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나도 그렇게 듣기는 했는데 그게 정확한 소문인지는 모르겠어. 오늘 퇴근 후에 그쪽 병원으로 간 사람들이 내일 회사에서 만나면 얘기해주겠지.”
“근데 같은 사고를 당했는데 왜 두 분은 다른 병원으로 갈린 거야?”
“처음엔 같은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나중에 우대리님이 옮기신 것 같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 어쨌든 나도 내일이나 모레쯤 우대리님 계신 병원에 가봐야겠다. 얼마 전에 내가 한 실수 때문에 괜히 대리님까지 덩달아 야근을 하셔서 계속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커다란 선물 바구니라도 사서 가져가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우대리님한테 폐 끼치다니 너 간도 크다.”
“안 그래도 그때 속으로 엄청 쫄았었는데 의외로 크게 얘길 듣진 않았어. 근데 입 딱 다물고 손가락만 움직이는데 오히려 그게 더 무서운 거 있지.”
들려오는 대화를 잠시 동안 진지하게 듣고 있던 윤재가 결국 몸을 돌려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윤재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동시에 고개를 돌린 두 사람 가운데 평소 좀 더 <민들레>를 자주 찾는 쪽인 정훈이 미소를 머금고서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사장님. 사장님은 평소에 홀에 잘 안 나오셔서 그런지 내가 여기 자주 들르는 데도 오랜 만에 얼굴 보는 것 같네요.”
반가움이 담겨 있는 정훈의 말에 일단 형식적인 미소를 머금고 ‘그러네요.’라고 짧게 대답한 윤재가 이내 표정을 바꾸고서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본의 아니게 옆에서 두 분의 대화를 좀 들었는데 좀 전에 하신 말씀이 사실인가요? 양과장님과 우대리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신 건가요?”
윤재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심각한 표정을 보고서 덩달아 진지해진 표정을 지은 두 사람이 슬쩍 서로를 마주본 뒤 다시 윤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건 정훈이었다.
“네. 사흘 전 밤에 두 분이 같은 택시를 타고 가시다가 봉변을 당하셨어요. 양과장님께서 1팀 몇 사람을 지목해서 같이 술자리를 갖자고 하신 것 같은데 술자리가 끝난 뒤에 우대리님이 취한 양과장님을 바래다주시기로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같이 사고를 당하셨고요.”
정훈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라 대략의 정황에 대해 알게 된 윤재는 그보다 중요한 사안을 떠올리고 다시 질문을 건넸다.
“많이 다치신 건가요? 두 분 다?”
“양과장님은 아까 직접 병문안 갔다 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부상이 좀 심하신 것 같아요. 그렇다고 위험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요. 우대리님은 양과장님보다는 부상이 덜 하다는 얘길 얼핏 들었는데 아직 직접 본 건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말씀드리기는 어렵고요.”
“좀 전에 우대리님이 쇄골 골절을 당하셨다고 하셨는데 그건 확실한 건가요?”
“저도 그냥 대충 지나다가 들은 거라서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아요. 사람마다 조금씩 말이 달라서요.”
차분하게 이어지는 정훈의 대답을 들은 윤재는 ‘네...’라고 다소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나마 양과장보다는 나은 상태라고 하지만 더 나은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그와 같은 얘기들도 아직까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사실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소문에 불과한 듯 했다.
모르면 모를까 알고 나니 솔직히 걱정이 되었다.
평소 절대 다치거나 쓰러지지 않을 것처럼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남자이기 때문인지 그가 현재 부상을 당한 채 회사를 쉬고 있다는 사실이 윤재에겐 곧바로 현실로 와 닿지가 않았다.
사고가 난 뒤로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 수영에게서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예 연락 자체가 없었다. 그 전 날까지만 해도 마치 정해진 규칙처럼 하루에 한 두 차례씩은 문자든 통화든 꼬박 연락을 해오던 수영이었기 때문에 오늘로 이틀째 이어지고 있는 공백은 어딘가 묘하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사실, 사고 얘기를 전해 듣기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일이 바빠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윤재는 뜻밖의 비보를 접하게 된 직후부터 최근 이틀간의 무소식을 나름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 병원에 들렀다가 모친으로부터 수영의 방문 소식을 전해 들었던 것이 줄곧 마음 깊이 남아 있었던 윤재의 머릿속엔 몇 가지 상상에 의한 장면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중 대부분은 수영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누워있는 모습으로, 어째서인지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떠오르는 상상들은 점점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여기, 주문할게요!”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잠시 동안 진지하게 이어지던 생각을 멈추고 현실로 돌아온 윤재가 정훈 일행에게 짧게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커플에게로 다가갔다.
“일단 양파 소스 오징어 버터구이 두 접시하고요...”
활기찬 목소리로 이어지는 주문에 따라 주문서를 체크해나가는 윤재의 얼굴엔 접객용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동시에 그의 머릿속 한켠은 여전히 조금 전 떠올렸던 일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들어가 몇 가지 종류의 음식을 바쁘게 만들던 도중 결국 미리 만들어놓은 음식을 바닥에 쏟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윤재는 접시가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놀라 황급히 홀에서 달려온 성호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자신이 치우겠다고 말했다.
“깨진 접시는 제가 치울 테니까 그냥 두세요. 그러다가 손 베여요.”
평소답지 않은 실수를 저지른 윤재를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고서 그렇게 말한 성호가 재빨리 주방 밖에서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찾아 들고 돌아와 졸지에 쓰레기가 되어버린 음식과 깨어진 접시 파편을 치우기 시작했다. 사실 몇 개월 간 이곳에서 꾸준히 일을 해오는 동안 성호가 이처럼 기본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윤재를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간 윤재가 보여 온 꼼꼼한 일처리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성호의 눈에는 실수를 저지른 뒤에도 어딘가 묘하게 떠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윤재가 조금은 이상하게 비쳐지고 있었다.
정해진 패턴대로라면 오늘 오후 윤재가 병원에 갔다 왔을 거라는 사실을 뒤늦게 머릿속에 떠올린 성호가 어느 정도 바닥을 치워낸 뒤 그 사이 다시 새롭게 접시에 음식을 담아내고 있는 윤재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오늘 병원에 갔다 오셨죠?”
성호의 질문을 받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그렇다고 짧게 대답하자 잠시 텀을 두고 성호의 질문이 이어졌다.
“혹시... 저기... 뭔가 안 좋은 얘기를 들으신 건가요?”
어째서 이 타이밍에 성호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건네고 있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윤재가 다시 새롭게 완성된 접시를 근처에 놓아둔 쟁반 위로 옮기며 대답했다.
“아니, 오히려 반대야. 아까 전 병원에 갔더니 상태가 전보다 호전되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얼마 전에 만난 주치의선생님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대답해주셨고. 당분간 추이를 더 지켜봐야겠지만 한 달 전이랑 비교하면 상태가 꽤 안정적으로 변한 것 같아.”
“아, 그래요? 다행이에요.”
“응.”
진심어린 성호의 말에 웃는 얼굴로 대답해준 윤재는 그러나 좀 전의 자신이 성호가 금세 알아차릴 만큼 흐트러진 상태였다는 걸 자각하고 속으로 쓰게 웃었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일에만 집중하자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끗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여기, 계산 좀 해주세요-!”
문득 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윤재의 다리가 움직였다.
“성호야. 이 접시, 지금 끓고 있는 냄비랑 같이 4번 테이블로 좀 가져다줘.”
“네.”
성호에게 짧게 지시를 내리고 계산대 앞으로 가서 선 윤재가 손에 남아 있는 물기를 앞치마에 대충 닦아내고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훈으로부터 카드를 건네받았다.
“오늘도 맛있게 잘 먹었어요.”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내가 여기저기 입소문 내고 다니고 있으니까 점점 손님이 늘어날 거예요. 우리 회사 안에서만도 내가 전도한 사람이 몇인 줄 몰라요.”
덧붙여진 농담에 스치듯 미소를 머금은 윤재는 잠시 후 영수증과 함께 받아든 카드를 지갑에 도로 집어넣으며 입구로 향하는 정훈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잠깐만요.’라는 말로 그를 불러 세웠다.
“어? 계산에 잘못 된 게 있나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정훈을 잠시 그대로 바라보던 윤재가 짧게 이어지던 망설임을 떨쳐내고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질문 하나만 좀 할게요.”
***
얼마 간 병실 안을 채우던 사각거리는 소리가 멎은 뒤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사과 한 조각을 쳐다본 수영이 고개를 들었다.
“하나 먹어 봐. 달다고 해서 사왔어.”
“생각 없어.”
“진짜 인정머리 없긴. 일부러 깎아주는데 맛보는 성의라도 좀 보여 주지.”
그렇게 말하며 붉은 입술을 삐죽 내민 건 십여 분 전 문병 차 이곳을 찾은 뒤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수영의 옆에서 억지로 말동무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늘씬한 미인으로, 그녀는 수영이 고등학교 시절 처음 알게 된 뒤 벌써 10년이 넘도록 친분을 쌓고 있는 친구 중 한 명인 세은이었다. 미국에서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전까지 평범하게 회사 생활을 하다가 현재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잠시 휴직 상태에 있는 그녀는 새침한 외모와 달리 무척이나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로써 수영과는 말 그대로 순수한 친구의 관계에 있었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수영과 만나 알게 된 뒤로 몇 개월 동안은 당시의 남자 친구 몰래 수영을 상대로 복잡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던 세은은 수영이 결코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끗이 인정한 뒤로는 쭉 평범한 친구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었다. 제법 긴 시간을 알고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수영과 육체적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는 사실은 어느 새부터인가 그녀에겐 하나의 빛나는 훈장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송여진이 연락했어?”
“아니, 따로 연락을 받은 건 아니고... 어제 저녁에 통화하던 중간에 여진이가 네가 다쳐서 혼자 문병 갔다 왔다는 얘길 하더라. 그 얘기 듣고 깜짝 놀라서 어느 병원이냐고 내가 물어봤지.”
예상한 대로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파일을 덮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은과 여진은 고등학교시절 짧게 사귀었다가 헤어진 이후로 중간에 수영을 포함한 몇 명을 넣어 평범하게 친구로 지내고 있는 관계였다.
“태호 넌 세은이한테 연락받고 온 거야?”
그때까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세은으로부터 받아든 사과를 아삭거리며 먹던 태호가 수영의 질문을 받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의 지인들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그보다 키가 큰 태호는 195센티의 키에 12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를 자랑하고 있는 남자로, 우락부락한 외모와 달리 유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지금부터 문병 갈 건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해서 가겠다고 했어. 너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 직접 보고 싶어서.”
“걱정이 돼서 온 게 아니라 얼마나 다쳤는지 궁금해서 온 거야?”
“뭐... 겸사겸사. 근데 이렇게 보니까 다행히 생각한 것보다는 괜찮은 것 같네. 어디를 어떻게 다친 거야?”
태호의 질문을 받고 일단 짧게 한숨부터 내쉰 수영이 두툼한 베개에 천천히 등을 기대고서 대답했다.
“늑골 두 군데에 금이 갔고 어깨랑 팔 몇 군데에 타박상을 좀 입었어. 나는 그나마 다행히 충돌한 면의 반대쪽에 앉아 있었던 덕분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과장님만큼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
“과장님은 많이 다치셨나 보지?”
“전치 7주라고 들었어. 나와는 다르게 몇 군데 심한 골절을 입은 상태라 한동안 회사 출근은 어려우실 모양이야. 운전한 택시 기사는 그보다는 조금 덜 다친 것 같고. 어쨌거나 상대방 차량의 백퍼센트 과실이니까 나머지 일은 어렵지 않게 처리될 거야.”
사고가 일어났던 당시를 짧게 떠올리고서 다시 한 번 짧게 한숨을 내쉰 수영이 그 순간 문득 울리기 시작한 벨소리를 듣고 근처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가 이번의 발신자는 그리 달갑지 않은 지인이라는 걸 확인하고 일말의 미련 없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몇 초간 더 이어지던 벨소리는 곧 뚝하고 끊겼다.
몇몇 지인들을 통해 사고 소식이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하루에 많게는 수십 통까지 안부 전화를 받고 있는 수영은 이제 슬슬 질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비슷한 질문에 따라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도 점차 피곤하게 느껴져 이럴 바엔 차라리 정해진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따로 녹음해 필요할 때마다 트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사고 소식이 회사에 전해진 날의 저녁 시간부터는 퇴근한 동료직원들의 집단 병문안이 이어지고 있어 이제 새로운 방문객이 병실 안으로 들어설 때면 반갑다기보다 귀찮다는 생각이 앞서는 수영이었다. 앞으로 계속 회사에서 얼굴 마주 보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형식상으로도 병문안을 해야 하는 동료직원들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냉정한 이성적 판단과 별개로 솔직한 감정은 지루함을 거쳐 점차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심한 부상은 아니라고 하지만 혹시 모를 후유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며칠 더 이곳에 입원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의 수영은 이런 와중에도 사고가 나기 직전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작성했던 파일 내용을 간간이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야근을 밥 먹듯이 해가며 집중해서 진행해온 일을 손에서 놓고 있는 지금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뉘어져 있는 몸과 달리 그의 기분은 아무래도 불편하고 초조한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수영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요인은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오늘로 사흘째 수영은 윤재에게 단 한 통의 전화나 문자도 하지 않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상대로부터 오는 연락도 없었다. 단순히 자신이 바빠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쪽의 일로 바빠 아예 자신으로부터의 연락이 끊긴 상태라는 것조차 윤재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드는 수영이었다. 연애를 염두에 둔 보통의 관계라면 흔히 말하는 밀당이라는 것도 해보겠지만 지금의 수영은 그저 한 결 같이 열심히 당기고만 있을 뿐이었다. 당장에 상대가 붙잡혀 있는 손을 억지로 뿌리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에 이런 일방적인 관계를 두고 서운한 감정을 느끼거나 불만을 갖는 것조차 사치라는 걸 물론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우련이한테 네 소식 알릴까 하다가 말았어.”
문득 들려온 말에 곧바로 세은에게 시선을 던진 수영이 약간의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쓸데없이 여기저기에 소문내고 다니지 마. 걸려오는 전화마다 똑같은 대답하는 것도 지치니까.”
“하여간 걱정해주는 사람들한테까지도 까칠하기는. 그러면서도 정작 문병 오는 동료직원들한테는 와줘서 고맙다며 친절하게 인사하고 있지? 얼굴 위에 가면 딱 덮어쓰고.”
“당장 회사 때려치울 거 아니면 그 정도는 해야지.”
“어휴, 이런 시꺼먼 속도 모르고 겉모습만 보고 젠틀하다며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고 있을 동료직원들이 불쌍하다.”
세은의 말에 짧게 코웃음을 친 수영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한 벨소리를 듣고 긴 팔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오늘 아침에서 시작해 지금까지만 벌써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몇 차례나 받은 터라 웬만하면 받지 않고 그냥 넘기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그는 액정에 떠올라 있는 ‘우휘영’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마지못해 통화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톤으로 중간 중간 이어지는 수영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가볍게 기지개를 켠 세은이 여전히 긴 의자 한 켠을 차지하고서 엉망으로 깎인 사과를 맛있게도 먹고 있는 태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수영이 먹으라고 깎아놓은 건데 왜 네가 다 먹고 있어?”
“어차피 오래 놔두면 맛없어지잖아.”
여전히 입안에 든 사과를 아삭거리며 대답하는 태호를 향해 살짝 미간을 찌푸려 보인 세은이 천천히 한 손을 들어 날씬한 허리에 얹었다.
“그래... 뭐, 놔둔다고 해서 나중에 먹을 것 같지도 않지만. 하여튼 사람 성의 무시하는 데에는 뭐 있다니까. 환자복 입고 있는 동안은 좀 온순해 지려나 했더니 완전 평소 그대로야.”
“그만큼 크게 다치지 않은 거니까 잘된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을 싫어하는 수영의 성격상 다른 환자들과 함께 쓰는 병실에서 잘 지낼까 하는 걱정을 했었던 세은은 역시나 예상대로 수영이 처음 옮겨진 병원에서 만 하루도 채우지 않고 작은 아버지가 원장으로 계시는 대형병원의 특실로 옮겼다는 얘길 여진으로부터 전해 듣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 사고를 당했던 여진도 수영의 친구라는 이름하에 혜택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하물며 귀한 집안에 속한 당사자인 수영이 사람 북적거리는 병실을 사용할 리 없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세은에게는 덧붙여 들려온 수영의 이동 소식이 차라리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다음 생애에는 자신도 좀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길 다시금 진지하게 빌어보게 되는 그녀였다.
“사과 하나 더 깎아줘?”
“아니야, 됐어. 바나나 먹을 거니까.”
“어째 문병하러 온 게 아니라 먹으러 온 거 같다. 넌.”
“이 몸 유지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냐?”
“아... 그러셔...?”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등 뒤로 넘기며 그렇게 중얼거린 세은이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반사적으로 문 쪽에 흘깃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몸을 돌려 통화에 집중하는 수영을 대신해 천천히 입구로 다가간 그녀는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 방문자의 모습을 빠르게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마른 체격, 단정한 얼굴, 수수한 옷차림.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 낯선 남자의 모습을 잠시 관찰하듯 훑어본 세은이 이내 형식적인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우수영씨 문병 오신 건가요? 지금 안에서 누구랑 통화중인데 일단 들어오세요.”
“아... 아닙니다. 먼저 손님이 와계신 것 같은데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듣고 왔는데 몸 상태는... 괜찮은가요?”
상대가 건네는 작은 음료수 박스를 무심코 받아든 세은이 ‘네... 뭐,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좀 전까지 살짝 굳어져 있던 남자의 얼굴 위로 엷게나마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수영의 지인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많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눈앞의 수수한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던 세은은 잠시 후 자신에게 꾸벅 가벼운 목례를 하고 돌아서서 멀어지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병실 안으로 돌아왔다.
“누구야?”
이쪽을 바라보며 묻는 태호를 향해 조금 전 건네받은 음료수 상자를 슬쩍 내밀어 보인 세은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냥 잠깐 문병 온 건가봐. 먼저 온 손님이 있으니 자기는 그냥 가보겠다고.”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한 태호가 잠시 후 제법 길게 이어졌던 통화를 마치고 이쪽으로 몸을 돌려온 수영을 알아채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수영아, 방금 전에 누가 왔다 갔어.”
태호의 말을 들은 수영이 잠시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레 태호에게 먼저 향했다가 세은에게로 옮겨진 그의 시선은 이내 세은의 손에 들려 있는 음료수 상자로 향했다.
“누구라고 밝혔어?”
입원 후 이미 수많은 방문자를 맞이했던 수영이 시니컬한 말투로 묻자 들고 있던 박스를 이미 한 구석에 산처럼 쌓여 있는 음료수 박스들 더미 근처에 내려놓은 세은이 조금 전 태호에게 했던 것과 같은 내용의 대답을 했다.
“아니, 이름은 말 안 하더라. 잠깐 얼굴이나 보려고 온 사람인가 봐. 선객이 있으니 오늘은 그냥 가보겠다고. 네 몸 상태만 짧게 묻고 가던데.”
“어떻게 생겼어? 얼굴은 봤을 거 아냐.”
“그냥 젊은 남자였어. 키는 나보다 조금 크고 비쩍 마른.”
별다른 흥미를 갖지 않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영이 짧게 덧붙여진 인상착의를 전해 듣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 세은을 쳐다봤다.
170센티인 세은보다 약간 큰 키를 가진 남자야 대한민국에선 평균 사이즈라고 할 수 있었지만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직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혹시 걷는 것 봤어?”
조금 뜬금없는 질문을 받고서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은 세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돌아서서 가는 거 보니까 다리를 절뚝거리던데. 어디 접지르기라도 한 건지...”
돌아온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수영이 놀라서 그를 부르는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입구를 빠져나갔다.
지나는 의료진들의 시선을 받으며 한산한 복도를 달리던 수영이 이제 막 문을 닫고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고 속으로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옆에 있는 또 다른 엘리베이터는 최상층 가까이에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라 다시 이곳까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실제로는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나 지금 당장 움직여 계단을 이용해 내려가나 걸리는 시간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을 거라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나오고 있었지만, 심정적으로 자신이 이렇게 멍하니 서있는 사이에도 혹시 모를 상대가 멀어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 수영은 결국 완전치 않은 상태의 몸을 이끌고 근처에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뒤는 생각지 않고 무작정 달려 계단을 내려갔다. 바삐 다리를 움직이는 중간 결국 다친 늑골 부분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수영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상태가 상태인지라 전속력을 낼 수는 없어도 통증을 버틸 수 있는 내에서는 최대한의 속력을 냈다.
꼭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조금 전 자신의 병실을 방문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윤재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보다도 지금 이 순간 수영은 확인 여부의 차원을 떠나 순수하게 윤재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어쩌면 조금 전의 방문자가 윤재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서 남은 계단을 마저 내려가 1층의 넓은 홀로 빠져나온 수영은 잠시 자리에 멈춰 선 채 오가는 의료진과 일반 사람들의 모습을 신중하게 훑어보다 결국 그 안에서 윤재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하고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만약 좀 전의 방문자가 윤재가 아니었다면 이런 노력은 그저 헛수고일 뿐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뒷모습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와 같은 사실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다리는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뇌의 제어를 벗어난 것처럼.
환자복을 입은 채 달리고 있는 자신에게로 향해지는 사람들의 의아함 반 걱정 반이 담긴 시선을 무시하고 마침내 거대한 유리문을 열고서 병원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수영은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던 도중 저 멀리로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문득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
버스를 타려는 것인지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지나쳐 멀찍이 떨어진 버스정류장과 이어진 길을 걷고 있는 남자의 다리가 눈에 띄게 절뚝거리고 있었다.
이미 <민들레>에서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하늘색의 긴팔 셔츠에 색이 빠진 청바지.
중간 중간 불어오는 후텁지근한 바람에 살짝 씩 날리는 머리카락은 지금 이 순간 수영이 열심히 찾고 있는 남자의 머리카락과 비슷한 길이의 상태였다.
틀림없었다. 체형부터 입고 있는 옷에서 머리카락 길이와 색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생각할 것 없이 곧바로 달리기 시작해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가던 중 마음 안에서 확신을 굳힌 수영은 마침내 한참동안이나 입안에 머물러 있던 남자의 이름을 소리 내어 외쳤다.
“김윤재-!”
갑작스런 외침에 지나던 사람들 여럿이 일제히 수영에게 시선을 던져왔다. 그때까지 절뚝거리며 앞서 걷던 남자 역시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수영은 곧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땀이 배어난 이마를 대충 손등으로 닦아내고서.
잠시 후 수영에게 일제히 시선을 던져왔던 사람들은 차례로 하나 둘씩 원래 향하던 방향으로 다시 시선을 옮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상황에서 여전히 걸음을 멈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건 수영과 몇 미터 떨어진 위치에 선 채로 뒤를 돌아보고 있는 남자뿐으로, 그는 남은 거리를 좁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수영을 커다래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하.... 윽.”
달리던 중간 미간을 찌푸린 채 신음을 흘리는 수영을 놀란 표정으로 쳐다본 남자-윤재가 곧바로 멈춰 있던 다리를 움직여 수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아요? 몸도 성치 않은데 이렇게 달리면 어떻게 해요!?”
자신의 팔에 닿아온 윤재의 손을 강하게 붙잡은 수영이 얼마간 거칠게 이어지던 숨소리를 애써 정리하고 잠시 동안 숙이고 있던 상체를 천천히 들었다.
“왜 얼굴도 안 비추고 그냥 간 거야? 여기까지 와서.”
대답에 앞서 질문부터 던진 수영이 질문을 받고 쓴웃음을 짓는 윤재를 잠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먼저 온 손님이 계신 것 같아서 나중에 다시 오려고 했어요.”
“혹시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그냥 친구야. 그리고 병실 안에는 그 여자 말고 다른 남자 친구도 있었어.”
혹시 모를 오해를 애초에 차단하기 위해 일단 가장 먼저 세은과의 관계부터 밝힌 수영은 크게 흐트러졌던 숨이 어느 정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러 대의 차량이 오가고 있는 도로를 넘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위치한 뜰 곳곳에는 환자복을 입고 있는 사람과 일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뒤섞여 일행을 이룬 채 각각 몇 군데 벤치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지금 당장 세은과 태호가 있는 병실로 윤재와 함께 돌아갈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윤재를 보내줄 생각은 더더욱 없는 수영은 윤재의 손을 붙잡은 채로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오래 서있는 거 힘들잖아. 앉아서 얘기해.”
“손... 놔주세요. 사람들이 쳐다봐요.”
“어차피 다시 볼 일도 없는 사람들인데 신경 쓰지 마.”
수영의 짧은 대꾸를 끝으로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사이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 남자들끼리 손을 잡고 걷는 두 사람을 두고 지나는 행인들은 조금 신기한 듯 쳐다보았지만, 다리를 절뚝거리는 윤재와 환자복을 입고 있는 수영의 모습을 토대로 각자 나름대로 추리를 했는지 그들의 시선에 담겨 있던 의아한 기색은 머지않아 곧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