맞춰서 규칙적으로 드시는 게 좋습니다. 왜냐면….”

    마우스를 쥔 의사가 검지로 왼쪽 버튼을 클릭했다. 달칵달칵. 의사가 무언가를 누를 때마다 모니터에는 영어 단어 같은 것들이 채워졌다. 분명 제 몸의 상태와 관련됐을 텐데 고결은 그걸 단 하나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고결은 무언가가 자꾸만 늘어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거두지 않았다. 모니터 말고는 마땅히 시선 둘 곳이 없어서 그랬다.

    “이제 그만 나가 보셔도 됩니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설명을 이어나가던 의사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결을 바라보았다. 의사의 말을 듣는 내내 기계적으로 네, 라는 대답만 반복하던 고결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이 답답한 공간에서 해방이었다.

    “감사합니다.”

    진료실을 나서기 전, 고결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의식적으로 인사를 할 정신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으나 몸에 밴 습관이 그걸 가능하게끔 만들었다. 의사 역시 가벼운 묵례로 결의 인사를 받아줬다.

    “최이숙 님. 2번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고결이 복도로 나가자 간호사가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환자의 이름을 불렀다. 한 중년 여성이 고결을 지나쳐 2번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고결은 제자리에 서서 그새 굳게 닫힌 2번 진료실의 문을 멀거니 응시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머릿속에 희뿌연 안개가 끼기라도 한 것처럼 전부 다 흐릿하기만 했다. 마치 쉬는 날 낮잠을 자다 악몽에 시달려 오히려 더 피곤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분 나쁜 탈력감이 온몸을 감쌌다.

    하아. 고결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속이 너무 답답했다. 이 크고 넓은 병원이 지금 고결한테는 창 하나 없는, 꽉 막힌 독방처럼 다가왔다.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후우.”

    건물 밖으로 나간 고결은 가장 먼저 크게 심호흡부터 했다. 매연뿐인 도시의 매캐한 공기가 건강에 좋을 리 없었다. 다만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처럼 묵직한 명치를 뚫어 주는 것에는 미약하게나마 효과가 있었다. 폐부 가득 찬 숨을 내뱉으며 고결이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외증조모였던가.”

    돌아가신 외증조모가 오메가셨다. 어머니한테 전해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어쨌거나 고결은 그 피를 일정 부분 이어받은 존재였다. 그러니 돌아가신 외증조모와 똑같은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고결은 애써 그런 식으로 생각 회로를 돌렸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는 되지 않았다. 그 형질이 왜 하필 몇 대 걸러서 자신에게, 그것도 25살이란 늦은 나이에 발현된 건지는.

    고결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를 꾹 눌러 참고 있는 위태로운 얼굴 위로 오후의 태양이 마치 쏟아지듯 강렬하게 내리쬈다. 곧이어 고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두 눈이 욱신거리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쨍하게 쏟아지는 햇빛의 눈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심란했다. 하지만 그런 고결의 마음과는 별개로 세상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하늘은 여전히 새파랬고, 가로수는 푸르렀으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평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병원과는 연이 없던 고결의 손에 두툼한 약 봉투가 쥐어져 있다는 것. 단지 그거 하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사소한 변화였다. 그러나 당사자인 고결한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고작 약 하나지만, 고결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음을 의미했으니까.

    고결은 무의식중에 약 봉투를 세게 움켜쥐었다. 바스락하는 소리와 함께 손안에서 약 봉투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 생생한 소리에 살짝 흐려졌던 현실감이 무서우리만큼 선명해졌다.

    ‘아, 맞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생각지도 않은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느라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체됐다. 촬영장을 떠난 지도 벌써 2시간이 가까이 됐으니 우현한테 연락이 와 있을지도 몰랐다.

    고결은 점퍼 주머니에다 약 봉투를 대충 욱여넣은 뒤 다급하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걱정과는 다르게 다행히도 우현한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아직 촬영이 다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은 여유를 부려도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카페 같은 곳에 가서 마냥 시간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고결은 일단 무작정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우선은 걸으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조금이라도 정리해 볼 요량이었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심란함에 고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 인류의 20%에 해당하는 알파와 오메가는 어떻게 보면 선택받은 인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알파일 때나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알파. 그건 일종의 권좌였다. 알파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자신이 유전자상 가장 우월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알파들은 정‧재계 법계, 학계, 언론계, 연예계, 스포츠계 등 나라의 핵심 분야 전반에 골고루 손을 뻗고 있었다. 분명 수적으로 우세한 건 베타인 데도 불구하고 정작 모든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알파들이었다.

    그에 대해 알파들은 유전적 능력치의 차이 등을 들먹이며 자신들 나름대로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건 허울 좋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그것이 지독한 피의 세습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알파들은 자신이 쌓아 온 부와 권력을 오직 알파 자손한테만 물려줬다. 그것도 오랜 시간, 꾸준하게. 알파라는 소수 공동체를 견고하게 만들어 베타와 오메가를 자신들의 발아래에 두기 위함이었다. 알파는 알파를 낳고, 돈은 또 다른 돈을 불렀으며, 권력은 더 큰 권력으로 자라났다.

    ‘…회사는 어쩌지.’

    하지만 오메가는 그와 정반대였다. 대놓고 차별하지 않을 뿐, 사람들은 은근히 오메가를 배척하고 불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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