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65화 (65/66)

65.

기상청 예보대로 27도까지 오른 기온은 충분히 덥다는 말이 나오게 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햇볕을 피해 높은 건물이 만들어주고 있는 그늘 안으로 들어서자 다행히 불쾌할 정도의 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아직까지는 장마가 오지 않은 터라 계속 대기가 건조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덕분일 터였다. 그래도 역시 조금 전까지 있었던, 냉방이 쌩쌩하게 돌아가는 웨딩홀 안과 비교하면 확실히 더운 느낌을 받고 있는 수영은 일단 입고 있던 수트 재킷을 벗어 팔에 걸쳤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인도와 조금 떨어진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윤재가 마침 의자 대용으로 앉을 만한 길쭉한 스텐 볼라드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조금 뒤따라서 걷던 수영은 볼라드 한켠에 엉덩이를 내려놓는 윤재의 모습을 먼저 눈으로 확인한 뒤 그와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서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혜리씨 오늘 정말 예뻤지요.”

윤재의 말을 듣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긴 수영이 동조하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영호씨 말을 들으니 둘이서 꽤 신중하게 드레스를 고른 모양이던데 오늘 보니 잘 어울렸던 것 같아.”

“두 분이 손 꼭 잡고 있는 모습이 많이 행복해 보였어요. 그동안 저희 가게에는 두 분이 계속 따로 오셔서 결혼식인 오늘 처음으로 두 분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제대로 본 것 같아요.”

“영호씨는 나랑 같은 1팀이고 혜리씨는 2팀이니까. 1,2팀이 일부러 미리 일정을 맞추지 않으면 회식 날짜나 장소는 거의 갈려.”

“네... 그렇겠네요.”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한 윤재가 문득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자판기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키자 그런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수영이 곧바로 들고 있던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눌러 꺼 담고서 다리를 움직였다.

“그냥 있어. 내가 뽑아 올게. 뭐 마시고 싶어?”

“스포츠 음료로요.”

“알았어.”

대답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보폭을 넓혀 멀어져가는 수영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윤재가 아까부터 시작되어 점차 크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소리를 듣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재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건 바로 옆 웨딩홀 건물에서 나온 듯한 단정하고 화사한 옷차림을 한 젊은 남녀들로 이뤄진 무리였다. 잠시 후 문득 말을 멈추고 바로 옆 길쭉한 볼라드 한켠에 혼자서 덩그러니 앉아 있는 윤재를 일제히 한 번씩 쳐다본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다시 자신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오늘 본 신랑신부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루는 그들의 대화는 그리고 잠시 후 또 한 차례 뚝 멈췄다. 이번에 그들을 침묵하게 만든 건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좁은 길 위를 점령한 그들 무리의 중심을 뚫고 나온 수영의 존재였다.

등에 달라붙는 시선을 무시하고 마저 걸음을 옮겨 윤재의 곁으로 다가온 수영이 들고 있던 캔 중 하나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인사와 함께 받아든 캔을 딴 윤재는 일단 천천히 몇 모금을 목안으로 흘러 넘겼다. 예식장 안에 있던 중간부터 갈증이 느껴졌던 탓인지 말라 있던 목으로 몇 모금의 시원한 음료가 들어가자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앉는 수영의 모습을 윤재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낮은 높이의 볼라드에 걸터앉은 탓에 가뜩이나 긴 수영의 다리가 먼 곳까지 길게 뻗어졌다.

한눈에 봐도 고가의 브랜드처럼 보이는 수영의 구두를 잠시 가만히 내려다보던 윤재가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다시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성호가 향수 같은 거에 관심 두고 있을 줄은 몰랐어.”

문득 들려온 성호의 이름에 자연스레 윤재의 얼굴 위로 미소가 드리워졌다. 때로는 다소 가볍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워낙에 활발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성호는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여름엔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라서 신경이 좀 쓰이는 모양이에요.”

“그럼 향수보다는 데오드란트가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조금 있다가 백화점에 가면 그것도 한 번 보자고 하려고요.”

“그런 쇼핑은 혼자 해도 충분할 텐데 왜 굳이 네가 같이 가주는 거야?”

“성호가 제가 옆에서 직접 맡아보고 같이 골라줬으면 하는 것 같아서요.”

윤재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잠시 텀을 두고 말했다.

“그러면 나중에 성호한테 무슨 향수 샀냐고 꼭 물어봐야겠네.”

“네?”

“네가 골라준 향이면 네가 좋아하는 향일 거 아냐.”

곧바로 이어진 수영의 말을 듣고 뒤늦게 말의 의미를 파악한 윤재가 잠시 동안 수영을 향하던 시선을 바닥으로 옮겼다. 기분 탓인지 순식간에 주변 온도가 조금 오른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슬쩍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윤재가 캔을 감싸고 있는 손끝에 살며시 힘을 실었다. 마치 주변을 배회하는 듯한 특별한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귀한 십 여분의 시간이 훌쩍 흘러가 있었다.

친인척이 모이는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있는 수영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은 윤재가 조심스레 침묵을 깨고서 입을 열었다.

“그 날 이후로 계속 생각했어요. 우리들의 관계에 대해서.”

지금 윤재의 입에서 나온 것이 조금 전까지 이어진 대화의 내용과 달리 무척이나 무겁고 진지한 화제라는 것을 인식한 수영은 그때까지 얼굴 위에 드리우고 있던 엷은 웃음기를 순식간에 지워냈다. 윤재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먼저 자신에게 대화를 제안해왔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있었던 그는 잠시 후 이어져 들려온 윤재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들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고 또 각자 몸담고 있는 삶 자체도 많이 다르니까요.”

“.......”

“당신을 보면 당신이 그간 집에서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고 자라왔는지 알 것 같아요. 어디 가도 빠질 것 없는 좋은 스펙에 똑 부러지는 성격에... 아마 부모님은 그런 자랑스러운 아들에 대한 기대가 크시겠죠. 언젠가는 정말 괜찮은 조건을 가진 상대와 결혼하길 간절히 바라고 계실 거고요. 그리고 그런 부모님의 바람은 언제든 이뤄질 수 있는 일일 거예요.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결코 달갑지 않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수영은 침묵을 지켰다. 당장이라도 중간에 말을 가르고 나서고 싶은 충동을 지금 그가 억지로 누르고 있는 건 여기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현재 윤재가 갖고 있는 생각을 분명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집처럼 대단하지는 않아도 평범한 저희 어머니 역시 하나뿐인 아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기대를 하고 계세요. 언젠가 아들이 참한 색시 얻어서 행복하게 살다가 예쁜 손주 안겨주길 바라고 계시죠. 보통의 부모님들이라면 모두가 비슷하게 가지고 계실 소박한 꿈을요.”

거기까지 말하고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전 그런 어머니의 바람을 이뤄드리고 싶고, 저 역시 모두의 앞에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요. 그 정도의 꿈은 저도 가질 수 있는 게 아닌가요?”

마치 자신을 향한 책망과 같은 윤재의 질문에 수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 들려온 말은 모두가 지극히도 옳아서 어느 한 군데 반론을 펼칠 수가 없었지만 사실이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도 없는 것이 지금 처해있는 수영의 입장이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나오는 답은 늘 같아요. 애초에 우리는 속해 있는 세계 자체가 너무 많이 달라서 제가 바라는 평범한 삶을 살기에 당신이란 사람은 맞지 않아요.”

거기까지 말하던 윤재가 한참 만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정리해온 생각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일까 처음 우려했던 것과 달리 말을 잇지 못할 만큼 크게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떨리기는커녕 오히려 담담하게마저 들리는 목소리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였다.

“당신이 그 날 병원에서 말했었죠. 만약 당신이 사고로 죽게 된다면 그때... 제가 조금은 당신을 위해 울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요.”

자신의 뺨에 닿는 수영의 시선을 아플 정도로 강하게 느끼면서도 윤재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도 저는 조금이 아니라... 많이 울었을 거예요.”

예상치 못한 윤재의 말에 수영의 숨이 일순 멎었다.

잠시 긴장을 놓으면 곧바로 흐트러질 것 같은 마음을 애써 다잡은 윤재가 한참 만에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려 줄곧 자신을 향하고 있던 수영의 시선을 마주했다. 곧바로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흐트러짐 없는 선명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앞으로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 생각이 모두 하나로 깨끗이 정리 된 것도 아니에요. 아니지만...”

“.......”

“그래도 저는... 한 번 더 당신을 믿어보고 싶어요. 당신의 마음을.”

윤재의 말이 끝나고 몇 초가 지나도록 수영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가 더 흐른 뒤에야 지금 들려온 윤재의 대답에 담긴 의미를 간신히 현실로서 인식한 그는 그럼에도 여전히 그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가슴이 꽉 눌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감정이 격해지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영은 지금 이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생생히 경험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가슴 깊은 곳에 상처를 입었을 윤재가 그간 끈질기게 이어진 자신의 구애를 받으며 혼자서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을지는 직접 그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미 한 번 자신을 배신하고 상처 줬던 사람을 또다시 믿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수영은 알고 있었다. 몇 개월 전의 그였다면 그런 마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커녕 애초에 깊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터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수영은 더더욱 윤재의 대답을 마냥 웃으며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다시 한 번 믿어보고 싶다는 말.

당장 듣기엔 간단한 그 한 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간 윤재가 홀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상상하자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는 상황이 온다면 그저 무작정 기쁠 것만 같았던 수영은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죄책감에 당장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수영은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김윤재라는 남자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결코 쉽지 않은 답을 내리기 위해 그가 어떤 용기를 냈는지 알고 있는 수영은 당장 그 어떤 말로도 정확히 표현이 되지 않는 감정이 순식간에 가슴 안에 차오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태어나 처음으로 간절히 사랑하게 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우는 거예요?”

다정한 목소리로 들려온 윤재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다 살짝 말끝을 흐린 수영이 이내 피식 희미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 어떡하지... 진짜 눈물 나올 것 같아.”

아마도 자신의 대답을 듣고 난 수영이 곧바로 웃는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던 윤재는 그런 예상과 달리 북받치는 감정에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수영의 모습을 보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남들 앞에서는 오만하게 목을 세우는 이 남자가 이렇게나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 윤재에겐 많이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지금 자신의 눈동자에 담겨져 들어오는 이 낯선 모습이 결코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끝내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감정의 여운에 잠겨 있는 듯한 수영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윤재가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조심스레 옆의 어깨로 손을 뻗으려던 찰나 갑자기 몸을 돌려온 수영의 품안으로 순식간에 끌려들어갔다. 강한 힘이 실린 수영의 긴 팔이 윤재의 야윈 등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당황한 동시에 곧바로 주변이 훤히 뚫린 장소임을 떠올리고 반사적으로 수영의 가슴을 밀어내려던 윤재가 그 순간 문득 귓가에 바짝 붙여진 입술에서 나온 낮은 목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멈췄다.

“괜찮아. 지금 주변에 아무도 없어.”

달래는 듯한 수영의 말을 들은 윤재가 팔에 실었던 힘을 서서히 빼내자 이번에는 그의 등을 감싸 안은 수영의 팔에 한층 더 힘이 실렸다.

“고마워.”

“.......”

“네가 이 답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지, 또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지 알고 있어.”

거기까지 말하고 한층 더 팔에 힘을 실어 윤재를 꽉 끌어안은 수영이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채로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더 날 믿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힘들게 만들어서.”

“.......”

“지금...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조금 방황하듯이 서툴게 지금의 기분을 전하려 애쓰던 수영이 이후 잠시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이어 나직하게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잘할게, 내가.”

윤재는 목소리를 내어 대답하지 않았지만 굳이 말로 듣지 않더라도 지금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그의 체온 자체가 대답이라는 것을 수영은 알고 있었다.

윤재가 자신의 사람이 되어주기로 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생겨난 벅찬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커져 갔다. 그렇게나 간절히 바라왔던 대답을 얻은 지금 수영의 가슴은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의 결혼식이 끝났는지 예식장 방향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한 무리 사람을 발견한 수영은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자신의 품에서 윤재를 해방시켜주었다.

“이 상태로는 모임이고 뭐고 못 가겠어. 어차피 가봤자 혼자 미친놈처럼 실실거리고 있을 텐데. 아예 그냥 지금 전화해서 캔슬해 버릴까...”

재킷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는 수영의 옆에서 윤재가 말했다.

“이미 정해진 약속이니까 참석하세요. 그것도 친척어른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중요한 약속인데.”

“조금은 달콤한 여운에 취해 있게 해주면 안 돼?”

“당신이 취소한다고 해도 전 약속대로 성호랑 같이 백화점에 갈 거예요.”

윤재의 냉정한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수영이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서 한참 만에 긴 몸을 일으켰다. 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사이에도 꾸준히 흐른 시간은 이제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조금 서둘러야 할 지점에까지 와 있었다. 죽을 만큼 아쉽지만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은 아니라고 수영은 냉정히 생각을 고쳤다.

성호에게 미리 말해둔 시간을 5분쯤 지나 웨딩홀 1층 로비로 다시 돌아온 윤재가 여전히 북적거리고 있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뒤 곁에 선 수영에게 말했다.

“지하주차장으로 가야 하죠? 그럼 빨리 가보세요. 전 성호 만나러 위로 올라갈게요.”

“모처럼 만에 백화점에 가는 건데 이것저것 둘러보기도 하고 재밌게 놀아. 그래도 저녁에 일할 거 생각해서 너무 체력 쓰지는 말고.”

“네.”

짧게 대답하고 지금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성호를 떠올리며 몸을 돌린 윤재가 마침 그 근처를 지나던 누군가와 세게 어깨를 부딪쳐 뒤로 밀려났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그의 몸을 뒤에서 받쳐 준 것은 반사적으로 뻗어져나간 수영의 손이었다.

“아, 씨. 제대로 앞 좀 보고 다니지.”

짜증스럽다는 듯이 윤재를 흘겨보고 그대로 지나치려던 남자가 갑자기 불쑥 뻗어져 나온 손에 팔을 붙잡혀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레 피해자 행세를 하며 지나치려는 남자를 붙잡은 것은 윤재에게서 떨어져 나온 수영이었다.

“이쪽 방향으로 계속 걸어오고 있던 게 누군데 누구한테 신경질이야?”

날이 선 수영의 목소리를 들은 주변의 사람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그가 서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왔다.

누군가한테 팔을 붙잡혔다는 사실에 욱해서 고개를 돌린 남자는 눈에 띄게 큰 키에 어딘가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하고 있는 수영의 모습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욕부터 쏟아내려던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당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심상치 않는 분위기로 보건대 지금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자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그저 멀거니 키만 큰 쭉정이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순순히 사과를 하는 것도 마치 꼬리를 내리는 것만 같아 내키지 않은 남자는 위에서 내려오는 수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그쪽 일행도 잘한 건 없는데 그냥 넘어가지?”

사과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크게 일을 키워 이득을 볼 것도 없겠다고 내심 판단을 내린 남자가 슬쩍 쌍방과실 쪽으로 이야기를 몰고 가려고 하자 그런 상대의 뻔한 속셈을 곧바로 읽어낸 수영이 서늘하게 웃었다.

“내 일행이 무슨 잘못을 했는데? 멀리서 걸어오던 댁이 계속 등을 보이고 서있던 내 일행을 보고도 안 피하고 정면으로 돌진해서 부딪친 건데 이건 누가 봐도 당신 잘못 아닌가? 부딪칠 당시 내 일행은 등을 돌리기만 했지 아직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어. 앞에 있는 사람을 뻔히 보고도 피하지 않은 쪽이랑 몸을 돌리자마자 부딪친 쪽, 둘 중 어느 쪽이 잘못한 건지 지금 당장 여기 있는 사람들 모아놓고 설문조사라도 할까?”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는 수영의 태도에 그와 마주한 남자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적당히 쌍방과실로 몰고 가 같이 사과하는 걸로 일을 무마하려고 했던 남자는 일목요연한 수영의 말이 끝난 뒤로 자신에게 향해지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고서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인상이라도 만만하면 밖으로 불러내서 한판 붙어보겠지만, 얼핏 수트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나 제대로 날이 서있는 눈빛으로 보건대 몸싸움으로 간다고 해도 자신이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정도의 당당한 태도는 실제로 이어질지 모를 몸싸움에도 분명한 자신감이 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여차 하면 밖으로 나가도 상관없다는 듯 지극히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는 눈앞의 상대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던 남자는 결국 한동안 이어지던 고민을 접고서 나지막하게 사과의 말을 내놓았다.

“미안합니다. 먼저 본 내가 제대로 못 피한 게 잘못인 것 같네요.”

자신을 보는 둥 마는 둥 사과하는 남자를 향해 ‘괜찮습니다.’라고 어떨 결에 대답한 윤재는 대강 상황이 일단락되자 급하게 등을 돌려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옆에 선 수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사이 갑작스런 소란에 잠시 발을 멈추고 이쪽에 신경을 고정하고 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예상보다 훨씬 싱겁게 상황이 종료된 뒤로 다시 각자의 길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이 정도는 그냥 지나쳐도 됐잖아요. 시간도 없는데.”

윤재의 말을 들은 수영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나한테 시비건 거면 그냥 귀찮아서 넘겼겠지만 너한테 지랄하는 꼴은 못 보겠어서.”

“.......”

“너도 앞으로는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겪으면 무작정 참으려고 하지 마. 네가 뭐가 부족해서 이런 거지같은 취급을 당해야 돼?”

명백한 불쾌감이 담겨 있는 수영의 말을 듣고 잠시 그대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문득 뒤늦게 성호의 존재를 떠올리고서 곧바로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작은 소동이 있던 사이 어느새 또 십여 분여가 훌쩍 흘러가 있었다.

자신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그보다 더 중대한 약속을 앞에 둔 수영의 입장이 걱정된 윤재가 조금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46분이에요. 지금부터 출발하면 서둘러도 늦겠어요. 주차장에 내려가도 차까지 가는 시간도 있을 텐데 어서 빨리 가보세요.”

윤재의 말을 듣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수영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계속 윤재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지금은 각자에게 약속이 있으니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옳을 터였다.

“그럼 갈게. 성호랑 재밌게 놀아. 저녁때는 장사 열심히 하고.”

“네.”

“전화할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하는 수영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윤재는 이내 자신도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20분이 넘도록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성호를 생각하면 다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한편으로 윤재는 이제 간신히 어깨에 지고 있던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은 것만 같아 편안해진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아까 전 자신의 고백을 듣고서 수영이 보였던 뜻밖의 반응이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마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던 수영. 스스로가 농담처럼 건넸던 말처럼 잠시나마 정말로 눈물을 보일 것처럼 변했었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윤재의 눈에는 선했다.

몇 번이나 고맙다고 그는 말했다. 아플 정도로 힘주어 자신을 꼭 끌어안고서.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대단한 사람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남자가 마치 첫사랑에 빠진 순진한 소년처럼 설렘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그런 수영의 모습을 보며 가슴 안에서 따스한 무언가가 서서히 차오르는 걸 자각한 순간, 윤재는 안도했다. 길고 길었던 고민 끝에 힘겹게 내린 자신의 답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고.

아직까지도 모든 생각들이 명확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당장 처해져 있는 주변의 환경이나 앞으로의 나날 등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부분은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가슴 안에 남아 있던 감정의 잔재들 역시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윤재는 이제 더 이상은 무작정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우수영이라는 남자에게서도, 자신 스스로에게서도. 어쩌면 또다시 상처를 입게 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 명확하지 않은 미래가 두려워 줄곧 움츠린 채 살아가기보다는 당당하게 지금 현재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었다. 그것이 수많은 밤을 지새워 고민한 끝에 윤재가 내린 단 하나의 명확한 답이었다.

“어, 사장님!”

조금 서둘러 계단을 오르던 윤재가 근처에서 들려온 성호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다 못해 연락을 하려던 차였는지 자신의 모습을 눈에 들이자마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재킷 안으로 집어넣는 성호의 모습을 확인한 그가 잠시 멈춰 있던 다리를 다시 움직여 남은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이 정도야 뭐... 그보다 우대리님과 데이트는 잘 하셨어요?”

장난기 섞인 성호의 질문을 받고 순간적으로 움찔한 윤재가 ‘응. 뭐... 얘기는 대충 끝났어.’라고 적당히 얼버무리며 상황을 넘겼다.

“그럼 갈까? 향수 사러.”

“네. 가죠. 아, 그런데 혹시 아까 우대리님이 말씀해주셨던 향수 이름 기억나세요? 지금 다시 떠올려 보려니까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제가 기억력이 좀 나빠서...”

성호의 질문을 받은 윤재의 머릿속에는 향수의 이름이 아닌, 향 그 자체가 되살아났다. 불과 얼마 전 수영의 긴 팔에 끌어 안겨있었던 당시 그의 품에서 맡았던 시원하고 매력적인 향이.

“이름은 나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매장에 가서 맡아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아, 그래요? 저도 향이 언뜻 기억은 나는데... 아무튼 일단 가보죠.”

“그래.”

모처럼 만에 쇼핑을 할 생각으로 기분이 좋아진 성호가 먼저 경쾌한 걸음을 떼자 들뜬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엷은 미소를 머금은 윤재도 곧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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