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오후 내내 내리던 비로 인해 축축이 젖어 든 거리는 해가 넘어간 시점부터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불빛들로 조금씩 밝혀져 나가고 있었다. 겉보기엔 제법 그럴 듯한 먹자골목의 구색을 갖춘 거리에는 다양한 메뉴를 내세운 음식점과 술집들이 차례로 늘어서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위치적으로 유동인구가 적은 지역에 자리한 탓에 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대부분의 가게들은 한창 많은 손님들을 맞이해야 할 저녁 시간임에도 텅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조금 전에야 비가 그친 터라 아직 물기가 흥건히 남아 있는 우산을 들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윤재는 잠시 후 저 멀리로 보이는 눈에 익은 간판을 발견하고 한층 더 걸음에 속도를 올렸다.
아직 회사원이던 시절 종종 퇴근 후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만나는 모임 장소로 쓰였던 낡은 가게는 오래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오는 음식의 맛도 좋지만 무엇보다 주인 할머니의 인심이 후하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나마 이 부근 술집 가운데에서는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곳이었다.
평일임에도 모처럼 만에 정해진 친구들과의 약속에 참석하기 위해 오늘 하루 가게를 쉬고 외출한 윤재는 미리 정한 약속 시간을 십여 분 넘기고서 모임 장소인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빗길에 차가 막혀 조금 늦게 될 것 같다는 연락을 미리 해두었음에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걸음을 옮긴 덕분에 다행히 처음 예상한 것보다는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야, 여기!”
가게를 들어선 것과 동시에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윤재가 창가 쪽 자리를 넓게 차지하고 있는 반가운 얼굴들을 차례로 시야에 들이던 중간 무심코 표정을 굳혔다. 그런 윤재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곧바로 미간을 찌푸린 상대는 몇 개월 전 지방에서 열린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던 윤재와 최악의 형태로 헤어진 그의 고교 시절 친구 조정민이었다.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상대가 끼어 있는 만큼 다소 불편한 기분을 안고서 일행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간 윤재는 일단 자리에 모인 반가운 얼굴들을 한 번씩 쳐다보고서 짧게 그들과 인사를 교환했다. 고등학교 동창 멤버로 이뤄진 오늘 자리에 모인 인원은 정민과 승태, 영욱과 홍일점인 혜선,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윤재까지 전부 합쳐 다섯 명이었다.
“야- 오랜만에 본다. 그치?”
“그때 후영이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잖아.”
“생각보다 빨리 왔네. 늦는다고 해서 못해도 30분 이상은 기다릴 각오하고 있었는데.”
“여기 앉아. 이쪽에.”
자신의 옆 자리를 손으로 두드리는 승태의 말에 따라 먼저 젖은 어깨를 툭툭 털어내고서 그의 옆 자리에 앉은 윤재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주문을 받으러 온 점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자기들끼리 의견조율을 마쳤는지 나서서 다가온 점원에게 막힘없이 주문할 메뉴들을 열거하던 혜선이 슬쩍 마주 앉은 윤재에게 시선을 던져왔다.
“윤재 너 뭐 따로 주문하고 싶은 거 있어?”
“아니. 그냥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네, 이렇게 주문할게요. 술은 소주 세 병이랑 맥주 두 병만 일단 먼저 갖다 주세요. 아, 콜라 두 병도 같이요. 윤재 너 콜라 먹지?”
“응.”
어차피 술을 거의 입에 대지 못하는 입장에서 따로 안주를 주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윤재는 주문을 받은 점원이 주방으로 향하는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증축을 했는지 오래 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넓어진 듯 보이는 가게 안은 늘 그렇듯 많은 손님들로 채워져 있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해 자주 오지는 못해도 가끔 친구들과 만날 때면 주로 이곳을 찾았던 윤재는 그때도 지금처럼 다른 친구들과 달리 혼자서 술 대신 탄산음료를 주문해 마시곤 했다. 처음 윤재에 대해 잘 알지 못해 무조건 부어라 마셔라 분위기를 조성하며 강제적으로 술을 강요했던 사람들도 불과 술 몇 잔에 완전히 뻗어버리는 윤재의 주량을 알게 된 뒤로는 무식하게 술을 강요하는 대신 친절하게 직접 나서서 윤재 분의 탄산음료를 따로 주문해주기까지 했다. 물론 그들이 그런 친절을 베푼 건 윤재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뒤처리가 귀찮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까 준석이한테도 전화했었는데 녀석은 오늘도 야근이라 못 온다고 하더라.”
영욱의 말을 듣고 자연스레 그에게 시선을 던진 윤재가 ‘준석이 요즘에 회사 일로 많이 바쁜 가봐. 우리 가게에도 안 온지 꽤 오래 됐어.’라고 대꾸해주었다. 이곳에 모인 멤버들 가운데에서 준석과 가장 친분이 깊은 것은 윤재로, 사실 동창생들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윤재보다 더 준석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들이 차례로 나오고 조금씩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테이블 위의 분위기는 한층 활기를 띠어갔다. 원래부터 말이 많은 성격인 승태와 영욱이 주로 대화를 이끌어 가면 간간이 홍일점인 혜선이 그들로부터 바톤을 건네받아 이야기를 이어갔고, 사실 상 같은 자리에 마주하고 있는 것이 껄끄러운 상태에 있는 정민과 윤재는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기보다는 듣는 쪽의 입장을 고수해 나갔다. 애초에 타고난 성격이 차분하고 말수가 적은 윤재와 달리 평소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무리에 속해있었던 정민이 주문한 술병의 대부분이 비워질 때까지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 같이 모인 일행이 짐작하고 있듯 그의 마주한 위치에 윤재가 앉아있다는 불편한 사실 때문이었다.
몇 개월 전 동창생인 후영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당시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신나게 윤재의 험담을 했다가 준석과 몸싸움까지 벌였던 정민은 아직도 그 날의 일을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원인을 제공한 거야 자신이라고 쳐도 당사자도 아닌 주제에 다짜고짜 무식하게 주먹부터 날려 왔던 준석에 대한 분노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마음 깊은 곳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물론 준석이 아닌, 정작 당사자인 윤재가 주먹질을 했다고 해도 순순히 그 상황을 받아들였을 그는 아니었지만. 윤재의 입장에선 다소 기분이 상할 만한 이야기였을지 몰라도 사실 그때 자신이 했던 말에 틀린 부분이 있다고는 여전히 생각하지 않고 있는 정민이었다.
승태와 영욱이 이끄는 일상 얘기들을 조용히 듣고 있던 혜선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윤재에게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가 곧바로 아하하 크게 웃음소리를 냈다.
“윤재 너 지금 참치찌개 덜어놓고 콜라랑 같이 먹고 있는 거야?”
앞 접시에 담긴 얼큰한 참치 찌개 한 숟갈을 입에 넣은 뒤 이어서 콜라를 조금씩 마시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보고 있는 혜선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찌개와 밥도 아니고, 그렇다고 찌개와 술도 아니고 찌개와 콜라라니.
이상한 음식 조합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조금은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사람이 꼭 외모와 성품이 비례한다는 법은 없지만 윤재를 볼 때면 어느 정도는 외모에 성품이 묻어난다는 세간의 얘기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색이 술집 사장님이 돼서 술을 입에도 못 댄다니 신기하다 너.”
웃음 섞인 혜선의 말에 윤재를 대신해 영욱이 대꾸했다.
“이 녀석 소주 몇 잔에도 뻗으니까. 그래도 준석이라도 같이 있었으면 좀 마시라고 했을 텐데 오늘은 혼자 왔으니 강요도 못하겠고.”
“찌개만 먹으면 속 버리니까 여기 이 감자튀김도 같이 먹어 봐. 적당히 짭짤하고 맛있다.”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접시를 든 혜선이 그것을 윤재의 앞에 놓아준 순간 갑자기 딱딱한 유리잔 바닥이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잘 먹고 있는데 뭐냐, 너?”
화기애애하게 이어지던 분위기를 순식간에 깨뜨린 건 혜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정민이었다. 자신의 가까이에 놓여 있던 접시를 조금 떨어진 윤재의 앞으로 옮겨준 혜선을 금방이라도 죽일 것처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은 불과 30여 분 전과 비교해 눈에 띄게 붉게 변해 있었다.
“뭐야... 그럼 한 접시 더 주문하면 되는 걸 갖고 뭘 그렇게 눈 하얗게 뜨고 쳐다봐?”
날 선 정민의 태도에 조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혜선이 그렇게 쏘아붙인 것과 동시에 자신의 앞에 놓인 접시를 집어든 윤재가 그것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졸지에 불편한 입장에 놓이게 된 윤재는 그 사이에도 여전히 혜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정민의 컵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중앙에 놓여 있던 맥주병을 들었다.
나머지 세 사람이 정민이 있는 자리에 굳이 자신을 불러낸 것은 몇 개월 전 그 날의 사건 이후 사이가 틀어진 자신들을 화해시키기 위해서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는 윤재는 개인적인 감정이야 어쨌든 친구들의 입장을 생각해 자신이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한 잔 받아.”
그렇게 말하고서 손에 든 병의 주둥이 부분을 비어있는 정민의 컵으로 가져가려던 윤재가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조정민! 너 진짜!”
자신의 컵 윗부분을 손바닥으로 감싸듯이 막아 앞으로 끌어온 정민의 행동은 그가 철저히 윤재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 전 혜선의 행동에 불이 붙은 차에 오히려 지금 윤재의 행동이 기름을 부은 격이 됐는지 좀 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운 기색을 띠우고 있는 그는 결국 낮게 욕설까지 내뱉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취기가 올라오고 있는 정민의 얼굴은 짧은 사이 더 붉게 변해 있었다. 사실 얼핏 보면 주당처럼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지만 실제 그는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만큼 술에 강한 체질은 아니었다.
상대가 보이는 명백한 거부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들고 있던 술병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은 윤재가 자리에 앉자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회복시키기 위해 곧바로 영욱이 앞으로 나섰다.
“야, 야, 지금까지 잘 지내와 놓고서 왜들 그러냐. 사회생활 해봐서 알겠지만 대학친구, 직장동료들보다는 그래도 고등학교 친구들이 제일 오래 간다?”
애써 웃는 얼굴을 하고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하는 눈앞의 영욱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진 정민이 잠시 동안 굳게 닫혀 있었던 입을 열었다.
“야, 서영욱. 이거 뭐야, 나한테 미리 말했던 거랑 모이는 멤버가 다르잖아?”
그렇게 말하고서 노골적으로 윤재를 노려본 정민이 또다시 낮게 욕설을 내뱉자 줄곧 그의 옆에 앉아 있던 혜선이 결국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조정민. 너 진짜 이렇게 자꾸 찌질하게 굴래? 애초에 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일부러 친구들이 화해하라고 자리까지 만들어 줬는데 사과는 못할망정 윤재가 먼저 어른스럽게 양보하고 나오는데도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뭐? 짓거리?”
“그래. 짓거리라고 했다, 왜? 이게 짓거리가 아니면 뭔데?”
“야, 이혜선. 네가 대체 뭔데 여기서 눈에 쌍심지 켜고 달려드는데? 김윤재가 네 서방이라도 돼? 왜 오버질이야? 둘이 벌써 떡이라도 쳤어?”
“뭐?”
예상치 못한 상스러운 말에 일순 말문이 막힌 혜선이 이내 한층 더 날카로워진 눈으로 정민을 노려봤다. 지금까지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가끔씩 술자리를 가지며 제법 돈독한 친구 관계를 유지해온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 금방이라도 죽일 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영욱과 승태 뿐 아니라 윤재까지 직접적으로 나섰지만 한 번 어긋난 두 사람의 관계는 쉽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오늘 이 자리를 만드는 데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건 혜선이었다. 몇 개월 전 후영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당시 예식장에서 일어났던 소동을 직접 목격한 뒤로 줄곧 그 날의 일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었던 그녀는 언젠가 때를 봐서 두 사람이 화해할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사건을 일으킨 정민이 먼저 사과만 한다면 마음 넓은 윤재는 분명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혜선은 그 뜻대로 상황이 전개될 경우 후영의 결혼식 이후로 각각 정민과 윤재 파로 갈려 있는 동창 내에서의 분위기가 다시 이전처럼 회복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 그 소동이 일어났던 날까지만 해도 친구들 사이에서 남자답고 호탕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던 정민이 어째서 친구들을 앞에 두고 그런 막말을 했던 건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혜선이었다. 평소 생활권이 겹치는 사람들끼리 좀 더 자주 만남을 갖다보니 자연히 먼 지역에 사는 윤재보다는 가까운 곳에 사는 정민과 더 자주 만나 놀았던 혜선은 자신과 함께 있을 때의 정민이 보였던 활기찬 분위기를 나름대로 좋게 평가해왔었고, 그랬던 만큼 그 날의 사건은 더욱 씁쓸한 기억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가해자의 입장에 있는 정민이야 어쨌든 두 사람의 화해로 그 날 이후 윤재의 마음에 깊이 남아 있을 상처나 앙금을 지워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던 혜선은 결과적으로 괜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윤재의 입장만 더욱 난처해지게 된 것 같아 무척이나 속이 상했다. 약속을 정하고 진행하는 내내 일부러 두 사람에게 서로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던 노력도 이걸로 한 순간에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나이가 몇인데 좀 더 어른스럽게 행동할 수 없어?”
“뭐? 야, 이혜선. 남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해. 그리고 좀 솔직해지자. 화해를 위한 자리 어쩌고 하는 건 그냥 구실이었던 거잖아? 김윤재 불러내려고. 왜? 둘이서 직접 만나자고 하려니까 쑥스러웠어?”
“뭐...?”
“전에 있던 술자리에서 은혜가 윤재한테 고백할까 어쩔까 고민 중이라고 하니까 윤재는 일이 바빠서 연애에 관심 쏟기 힘들 거라고 은근슬쩍 방해하던 게 너잖아? 그래놓고 지금 여기선 살살 웃는 얼굴로 끼 부리면서 접시 놔주고 편들어주고 그런 식으로 점수 따려고 머리 쓰고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게 내 앞에선 콧대 높게 굴더니 씨발, 그래서 결국 기껏 눈에 찬 게 이런 다리병신...”
“야-!”
비웃음 섞인 정민의 말에 끝내 참기를 포기한 혜선이 있는 힘껏 손을 휘둘러 정민의 따귀를 때린 것과 동시에 터져 나온 날카로운 마찰음이 짧게 주변에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가게를 채우고 있는 손님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해졌다.
꽤나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신나게 말을 이어가던 중간 예상치 못하게 뺨을 얻어맞은 정민이 한 템포 늦게 자신이 당한 일을 깨닫고서 천천히 손을 들어 혜선의 손이 치고 간 자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잠시 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는 곧바로 눈을 뒤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에 보는 눈이 많다는 사실도,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도 머릿속에서 지운 채 당장이라도 주먹을 쓸 기세로 혜선의 앞으로 다가서는 정민을 막은 건 급하게 두 사람의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윤재였다.
“추태 적당히 부려.”
자신의 팔을 붙잡은 것이 다름 아닌 윤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과 동시에 황당한 표정을 지은 정민이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우람한 체격을 가진 그에게 있어 비쩍 마른 데다 몸도 성치 않은 윤재는 애초에 진지하게 대할 급도 되지 않는 나약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던 만큼 그가 이처럼 윤재를 상대로 업신여기는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었다.
“뭐? 추태?”
“.......”
“왜? 이 새끼야. 어디 이 기회에 정의의 기사 흉내라도 내보게?”
“너야말로 뭐하려는 건데? 여자상대로 주먹이라도 쓰려고?”
“아... 이런 식으로 점수 따는 거야? 은혜도 그렇고 이혜선도 그렇고 이렇게 젠틀한 척 해서 꼬셨나 보지? 그래, 어디 이 기회에 나도 좀 배우자.”
“조정민.”
좀처럼 남들에게 들려준 적 없는 낮은 목소리로 정민의 이름을 부른 윤재가 그 사이 곁으로 다가와 정민의 팔을 붙잡은 영욱과 승태에게 시선을 던졌다. 말로는 계속 중재를 위해 애를 썼던 두 사람은 정작 실제 몸싸움까지 번질 정도로 상황이 험악하게 진행되자 윤재보다 몇 발자국은 늦게 몸을 움직였다. 얼굴 상태로 보아 두 사람 역시 정민 못지않게 취기가 올라와 있는 상태인 듯 했다. 지금 다섯 명 중 온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체질 상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은 윤재와 소량의 술을 마신 혜선 두 사람이었지만, 조금 전 험악한 상황에까지 몰렸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혜선은 현재 취기와는 다른 의미로 흐트러진 정신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결국 영욱과 승태의 적극적인 중재에 의해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힌 정민이 한참 만에 다시 제자리에 앉았지만, 이미 갈 데까지 가버린 테이블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닥까지 가라앉아버린 상태였다.
혜선의 의견에 따라 좋은 뜻에서 화해할 자리를 마련하는데 함께 힘썼던 영욱과 승태는 잔뜩 굳어 있는 혜선과 정민, 윤재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는 중간 계속해서 잔을 채워 입으로 가져갔다. 딱히 해결할 방법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술로라도 마음을 달래겠다는 생각이 그들의 행동에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게 불편한 시간이 십여 분 쯤 흘렀을 때쯤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혜선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포착한 윤재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윤재야. 왜?”
승태의 질문에 대답 없이 지갑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는 윤재가 혜선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든 혜선의 눈가가 예상대로 발갛게 변해 있었다.
“우리 먼저 갈게.”
“어?”
“오늘은 아무래도 술 마시고 놀 분위기가 아니니까.”
“아... 그래.”
취한 정민이 한바탕 난동을 부려놓은 탓에 완전히 가라앉아버린 분위기를 좀처럼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승태와 영욱은 먼저 가겠다는 윤재의 말을 비교적 흔쾌히 받아들였다.
인사는커녕 고개조차 돌려오지 않는 정민에게 마지막으로 슬쩍 한 번 시선을 던진 뒤 한참 만에 불편한 자리를 빠져나온 윤재는 잠시 후 묵묵히 자신의 곁에서 걷고 있는 혜선을 쳐다보았다. 아까 전 술에 취한 정민과 험악한 상황까지 갔던 데에 대한 충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인지 가게를 빠져나온 뒤에도 혜선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나는 버스 타는데 너는?”
“난 지하철...”
“그래. 그럼 지하철역으로 먼저 가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혜선과 함께 근처 지하철역으로 향하기 시작한 윤재가 밤이 깊어져 한층 화려해진 거리를 걷던 중간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일, 너무 깊이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네가 힘들어.”
“...알아.”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혜선은 다시 꾹 입을 다물었다. 모처럼 공을 들인 화장이 눈물로 젖어버린 것이 신경 쓰이는 것인지 걷는 내내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던 그녀는 잠시 후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에 다다른 뒤에야 간신히 고개를 들어 윤재를 쳐다보았다.
괜찮다는 혜선의 말에도 끝내 계단을 내려와 개찰구까지 바래다 준 윤재가 입을 열었다.
“가. 다음에 보자.”
“.......”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혜선을 보고 역시 아까의 일로 많이 놀란 모양이라고 생각한 윤재는 잠시 후 들려온 ‘미안해.’라는 사과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왜 네가 미안한데?”
“오늘 자리 마련한 게 나니까.”
“.......”
“정민이랑 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화해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면 네 안에 남아 있는 앙금이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해서. 결국엔 이렇게 더 안 좋은 일만 당하게 만들었지만.”
그렇게 말하며 쓰게 웃은 혜선이 이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순식간에 빨개진 그녀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실제 결과는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일부러 자신을 생각해 자리를 마련해준 혜선의 마음을 이해한 윤재는 의식적으로 한결 더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난 별로 상관없어. 오늘 자리에서 화해하면 좋았겠지만 솔직히 말해 앞으로 평생 정민이랑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해도 크게 아쉬울 건 없어. 어차피 우린 그렇게 친한 관계도 아니었고...”
“.......”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집에 들어가서 푹 자.”
괜히 정민의 존재도 모르고 불려 나왔다가 불쾌한 일을 당해 기분이 상했을 텐데도 애써 자신을 생각해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윤재의 모습이 오히려 한층 더 아프게 눈에 박혀온 혜선은 잠시 후 곁을 스쳐가는 행인들을 따라 자신도 개찰구를 향해 몸을 돌리려다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혜선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돌아서려고 마음먹고 있던 윤재는 갑자기 다시 자신에게 몸을 돌려 다가오는 혜선의 모습을 조금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무슨 할 말 있...”
“윤재 너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
생각지 못한 질문에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은 윤재가 곧바로 대답을 내놓지 않자 그런 그의 반응을 부정으로 해석한 혜선이 말을 이었다.
“없으면... 나랑 사귈래?”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시선으로 묻는 윤재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혜선이 쓴웃음을 짓고서 말했다.
“아까 그 자식이 했던 말... 아주 다 틀린 말은 아니야.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은혜가 너랑 사귀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은근슬쩍 방해한 거 사실이야.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갑작스런 이야기에 여전히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를 앞에 두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혜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전혀 눈치 못 챘던 것 같지만 나... 사실은 꽤 오랫동안 너 좋아했어. 친구로서가 아니라 이성을 보는 눈으로. 내 나름대로는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조정민 눈에는 보였나 봐.”
“.......”
“넌 나를 지금까지 평범한 친구로만 봐왔을 거라는 거 알아. 그래서 내가 갑자기 이런 고백을 해서 많이 놀랐을 거라는 것도 알아. 그래도 말하고 싶었어. 물론 아까 조정민이 그런 얘길 하지 않았으면 평생 이런 용기 내지 못하고 계속 숨기고 있었겠지만.”
지금 윤재가 느끼고 있을 당혹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혜선은 좀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여 오지 않는 윤재의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금 전 스스로가 말했듯 정민의 폭로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평생 윤재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채 평범한 친구로서만 지냈을 거라고 혜선은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조금 전 있었던 정민의 난폭한 행동을 결코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로 인해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으니 아주 조금이라면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윤재를 남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늘 조용히 무리에 섞여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윤재의 모습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정도의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노느라 정신이 팔린 남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침착한 분위기를 잃지 않았던 윤재는 학교가 자랑하는 모범생이었고 당시의 기억으로 그런 그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은 꽤 많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혜선은 윤재를 좋은 친구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마도 윤재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 건 그가 큰 사고를 당해 다리를 절게 되면서일 거라고 혜선은 기억 속을 더듬어 짐작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절망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겪고서도 이전과 다름없이 예쁘게 웃는 그의 모습은 볼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렸고, 그런 감정을 알게 된 이후로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하던 중간 중간 윤재를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었다. 아마도 그것이 시작이었을 거라고 혜선은 짐작하고 있었다.
“대답... 지금 당장 하기 어려우면 생각할 시간을 줄게.”
잠시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혜선이 말하자 문득 윤재의 표정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그 사이에도 꾸준히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이 개찰구 앞에 마주보고 서있는 두 사람을 한 번씩 훑어보고 지나치고 있었다.
“미안해. 혜선아.”
“!”
한참 만에 입을 연 윤재가 건네 온 것은 사과의 말이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만큼 혜선은 어리석지 않았다.
“거절...이야?”
“.......”
“지금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데... 바로 연인으로 가는 게 부담스러우면 일단 친구부터 시작해도...”
“미안해. 난....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아.”
“.......”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난 널 친구로밖에는 볼 수 없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윤재의 대답은 확고했다. 일말의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는 혹시 다른 길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마저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윤재는 분명한 거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서울 만큼 냉정히.
이렇게까지 시원스레 거절을 당하면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알았어. 사실 이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건 이미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충동처럼 고백을 해놓고서 곧바로 좋은 답을 들을 거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던 혜선은 오히려 지금의 거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충동적인 고백은 자신에게도 좋지 않지만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그녀는 조금 전 잠시 보였던 냉정한 태도를 지우고 평소대로 돌아와 있는 윤재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도 말하고 나니까 속이 다 후련하다. 네가 너무 시원하게 뻥 차준 덕분에 이제 미련도 버릴 수 있게 될 것 같고. 고마워.”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조금 곤혹스런 표정을 짓는 윤재의 앞으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린 혜선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잘 좀 먹고 다녀. 어째 볼 때마다 더 핼쑥해지는 것 같다. 넌.”
“.......”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럼 난 이만 갈게.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손목에 시선을 던져 시간을 확인한 혜선이 윤재에게 짧게 인사를 남긴 뒤 서둘러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걷던 중간 슬쩍 몸을 돌려 윤재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인 그녀는 곧 다시 등을 돌려 걷다 이내 계단 아래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혜선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지만 그녀의 눈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상대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분명한 거절의 말을 건넨 윤재의 마음 역시 좋을 리 없었다. 그것도 상대는 벌써 1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알고 지내온 친구인 만큼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더욱 컸다.
그러나 답은 분명히 정해져 있었고, 그럴 바엔 차라리 상대가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태도를 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윤재는 생각했다. 좀 더 신중히 생각해 보겠다느니 친구부터 시작을 하자느니 하는 등의 여지를 남기지 않은 건 그와 같은 생각에 따른 것이었다.
아까 전 혜선이 가게 안에서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녀에 대한 안쓰러운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연민으로 중요한 고백을 승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가 말했던 대로 윤재는 지금껏 혜선을 단 한 번도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그 이전에 가뜩이나 수많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한 지금 새롭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여놓을 여유 자체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마지막으로 보았던 혜선의 모습을 무거운 마음으로 떠올리던 윤재는 급하게 곁을 지나는 행인에게 어깨를 부딪쳐 현실로 돌아왔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상대에게 괜찮다고 대답한 그는 그제야 천천히 등을 돌려 지하철 입구로 향했다.
***
집에 돌아오니 꽤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실제 혜선 일행과 함께 보낸 시간 자체는 길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꽤 먼 약속장소까지 오가는 데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 탓이었다. 체력적인 부분이야 어쨌든 외출 동안 겪은 가볍지 않은 일들로 인해 정신적인 면에서 적지 않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윤재는 일단 샤워를 뒤로 미루고 거실 소파에 길게 몸을 뉘었다.
피곤하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지만 어째서인지 막상 눈을 감자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져갔다. 가장 먼저는 몇 시간 전 술집에서 일어났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후 지하철역에서 혜선과 주고받았던 대화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단 네 시간에 걸쳐 이뤄진 외출은 평소 그보다 두 배 이상이 소요되는 가게 일을 할 때보다 더 많은 체력적 손실을 낳았다.
몸은 피로한 가운데 정신은 점점 또렷해져 이대로 잠을 이룰 수도 없는 상태가 된 윤재는 가벼운 한숨으로 체념하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나갔다.
얼마 전까지 비가 내렸던 탓에 아직 축축이 젖어 있는 밤 골목은 오늘도 평온했다.
취해서 비틀거리며 걷는 중년의 남성, 한바탕 비가 내린 뒤에도 골목 곳곳에 나와 있는 폐지며 플라스틱을 주우러 다니는 머리 희끗한 어르신, 서로에게 꽉 밀착된 채로 걷는 연인, 소심하게 어딘가에 숨어 냥냥거리는 길고양이.
늘 봐온 익숙한 풍경을 잠시 가만히 눈에 담던 윤재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근처 테이블에 놓여 있던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한동안 가게 일로 바빠 소박한 취미생활조차도 누릴 수 없었던 것에 간간이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던 그는 모처럼 만에 가게를 쉬고 여유로운 시간을 갖게 된 지금 자연스럽게 스케치북과 연필부터 손에 들었다. 실제적으로 따지면 그림을 그리지 못한 기간이라고 해봐야 보름을 조금 넘기는 정도였지만, 어째서인지 손에 닿는 연필의 감촉이 평상시보다 많이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렸던 게 선인장이었던가...’
오랜 만에 정물화가 아닌 풍경화를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잠시 베란다 너머의 골목 풍경을 시야에 담았다가 스케치북을 펼친 윤재는 중간쯤부터 차곡차곡 자신이 그린 그림들로 채워져 있는 장들을 하나둘 넘기던 도중 문득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
생각지 않게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앞장까지 채워져 있던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화풍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아니, 사실은 화풍이라는 말을 쓰는 것조차 민망한 낙서 수준의 그림이었다.
불안정한 선으로 간신히 이뤄진 것은 인체비례를 깡그리 무시하고 완성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이상한 얼굴의 주인이 누구인지 윤재는 알고 있었다.
중앙에 몰린 커다란 눈과 긴 코, 흡사 두더지의 주둥이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입술, 로봇처럼 각이 져 있는 어깨.
이 그림의 모델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부분은 몸에 걸쳐져 있는 셔츠의 무늬뿐이었다. 정작 중요한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도 셔츠의 디테일한 무늬 부분은 나름대로 신경을 쓴 듯 제법 원본과 비슷한 형태로 완성이 되어 있었다.
자연스레 머릿속에는 그 날의 일이 떠올랐다.
뜻밖의 서툰 그림을 보고 소리를 죽이지 못한 채 웃던 자신을 향해 그는 말했었다.
‘그렇게까지 웃으면 상처 받아.’라고.
당시만 해도 대충 가볍게 휘갈겨 그린 모양이라고 웃으며 넘겼었던 윤재는 다시 한 번 찬찬히 그 날의 그림을 눈에 담고 있는 지금, 비교적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는 셔츠의 무늬 등을 통해 당시 수영이 서툰 솜씨로나마 나름대로 진지하게 그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처음 얼마 간 두더지를 떠오르게 하는 이상한 얼굴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던 윤재는 그러나 서서히 얼굴 위에 드리우고 있던 미소를 걷어냈다. 이윽고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이 된 그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불과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일이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 이상했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세세한 부분이 어째서 이제 와서 이렇게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곧 끝나면 그때 수영은 머릿속에서 잊혀있었던 이 그림처럼 그저 지나간 기억의 흐릿한 한 조각으로 남게 될까. 간절히 지우려 애를 쓰면 정말로 깨끗이 지워낼 수 있을까. 애초에 우수영이라는 남자가 단 한 번도 김윤재의 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재회 이후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머지않아 자신의 곁을 떠날 사람이니 작은 마음의 한 부분조차 줘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되면 상처를 받게 되는 건 자신일 뿐이라고. 그것은 그간 셀 수없이 되뇌었던 주문이었다. 혹시라도 마음이 흔들릴라치면 스스로를 강하게 다잡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그것은 간신히 아문 상처 위에 덮여 있는 막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윤재는 그토록 필사적으로 지키기 위해 힘써왔던 그 ‘막’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상당 부분 벗겨져나가 버린 상태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은 자신을 향한 수영의 행동과 말들을 이전처럼 덤덤히 넘길 수가 없었다. 애써 생각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전화를 거는 사소한 일조차 주저되어 하지 못했음에도 결국은 수영을 만나러 직접 병원까지 찾아갔던 스스로의 행동을 윤재는 지금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우는 건 정말 싫은데, 그래도 만약 내가 그 상황에서 정말 사고로 죽게 된다면, 그땐 네가 조금은 울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의식적으로 묻어두고 있었던 수영의 말을 다시 귓가에 되살린 순간 윤재는 다시 한 번 가슴이 강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수영의 고백을 듣는 내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강한 가슴의 통증을 느꼈던 것인지.
이미 한참 전부터 끝을 준비하고 있었던 자신은 순수하게 부딪쳐오는 수영의 마음이 무서웠던 거였다.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피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팠고, 그래서 그렇게나 진지하게 이어진 수영의 고백에 잠시나마 기쁜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던 거였다. 마치 해서는 안 될 일을 눈앞에 둔 겁먹은 어린 아이처럼.
그 순간만 넘기면 모두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평범한 미래를 위해서는 당장의 아픔만 삭이면 될 거라고. 그래서 수영이 끝내 스스로가 가진 모든 패를 내보이며 다가올 때도 자신은 그 마음 한 조각 받아들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만약 또다시 마음을 주었다가 같은 일을 당하게 되면 그때 자신은 평생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마지막까지도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 무서웠다.
병원에서 수영과 만남을 가진 뒤로 쭉 머릿속을 채우는 수많은 생각들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윤재는 이제 간신히 자신의 안에 있는 아픔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시간 전 혜선으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고 난 뒤에야.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고백을 듣고 놀란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이후에도 윤재의 마음을 채운 건 그저 당혹감과 미안함의 감정뿐이었다. 어렵사리 용기를 냈을 혜선에겐 미안하게도 그녀의 고백을 듣고 나서 단 한 순간조차 기쁨이나 가슴을 옭죄는 절절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던 윤재였다. 그저 이미 정해진 답을 전해야 하는 입장에서 미안한 감정만을 안고 있었던 윤재는 결국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처음 정해두고 있던 대답을 건넸다. 물론 뒤따르는 후회는 없었다.
돌아서서 멀어져가는 혜선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배웅하는 짧은 시간동안 윤재는 쓰게 웃었다. 불과 며칠 전 수영에게서 들었던 고백에 가슴이 저릴 정도의 아픔을 느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조금 전 혜선의 고백을 들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동요했던 그때 자신의 모습을 그는 순식간에 바로 몇 분 전의 일처럼 생생히 기억해냈다. 심지어 혜선이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말을 꺼냈던 순간에조차 그는 이미 오래 전 그것과 똑같은 말을 했던 남자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언젠가 어스름한 방안 한켠에 서서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남자의 모습을.
수영의 절실한 고백을 들은 이후 수많은 밤을 꼬박 새우고서도 찾지 못한 답을 이제야 간신히 찾아낸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 비친, 그의 모습 안에서.
앞으로 얼마의 긴 시간이 걸리든지 자신은 끝내 그를 깨끗이 지워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손에 들려 있는 서툰 그림을 한참 동안 말없이 내려다보던 윤재가 하얘질 만큼 질끈 깨물고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해, 너를.’
기억 밖으로 억지로 떨쳐내고 있었던 수영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귓가에 되살려낸 윤재가 순식간에 뜨거워진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그 고백을 듣던 당시엔 그저 아프고 아파서 퍼렇게 물들어갔던 마음이 지금은 그때와 다른 색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제야 간신히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줄곧 애써 억누르고 외면해 왔던 이 선명한 색을 머금은 감정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자 가슴을 옭죄던 통증은 거짓말처럼 서서히 사라져갔다. 물에 풀려 너울너울 춤추다 사라져가는 물감처럼.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낸 윤재가 손에 들린 스케치북 속 두더지 닮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온통 검은 구름으로 덮여 있던 새파란 하늘이 이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