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 새끼, 아주 반은 죽여 놨을 텐데.”
새로 채운 맥주 한 컵을 깨끗이 비워낸 준석이 자신이 직접 안주용으로 사온 과자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취해서 술주정 부린 거지. 깨고 나면 기억도 못할 거야. 아마.”
“취하면 다 용서 되냐? 평소 인격이 그 정도밖에 안되니까 취해도 그런 막말이 나오는 거야. 하여간 조정민 그 새끼, 진짜 나랑 싸우면 신나게 얻어터질 새끼가 만만한 상대 앞에서는 아주 잔뜩 어깨에 힘 넣고 허세부리고 있어. 개새끼가.”
평소 이 정도로 험악한 말을 쓰는 일이 드문 준석을 알고 있는 윤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거세지는 욕설의 강도를 통해 준석의 기분이 점점 더 안 좋은 쪽으로 가고 있다는 걸 눈치로 파악했다.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 쯤 예상치 못한 준석의 방문을 맞이한 윤재는 처음 현관문을 열고 눈으로 확인한 심상치 않은 준석의 표정을 통해 그가 오늘 예고도 없이 이곳을 찾은 이유를 짐작했다. 야근이 있어서 모임자리에 끼지 않았던 준석이 구태여 늦은 시간에 그것도 오늘 자신의 집을 방문할 이유란 한 가지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와 같은 윤재의 짐작은 정답이었다.
준석의 간략한 설명에 따르면 한창 야근을 하고 있던 중간 갑작스럽게 혜선의 연락을 받은 그는 먼저 오늘 있었던 좋지 않은 일에 대해 짧게 설명한 그녀로부터 ‘그러니까 네가 윤재의 기분을 잘 좀 다독여줘’라는 부탁을 받은 듯 했다. 혜선에게서 갑작스런 연락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 다른 정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준석이었지만, 좋지 않은 내용의 전화를 받고 난 뒤 그가 제대로 일에 집중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 윤재는 일부러 자신을 생각해 준석에게 연락을 취한 혜선의 배려를 마냥 감사한 기분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 새끼 그 자리에 끼어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같이 가던가, 그렇게 못하면 적어도 너 혼자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나도 조정민이 올 줄 알았으면 안 나갔을 거야.”
“하여간 괜히 오지랖 넓게 화해 자리는 무슨... 그런 새끼랑은 평생 말 안 섞는 게 답이야.”
여전히 분이 덜 풀리는지 이후로도 진득한 욕설을 몇 차례 더 입 밖에 낸 준석은 그러던 중 문득 표정을 바꾸었다. 정민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는 내내 잔뜩 구겨져 있던 그의 얼굴은 어느 샌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속상했지?”
문득 들려온 진지한 질문에 지금 막 두 잔째의 맥주를 비우고서 빈 컵을 바닥에 내려놓은 윤재가 피식 웃었다. 평소 밖에서는 가능한 한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당장 쓰러져 누워도 상관없는 조건이 갖춰져 있을 경우 윤재는 드물게 주량을 신경 쓰는 일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편히 술을 마시곤 했다. 특히나 오늘은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던 만큼 당장 앞에서 맛있게 술을 마시는 준석을 보니 덩달아 자신도 마시고 싶어진 그였다.
“그냥 그런 놈도 있구나 싶었지 뭐. 내가 <민들레> 운영하면서 본 진상손님들만 몇 명인 줄 알아? 몇 만원 어치 실컷 먹고 나서 마지막에 자기 머리카락 몇 가닥 집어넣고 돈 못 내겠다고 소래 고래고래 지르며 행패 부린 사람도 봤는데 오늘 있었던 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윤재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린 준석이 새로 채운 컵을 들고서 말했다.
“그런 쓰레기도 있단 말이야? 와... 진짜 벼룩의 간을 내먹지. 그런 진상들 얘기는 예전부터 조금씩 들었는데 진짜 있기는 하구나.”
신기하다는 듯 대꾸했지만 사실 준석의 기분은 씁쓸했다. 평소 윤재는 웬만해서는 남들 앞에서 힘든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지금처럼 직접 그의 입을 통해 이런 불쾌한 내용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꽤나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밝고 명랑한 성격의 사람도 서비스직에 오래 종사하다보면 우울증에 걸리는 일이 허다한데 하물며 윤재처럼 성격적으로 사람 대하는 일에 맞지 않는 사람이 그냥 멀쩡한 사람도 아닌 진상 취객들을 대하는 동안 어느 정도의 정신적 고통을 경험했을지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나야 내일 오후 늦게부터 일하니까 괜찮지만 준석이 넌 바로 몇 시간 뒤에 출근해야 하잖아. 술은 조금만 마셔.”
“응. 이것까지만 마실 거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준석이 ‘요즘 회사 일이 많아? 야근이 잦네.’라는 윤재의 질문을 받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근 많은 것까지는 괜찮은데... 나 어쩌면 올해 말쯤에 중국에 갈지도 몰라. 이번에 새로 생긴 중국 지사에 파견될 인원을 뽑고 있는데 내가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거든.”
갑작스런 준석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윤재가 곧바로 미간을 좁히고서 물었다.
“중국으로? 가면 얼마나 있는 건데?”
“아직 확정이 난 건 아닌데 일단 가게 되면 못해도 1년은 채워야 할 거야.”
“1년...? 근데, 너 중국어 잘 못 하잖아.”
“나야 어차피 기술적인 부분을 위해 가는 거니까 만약 정말 가게 될 때는 중국어 잘하는 직원이랑 한 팀으로 묶이게 되겠지.”
“.......”
“.......”
“네가 생각하기에 거기로 가게 될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 거 같아?”
진지한 윤재의 질문을 받고 슬쩍 허공에 시선을 던진 준석이 잠시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지금 얘기 나오는 분위기로 봐서는 70퍼센트 쯤...?”
“.......”
70퍼센트면 굉장히 높은 수치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얘기를 듣고서 조금 어두워진 표정을 지은 윤재는 그러나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확정이 난 것도 아니지만, 만약 확정이 난다고 해도 그것이 준석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결정이라면 기분 좋게 그를 보내주고 싶은 윤재였다.
“만약 가게 되면 잘 다녀와. 몸 건강히.”
한참 만에 윤재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미간을 좁힌 준석이 어느새 반이나 없어진 과자를 한 움큼 집으며 말했다.
“안 갔으면 좋겠다는 말은 안 하고?”
“나야 안 갔으면 좋겠지만 일이잖아. 나도 예전에 회사 다녔으니까 그 쪽 분위기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네가 외롭다고 붙잡으면 내가 안 갈 지도 모르잖아?”
“내가 애냐? 이 나이에 외롭다고 징징거리며 친구 발목 잡게.”
피식 소리와 함께 들려온 윤재의 대답에 준석이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윤재다운 반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 가지 말라고 붙잡아주길 바랐던 그는 마음 한 편으로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한 사람의 미래와 직결되게 될지도 모를 중요한 결정에 관여할 자격을 갖춘 것은 부부나 연인, 혹은 가까운 가족 관계 정도까지인 게 세간에서 통하는 상식일 터였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결국 친구는 친구일 뿐 상대의 인생을 좌우할 정도의 결정에까지 관여할 수는 없었다. 만약 반대로 윤재가 지금 자신의 입장이었다고 한다면 자신 역시 개인적인 감정을 이유로 억지로 윤재를 붙잡지는 않았을 거라고 준석은 생각했다.
“준석아...”
문득 들려온 윤재의 부름에 고개를 든 준석이 ‘응?’이라고 대꾸했다.
편안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겁도 없이 가득 채운 맥주를 네 컵이나 비운 윤재의 눈가와 뺨이 어느 샌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우리 벌써 알고 지낸 시간이 10년이 넘었잖아...”
“.......”
“그런데 만약 넌 내가... 네가 알지 못하는 비밀을 갖고 있다면... 어떨 것 같아?”
뜬금없는 질문을 받고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힌 준석이 비어있는 자신의 컵에 절반쯤 맥주를 채웠다. 윤재에겐 아까의 잔을 마지막으로 삼겠다고 말했지만 조금 전 짭짤한 과자를 한 움큼 집어먹은 탓인지 갈증이 생겼다.
“비밀? 어떤 비밀? 사실은 엄청난 빚이 있다던가, 아니면 예전에 어마어마한 중대 범죄를 저질렀다던가 하는 거?”
약간의 농담을 섞어 준석이 되묻자 윤재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한 듯 보이던 윤재는 순식간에 몰려오는 취기로 인해 눈을 깜빡거리는 횟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이 상태라면 이제 머지않아 슬슬 바닥에 누운 뒤 그대로 잠들어버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범죄는 아니야. 그건 아닌데...”
“범죄 아니면 됐어. 사람이 살다보면 가슴 안에 비밀 몇 가지는 가지고 있을 수 있지. 꼭 안에 있는 얘길 다 꺼내놓을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그래야 할 의무도 없고.”
침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던 준석이 문득 이거야 마치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굳이 스스로를 대입하지 않더라도 그와 같은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람이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피해를 입지 않는 한 굳이 남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본능은 말 그대로 본능적인 부분이니 충분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죽여도 모자랄 추악한 범죄인들마저도 묵비권이라는 권리를 보장받고 있듯이.
그러니 지금 들려온 윤재의 말에 대한 준석의 대답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객관적인 사안 어쩌고를 떠나 철저히 감정적이 된다고 해도 그의 대답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비밀을 갖는 것이 누군가로부터 비난받을 일이라면 준석 역시 꽤나 오랜 시간에 걸쳐 눈앞의 남자를 상대로 쭉 비난받을 일을 저질러오고 있는 것이었다.
“너랑 난 누가 봐도 쿵짝인 죽마고우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고 너한테 비밀 없겠냐? 이 녀석이 술 마시더니 괜히 센치해져서는 갑자기 왜 안 하던 질문을 하고 그래?”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은 준석이 아무래도 방에 가서 베개를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킨 순간 윤재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에 알 수 없는 미래보다는 지금 현재가 더 중요하다는 말... 맞는 거겠지?”
다시 이어진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미간을 좁힌 준석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천천히 윤재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왜 안 하던 질문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끔 취한 윤재가 뜬금없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 조심스레 손을 뻗어 윤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맞아. 과거나 미래보다는 지금 현재가 더 중요하지.”
“...그렇지?”
“그래.”
자신의 대답을 듣고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윤재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낸 준석이 다시 구부리고 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졸려? 방으로 들어갈래?”
“아니...”
“그럼 있어 봐. 물 좀 가져올게.”
“으응...”
부쩍 말끝이 늘어지는 윤재의 대답을 들은 준석이 스치듯 미소를 머금고 곧장 냉장고가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맨 정신일 때는 너무도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갖고 있기 때문일까 때때로 술에 취해 풀어지는 윤재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많이 어린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 정도로 말끝이 늘어진 상태라면 몇 분 뒤엔 몽롱한 상태에서나마 꼬박꼬박 대꾸하던 것도 더 이상은 하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래도 물을 마실 정도의 시간까지는 버텨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서둘러 새 컵과 보리차가 들어 있는 물통을 들고 거실로 돌아온 준석은 역시나 그 사이 거실 바닥에 비스듬히 몸을 웅크린 채 누워있는 윤재의 모습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는 어린애 같다니까...’
속으로 짧게 투덜거리면서도 지금 자신의 앞에서 평소의 긴장을 풀어놓고 무방비 상태가 되어 있는 윤재의 모습에 조금은 흡족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준석이 일단 손에 든 것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웬일로 맥주를 네 컵하고 반이나 쭉쭉 마신다 싶더니 역시 뻗는 타이밍도 일찍 찾아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 그 상황을 겪고 아무렇지 않을 리는 없었을 터였다. 익숙하다고 해서 상처가 상처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닐 테니까. 차라리 주위의 혜선이나 영욱처럼 기분이 상하면 그때마다 바로 감정 표현을 하면 좋을 텐데 워낙 참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웬만한 일로는 좀처럼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윤재가 준석은 아프고 또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이렇게 평소답지 않게 맘껏 술을 마시는 것으로 소심하게나마 기분을 표현해주는 것이 다행처럼 여겨졌다.
허나 준석은 그와 같은 생각과 동시에 자신 역시 남의 일처럼 윤재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평소의 자신도 윤재의 앞에 있을 때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사실 지금 당장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인다면 일단 가장 먼저 윤재를 붙잡고서 이전에 이 집에서 마주쳤던 낯선 남자의 존재에 대해 속 시원히 듣고 싶은 준석이었다. 그날의 불쾌한 첫 대면 이후로 지금까지도 준석에게 있어 그 기분 나쁠 만큼 잘난 상판을 하고 있는 남자의 존재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분이야 어쨌든 혹시라도 자신의 추궁으로 인해 마음이 불편해진 윤재가 앞으로 더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려 노력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준석은 의식적으로 그날 봤던 낯선 남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일체 윤재의 앞에서 꺼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은 정작 윤재가 없는 곳에서 그가 모르는 사람들과 자유롭게 만나고 다니면서 자신만이 일방적으로 윤재의 일거수일투족을 옭아매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물론 준석은 잘 알고 있었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었다. 그것이 실상 초라한 자기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옆방에 가서 윤재 전용의 낮은 베개와 여름 대비용으로 미리 꺼내놓은 듯한 얇은 이불을 들고 거실로 돌아온 준석은 먼저 베개를 윤재의 머리 아래에 놓아주고 난 뒤 이불도 덮어주었다.
-‘당장에 알 수 없는 미래보다는 지금 현재가 더 중요하다는 말... 맞는 거겠지?’
아까 전 들었던 윤재의 질문을 다시 한 번 찬찬히 귓가에 떠올린 준석이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말로는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자신이 윤재를 상대로 취하고 있는 행동은 그 말과는 어긋나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겁이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
윤재와 오랫동안 함께 할 미래를 위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한 발도 내딛지 못한 채 늘 같은 자리를 지키는 스스로의 모습이 씁쓸한 동시에 슬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한 가지 더 준석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마지막까지도 정민의 일에 집중하느라 일부러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준석은 야근 중간에 받았던 혜선의 연락을 통해 오늘 그녀가 윤재에게 고백을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상대로 시원하게 차였어.’
-‘.......’
-‘.......’
-‘...위로의 말이 듣고 싶어?’
-‘아니. 그냥 누군가한테 말하면 좀 시원해질 것 같아서. 사실 지금 좀 우울하거든.’
-‘윤재가... 뭐라고 하면서 거절했는데?’
-‘내가 여자로 안 보인대. 그냥 친구로만 보인다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대. 진짜 미련도 못 갖게 얄짤 없이 거절하더라. 뭐... 사실 그 편이 나한텐 더 도움이 되는 게 맞긴 하지만...’
-‘.......’
-‘앞으로 어색해서 윤재 얼굴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계속 참고 있을 걸... 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우울하다.’
땅으로 꺼져가는 목소리를 내는 혜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서 적당히 그녀와의 통화를 마무리 지은 준석은 그 후로 한동안 일에 복귀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 혜선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미 수없이 반복했던 상상 속 자신의 처지와 무서울 만큼 닮아 있어서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상상 속에서 자신의 고백을 받은 윤재는 혜선이 전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
나는 널 그냥 친구로밖에는 볼 수 없고, 앞으로도 쭉 그럴 거라고.
거절을 당하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애초에 모든 고백이 다 긍정의 대답만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고백 이후로 윤재가 더 이상은 이전과 같이 자신의 앞에서 편안한 미소를 보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윤재가 무심코 자신의 시선을 피하기라도 한다면 그때 자신은 돌이킬 수 없는 고백을 죽을 때까지 후회할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그럴 터였다.
혜선의 고백 실패담 따위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로 인해 한층 더 겁쟁이가 되어버린 스스로의 처지에 쓴웃음이 난 준석은 이런 자신의 마음 따위 꿈에도 알 리 없이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윤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너와 함께 할 미래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지금만을 볼 수가 없어.’
아까 전 윤재로부터 받았던 질문에 이번에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대답을 마음으로 전한 준석이 천천히 손을 뻗어 조심스레 윤재의 뺨을 쓸어내렸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도 언제나 이 거리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실제로는 단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이 좁은 거리가 준석에겐 마치 수 억 광년 떨어진 은하계 어느 지점보다도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윤재에게 있어 가까운 사람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결국 그의 깊은 안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다.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다고 해도 현실의 자신은 그저 다정한 친구로만 존재할 뿐 마음 가는대로 윤재를 마음껏 품에 안을 수도, 키스를 할 수도, 온몸이 뜨겁게 녹아내릴 때까지 격렬하게 그와 엉켜 사랑을 나눌 수도 없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적어도 육체만큼은 얼마든지 그와 같은 욕망을 현실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준석은 자신의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잠들어 있는 윤재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늘 그렇듯 자신을 향해 보이는 윤재의 절대적인 신뢰가 지금의 준석에겐 기쁨인 동시에 아픔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 찾아든 것은 작은 충동이었다.
잠시 동안 잠든 윤재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준석이 어느 순간 천천히 어깨를 낮춰 윤재와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급격히 빨라지는 심장소리가 소란스럽게 귀를 울리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충동을 거스르지 못한 그는 잠시 후 입술에 닿아온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을 현실로 자각한 것과 동시에 줄곧 바닥에 대고 있던 주먹에 힘을 실었다.
입을 벌리고 혀를 넣을 것도 없이 그저 간신히 입술만을 맞대고 있을 뿐인 키스.
좀 더 용기를 내 맞닿은 입술을 조심스레 밀착시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흡사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요동치는 스스로의 심장박동을 생생히 느끼던 준석은 잠시 후 윤재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고개를 들어 잠시 동안 맞닿아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곧 ‘으음...’하는 작은 소리를 내고 옆으로 돌아눕는 윤재의 모습을 보며 일시적으로 크게 뛰었던 가슴을 가라앉힌 그는 그 사이 아래로 내려와 있는 이불을 다시 손에 쥐어 윤재의 어깨까지 끌어올려주었다.
‘내가 너한테 가진 비밀이 뭔지 알면 아마 넌 절대 내 앞에서 이렇게 취해 잠들지 않겠지.’
오늘도 이렇게 혼자만의 비밀을 한 가지 더 늘린 준석은 여전히 크게 뛰고 있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고서 천천히 손을 움직여 주변 바닥에 널려져 있는 술병과 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시곗바늘은 어느새 새벽 한 시 반을 지나쳐 가고 있었다.
***
“아직 다 완쾌된 거 아니지?”
그렇게 말하며 불쑥 손을 뻗은 여진이 살짝 손의 위치를 내려 수영의 옆구리 위쪽 부분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조금은 간지러워하며 웃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그는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담배에 불을 붙여 입으로 가져가는 수영의 태연한 모습을 확인하고 뻗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벌써 퇴원해도 괜찮은 거야?”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지장 없는 정도니까 굳이 입원해 있을 필요 없어.”
“그래도 길게 병가를 얻어낼 수 있는데 이참에 좀 더 쉬지 그랬어?”
“너도 병원 생활 며칠만 해봐. 며칠까지 갈 것도 없이 이틀만 지나도 지겹다는 소리가 입에서 줄줄 흘러나올 걸.”
그렇게 말하고서 한 차례 길게 연기를 내뱉은 수영이 문득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그보다 아까 전화로 했던 얘기부터 먼저 해봐. 장호연이 출국했다고?”
순식간에 심각해진 공기를 읽어낸 여진이 ‘응.’이라고 짧게 대답하고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곧바로 혀를 적시는 칵테일의 독특한 맛을 잠시 동안 가만히 음미한 뒤 역시 이곳의 바텐더 실력은 최고라고 고개를 끄덕인 그는 그 사이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다시 새로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수영의 모습을 슬쩍 쳐다봤다. 이제 막 퇴원한 환자가 그렇게 담배를 펴도 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그간 병원 안에서 강제적으로 금연을 해야 했던 수영의 고생을 생각하면 조금은 해방감을 만끽하게 놔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자애로운 생각이 들기도 하는 여진이었다.
“그 날 이후로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데 내가 받은 보고로는 사건 이전과 별로 달라진 건 없었던 모양이야. 계속 오너 일 하고, 사람들 만나서 놀고. 그러다가 좀 위험한 놈이랑 관계를 했나 봐. 단체로 이상한 약 먹고 섹스하다 그 중 몇 사람이 약 부작용 때문인지 중간에 병원에 실려 갔는데 그 명단에 장호연이 끼어 있었어. 뒤에는 어떤 장난질을 쳤는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더라.”
“.......”
“입장 상 사실을 밝힐 수는 없으니까 괴한한테 납치당해서 강간당한 걸로 대충 얘기를 만들어놓긴 한 것 같은데 그날 이후로는 거의 잠수 상태라고 하더라고. 지나가는 소문으로는 그 꼴 만든 상대 찾으러 다닌다는 얘기도 있고.”
진지하게 이어지는 여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수영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기고서 말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외국으로 갔다고? 믿을 만한 얘기야?”
“같이 출국한 사람이 확인됐으니까 뜬소문은 아니야. 대충 짐작하기에 지저분한 소문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돌아올 생각이 아닐까 싶어. 어쨌거나 그 날 이후로 이쪽과 관련해서 움직이는 기미는 안 보여. ‘그 사람’ 가게와 관련해서도.”
여진의 마지막 말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수영이 곧 입을 열었다.
“<민들레> 근처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어떻게?”
“‘그 날’ 이후 계속 가게 주변에 사람 심어두고 틈틈이 보고받고 있으니까.”
침착한 말투로 그렇게 대답한 수영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여진을 슬쩍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하.’하고 짧게 소리를 낸 여진이 수영의 손에 들려 있는 담배를 빼앗고서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아예 집에 데려다 놓지 그러냐. 잘 때는 침대에서 꼭 끌어안고 자고.”
“.......”
“그러니까 숨은 쉬게 해주되 손에서 놓지는 않겠다는 거지? 본인은 자유로운 줄 아는데 알고 보면 엄청나게 커다란 철장에 갇혀 있는 거고. 여의도 규모쯤 되는.”
“비약하지 마. 걱정 돼서 잠시 지켜보고 있는 것뿐이니까.”
“일일이 사람 상대하는 게 성가시다는 우수영한테 그 귀찮은 감시라는 것도 다 시키고 진짜 대단하다, 그 사람?”
약간의 비아냥이 섞인 농담을 건넨 여진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 곧바로 시니컬한 대꾸가 돌아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는 수영의 모습을 확인하고 덩달아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 호연의 이야기를 들을 때와 다른 분위기로 진지해진 수영의 모습은 어딘가 낯선 느낌을 주고 있어서 여진은 새삼 김윤재라는 남자가 수영에게 대체 어느 정도의 존재인지에 대한 의문을 진지하게 품게 되었다.
잠시 묘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문득 계단을 내려오는 하이힐 굽 소리를 포착하고 고개를 돌린 수영이 이제 막 입구 안으로 들어선 반가운 얼굴을 확인하고서 가벼운 눈짓을 보냈다.
많은 손님들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수영을 발견하자마자 얼굴 가득 함박미소를 머금고 서둘러 다가온 건 이곳 의 오너인 제이였다. 안 본 사이 조금은 살이 빠진 듯한 그는 오늘도 여전히 화려한 옷차림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야- 오랜만이야, 수영씨. 우리 여진씨도.”
반 년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자주 이곳을 방문했던 두 사람과 제법 돈독한 친분을 쌓아온 제이는 성격 활발한 여진과 보기 드문 미남인 수영의 조합을 내심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수영의 경우 주변 사람들로부터 꽤나 까칠한 성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듯 했지만, 편한 친구인 여진과 함께 있을 때의 그는 그래도 다른 때보다는 느슨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이 지금까지 두 사람의 모습을 남몰래 관찰해온 제이의 평가였다.
“이제 퇴원한 거야? 몸은 괜찮아?”
“보면 알겠지만 멀쩡해요.”
“병문안 갈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난 그렇게 사람 많은 공공장소는 좀 힘들어서... 괜히 또 중간에 이런 말투 불쑥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그렇잖아. 수영씨 입장이란 것도 있는데. 그래도 자꾸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살짝 말끝을 흐린 제이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곳에선 별 문제 없이 당당하게 스스로를 내놓고 생활하고 있지만 확실히 제이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별화 되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오래 전 지나는 행인으로부터 ‘토 나오는 게이새끼’라는 심한 모욕을 들은 이후로 가능하면 낮에 외출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고 한 제이가 평범한 사람들로 채워진 병원이란 장소를 방문하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일이었다.
“미안한 마음 가질 거 없어요. 어차피 안 그래도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서 힘들었으니까. 애초에 큰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었고.”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마음이 좀 편해지지만... 어쨌든 지금 겉으로 보기엔 다행히 멀쩡하네. 수영씨 잘생긴 얼굴에 흉터라도 생겼으면 내가 다 안타까웠을 텐데 정말 다행이야. 자기는 다른 데는 다치더라도 얼굴은 꼭 잘 보호해야 돼. 알겠지?”
백퍼센트 진담이 담겨 있는 제이의 말을 듣고 피식 웃음소리를 낸 건 수영의 옆에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진이었다.
어릴 적부터 외모에 대한 칭찬을 지겹도록 들어온 탓인지 수영은 조금 전 들려온 제이의 말도 그저 지나가는 농담의 하나쯤으로 흘러 넘기고 있는 듯 보였다. 한 때는 같은 남자로서 부러운 감정과 동시에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지만 그런 잘난 친구 덕분에 과거 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갖는 혜택을 누렸던 여진은 그 이후부터 넓어진 마음으로 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핸드폰 배터리 다 나갔네. 중요한 연락 올지도 모르는데... 나 잠깐 차에 좀 갔다 올게.”
수영에게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향하는 여진의 뒷모습을 흘깃 쳐다본 제이가 그 사이 천천히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수영에게 시선을 옮기고 입을 열었다.
“저기... 연석씨한테 절교 선언했다며?”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고 입에 대고 있던 잔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은 수영이 순식간에 심각해진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와 잠시 시선을 마주했다. 연석의 얘기가 나온 것은 뜻밖이었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평소 연석은 이곳을 자주 찾았으니 그의 고민상담 역할을 맡아주고 있는 제이의 입에서 절교 얘기가 나온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많이 속상했는지 여기서 술 진탕 마시고 취해서 울기까지 했다니까. 그거 달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
“연석씨가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어도 자기 엄청 좋아했던 거 알고 있지? 자기는 누구 한 사람이랑 진득하게 연애하는 타입이 아니니까 그냥 쿨한 관계로 있으려고 했는데 이젠 그것도 못하게 됐다고 속상해 하더라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적당히 화해하는 게 어때?”
조심스럽게 중재에 나선 제이가 비워져 있는 수영의 잔을 다시 가득 채워주었다.
“정연석한테서 어떻게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선을 넘어서는 행동을 했고 그래서 우리들 관계는 끝난 겁니다. 사실 냉정히 따지자면 애초에 우리는 관계라는 단어를 쓸 것도 없는 사이였죠. 가끔 기분이 내키면 만나고 그러다가 동하면 한 번씩 자고... 만나지 않고 지낼 때는 따로 그를 생각한 적도 없었어요. 적어도 나한테 정연석은 그 정도의 존재밖에는 되지 않았던 겁니다.”
더없이 냉정한 수영의 말에 미간을 좁힌 제이가 연분홍색의 립스틱이 곱게 발라져 있는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수영의 성격 상 웬만한 일로는 굳이 절교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낼 리가 없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다 보니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기가 애매한 것이 지금 그가 처해 있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울며 속상해하는 연석의 모습을 쭉 곁에서 지켜봐온 만큼 가능하면 그의 편이 되어주고 싶은 것이 제이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정연석이라는 남자는 다소 가벼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본성이 악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지금껏 그를 옆에서 지켜봐온 제이의 생각이었다.
“그냥 친구로 지내는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일단 절교라는 것만이라도 해제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이가 슬쩍 한 발 물러서서 묻자 곧바로 쓴웃음을 머금은 수영이 입을 열었다.
“평범한 친구로라면 어찌어찌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연석이는 날 그런 눈으로 보고 있지 않고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깨끗이 헤어지는 편이 낫다고 봐요. 현실적으로 봐도 괜히 질질 미련을 안고 가게 하는 것보단 그 편이 그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니까. 어쨌건 난 뻔히 보이는 감정을 모른 척 하면서 친구놀이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친구라도 좋으니 옆에 있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이해 못하는 거야?”
모처럼 만에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던 하이톤 대신 원래의 굵직한 목소리로 질문을 건넨 제이가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잠시 텀을 두고 이어진 수영의 대답은 예상대로 냉정했다.
“그런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거기에 맞춰줄 생각은 없습니다.”
“.......”
“반대의 상황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에요. 허울 좋은 친구로 지내며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결혼하는 것을 곁에서 축하해줄 만큼 난 아량이 넓지 못해서요. 그럴 바엔 깨끗이 헤어질 거고, 정 포기할 수 없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리던 난 반드시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 겁니다.”
단호한 수영의 대답을 들은 제이가 쓰게 웃었다.
과연 수영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마음 조리며 멀리서 훔쳐보는 건 수영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이렇게 일말의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는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한층 더 연석이 가엾게 느껴지는 제이였다.
잠시 동안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연석의 얼굴을 서서히 지워낸 제이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그래... 자기 생각이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연석씨는 내가 잘 달래 볼게. 그건 그렇고... 어때? 그 신경 쓰인다던 상대랑은 요즘 잘 돼가고 있어?”
갑작스럽게 전환된 화제에 잔으로 뻗던 손을 멈칫한 수영이 호기심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와 짧게 시선을 마주했다. 좀 전 연석의 이야기를 할 때와 다른 의미로 사뭇 진지해진 표정이 된 수영은 일단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잠시 방치하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로 가져가 그 끝을 털어냈다.
퇴원한지 오늘로 겨우 이틀째.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보름 남짓의 기간 동안 몇 차례 연락을 하긴 했지만 얼굴을 본 것은 윤재가 뜻밖에 문병을 왔던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 일상에 시달리는 윤재가 병원을 찾아오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의 문병이 한 번으로 끝났다는 사실에 서운함을 느끼거나 불만을 가진 적은 없는 수영이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변해 있는 상태였다.
“수영씨?”
대답 없이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수영을 잠자코 바라보던 제이가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제이의 존재를 다시 머릿속에 들인 수영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모르겠어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나온 대답은 무거웠다.
지금 수영의 얼굴 위로 드러나는 어두운 표정을 통해 아무래도 그의 연애가 뜻대로 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라고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린 제이는 한층 더 조심스러워진 태도로 질문을 이었다.
“수영씨가 이렇게 연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걸 보니 좀 신기하네. 미안하지만 난 자기는 평생 지금까지처럼 가벼운 섹스만 즐기며 살 줄 알았어. 특정한 한 사람한테 정착하지 않고 만인의 연인으로서 자유롭게.”
“........”
“정 힘들 것 같으면 그냥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낫지 않겠어? 당신 좋다고 목매는 사람, 그동안 내가 이 가게 안에서 봐온 것만도 수십 명은 족히 되는데 그 안에서 찾으면 이렇게 따로 마음 고생할 필요도 없잖아? 애초에 자기는 누구한테 목매는 타입도 아니고.”
“.......”
“.......”
“그럴 수 있다면 그랬겠죠. 하지만 나한테는 그 사람 외엔 의미가 없어요.”
한참 만에 입을 연 수영은 평소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서늘한 얼굴을 하고서 사람을 코끝으로 부리던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너무나도 순정적인 말이었다.
“포기할 수 없으면 어떻게든 내 사람으로 만들 거라고 아까 자기가 그랬잖아. 그래서 그대로 하고 있어?”
제이의 질문을 받은 수영이 길게 연기를 내뱉고서 툭툭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냈다. 오랜만에 마음껏 피우는 담배는 꽤 맛있어서 중간에 끊지 않고 연이어 피우다보니 처음 새것의 상태에 가까웠던 담뱃갑은 어느 샌가 3분의 2가량이 비워져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힘들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좀 사그라지면 나을 텐데 오히려 점점 더 깊어져서... 나로서는 노력하고 있지만 이 노력들이 제대로 닿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포기도 못하겠으니 정말 죽을 맛이네요.”
“...자기도 힘들 때가 있구나.”
“물론 그쪽도 그쪽대로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하겠죠. 하필이면 나 같은 놈한테 붙잡혀서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가엾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마지막에는 결국 쓴웃음을 머금은 수영이 가득 차있는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의사의 조언대로 퇴원 후 얼마동안은 음주를 자제할 생각이었지만 윤재의 얘기가 나오자 아무래도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는 그였다.
“가엾지만... 그래도 포기는 안 하겠다는 거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제이가 다시 질문을 건네자 순식간에 잔을 말끔히 비워낸 수영이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잠시 차에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비웠던 여진이 이제 막 입구 안으로 들어서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말했잖아요. 그럴 수 있었다면 이미 그랬을 거라고.”
여진이 가까이 다가오기 전 씁쓸한 목소리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은 수영은 기다렸다는 듯 비워진 자신의 잔을 새롭게 채워주는 제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다가온 여진이 다시 수영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그때까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제이의 얼굴 위엔 평소대로의 웃음기가 드리워졌다.
“나 없는 사이에 두 사람 무슨 재밌는 얘기라도 했어요?”
차에서 가져온 새 담뱃갑을 뜯으며 제이에게 질문을 던진 여진이 ‘수영씨를 위한 맞춤 연애상담’이라는 제이의 대답을 듣고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제이, 지금까지 한 농담 중에 제일 썰렁했어요.”
그렇게 말한 여진이 곧바로 ‘이 정도는 돼야 어디 나가더라도 먹힐 거예요.’라며 알고 있는 농담들을 하나 둘 꺼내놓기 시작하자 그런 그의 옆에서 찰칵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인 수영이 먼저 한 모금 빨아들인 연기를 길게 내뱉고서 옆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가만히 귀에 담았다.
물론 여진이 들려주는 농담을 듣는 내내 수영은 단 한 번도 웃음소리를 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