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열린 차창으로 매연이 뒤섞인 후텁지근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긴 팔을 입고 다녔던 행인들의 옷차림은 얼마 사이 눈에 띠게 얇아져 있어서 새삼 계절의 흐름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기온이 오르면 이곳 버스 안도 창문을 꽁꽁 닫은 채 에어컨 가동이 시작될 터였다.
평일 오후라 텅 비어있는 맨 뒷좌석에 앉아 차창 너머의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윤재가 문득 앞자리에서 들려온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를 듣고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윤재가 차에 오르기 전부터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커플은 대충 보기에 갓 대학에 입학한 정도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남녀로, 버스가 달리는 내내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중간 중간 커다란 웃음소리를 섞어가며 신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오빠, 왜 자꾸 그렇게 쳐다 봐? 부담 돼. 그만 봐.”
“네가 너무 귀여우니까 안 보려고 해도 자꾸 눈이 가잖아. 넌 특히 웃을 때 보조개가 들어가서 더 귀여워.”
“보조개만 귀여운 거야?”
“에이- 일일이 세자면 끝이 없지. 넌 그냥 그 자체가 귀여움이야.”
“모야~”
“진짜 작게 만들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좋겠다.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서 볼 수 있게.”
본의 아니게 앞에서 들려오는 간질간질한 대화를 듣는 내내 윤재는 지금의 자리를 선택해 앉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간 말로만 들어왔던, 닭이 되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뜻하지 않은 기회를 맞아 홀로 진지하게 체험하고 있는 그였다.
한 시라도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불편한 기분을 안은 채 앞으로 남아 있는 정거장의 수를 머릿속으로 세던 윤재가 그렇게 약 20여분의 시간이 흐른 끝에 마침내 익숙한 정거장의 안내 멘트가 들려오자마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 앞으로 가서 섰다.
목적지인 정거장에 도착하기 전 잠시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사이에도 텅 빈 버스 안에는 어린 커플의 떠들썩한 대화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할아버지 손님이 뒤를 돌아보고 ‘좀 조용히 하지.’라고 날이 선 목소리로 주의를 준 뒤에야 그때까지 정신없이 떠들고 있던 커플은 있는 대로 높였던 목소리를 줄였다.
잠시 후 목적지인 정거장에 도착한 뒤 버스에서 내린 윤재는 꽤나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조금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지금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에는 그의 모친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얼마 전 의 사건 이후 엉망이 된 얼굴을 모친에게 보일 수 없어 가게가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병원에 가지 않았던 며칠을 제외하면 아무리 가게와 집안 일로 피곤하더라도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규칙적으로 병원을 방문하고 있는 윤재였다.
<민들레>에 이어 이제는 제3의 집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한 병실 안으로 들어선 윤재는 꺄르르거리는 어린 아이의 웃음소리와 함께 시야에 들어온 낯익은 여성의 얼굴을 확인하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윤재 왔니?”
윤재의 존재를 알아차리자마자 곧바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온 건 이모의 딸인 소영이었다. 현재 임신 7개월로 크게 배가 부풀어 있는 상태인 그녀는 형제자매가 없는 윤재가 어릴 적 외할머니 댁을 찾을 때면 가장 가까이 어울렸던 친척이었다.
“왔어? 매형은?”
“잠깐 화장실에 갔어.”
소영의 대답을 들으며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간 윤재가 모친인 정심의 팔에 안겨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희진이 안녕?”
올 해로 다섯 살이 되는 희진은 오래 전 두어 번 만난 적이 있는 윤재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어느 순간 윤재가 풍기는 상냥한 분위기에 마음을 열었는지 이내 처음 보이던 경계심을 풀고 가까이 다가온 윤재를 향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희진아, 오빠한테 가서 안아 달라고 해.”
그렇게 말하며 희진을 안고 있던 손을 풀어준 정심이 잠시 머뭇거리면서도 윤재를 향해 손을 뻗는 희진의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지켜봤다.
“희진이 많이 컸구나.”
자신을 향해 짧은 양 팔을 힘껏 뻗어오는 희진을 조심스레 들어 품에 안은 윤재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살짝 고개를 숙이자 어린 아이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코끝에 닿아왔다.
까르륵대며 좋아하는 딸과 자상하게 딸을 어르는 윤재의 모습을 잠시 동안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소영이 입을 열었다.
“아빠와 딸 같다. 꼭.”
고개를 든 윤재가 소영을 쳐다보았다.
“빈말이 아니라 윤재 넌 진짜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아. 우리 그이는 피곤하다며 집에 와도 애를 볼 생각을 통 안 하는데... 넌 분명 가정적인 남편이 될 거야. 누군지 몰라도 너랑 결혼할 여자는 복 받은 거라고. 얼굴 단정하지, 성격 좋지, 성실하지, 당장 내 주위를 둘러봐도 요즘 세상에 너처럼 진국인 남편감이 없다.”
이어지는 칭찬에 민망한 기분이 든 윤재가 슬쩍 정심을 쳐다봤다.
소영의 말에 동조하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정심은 그러나 당장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윤재에게 맞선 얘기를 꺼냈다가 거절당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듯 했다.
“윤재 네가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잘 다루기도 하지만 애들도 너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아. 안 그래도 원래 아이들은 너처럼 인상이 부드럽고 착해 보이는 얼굴을 좋아한다더라. 우리 그이는 덩치가 크고 인상이 괴팍해서 그런지 아파트 앞 놀이터에 나가면 애들이 다 슬슬 피하더라고. 우리 희진이까지도 아빠가 안아준다고 하면 싫다고 도망간다니깐.”
거기까지 말하던 소영이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발자국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평소 그녀가 육아와 관련해 남편에게 많은 불만을 갖고 있다는 건 당장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을 통해서만도 충분히 파악이 되었다.
“오랜 만이야. 처남.”
“안녕하세요.”
다가오는 매형에게 인사를 건넨 윤재가 조심스레 안고 있던 희진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오랜 만에 모친을 찾아 병문안을 온 이종사촌 내외는 대화를 이어가는 도중 툴툴거리면서도 내심 서로를 아끼는 모습을 중간 중간 보이고 있었다. 특히나 매형의 경우 표현법이 서툴긴 해도 아내를 위하는 마음은 확실해 보였다.
“이게 뭐야, 두께가 2센티는 되겠다. 아까우니까 껍질에 붙어 있는 건 당신이 다 갉아먹어.”
“일부러 해주는데도 불만이야.”
이제 곧 만삭이 될 아내를 위해 손수 사과 껍질을 벗겨내고 있는 매형의 손놀림은 너무도 어설퍼서 보는 윤재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그러던 도중 윤재는 문득 머릿속에 한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마 전 비가 많이도 내리던 날에 자신을 돕겠다고 주방 한 켠을 차지하고 서서 나름대로 신중히 무를 썰던 남자의 모습을.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칼의 손잡이를 단단히 휘감고 있는 모습은 겉으로 보기엔 나무랄 데 없이 멋진 그림이었지만, 실제 그의 손놀림에 의해 썰어져 나오는 무의 형태는 각자가 삐뚤빼뚤 엉망이었다. 어떤 것은 지나치게 얇은 반면 또 어떤 것은 얇은 것의 3배가량 되는 두께를 자랑했다.
겉으로 보기엔 모든 것을 다 잘 할 것 같은 남자는 이미 스스로가 밝혔던 예술적인 부분 뿐 아니라 요리에도 무척이나 서툰 듯 보였다. 평소 일과 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을 그가 직접 장을 보고 귀가해서 홀로 요리를 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역시 잘 상상이 되지 않기는 했지만.
“둘째 낳고 나면 한동안 또 고생하겠네.”
“집안일은 이이가 다 해주겠죠. 뭐.”
“그래, 아내가 힘들 때는 남편이 다 해줘야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자신을 쳐다보는 정심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매형이 잠시 눈을 뗀 사이 바닥에 앉아 구르고 있는 딸 희진이를 발견하고 곧바로 아이를 일으켜 품에 안았다. 그러나 아까 전 소영이 했던 말이 사실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억지로 아빠의 품을 박차고 나온 희진이는 침대 옆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있는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희진이는 아빠가 싫은가 보네.”
“그러게 평소에 애 좀 봐주면 이러지 않지.”
“봐주려고 해도 내가 옆에 있는 걸 싫어하는데 어쩌라고.”
“당신한텐 담배 냄새가 나서 싫다고 하잖아. 내가 그렇게 끊으라고 잔소리를 하는데 말도 안 듣고.”
“대신 피울 때는 베란다에 나가서 피우잖아.”
“그거야 당연한 거지. 아무튼 담배 빨리 안 끊으면 우리 둘째도 못 안게 할 거니까 알아서 해. 당신 빨리 죽으면 나 혼자 애 둘 어떻게 키우라고 말을 그렇게 안 듣는 거야?”
겉으로는 싸우는 것 같은데도 말의 내용을 곱씹으면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동갑내기로 무려 9년을 연애한 끝에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은 때론 부부보다도 친구에 가까운 느낌을 줄 때가 있었다.
서로를 걱정하는 부부와 그 사이에서 재롱을 부리는 귀여운 어린 딸.
문득 지금 모친의 곁에 있는 부부 안에 자신이 속해 있었다면 그때 모친은 지금보다 좀 더 흐뭇한 얼굴을 보였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떠올린 윤재가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남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애정표현을 하고 한 쌍으로써 인정받는 것. 보통의 남녀 간의 관계에서라면 그것은 너무도 평범하다 못해 흔해빠진 것이었다. 불륜만 아니라면 주변 누구에게도 숨겨야 할 이유가 없는 떳떳한 관계였다.
그런 평범한 삶을 줄곧 윤재는 바라고 있었다. 아까 전 버스에서 봤던 커플처럼 자연스럽게 남들 앞에서 서로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며 더 깊어진 후엔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사람처럼 서로를 지탱하는 부부라는 이름의 연으로 맺어져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그리고 분명 그 기회는 지금까지도 열려져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누군가와 만나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으면 대단치는 않아도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모친에게도, 가장 친한 친구인 준석에게도, 그 외에 어느 누구를 상대로도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숨겨야 할 일도 없을 테니 평생을 지고 갈 마음의 짐을 안지 않아도 될 터였다.
소영의 품에 안겨 귀엽게 재롱을 부리는 희진의 모습을 바라보는 윤재의 표정이 씁쓸했다. 어쩌면 자신도 저렇게 귀여운 딸을 가진 아버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와 같은 바람은 그냥 바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윤재의 기분은 더욱 착잡해져갔다. 그냥 어느 쪽이든 깨끗이 포기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불과 한 달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택할 선택지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뻔히 정해져 있는 답을 고르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자신.
어쩌면 처음 한동안 그저 잘 꾸며진 허상처럼 보였던 수영의 진심을 정면으로 보기 시작한 때에 이미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한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천천히.
“자기가 보기에도 윤재, 결혼하면 좋은 남편 될 것 같지 않아?”
갑자기 들려온 자신의 이름에 잠시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재가 현실로 돌아왔다.
“처남이야 뭐 딱 봐도 자상한 남편감이지. 아이들도 잘 돌볼 것 같고.”
“그치? 겉보기엔 이래도 생활력도 얼마나 강한데. 은근히 억척스러운 면도 있고.”
들려오는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로 물었다.
“겉보기가 어떤데?”
윤재의 질문을 받은 소영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겉보기엔 좀... 여리여리 하잖니. 가뜩이나 살도 없는데 뼈 자체도 얇은 편이라 전체적인 인상이 가늘다고 할까... 거기에 타고난 피부까지 희니까 완전히 햇빛 구경도 못하고 곱게 자란 도련님 느낌도 나고 말이야.”
“그냥 하얗게 말라빠진 좀비는 아니고?”
윤재 치고 드물게 농담을 던지자 피식 작게 웃음소리를 낸 소영이 이어서 말했다.
“좀비 치곤 너무 단정하게 생겼잖아, 넌. 하여튼 다른 또래 남자들처럼 좀 더 꾸미고 다니면 좋을 텐데 넌 너무 수수하게만 입고 다닌다고. 아직 한창 나이일 때 실컷 꾸미고 다녀. 그래야 여자도 따르지.”
그 이후로도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낸 소영이 얼마 뒤 다음 일정을 위해 일어나야 할 시간임을 알아차리고 한참이나 머물러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전까지 그녀의 품에 안겨 간간이 재롱을 부리던 희진이는 어느 샌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 조리 잘 하세요. 이모. 또 올게요.”
“잘 가요, 매형. 누나도. 아기 낳으면 한 번 찾아갈게.”
“그래, 나중에 봐.”
떠나는 이종사촌 누나 부부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한 뒤 다시 병실 안으로 돌아온 윤재는 자연스레 조금 전 매형이 비우고 내버려 둔 빈 캔과 과일 껍질들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주변이 어수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민들레>를 운영하기 시작한 뒤로 한층 더 주변 정리에 엄격해진 그는 어느 정도 손님이 왔다 간 흔적이 사라진 뒤에야 침대 옆에 길게 놓여 있는 보호자용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안 본 사이 희진이가 많이 컸네요.”
“그러게. 소영이를 닮아서 눈이 크고 동그란 게 보고 있으면 아주 귀여워 죽겠다.”
희진이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뺨을 누그러뜨린 정심이 윤재의 얼굴 위에 떠올라 있는 씁쓸한 미소를 알아차리고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걱정 안 해도 당분간은 맞선 얘기 안 꺼낼 테니까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
“안 그래도 너 가게 일만으로도 많이 바쁠 텐데 내가 옆에서 결혼 얘기로 너무 닦달하는 거 아니냐고 아까 소영이가 나한테 그러더라.”
모친의 말을 들은 윤재가 자연스레 조금 전 헤어진 소영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겉으로 보기엔 다소 가벼워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사실 그녀가 은근히 속이 깊은 사람이라는 걸 윤재는 잘 알고 있었다.
“요즘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 전에 검사한 거 결과는 나왔죠?”
예상치 못한 소영의 방문으로 인해 줄곧 뒤로 미뤄두고 있었던 질문을 꺼낸 윤재는 다행히 좀 전 검사보다는 호전되었다는 모친의 대답을 듣고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 뒤 얼마 동안 크고 작은 부작용으로 인해 몇 번이나 수술실에 들어갔던 모친의 상태가 미미하게나마 호전되기 시작한 건 최근 들어서의 일인 만큼 가게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내내 그에 대한 걱정을 머리에서 떨쳐내지 못했던 윤재였다.
어쨌거나 모친의 몸 상태가 호전되어가고 있다는 대답을 들은 지금 간신히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게 된 윤재가 좀 전부터 느껴지고 있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근처 냉장고 안에서 커피 캔 하나와 알로에 주스가 든 캔 하나를 꺼냈다. 알로에 주스는 모친이 병원에 입원한 뒤로 꾸준히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소영이 누나가 병문안 온 건 오랜만이죠?”
시원한 알로에 주스 몇 모금을 넘기고 물기가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낸 정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안 그래도 만삭에 가까워져서 걷기 불편하니까 내가 오지 말라고 했는데 마침 이 근처에 볼 일이 있다고 온다고 하지 뭐니. 오랜 만에 봐서 좋긴 한데 안 본 사이 살이 많이 불었네. 소영이도 언니랑 비슷한 체질이면 살빼기 쉽지 않을 텐데 애 낳고 관리 열심히 해야 할 거야.”
“매형이랑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요.”
남자답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매형의 얼굴을 보고 제일 처음 좋지 않은 인상을 느꼈던 윤재는 역시 똑 부러진 성격의 소영이 허튼 사람을 배우자로 택할 리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늘 그렇듯 제법 긴 시간을 들여 최근 가게 운영의 상태를 주제로 진지하게 모친과 대화를 이어가던 윤재가 슬슬 가게를 열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슬슬 가볼게요. 이모는 언제 오세요?”
“아는 동생 만나서 저녁 먹고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쯤 올 거야.”
“네.”
“아 참, 윤재야. 너도 아는지 모르겠는데 나흘 전에 그 사람 여기에 왔었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에 병실 입구를 향하던 시선을 모친에게로 옮긴 윤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정심이 말을 이었다.
“우수영이라고 하는 사람. 너보다 나이는 위지만 친구처럼 지낸다는 남자 말이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나온 수영의 이름에 무심코 눈을 크게 뜬 윤재는 그러나 곧바로 동요의 기색을 감추었다. 수영을 단순히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지인 혹은 친구로 알고 있는 모친을 앞에 두고 지나치게 경직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스스로가 무덤을 파는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수영과 자신의 관계-그것이 비단 과거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현재형의 상황임을 대입하면-를 솔직히 드러낼 수 없는 지금의 입장에선 최대한 그가 속해 있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윤재는 아무래도 나흘 전 그가 이곳에 왔던 이야기를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저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병문안으로 온 건가요?”
윤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자 곧바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정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겉으로 보기엔 좀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조금 얘기를 나눠보니 인상만큼 차가운 사람은 아닌 것 같더구나. 솔직하고... 똑똑한 사람 같았어. 내가 보기엔.”
“...어떤 얘길 하던가요?”
“그냥 몸 상태가 어떠냐고... 혼자 공부를 했는지 이것저것 대장암에 좋은 음식 같은 것도 얘기해주더구나. 그 날 그 사람이 가져온 엑기스는 지금 냉장고 아래 칸 서랍에 들어있고.”
모친의 대답을 들은 윤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모친의 건강에 대해 물어오던 수영의 얼굴은 꽤나 진지해서 처음엔 단순히 형식적인 안부인사 같은 거라고 생각했던 윤재도 지금은 그와 같은 반복된 질문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처럼 생각의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차에 모친의 입을 통해 뜻밖에 전해 듣게 된 수영의 이야기는 윤재로 하여금 자연스레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끔 하고 있었다.
“전에 봤을 때는 내가 비몽사몽인 상태여서 제대로 보질 못했었는데 나흘 전에 맨 정신으로 보니까 정말 훤칠하니 잘 생긴 남자더라. 정말 윤재 너랑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니?”
갑작스럽게 날아온 질문에 반사적으로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네.’라고 대답하자 곧바로 모친의 말이 이어졌다.
“딱 봐도 윤재 너랑은 정 반대 타입이라 둘이 잘 지낸다고 하니 아무래도 좀 신기해서 말이야. 그 왜, 그 정도로 잘생긴 남자들은 놀기도 엄청 잘 놀 것 같잖니. 직접 안 나서도 여자들이 알아서 붙을 타입이라 본인이 알아서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혼했을 때 딱 아내를 고생시킬 타입이야.”
예리한 모친의 안목에 순간적으로 쓴웃음이 머금어진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던 도중 입가에 드리우고 있던 엷은 미소를 거두었다.
“이것저것 대화 좀 나누다가 내가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얘기했었어. 주변에 아가씨들이 많을 것 같은데 그 중에 참한 아가씨 있으면 우리 윤재한테도 소개 좀 시켜달라고.”
모친의 말이 끝난 뒤 잠시 텀을 두고 윤재가 입을 열었다.
“...뭐라고 대답했어요?”
이번에는 반대로 질문을 받은 정심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힘들 것 같대. 네가 자기보다 먼저 장가가면 샘이 날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자기는 줄을 못 놔주겠다고. 보기보다 재미있는 사람이더라. 그 친구.”
모친의 말을 듣고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인 윤재는 그러나 곧 얼굴 위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를 서서히 걷어냈다.
자신과 ‘그런 관계’가 되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 수영이 모친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어떤 기분이었을 지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알겠다고 대충 넘겼어도 될 상황에서 수영이 평소 잘 하지도 않는 농담을 빌어서나마 거절을 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윤재는 알 것 같았다.
수영은 자신의 모친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할 수 없어 숨길망정 속이고 싶지는 않았던 거였다.
어스름한 밤의 거실,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수영은 말했었다.
-‘여기가 아니라 사람 많은 명동 거리 한 가운데에서도 지금과 똑같이 할 수 있어, 난. 네가 상대라면 창피할 것도, 숨길 것도 없어.’
수영이 그 정도로 단호한 각오를 하고 있다는 걸 윤재는 굳이 의심하고 있지 않았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며 정면으로 부딪쳐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수영은 한 결 같이 명확한 태도를 유지해 왔었다. 지난 과거의 잘못을 돌이켜보는 것을 저어하지도, 자신을 앞에 두고 그 일에 대한 사과를 하는 것을 망설이지도 않았다. 기다리겠다고 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는 그 말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지난날의 일이 깊은 교훈을 남긴 탓일까, 때때로 윤재는 수영이 지금 순간에도 세심한 부분에서까지 자신을 신경써주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달을 때가 있었다. 윤재가 아는 지난날의 수영이 거침없이 자신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남자였다면 지금의 수영은 그 시절의 치기를 어느 정도 벗어버린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이 그를 바꿔놓은 것인지, 그가 속해 있는 사회라는 이름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알게 모르게 그를 바꾼 것인지 혹은 그 둘 다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수영이 예전 그대로의 수영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이제 윤재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윤재는 이미 한참 전에 정해져있던 선택지를 고르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만 가볼게요.”
“그래, 바쁘고 피곤하면 무리해서 오지 말고 집에서 푹 쉬어. 여긴 가끔씩 얼굴이나 비쳐주면 되니까.”
“네. 힘들면 그렇게 할게요. 쉬세요.”
언제나와 같은 말들을 마지막 인사로 교환하고 병실을 나선 윤재는 마침 이번 층에 도착해 있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하고 서둘러 달려갔다. 다행히 친절한 인상을 한 아저씨가 대기 버튼을 눌러준 덕분에 무사히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수 있었던 그는 일단 먼저 뒤를 돌아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4시 23분.
손목에 시선을 던져 시간을 확인한 윤재는 가게를 열기까지 남은 시간 내에 장을 보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문을 연 가게 안은 제법 많은 손님들로 채워져 있었다.
한낮에는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었지만 해가 지기 시작한 뒤로 급격히 기온은 떨어져 밤 아홉시를 지날 때쯤이 되자 창가 쪽에 앉아 있는 손님들 중 일부는 열려 있는 창문을 일부러 닫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괜찮지만 점점 날씨가 더워져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틀어야 할 시기가 오면 전기세 부담을 감안해야 하는 만큼 눈에 띠게 얇아진 옷차림을 하고 있는 가게 안 손님들을 둘러보는 윤재의 얼굴엔 걱정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전기세 폭탄이 무서워 가게 벽에 설치해둔 몇몇 선풍기만으로 버텨보려고 하다 오히려 많은 손님을 놓쳐 더 큰 손해를 보았던 작년을 떠올리면 올해는 좋든 싫든 근처 다른 가게에 손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에어컨을 가동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윤재였다. 자신만 해도 찐득찐득한 한여름에 후텁지근한 가게 안엔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 제대로 된 가게 운영을 위해서 전기세 부담을 감수하는 건 이제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 골뱅이 무침 좀 갖다 줘요!”
“소주 세 병 더 갖다 주세요!”
“여기 주문 좀 할게요!”
가게 안 곳곳에서 동시에 들려오는 외침에 따라 성호와 갈라져 바삐 움직이던 윤재는 한창 북적이던 가게가 어느 정도 평안을 되찾을 때쯤이 되어서야 짧게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병원에서 늦게 나온 데다 장을 보는 데에도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 탓에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로 가게 문을 열어 벌써 몇 시간째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지금 윤재의 체력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중간 중간 아무래도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열량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샐러드용으로 으깨놓은 감자를 따로 작은 통에 덜어 조금씩 먹고 있었지만, 질적으로 보나 양적으로 보나 그건 식사대용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여기, 주문이요!”
문득 홀에서 들려온 외침소리를 들은 윤재가 그 사이 골뱅이를 무치던 손에서 서둘러 비닐장갑을 벗겨내려 하고 있는 성호를 향해 말했다.
“내가 갈게.”
주로 요리는 윤재가, 서빙과 주문은 성호가 맡는 걸로 되어 있었지만 몇 개월에 걸쳐 성호가 어느 정도 주방 일에 익숙해진 뒤부터는 사이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져 있는 상태였다. 물론 아직까지도 두 사람이 동시에 주방 일을 하고 있을 경우에는 자연스레 성호가 주문을 받기 위해 나가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으로 지켜지고 있기는 했지만.
“주문하시겠어요?”
젊은 커플이 자리 잡고 있는 테이블로 다가간 윤재가 상냥한 목소리로 묻자 어딘가 개운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 여자가 주문에 나서려는 남자의 손등을 툭 치고서 말했다.
“아무래도 이것보단 이게 더 낫다니까.”
“그럼 그것도 같이 시켜.”
“한꺼번에 시키면 남기잖아. 돈도 많이 들고.”
“그건 그런데... 아, 이것도 전에 형식이랑 와서 먹어 보니까 입에 잘 맞더라. 너 이거 먹어 봤어? 쭈꾸미가 엄청 쫀득쫀득해.”
“어차피 버터구이 오징어도 시킬 건데 쭈꾸미 말고 다른 걸로 하자.”
아무래도 아직까지 의견 조율이 다 끝나지 않은 듯한 커플에게 ‘괜찮으니 천천히 고르세요.’라고 말한 윤재는 그 사이 눈에 띠게 한가해진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자신과 성호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손님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건 윤재에게 있어 무척이나 보람되고 즐거운 일이었다. 때때로 음식이 너무 짜다고 투정을 부리는 손님들도 있지만 그런 손님은 전체로 보면 극소수일 뿐, 처음 온 손님들이 단골이 되어 다시 이곳을 찾는 경우는 무척이나 많아서 그 덕분에 이런 좋지 않은 지리적 조건에도 <민들레>는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주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커플을 다시 한 번 쳐다본 윤재가 문득 뒤쪽에서 들려온 남자들의 대화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근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벌써 소주 세 병을 깨끗이 비운 수트 차림의 두 남자는 아까 전 윤재와 짧게 인사를 나눴던 <민들레>의 단골손님들로, 그들은 이전에 몇 번 회식 차 양과장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그의 직장 부하직원들이었다. 윤재가 개발한 신메뉴 ‘양파소스 오징어 버터구이’에 중독이 됐다며 일주일에 한 차례 이상씩 이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붙임성 좋은 성호와는 제법 친한 형 동생 사이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자신들을 돌아보는 윤재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간단히 손짓을 한 남자들이 잠시 멈추었던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그럼 아까 병원에 갔다 온 거야? 양쪽 다?”
“아니 오늘은 일단 한 군데만. 우리 팀은 나눠서 갔거든. 양과장님은 생각보다 많이 다치신 것 같아. 다행히 위험한 상태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전치 7주가 나왔으니 회사는 그만큼 쉬셔야 할 것 같고.”
“그래? 어떡하냐... 1팀 혜영씨 말로 우대리님도 이틀째 결근이라고 들었는데. 그 날 밤에 양과장님이랑 같은 택시에 타고 계셨다잖아. 소문으로 듣기엔 쇄골이 골절됐다고 하던데.”
무심코 귀에 담고 있던 대화 중간 갑자기 나온 수영의 이름에 일순 눈의 깜빡임을 멈춘 윤재가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