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64화 (64/66)

64.

맑지만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본격적인 여름으로 접어들며 급격히 뜨거워진 햇살이 하루하루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식적인 장소에 가는 사람답게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긴 팔 셔츠에 재킷까지 갖춰 입고 온 성호는 다행히 냉방이 쌩쌩하게 돌아가고 있는 넓은 예식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일단 주변부터 빠르게 둘러보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느 홀에서 예식이 치러지고 있는지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계단을 발견하고서 곧바로 그리로 향한 성호는 주변 분위기에 휩쓸린 탓인지 괜히 자신까지 긴장되는 기분을 느끼며 단숨에 3층으로 올라갔다.

곱게 차려 입으신 부모님의 곁에 서서 오가는 하객을 맞이하던 신랑-영호가 아직까지 한산한 이른 시간에 도착한 성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와줘서 고마워. 성호씨.”

“결혼 축하드립니다.”

“여기서 성호씨 얼굴 보니까 참 반갑네. 최근엔 일이 바빠서 <민들레>에 통 가보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일부러 여기까지 와주고 정말 고마워.”

“아뇨. 전 신랑보다는 신부 측 지인으로 온 거라 인사는 나중에 신부님께 받을 게요.”

성호의 농담에 하하하 크게 소리를 내며 웃은 영호가 곧바로 생각이 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근데 난 당연히 두 사람이 같이 만나서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따로 왔네?”

“네?”

무슨 얘긴가 싶어 살짝 눈을 크게 뜬 성호가 잠시 후 영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의자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 눈에 익었다.

“사장님은 먼저 도착하셔서 좀 전에 인사 나눴어. 성호씨랑 같이 오지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오늘은 각자 움직이기로 되어 있었다고 하시던데.”

“아... 네. 실은 사장님은 오늘 지방에 내려가기로 되어 있으셔서 일단 저 혼자라도 가겠다고 말씀을 드려놨었거든요.”

“그래? 이런... 혹시 우리 결혼식 때문에 중요한 일 캔슬하거나 그런 건 아니신지 모르겠네.”

“그건 아닐 거예요. 다른 건 몰라도 일에 관해선 철저하신 분이니까요. 저, 그럼 전 사장님께 가볼게요. 아참. 자, 여기 축의금이요.”

“고마워. 성호씨.”

결혼식을 앞두고 싱글벙글 입이 귀에 걸려 있는 신랑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걸음을 옮긴 성호가 반대쪽 벽을 향해 앉아 있는 윤재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홀로 앉아 있는 윤재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가끔 곁을 지나는 사람들이 한 번씩 그의 얼굴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사장님.”

성호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윤재가 반가운 얼굴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왔네.”

“오늘 못 올 거라고 하셨잖아요?”

“응. 그랬는데 만나기로 한 분이 오늘 급한 볼일이 생겼다고 아침에 연락을 해 오셔서 약속이 내일로 미뤄졌어.”

“오늘 아침에요? 이야... 이거 뭐, 오늘 결혼식에 참석하라는 신의 계시인가요?”

“신의 계시까지야... 그래도 사실 잘 되긴 했지. 직접 청첩장까지 받았는데 가능하면 참석하고 싶었거든.”

“그쵸. 만약 사장님 오늘 안 오셨으면 혜리 누님은 좀 서운해 하셨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사장님 옆에 딸려가는 덤 같은 존재니까요.”

성호의 농담 섞인 대꾸에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슬쩍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예식까지는 아직 꽤 시간이 남아 있으니 못해도 여기서 10여 분은 더 지나야 하객들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날 듯 했다. 어느 약속 장소를 가든 반드시 시간의 여유를 두고 출발하는 습관으로 인해 오늘도 이른 시간에 예식장에 도착한 윤재였다. 혼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는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분명한 친분을 가지고 삼삼오오 뭉치는 하객들 틈에서 혼자만이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떠오른 생각은 아무래도 그의 마음을 조금은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행이라고 할 수 있는 성호와 생각보다 이르게 만나게 된 지금 윤재의 얼굴은 좀 전보다는 한층 편안한 기색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나저나 사장님 오늘 멋있으신데요?”

성호의 칭찬을 받은 윤재가 슬쩍 고개를 숙여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여름용의 시원한 재질로 만들어진 재킷과 하얀 셔츠, 단정한 검은색의 슬랙스.

아무래도 결혼식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는 만큼 모처럼 옷장에서 아껴온 재킷을 꺼내 입은 오늘의 윤재는 평소 성호가 가게에서 봐온 것과는 전혀 다른 댄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마도 회사에 재직하던 시절의 윤재는 줄곧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하고 나름대로 짐작해 본 성호가 천천히 윤재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몸이 밀착되자 평소 가게에서 자주 맡아온 윤재 특유의 향이 풍겨왔다.

“그러고 보니 한 번 여쭤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자꾸 잊어버렸는데....”

“응?”

“사장님한테선 늘 좋은 냄새가 나요. 무슨 향수 쓰세요?”

뜬금없는 질문을 받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슬쩍 팔을 들어 코에 가져다댔다. 혹시 지하철 옆자리에 앉아있던 누군가의 향수 냄새라도 밴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코에 닿아온 건 익숙한 냄새였다.

“향수는 안 써. 그러니까 얼굴 주변에서 나는 건 아마 스킨 냄새일 거고 옷에서 나는 건 섬유유연제나 탈취제 향일 거야.”

“그런가요? 엄청 좋은데...”

그렇게 중얼거린 성호가 갑자기 윤재의 어깨에 코를 대더니 킁킁 소리를 냈다. 이렇게 제대로 맡고 보니 확실히 향수라고 하기엔 다소 미약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냄새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저도 사장님처럼 스킨도 바르고 섬유유연제도 쓰는데 왜 저한테선 이런 좋은 냄새가 안 날까요? 사실 전 남들보다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라서 여름이 되면 그게 좀 신경 쓰이거든요. 가끔 버스에서 누가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해서...”

사뭇 진지해진 성호의 표정을 확인한 윤재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지속적으로 좋은 향을 내고 싶으면 향수를 하나 사서 쓰는 게 더 나을 거야. 스킨이나 섬유유연제는 조금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니까.”

“그런가요...? 음... 향수에 대해선 잘 모르는데... 남자 향수는 어떤 게 인기 있는지 혹시 아세요?”

“향수를 살 거면 누구한테 추천을 받기보다는 매장에 가서 직접 맡아보고 사는 게 좋아. 유명하다고 해도 실제 나하고는 맡지 않을 수 있으니까.”

“아, 그렇겠네요.”

곧바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인 성호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오늘 저녁에 가게 여는 거죠?”

“응. 약속이 내일로 미뤄졌으니까...”

“저기 그럼 결혼식 끝나고 저랑 같이 이 근처에 있는 백화점에 가지 않으실래요? 사장님이 향수 좀 같이 골라주셨으면 해서요. 쇼핑 좀 하다가 같이 가게로 가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조심스런 성호의 제안을 받은 윤재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향수 산 뒤에 같이 장 보러 시장 들렀다가 가자.”

윤재의 대답을 듣고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성호가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서 말을 이었다.

“참, 향수 하니까 생각난 건데. 평소에 우대리님 가게에 오실 때마다 되게 좋은 향이 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어차피 조금 있다가 만날 거니까 만나면 그때 쓰시는 향수가 뭔지 한 번 여쭤봐야겠어요.”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들려온 수영의 이야기에 순간적으로 멈칫한 윤재가 이내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서 ‘그래.’라고 대꾸했다.

한 번 수영의 일을 떠올리자 의식적으로 가라앉히고 있던 마음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다는 것은 곧 수영과의 만남을 염두에 두어야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윤재는 예정된 예식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마음 안에서 긴장감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직접 병원을 찾았던 때를 기준으로 수영과 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중간 중간 꾸준히 수영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통해 얼마 전 그가 퇴원을 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스스로가 전화상으로 얘기했던 대로 그동안 밀려 있는 일이 많은 탓인지 수영은 물론 그의 동료들까지도 최근 들어서는 거의 <민들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어, 저기 오셨어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재가 문득 옆에서 들려온 성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얼마 동안 눈을 떼고 있던 사이 한산하던 주변은 제법 많은 하객들로 채워져 있었다.

성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는 다 같이 모여 신랑 신부 측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수트 차림의 남자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장신의 남자를 발견하고 시선을 고정했다.

아직 이쪽을 보지 못했는지 일행들 사이에 섞여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수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맞춰 적당히 형식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몸이 완쾌된 상태인지는 당장 확인할 길이 없었으나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다행히 사고를 당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윤재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헐렁한 환자복 차림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이 날렵한 몸에 멋지게 피트되는 수트 차림을 하고 있는 수영은 늘 그렇듯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독점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대리님!”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성호가 조금 가까이 다가온 일행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자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 왔다. 성호의 옆에 앉아있다는 이유로 덩달아 졸지에 시선의 홍수에 파묻히게 된 윤재는 뒤늦게 이쪽에 시선을 던졌다가 자신에게 옮겨진 수영의 시선을 마주하고 스치듯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는 수영의 일행 중 가장 먼저 윤재에게 인사를 건네 온 건 정훈이었다.

“혜리씨가 <민들레> 두 분한테도 청첩장 돌렸다고 하더니 정말 오셨네요. 우리 사장님이 혜리씨 청첩장 첫 번째로 받은 사람이라면서요?”

싱글거리며 말하는 정훈을 향해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네.’라고 짧게 대답한 윤재는 잠시 후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수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동료들의 관심이 성호에게 옮겨진 틈을 타 윤재의 곁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선 수영은 윤재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은 수척해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 여기에 오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지 않았어?”

어제 저녁 짧은 통화에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린 수영이 그렇게 묻자 곧바로 입을 연 윤재가 대답했다.

“만나기로 한 아주머니가 약속을 내일로 미루자고 연락을 해 오셔서요. 그래서 아침에 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갔다가 그대로 돌아왔어요.”

“그래?”

“그보다... 몸은 괜찮아요?”

이번에는 반대로 윤재의 질문을 받은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밀린 일 한꺼번에 처리하느라 잠 못 자는 것만 빼면 괜찮아. 회복력이 좋은 건지 금이 갔던 뼈도 생각보다 빨리 붙었고. 어차피 그 외의 부상은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행이네요. 양과장님도 같이 퇴원하셨나요?”

“과장님은 아직 병원에 입원해 계셔. 이제 꽤 회복이 돼서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문제는 없으신 것 같지만 그래도 연세도 있으시고 아무래도 무리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 며칠은 더 병원에 입원해 계실 모양이야.”

“그래요. 일단은 건강이 우선이니까요.”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그렇게 소소한 일상얘기가 오가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곁으로 다가온 성호가 수영에게 물었다.

“우대리님. 저기, 혹시 무슨 향수 쓰세요?”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수영이 슬쩍 윤재를 쳐다봤다가 다시 성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가는 장소나 그 날 기분상태에 따라 몇 가지 종류를 돌려가며 쓰는데... 오늘 뿌린 건 john varvatos야.”

수영의 대답을 듣고 ‘그렇구나...’라고 작게 대꾸한 성호는 곧바로 머리에 입력되지 않는 향수 이름을 다시 한 번 수영의 입을 통해 확인했다.

“전에 가게에 오셨을 때 뿌리셨던 거랑 다른 향수 같은데 이것도 참 좋네요. 안 그래도 훤칠하니 잘 생기신 분이 이런 좋은 향까지 풍기고 다니시니 여자들이 홀려서 쳐다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아까부터 저쪽에 서있는 아가씨들이 계속 대리님 흘끔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거 아세요? 특히 왼쪽에 있는 아가씨는 진짜 예쁘네요.”

윤재가 바로 곁에 있는 상황인 만큼 지금 들려온 성호의 칭찬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져 미간을 좁힌 수영은 곧 예식이 시작될 거라는 안내멘트에 따라 식장 안으로 향하기 시작한 하객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대리님, 들어가시죠?”

주변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다가온 일행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수영은 그 사이 짧은 인사를 남기고 먼저 성호와 함께 식장으로 향하고 있는 윤재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곧 자신도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내 결혼인 만큼 신랑신부 두 사람 모두의 하객에 해당되는 수영의 일행은 각자 눈치껏 신랑 측 하객석과 신부 측 하객석에 반으로 나누어 앉았다. 그 과정에서 수영은 미리 정해진 대로 가장 친하게 지내는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신랑 측 하객 석에 앉았고, 다른 하객들에 떠밀리듯 안쪽으로 들어간 성호와 윤재는 수영이 앉은 자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신부 측 하객석에 자리를 잡았다.

늦은 죄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뒤에 선 하객들의 수만도 엄청났다. 오늘 이곳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에는 회사 동료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외에 신랑 신부 측이 평소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온 지인들 수도 무척이나 많은 듯 보였다. 신랑인 영호와 신부인 혜리의 평소 쾌활한 성격을 떠올리면 오늘 두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이처럼 많은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식장의 조명이 바뀌고 예식이 시작되자 그때까지 식장 안을 채우던 웅성임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잠시 후 진행 멘트에 따라 익숙한 결혼행진곡 선율에 맞춰 등장한 신부는 예상대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원래도 미인이었지만 여자의 일생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라는 결혼식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혜리는 참석한 하객들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만들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와... 혜리 누님 오늘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옆에서 들려온 성호의 중얼거림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조의 뜻을 내비친 윤재는 잠시 후 진행순서에 따라 시작된 주례사를 진지하게 귀에 담았다. 다른 많은 결혼식에서 들어온 것들과 상당 부분 겹치는 주례사의 내용은 다소 지루한 감이 있어서 처음 한동안 경건한 태도로 주례사를 경청하고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 조금씩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례사가 길어짐에 따라 점점 더 어수선해지는 분위기 속에서도 신랑과 신부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이크를 타고 들려오는 좋은 얘기들을 묵묵히 귀에 담고 있던 윤재는 이어서 축가를 부르기 위해 서둘러 앞으로 나온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화사한 연분홍색 시폰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은 윤재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 가끔씩 신랑신부와 함께 <민들레>를 찾았던 두 사람의 회사동료였다.

맑은 목소리로 시작된 노래는 윤재의 귀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축가로 쓰이기에는 충분할 만큼 달콤한 선율로 이루어져 있었다.

더없이 간질간질한 분위기 속에서 문득 뒤쪽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는 잠시 후 모두가 축가를 부르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홀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했다.

많은 하객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처럼 돋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는 남자-수영이었다.

언제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수영과 눈이 마주친 것과 동시에 그때까지 줄곧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가슴이 덜컹이는 것을 느낀 윤재는 그 와중에도 달콤하게 이어져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조용히 귀에 담았다.

“나의 맘에 찾아와 손 내밀어준 따뜻함이- 그대의 그 손길이 차갑던 내 맘을 환히 비춰주네-”

잠시 후 청아한 목소리로 이어지던 축가가 마침내 끝이 나고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수영과 마주하던 시선을 거둔 윤재가 다시 앞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한 것은 시간상으로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윤재는 이후 남은 일정이 차례로 진행되어 결혼식이 모두 끝날 때까지도 짧게 마주했던 수영의 시선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못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가 했더니 친척들 수만도 엄청 나네요. 얼마 전 저희 친척 누나 결혼식 때는 이거 반도 안 됐는데...”

주변에 앉아 있던 하객들이 동시에 일어나 우루루 앞으로 나가서 신랑 신부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바라보던 윤재가 문득 옆에서 들려온 성호의 말을 듣고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집도 그래. 나를 포함해서 친가 쪽 대부분이 외동이라 명절에 다 같이 모여도 집안이 휑해.”

“전 친척들 많은 건 별로인데 그래도 이런 결혼식 같은 날엔 식장을 가득 채워야 지인들 보기에 초라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전 돈 주고 하객 사는 사람들도 이해 돼요.”

얼마 전 참석했던 썰렁한 친척 누나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성호는 잠시 후 사진 촬영을 마친 신랑신부 측 친척일가들이 우루루 밖으로 빠져나간 뒤 이어서 들려온 ‘지금부터 친구 분들, 직장동료 분들 신랑신부님과 함께 사진 촬영 있겠습니다.’라는 진행자의 멘트를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저기 껴도 될까요? 아무래도 안 나가는 게 좋겠죠?”

“그러게... 저기에 섞여서 같이 사진을 찍기에 우리들 입장이 좀 애매하긴 하네. 안 그래도 사람 수도 많아 보이는데.”

“그럼 우린 밥 먹으러 가죠.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붐빌 때 가야 자리 잡기 편해요.”

출출하던 차에 밥을 먹을 생각으로 한층 밝은 표정이 된 성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앞쪽에서 우렁찬 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재씨! 성호씨! 어서 와요, 같이 사진 찍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놀라 서로를 마주본 두 사람은 일제히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주는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지못해 앞으로 나갔다. 각자 자신이 설 자리를 찾아 분주히 움직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 일부는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윤재의 다리로 옮겨졌다.

“옆으로 좀 가 봐요.”

“이쪽도 좁아요. 설 곳이 없는데...”

워낙 많은 인원으로 인해 빽빽이 들어차 있는 자리엔 딱히 두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은 보이지 않았다. 혜리의 부름에 불려 나오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난감한 입장이 된 윤재는 잠시 텀을 두고 들려온 수영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윤재씨, 이쪽으로 와요. 성호씨는 저쪽 끝 뒷자리로 가서 서고.”

옆에 서있던 동료를 밀어내가며 억지로 한 사람이 들어올 만한 자리를 만든 수영이 잠시 머뭇거리다 이 이상 시간을 끌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움직여 다가오는 윤재의 손을 붙잡아 그를 자신의 옆에 세웠다. 그 사이 수영이 말한 대로 그나마 비어있던 끝자리에 안착한 성호가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하자 그때까지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던 사진기사가 몇 차례에 걸쳐 마주 서있는 무리에게 다양한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좋은 날이니 다 같이 밝은 표정으로 나올 수 있게 웃어요.”

사진기사의 주문에 따라 의식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바로 그 순간 문득 커다란 손에 손을 붙잡혀 무심코 숨을 멈췄다. 자연스레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자 곧바로 앞쪽에서 카랑카랑한 사진기사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거기 뒤쪽 키 큰 남자 분 옆에 계신 남자 분 이쪽 보세요! 바로 찍을 겁니다!”

직접적으로 지적을 당해 다시 정면을 바라본 윤재는 그 사이에도 여전히 붙잡혀 있는 손이 신경 쓰이고 있었다. 맨 뒷자리인데다 사람들이 밀착되어 있는 상황인지라 누군가에게 목격당할 가능성은 없는 만큼 지금 그가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걱정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자- 이쪽 보세요!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사진기사의 주문에 따라 세 차례 반복해서 비슷한 표정을 만들어 보인 윤재는 잠시 후 전체 사진 촬영이 끝나고 흩어져가는 사람들 틈에 남아 아직까지도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수영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사람들이 흩어지기 직전 윤재의 손을 놓아준 수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결국 윤재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근처에서 자신을 부르는 동료에게 먼저 가라는 말을 건넨 수영이 다시 윤재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아까 표정 보니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길래 긴장 좀 풀라고 그런 건데, 혹시 기분 상했어?”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사진 찍기 전에 너하고 성호가 자리에 남아있는 게 보여서 부를까 하다가 네가 괜히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그냥 놔뒀는데 그래도 혜리씨 덕분에 좋은 사진 남기게 됐네.”

수영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멀찍이 떨어져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성호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식사하러 가는 건가요?”

“아니. 난 조금 뒤에 다른 약속이 있어서 식사는 거기서 할 거야.”

“약속이요?”

“응. 친척들 몇 집이 모이는 자리야. 이번에 막내 작은 아버지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거든. 송별회 비슷한 거지.”

“...네.”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윤재를 잠시 가만히 내려다보던 수영이 문득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고서 말했다.

“중요한 자리만 아니었으면 빠졌을 텐데. 아까 전에 오늘 약속이 내일로 미뤄졌다고 했는데 그럼 내일 지방에 내려가는 거야?”

“네. 근처 가게 아주머니랑 같이 가게 될 것 같아요.”

자신의 대답을 듣고 짧게 한숨을 내쉰 수영의 얼굴이 좀 전에 비해 조금 어두워진 것을 느낀 윤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잠시 텀을 두고 수영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은 약속이 있다고 해서 내일 오후에 너희 집에 가려고 계획 짜두고 있었는데 그럼 어쩔 수 없이 나중으로 미뤄야겠네. 평일엔 또 요즘 계속 다 같이 야근이라 <민들레>에 갈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

“얼굴... 보고 싶었어.”

나직이 덧붙여진 수영의 말을 듣고 무심코 눈을 크게 뜬 윤재가 아무런 대꾸 없이 그대로 침묵을 지키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멀찍이 서있는 성호를 쳐다보았다. 이쪽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한창 신나게 대화에 빠져 있는 성호와 함께 있는 사람은 수영의 동료인 정훈과 대식이었다. 평소 가게에 올 때마다 성호와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던 두 사람은 어느 샌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성호를 상대로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잠시 성호 일행을 바라보며 짧은 생각에 잠겨 있던 윤재가 다시 수영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다음 약속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요?”

윤재의 질문을 받은 수영이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서 대답했다.

“차로 오가는 시간 제외하면 30분쯤? 속도 더 내면 40분.”

“...그럼 30분 동안만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뜻밖의 제안을 받은 수영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윤재가 뭔가를 하자고 먼저 제안을 해오는 경우는 극히 드문 만큼 수영이 지금과 같은 동요를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간 반복되어 온 상황을 생각하면 이처럼 진지하게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하는 윤재의 말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것이 수영의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리 겁먹고 모처럼의 윤재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도 없는 수영은 약간의 불안한 마음을 일단 적당히 수습하고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수영의 대답을 들은 윤재가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성호의 곁으로 향했다.

“성호야.”

“아, 사장님. 대리님과 얘기 끝나셨어요?”

이름을 불려 뒤를 돌아본 성호가 곧바로 그렇게 묻자 윤재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정훈씨, 대식씨. 아직 식사 전이시죠? 여기에서 드시고 가실 건가요?”

“아, 네. 먹고 가야죠. 축의금도 두둑하게 넣었는데.”

정훈의 대답을 들은 윤재가 성호에게 시선을 옮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대신 두 분이랑 같이 가서 식사할래?”

“네? 사장님은요?”

“난 우대리님과 얘기할 게 좀 남아 있어서...”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죠. 속이 비면 안 좋은데.”

“난 오늘 아침을 늦게 먹고 와서 지금 당장은 별로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성호 너는 여기 두 분이랑 같이 가서 식사해. 그리고 30분 쯤 있다가 아까 우리들 같이 앉아 있던 데서 다시 만나자.”

“정말 안 드셔도 괜찮겠어요?”

“응. 이따가 봐.”

“아... 네. 그럼 이따 뵐게요.”

성호와 짧게 얘기를 나눈 뒤 남은 두 사람에게도 맛있게 식사하라는 인사를 건넨 윤재는 곧바로 몸을 돌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영의 곁으로 돌아왔다.

“성호한테 먼저 식사하라고 했어요. 식사 후에 다시 만날 거예요.”

“가게 문 열려면 아직 멀었는데 굳이 같이 돌아갈 필요가 있는 거야? 각자 간다고 하면 우리들 차에서 얘기 나누면 될 것 같은데. 그럼 널 집 앞까지 바래다줄 수도 있고.”

“결혼식이 끝나면 성호랑 둘이 같이 백화점에 가기로 했어요. 향수 사는데 같이 좀 골라달라고 해서요.”윤재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까 성호가 뜬금없이 무슨 향수를 쓰느냐고 물어온 건가하고 뒤늦게 상황을 납득한 그는 어쨌든 윤재 역시 뒤의 일정이 짜여 있는 만큼 이곳 부근을 떠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일단 나가서 커피숍으로 갈까? 좀 걸어야 할 것 같지만...”

“아뇨. 시간도 촉박한데 1층에서 얘기해요.”

윤재의 의견에 따라 두 사람은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내려갔다.

“사람이 많은데...?”

수영의 말에 윤재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조했다.

제법 크고 유명한 예식장인 터라 떠나는 하객들과 새롭게 들어오는 하객들이 한 데 뒤섞여 꽤나 북적거리고 있는 1층 로비는 아무래도 얘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미리 봐둔 의자들도 이미 다른 사람들로 인해 전부 채워져 있는 상태였다.

천천히 주위를 살피던 중간 넓은 유리 벽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윤재가 잠시 후 옆에 서있는 수영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아예 밖으로 나갈까요? 저 앞에 큰 건물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서 그렇게 덥지는 않을 것 같은데.”

“너 서있는 거 불편하잖아? 나야 나가면 담배 피울 수 있으니 좋지만...”

“조금 오해하고 계신 거 같은데 제 다리 그렇게 유리처럼 약하지는 않아요. 몇 시간 이상 계속 서있으면 다음 날 무리가 가는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로 오래 서있지만 않으면 특별히 문제없어요.”

윤재의 말을 듣고 혹시 자신이 그간 필요 이상으로 윤재를 약자 취급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떠올리던 수영은 ‘가요.’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하는 윤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곧 자신도 다리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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