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고결이 몸살감기인지 뭔지 모를 병에 시달린 지도 벌써 열흘이 되어 갔다. 지난 열흘간 고결은 아픈 티를 내지 않고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나 우현의 눈을 속이기란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하긴. 24시간을 붙어 있는 데다가 애초 서로에 관해서 모르는 게 없는 사이니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고결은 괜찮다고, 병원에 갈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신경 쓰지 마시라고 말했지만 우현은 단호했다.
“우리 병원에 결이 네 이름으로 예약해 놨어. 너 오면 바로 봐준다고 하시니까 지금 출발해.”
우리 병원이라면 ‘CH그룹’ 산하의 ‘CH병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저 모르게 이미 병원까지 예약해 놨다니. 고결은 당황스러움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결한테 차우현은 대뜸 자신의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결제는 이걸로 하라는 말과 함께.
오늘은 우현의 드라마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사전제작 드라마라 쪽대본에 쫓기는 신세는 아니라지만 어쨌거나 마지막 촬영 날은 평소보다 더 정신이 없고 바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 매니저라는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위해 아티스트를 현장에 두고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가 어떻게 형만 현장에 두고 가요, 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고결은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놓지 못했다. 거절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겠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우현의 얼굴이며 눈빛이 진지하다 못해 무겁기까지 한 탓이었다.
본래 고결한테 있어 차우현이란 뭘 해도 어설프고, 허술하고, 야무지지 못한. 그래서 자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줘야 하는 존재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보고 있으면 불안해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기고야 마는.
그런데 가끔 가다 우현은 이렇게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굴곤 했다. 우현한테는 아무렇지 않게 상대방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힘이나 분위기라는 단순한 표현은 한참 부족한, 사람 하나쯤 아주 쉽게 짓누를 수 있을 듯 엄청난 무게감 같은 게. 우현이 이렇게 나올 때마다 고결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넘어갔다. 이런 모습을 한 우현한테는 영 면역력이 없어서 효과가 배로 뛰어났다.
“네. 그럼 다녀올게요.”
고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저렇게 말하는 것뿐이었다. 형 혼자만 현장에 두고 못 가요, 가 아니라.
***
“오늘 검사하길 정말 잘하셨네요. 나이가 좀 있으셔서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역시 오메가로 발현하신 게 맞았습니다. 열성 인자 81%, 우성 인자 19%로 열성 오메가시네요.”
고결이 넋 나간 얼굴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의사를 응시했다. 뭔가를 말하고 있는 건지 의사의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고결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몸의 감각들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처음 진료를 볼 때 미묘한 발열이랑 근육통 같은 게 며칠째 계속 지속됐다는 고결의 말에 의사는 뜬금없는 걸 물어 왔다. ‘기침이랑 콧물 이런 증상은 전혀 없으셨다는 거죠? 그럼 혹시 아랫배 쪽이 좀 뻐근하다든가 뭔가 뭉치는 느낌 같은 게 들진 않으셨어요?’ 하고.
예상치 못한 질문이 당황스러웠으나 고결은 차분히 자신의 몸 상태를 되돌아봤다. 얘기를 듣고 나니까 그제야 아랫배에서 종종 느껴지곤 하던 기분 나쁜 통증이 떠올랐다. 욱신거리고 어딘가 저릿저릿한 느낌. 그냥 뭘 잘못 먹어서 그런 거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긴 터라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런 증상을 앓았다는 것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주는 아닌데 어쩌다 가끔 짧게요. 고결의 대답을 들은 의사는 대뜸 피 검사를 권했다. 그때는 엉덩이 주사나 한 대 놔 주지 뭘 또 검사까지 하자는 걸까 싶었다. 설마하니 그게 이런 결과가 되어 돌아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열성 오메가’
고결은 의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믿지 못할 단어를 느릿하게 곱씹고 또 곱씹었다.
‘…내가 열성 오메가라고?’
‘오메가’, 그건 고결의 인생에 단 한 번도 끼어든 적이 없는, 감히 끼어들 거라 상상조차 못 해 본 생소한 단어였다.
알파와 오메가란 특이한 성별로 구분되는 존재는 인류의 약 20%뿐이었다. 거기다 대부분의 알파와 오메가는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인 13살을 전후로 제2의 성이 발현됐다. 그러나 고결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다섯이었다. 열다섯도 아닌 스물다섯. 제2의 성이 발현하기엔 너무 늦다 못해 뜬금없기까지 한 나이였다.
“보다 더 확실한 결과를 원하신다면 피 외에도 머리카락과 타액. 입안 상피세포 등으로 조금 더 세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정밀 검사도 있긴 합니다.”
“…정밀 검사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고결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빛이 감돌았다. 아닌 게 아니라 깜깜하던 머릿속에 벼락이라도 내리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피 검사로 나오는 수치는 전부 뭉뚱그려서 낸 기본 통계에 가까운 거라서요. 정밀 검사를 하시면 지금 고결 님 몸에 있는 오메가 인자 중 열성과 우성의 비율이 정확히 몇 프로인지 소수점 자리까지 아주 정확하게 나옵니다. 또 추후 아이를 낳게 되면 알파와 오메가 중 어느 쪽을 출산할 확률이 더 높은지 등도 아실 수 있고요. 그래서 많은 알파, 오메가분들이 결혼을 앞두고 배우자와 함께 검사를 받으시는 편입니다.”
의사가 파일 안에 꽂힌 종이 몇 장을 이리저리 넘겨 보았다. 고결은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은 채 힘주어 씹었다. 엉망진창으로 짓이겨진 아랫입술에서 열감과 함께 아릿한 통증이 피어올랐다. 의사의 손에서 낱장의 종이들이 팔락일 때마다 신경이 날카롭게 긁혔다. 피가 마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고결 님은 그런 경우가 아닌 데다가 이미 열성 오메가라는 게 피 검사를 통해 나왔는데 굳이 그 검사를 따로 받으실 필요가 있으실지….”
말끝을 흐린 의사가 보고 있던 파일을 덮어 책상 위로 슬며시 내려놓았다. 좋게 에둘러 말하긴 했으나 결국 의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거였다. 정밀 검사 받아 봤자 괜한 시간 낭비밖에 되지 않으니 그만둬라. 고결이 모난 마음에 일부러 삐뚤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런 의미로 한 말일 게 분명했다.
“그래도 지금 얘기하신 정밀 검사가 피 검사보다는 더 정확한 거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의사의 의견일 뿐이었다. 고결은 정밀 검사 쪽의 정확도가 조금이라도 높다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할 의지가 있었다.
“아니요. 단지 정밀 검사 쪽이 볼 수 있는 부분이 조금 더 정교하고 세밀한 거죠. 정확도는 정밀 검사나 피 검사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고결의 의지를 마치 얇은 나뭇가지 꺾듯 단숨에 꺾어 버렸다.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원망스러우리만큼 단호한 대답이었다. 순간 저 멀리서 무언가가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그건 고결이 품고 있던 마지막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다.
정확도가 똑같다는 건, 결국 검사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 따윈 전혀 없단 소리였다. 열성과 우성의 % 정도는 바뀔 수 있어도 당신이 오메가라는 사실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다, 그 뜻이었다.
그 잔인한 사실을 되새기는 순간 멀미와도 같은 감각이 고결을 감쌌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고결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은 분명 지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래된 낡은 배를 타고서 커다란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위태롭게 떠 있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심지어는 아찔한 현기증마저 일었다.
고결의 손가락이 차츰차츰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어찌나 힘을 주고 있는지 마른 손등 위로 굵은 힘줄과 단단한 뼈가 툭툭 불거졌다. 고결은 그 상태로 최대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금방이라도 휘발될 것 같은 이성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함이었다.
“…제가 올해로 스물다섯인데. 그리고 지난 25년을 베타로 알고 살아왔는데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요? 예전에 학교에서 젠더 검사 받았을 땐 베타 판정 받았거든요. 분명히요. 제2차 성이 발현된다는 13살 때도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고요.”
고결은 흥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목소리의 끝이 잘게 떨리는 것까진 어쩌지 못했다.
본래 고결은 흔히들 말하는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무슨 일에도 크게 동요하는 법 없이 대체로 차분했으며 덤덤했다. 가능하면 복잡하지 않게.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으로. 그게 인생을 살아가는 고결의 기본 자세였다.
원래부터 타고난 성격이 그런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아프시고 그로 인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게 되면서부터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을 뿐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버티기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런 고결이라고 해도 25년간 알아 온 자신의 성별이 하루아침에 변했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물론 흔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필리핀에 사는 60대 노인이 우성 알파로 발현해서 기사가 났었죠. 한국에서도 40대 남성이 뒤늦게 알파로 발현됐단 사실이 알려져 뉴스에 나오기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