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58화 (58/66)

58.

처음 몇 초 동안은 이곳에 있을 리 없는 남자의 존재를 눈에 들이고서 그대로 놀란 채 굳어 있던 윤재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수영의 모습을 뒤늦게 현실로 인식하고 곧바로 자신의 엉덩이에 붙어 있는 남자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그렇지 않아도 위치 상 입구와는 등진 채로 서있는 남자는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다가오는 구두 굽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금 막 강제적으로 떨어져 나온 손을 다시 윤재의 엉덩이를 향해 뻗으려 하고 있었다. 눈이 풀린 남자의 입에선 연신 흐흐거리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전에 간 룸싸롱 대학생 아가씨... 이름이... 혜은이였나... 그 아가씨랑 닮은 거 같네.... 혹시 혜은이 오빤가...? 크크...”

윤재의 허리춤으로 퉁퉁하게 살이 오른 손을 뻗으며 그렇게 말한 남자가 갑자기 뒤쪽에서 뻗어온 손에 손목을 붙잡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다 일순 강하게 손목을 옭죄어 오는 힘을 느끼고 ‘아야야야야-’하는 호들갑스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취기로 인해 불그스름하게 변해 있던 남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잠깐만요, 이 손님 지금 많이 취해 있는 상태에요.”

남자의 비명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는 와중에 급하게 앞으로 나선 윤재를 슬쩍 쳐다본 수영이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킨 끝에 줄곧 강하게 움켜쥐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풀어주었다. 그때까지 엄청난 힘에 의해 마치 살이 파 먹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던 남자는 붙잡혀 있던 손목이 해방을 찾은 것과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몸을 웅크렸다. 윤재의 말대로 꽤나 심하게 취해 있는 남자는 잠시 후 이마를 무릎에 붙이고서 어린아이처럼 아프다며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상대가 제대로 이성을 갖춘 상태였다면 결코 이 정도로는 끝내지 않았을 수영은 어쨌거나 이 이상 술주정뱅이를 상대로 혼자 진지하게 화를 내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에 그쯤에서 감정을 추스르고 근처 의자를 끌어내어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사실, 일전에 자신의 폭력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고 잔뜩 겁을 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던 윤재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수영은 앞으로 가능하면 적어도 윤재의 앞에서 만큼은 그때와 같은 거친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윤재가 자신을 상대로 겁을 먹는 것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그였다.

아침 일찍부터 조금 전까지 온종일 회사 사무실을 지키며 일을 하느라 심신 양면으로 지쳐있는 상태인 수영은 방금 전 뜻밖의 장면을 목격한 이후 순식간에 몰아쳤던 감정의 폭풍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잠시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떠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사이에도 윤재는 조금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은 채로 웅크린 남자의 곁을 지키고 서있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윤재의 손에 들려 있는 계산서를 빼앗아 적힌 금액을 확인하고서 곧바로 바로 앞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남자의 팔을 붙잡아 그를 억지로 자리에서 일으켰다.

“시끄러우니까 질질 짜지 말고 빨리 계산하고 가.”

남의 장사 터에 와서 언제까지 영업 방해를 할 거냐는 비난이 담겨 있는 말투로 그렇게 말한 수영이 흠뻑 젖은 소매로 붉어진 눈가를 훔치고 있는 남자의 눈앞에 계산서를 내밀었다. 그제야 처음으로 슬쩍 고개를 든 남자는 좀처럼 주변에서 볼 수 없는 잘생긴 얼굴을 놀라움 반 신기함 반의 눈으로 잠시 쳐다보다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계산서를 받아들었다. 취기와 흐느낌의 흔적이 뒤섞여 벌겋게 된 그의 얼굴은 계산서에 적힌 숫자를 확인한 것과 동시에 일그러졌다가 다시 서서히 원상 복구되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남자가 재킷 주머니 안쪽에 손을 집어넣어 지갑을 꺼냈다. 이어 낡은 지갑 안에서 만 원 권 지폐 네 장을 꺼내 윤재에게 건넨 그는 이게 다라며 손을 휘젓고 비틀비틀 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원래 받아야할 돈보다 칠 천 원이나 더 받은 윤재가 곧바로 남자의 뒤를 쫓아가서 따로 빼낸 만 원 권 지폐 한 장을 도로 남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우산꽂이에 꽂혀있는 우산들 중 하나를 꺼내 펼친 뒤 이제 막 입구를 나선 남자의 손에 들려주었다.

“집까지 혼자 가실 수 있겠어요?”

“갠차나... 갠찮다고...”

흐트러진 발음으로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계단 아래로 내려서는 남자의 모습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던 윤재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근처 바닥에 놓여 있는 수영의 우산을 집어 들어 우산꽂이에 넣은 그는 조금 떨어진 위치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영의 시선을 확인하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가끔 저렇게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는 손님들이 있어요.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지나가는 말로 짧게 취객을 변호해준 윤재가 어딘가 심기 불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수영을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많이 피곤해 보여요.”

윤재의 말을 듣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수영이 긴 손가락을 걸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스스로도 피곤하다는 자각을 하고 있는 만큼 지금 들려온 윤재의 걱정 섞인 말이 단순히 지나가는 말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수영은 자신의 일보다 일단 당장에 신경 쓰이는 부분을 입 밖에 냈다.

“평소에 이런 일이 자주 있어?”

질문을 받은 윤재가 ‘취한 손님을 상대하는 일이요?’라고 되묻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수영이 미세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널 만지거나 하는 일.”

덧붙여진 말을 들은 뒤에야 질문의 명확한 의도를 알아차린 윤재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이런 일은 좀처럼 없어요.”

윤재는 부정했지만 당장 수영의 귀에 걸린 건 ‘좀처럼’이라는 말이었다. 좀처럼 없다는 건 아주 없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또한 오늘뿐 아니라 윤재가 이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윤재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잠시 진지하게 상상하던 수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자연스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예시는 조금 전 밖으로 내보낸 기름기 가득한 면상을 한 남자였지만, 좀 더 깨끗한 외형을 지닌 사람으로 예시를 변경한다고 해도 기분은 조금도 나아질 것이 없었다. 남녀노소를 통틀어 누군가가 그런 목적으로 윤재의 몸에 접촉한다는 사실 자체에서부터 이미 그의 기분은 최악의 상태로 들어섰다.

애초에 윤재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순결한 처녀도 아니었고, 그럴 의무를 진 성직자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의 건강한 청년으로써 법의 테두리 내에서라면 자유롭게 누군가와 육체적 관계를 갖는 것은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자신이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수영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아까 전에 보았던 장면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만 보면 그저 엉망으로 취한 주정뱅이가 윤재의 엉덩이를 만진 것뿐으로, 그를 바닥에 눕혀 올라타거나 그의 옷을 벗기고 안에 삽입을 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영이 경험해온 화려한 섹스들을 떠올리면 전희라고 부를 건덕지도 없는 대단치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객관적인 판단과는 별개로 좀 전의 주정뱅이가 행한 그 대단치 않은 행동은 지금 수영의 머릿속에 무척이나 불쾌한 기억으로 남은 채로 여전히 그의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었다.

몇 년 전 한창 사귀던 여자가 바로 옆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당시에도 일말의 질투심이란 걸 느끼지 못했던 수영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소위 말해 노는 친구들과 한창 어울려 다니며 난교나 스와핑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는 그에게 있어 파트너를 바꿔 관계를 갖는 것은 매너리즘을 해소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 중 하나일 뿐,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간혹 이전의 몇몇 파트너들이 자신의 질투심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인 것이 뻔히 보이는 수작을 걸어왔을 때에도 수영은 그저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을 뿐이었다. 애초에 쾌락을 목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아닌 다른 파트너와 섹스를 하던 오랄을 하던 수영에겐 그다지 상관없는 일로 여겨졌던 만큼 연인이나 부부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과 얽매어 산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귀찮고 비효율적인 일로만 느껴졌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제대로 된 사회인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남들이 거쳐 가는 일반적인 과정을 따라 결혼을 할 계획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 역시 남들처럼 단 한 사람에게 국한되어 살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렇게나 자유분방한 성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남자가 지금까지 겪어온 것과 비교하면 장난거리도 되지 않는 사소한 장면 하나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충동을 느꼈던 것을 보면 그래서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 건지도 몰랐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윤재를 만지는 것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스와핑은커녕 누군가가 윤재의 어깨를 감싸 안는 것조차도 용납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나 보수적인 인간이 되어버린 건지, 언제부터 자신의 안에서 이런 흉포한 독점욕이 생겨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취객이든 누구든 윤재를 그런 눈으로 보고 행동한다면 자신은 결코 지금까지처럼 방관자의 얼굴을 하고서 얌전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일어나지를 않네요.”

여러 가지 복잡한 기분을 안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수영이 문득 들려온 윤재의 혼잣말을 듣고 곧바로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좀 전의 취객을 밖으로 보내고 난 뒤 줄곧 입구 근처에 서있던 윤재의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다가간 수영은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길바닥에 엎드려 있는 남자가 조금 전 보낸 취객임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은 채 조금씩 꿈틀거리는 남자는 좀처럼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금 전 윤재가 친절히 손에 쥐어준 우산은 남자와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뒤집힌 채로 고스란히 내리는 비를 맞고 있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고 속으로 혀를 찬 수영이 옆에 선 윤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곧 다시 일어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아무래도 그대로 잠이 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움직임이 잦아든 남자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는 윤재의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했다.

“안 되겠어요. 저대로 있다간 지나가는 차에 사고를 당할 지도 모르고...”

아무래도 이대로 내버려 둬선 안 되겠다고 판단을 내린 윤재가 근처의 우산꽂이에서 우산 하나를 꺼내들자 곧바로 그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아 든 수영이 놀란 표정을 짓는 윤재를 등 뒤에 남겨두고 직접 가게 문을 나섰다.

몇 시간 전보다는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법 굵직한 빗줄기가 우산 지붕 위로 소란스런 소리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곁으로 다가간 수영은 취한 것 외에 남자에게 특별한 문제는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마침 근처에서 다가오고 있는 택시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잠시 후 가까이 와서 멈춰 선 택시의 뒷좌석 문을 연 수영은 탑승하는 손님이 수영이 아닌 바닥에 흠뻑 젖은 채로 엎드려 있는 남자라는 것을 눈치 채자 곧바로 난색을 표하는 택시기사의 말에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낸 그가 그 안에서 빳빳한 오만 원 권 지폐 한 장을 꺼내 택시기사의 앞에 내밀었다.

“미안한데 부탁 좀 할게요.”

돈을 건네받은 것과 동시에 구겨져 있던 택시 기사의 얼굴이 풀리는 것을 확인한 수영이 다시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거 놔아... 나 잘 거야...”

수영의 손에 억지로 일으켜진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투정부리며 크게 몸을 흔드는 과정에서 그의 손에 부딪친 수영의 우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졸지에 덩달아 비에 맞게 된 수영의 옷이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굳이 떨어진 우산을 줍는 대신 그 사이 또다시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허물어지려 하는 취객을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운 수영은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서서 대기 중인 택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취한 남자의 입에선 오래 된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남자는 연신 헤헤거리는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절로 주먹이 쥐어지는 상황에서 애써 감정을 추스른 수영은 자신의 팔을 지탱한 채로 비틀거리며 걷는 남자를 택시 뒷좌석에 대충 쑤셔 집어넣었다.

“아이고... 많이도 취하셨네.”

수영의 부축에 의해 뒷좌석에 오르는 남자의 얼굴을 흘끔 쳐다본 택시기사가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한 마디를 했다. 시트는 가죽 재질이라 수건으로 닦아내면 되지만 젖은 신발이 닿은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따로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그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당신 집, 어디야?”

“우리~집? 우리 집은 신정동...”

“신정동 어디?”

“xx아파트... 301호...”

거의 눈을 뜨지 못하면서도 어쨌든 대답은 착실히 해주는 남자의 말을 한 번 더 확인한 수영이 뒤를 돌아본 채 기다리고 있는 택시기사에게 ‘신정동 xx아파트 앞에서 내려주세요.’라고 말하고서 뒷좌석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잠시 후 출발한 택시는 서서히 멀어지다 이내 골목길을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간신히 귀찮은 일 하나를 처리한 수영이 무심코 한숨을 내쉰 순간 문득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비가 멎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그는 자신의 머리 위로 우산을 받쳐주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확인하고 쓰게 웃었다.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윤재의 양손에는 각각 두 개의 우산이 들려져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좀 전에 취객의 손에 부딪쳐 바닥을 뒹굴었던 수영의 것이었다.

“왜 나왔어? 그냥 안에 있지.”

윤재의 손에서 우산을 건네받은 수영이 천천히 가게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묻자 그와 나란한 위치에서 걷기 시작한 윤재가 ‘이렇게 젖어서 어떻게 해요?’라고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대신 해서 밖에 나갔다가 이런 봉변을 당한 수영을 보는 윤재의 마음은 당연하게도 편할 수가 없었지만, 그와 반대로 자신이 없었다면 윤재 혼자서 힘든 취객 뒤치다꺼리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 수영은 차라리 이편이 몇 배는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지 못한 채로 텅 비어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선 수영은 일단 젖은 수트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은 뒤 어깨 부분을 중심으로 흠뻑 젖어 있는 셔츠를 대강 손으로 털어내고서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역시나 젖은 옷이 피부에 달라붙는 축축한 느낌은 더없이 불쾌했다.

“셔츠... 벗을래요? 여분으로 놔둔 옷이 몇 벌 있는데 그거라도 괜찮다면 가져다 드릴게요.”

조심스런 윤재의 제안에 잠시 고민을 하던 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긴 손가락이 능숙하게 단추를 풀어낸 끝에 젖은 셔츠가 떨어져나간 그의 몸엔 엷은 물기가 남아 있었다. 당연히 손님이 있었다면 주방을 빌렸겠지만 당장 넓은 창밖에 펼쳐져 있는 썰렁한 풍경으로 보건대 당분간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수영의 상체는 자연스레 누구라도 돌아볼 만큼 멋진 선을 이루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넓고 끝부분이 살짝 각이 져 있는 어깨는 시원하고도 강인한 인상을 주고 있었고, 거기에서 과하지 않은 근육이 붙은 배와 날씬한 허리로 이어지는 선은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꼽는 역삼각형의 표본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셔츠와 수트를 입었을 때 최고의 시너지를 내지만, 그 외에 어떤 종류의 옷을 걸치든 자연스레 멋진 핏이 나올 수밖에 없는 체형이었다.

잠시 후 가게 한 구석에 붙어 있는 쪽방으로 사라졌던 윤재가 한 손에 하얀 티셔츠를 들고 다시 수영에게로 돌아왔다. 아무 것도 위에 걸치고 있지 않은 수영의 모습을 보고 무심코 시선을 피한 그는 들고 있던 티셔츠를 수영에게 건넸다.

“받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인데... 좀 헐렁한 사이즈라 웬만하면 맞을 거예요.”

윤재가 건넨 티셔츠를 받아 차례로 목과 팔을 꿴 수영은 다행히 생각보다 잘 맞는 품을 확인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앞부분에 유명한 은행의 로고가 새겨져 있는 티셔츠는 아무래도 홍보용으로 제작된 것 같았다.

“뭐 좀 가져다드릴까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괜한 수고를 끼쳤다는 사실에 조금 미안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듯한 윤재의 얼굴을 잠시 가만히 쳐다보던 수영이 말했다.

“따뜻한 걸로 마실 거나 한 잔 줘. 커피랑 녹차만 빼면 아무 거나 상관없어.”

오늘 회사 내에서 질리도록 카페인을 섭취한 수영이 그렇게 간단하게 주문을 하자 바로 몸을 돌린 윤재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저녁을 먹은 뒤로 꽤 많은 시간이 지나 조금 출출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모처럼 없는 시간을 내서 <민들레>를 찾은 만큼 조금이라도 더 윤재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수영은 의도적으로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릴 만한 음식은 주문하지 않았다.

초여름을 알리는 빗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가뜩이나 번화가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원래도 손님의 왕래가 많지 않은 이곳은 특히나 오늘처럼 궂은 날씨엔 다른 몫 좋은 장소에 있는 가게들보다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귀에 담던 중간 옆자리에 벗어둔 젖은 셔츠를 쳐다본 수영의 머릿속에 문득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몇 개월 전, 윤재와 재회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찾았다가 술에 취한 남자가 들이부은 술을 뒤집어쓰는 봉변을 당했던 때의 일이었다.

-‘...조금 작아도 상관없다면 잠시 입을 만한 걸 찾아올게요. 집에 갈 때까지 입으신 뒤에 버려도 상관없으니 따로 돌려주지 않으셔도 돼요.’

자신의 가게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최대한 성의를 보이려고 노력했던 윤재의 모습을 수영은 바로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던 윤재의 잔뜩 굳은 얼굴을.

그 날 빌렸던 옷은 결국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지금도 수영의 옷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유리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다가오는 윤재의 모습을 확인한 수영이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수영과 눈이 마주친 순간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은 윤재는 그럼에도 수영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유자차에요.”

주위의 공기를 휘감고 도는 향긋한 냄새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수영이 윤재가 앞에 놓아준 유리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기분 좋은 향과 맛을 느끼며 몇 모금의 유자차를 목안으로 넘긴 그가 따뜻하게 데워진 유리잔을 살짝 흔들며 물었다.

“맛이 깊네. 너무 달지도 않고.”

“이모가 만들어주신 거예요.”

“이모가?”

“네. 제가 어릴 때 자주 감기에 걸렸었거든요. 그때부터 이모가 직접 유자차를 만들어서 보내주셨어요.”

“그래? 안 그래도 나도 지금 감기 기운이 좀 있는데... 혹시 눈치 채고 일부러 이걸로 가져온 거야?”

“평소보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는 것 같아서요. 감기는 확실치 않아도 많이 피곤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재의 대답을 듣고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수영이 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가 천천히 몇 모금을 더 목안으로 넘겼다.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말을 들은 직후여서인지 확실히 좀 전보다 더 깊은 맛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윤재의 앞에서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이런 배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서서히 몸 안 곳곳으로 퍼져가고 있을 감기 기운이 꼭 나쁘게만 생각되지는 않는 수영이었다.

“성호는?”

“감기 기운이 있어서 일찍 보냈어요. 오늘은 날씨가 이래서 손님들 수도 많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아까 윤재가 그런 불상사를 당했던 건가 하고 상황을 납득한 수영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히 아까 본 주정뱅이는 그다지 거친 성격의 인간은 아닌 듯 해서 윤재 혼자서도 해결을 하려고 노력했으면 해결이 되었을 것 같지만, 혹시라도 위험한 인간이 상대였다면 윤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나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성호의 존재로 인해 이곳에서 일하는 윤재에 대해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던 수영은 좀 전에 불쾌한 장면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이후 여러 모로 복잡한 기분을 안고 있었다. 이성을 갖춘 사람이 상대라면 윤재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겠지만 막무가내로 미친 소처럼 힘을 쓰고 나오는 취객이 상대라면 윤재의 힘으로는 당해내기가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취객 상대하는 일이 잦아?”

수영의 질문을 받고 자연스레 아까 전의 일을 떠올린 윤재가 자신 몫으로 가져온 잔을 양손으로 감싸고서 대답했다.

“아니요. 가끔 있는 일이에요. 대부분은 취하더라도 일행한테 부축 받아서 돌아가니까요. 아까 그 손님은 혼자 오셔서 따로 부축해갈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거고요.”

“네 엉덩이 만졌잖아. 왜 가만히 있었어?”

미세하게 날카로워진 수영의 목소리에서 잠재된 분노를 읽어낸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라 그 일을 당한 찰나에 당신이 들어온 거예요. 만약 단 둘이 있었을 때 그 손님이 더 심하게 달라붙어 왔다면 그땐 제가 주먹이든 발이든 날렸을 거예요.”

윤재의 입에서 나온 뜻밖에 대답에 잠시 그 장면을 상상해본 수영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윤재가 주먹을 쓰는 장면은 아무래도 잘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강하게 나가겠다는 대답을 듣고 나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리는 그였다.

잠시 동안 윤재의 이모가 만들어준 유자차를 조용히 음미하던 수영이 문득 마주한 자리에 앉아있는 윤재의 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건 뭐야?”

수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숙인 윤재가 벌어져 있는 앞치마 주머니 사이로 삐져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잡혀 나온 것은 아까 전 혜리가 전해주고 간 청첩장이었다.

청첩장은 오늘 완성본이 나와 아직 회사 사람들에게는 돌리지 못했다고 혜리가 말했지만, 같은 회사 동료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그녀의 결혼 소식이야 이미 사내에 알려져 있을 거라고 생각한 윤재가 손에 들려 있는 청첩장을 수영에게 건넸다.

“오늘 혜리씨 여기 왔다가 갔어?”

봉투에서 꺼낸 청첩장을 대충 펼쳐 훑어본 수영이 그렇게 묻자 윤재가 ‘네.’라고 짧게 대답했다.

오늘처럼 궂은 날씨에도 혜리가 굳이 여기에 들러 윤재에게 청첩장을 준 이유에 대해서라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수영이었다. 평소 회사에서도 회식 얘기만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민들레>얘기부터 꺼내던 혜리가 얼마나 이곳과 윤재를 좋아하고 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엔 윤재를 연애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시 혜리를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던 수영은 다행히 그녀가 윤재를 보는 감정이 순수한 우정에 가까운 호의라는 것을 확신한 뒤부터 자연스레 그녀를 향하던 경계의 시선을 거두었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다른 누군가도-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조건으로-소중하게 여겨준다는 건 충분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괜찮은 사람이야. 혜리씨는. 상냥하고 싹싹하고. 그래서 결혼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 회사 내에서 그녀를 노리는 남자들이 많았어.”

문득 담배 생각이 났지만 일단 이곳이 가게 안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충동을 자제한 수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최근 주변에 결혼하는 사람이 많아. 같은 팀 동료 중 한 명은 며칠 전에 결혼했고, 다른 한 명은 다음 달 초에 할 예정이고. 혜리씨까지 더하면 두 달 사이에 동료 셋이나 결혼식을 올리는 거야. 회사 동료들 빼고 친구들 결혼식에도 이 달에만 두 번이나 다녀왔어. 다들 슬슬 그럴 나이이긴 하지만 한꺼번에 몇 군데를 도니까 지겨워, 솔직히.”

정말로 솔직하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수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재가 문득 입을 열었다.

“결혼 생각... 없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것과 동시에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춘 수영이 잠시 텀을 두고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 위에 엷게 떠올라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다.

“내가 지금 누구한테 대시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거 맞지?”

무척이나 진지한 질문을 받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표정을 푼 수영이 짧게 말을 이었다.

“그럼 그런 질문 하지 마. 무서우니까.”

농담처럼 진담을 건넨 수영이 잠시 후 한참 만에 처음으로 들려온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따라 입구 쪽에 시선을 던졌다.

먼저 들어와 앉을 자리를 살피고 있는 젊은 남녀 커플을 이어 곧바로 듬직한 체격을 한 중년의 남자 일행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듯 자연스레 창가 근처 자리로 향하는 남자들 일행은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도 곧바로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꽤나 심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미 다른 곳에서 거하게 한 잔을 걸치고 난 뒤 2차의 장소로 이곳을 고른 듯 했다.

곧장 주문을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윤재를 쳐다본 수영이 자신도 몸을 일으켰다.

“넌 저쪽 커플 주문 받아. 내가 저쪽으로 갈게.”

윤재를 뒤에 남기고 근처 선반에 놓인 주문서와 펜을 집어 든 수영이 곧바로 창가 쪽에 앉은 남자 일행의 앞으로 다가갔다.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도 충분히 지독하게 느껴질 정도로 독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는 일행은 얼핏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뭘로 주문하시겠습니까?”

큰 키로 인해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수영의 얼굴을 동시에 고개를 바짝 들어 쳐다본 일행들 중 한 명이 잠시 놀란 듯 눈을 꿈뻑거리더니 이내 씩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새로 온 직원인가? 참 훤칠하니 잘 생겼구먼~ 우리 딸내미 소개시켜주고 싶네.”

“뭔 소리야? 자네 딸은 한 달 전에 재혼 했잖어.”

“아... 그랬나? 크크크...”

악의 없는 남자의 말에 형식적인 미소로 대꾸해준 수영이 흘긋 고개를 돌려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 앞에 서서 주문을 받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시야에 담았다. 한참 만에 새롭게 등장한 손님들의 존재를 순수하게 반기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는 주문서에 체크를 마치고 몸을 돌리자마자 수영에게 시선을 던져왔다.

자신과 짧게 눈을 맞춘 뒤 서둘러 주방으로 향하는 윤재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수영은 잠시 후 얼마간 이어지던 의견조율을 끝내고 차례로 주문할 메뉴들을 나열하는 일행의 말에 따라 하나하나 주문서에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만큼 짧게 윤재의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던 그의 계획은 이것으로 완전히 틀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적어도 이 진탕 술에 쩔은 일행을 보낼 때까지는 가게에 있어야겠다고 계획을 수정한 수영은 체크를 끝낸 주문서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문받은 양이 꽤 많은데 혼자서 다 만들 수 있겠어?”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오는 수영을 돌아본 윤재가 입버릇처럼 괜찮다는 대답을 내놓으려던 중간 수영이 내보이고 있는 주문서를 확인하고 살짝 벌어졌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두 손님 일행의 주문 내역을 합치면 찌개 종류만 4개에 양파소스 오징어가 두 접시, 골뱅이 무침이 한 접시, 과일안주가 두 접시였다. 마른안주 종류야 빨리 만들 수 있다손 치더라도 찌개를 만드는 데에는 일정 이상의 시간과 손이 필요했다. 이럴 경우 평소라면 성호가 재료를 다듬는 일을 맡아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상황에선 윤재 혼자서 전부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괜찮다는 말이 들려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머뭇거리는 윤재에게서 곤란한 기색을 읽어낸 수영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근처 소쿠리 안에 담겨져 있는 무를 집어 들었다.

“이거라도 자를까?”

“.......”

지금처럼 일손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무턱대고 사양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 윤재가 잠시간 이어지던 망설임을 떨쳐내고 말했다.

“...부탁 좀 할게요.”

윤재의 말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수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늦게까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온 탓에 쌓인 피로감과 감기 기운이 더해져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상태였지만 조금 전 윤재의 입에서 나온 ‘부탁’이라는 단어가 아직까지 그의 안에 남아 있는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직접 요리를 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 만큼 무를 썰어 본 기억도 없는 수영은 일단 손에 들려 있는 큼직한 무를 싱크대로 가져갔다. 흐르는 물에 어느 정도 흙이 씻겨 나간 뒤 어딘가 덜 익은 것처럼 보이는 무의 윗 초록 부분을 뭉텅이로 잘라내 쿨하게 버린 그는 이내 근처에 꽂혀 있던 칼 한 자루를 꺼내 먼저 반 토막을 낸 무를 적당한 크기로 썰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오늘 처음 자신의 손에서 괜찮은 요리가 만들어질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드는 그였다.

*

거나하게 취해 있던 손님 일행이 가게를 떠난 건 수영의 예상보다는 빠른 시각이었다. 어쩌면 잔뜩 취해있는 그들이 만만한 인상을 한 윤재를 상대로 시끄럽게 소란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수영의 우려도 기분 좋게 빗나갔다.

취객이 난리를 피우는 건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일이라는 윤재의 말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수영은 아까 전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보았던 불쾌한 장면으로 인해 자신이 조금은 예민해져 있었던 모양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갈게. 마저 수고해.”

지금 막 주문받은 음식을 만들고 있는 윤재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주방을 나선 수영은 곧바로 한 쪽에 걸어놓았던 수트 재킷과 셔츠를 팔에 걸쳐 들고 입구로 향했다. 유리문 너머의 바깥에는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민들레>를 빠져나온 수영은 우산을 펼쳐들고 계단을 내려선 뒤 일부러 가게 근처의 물웅덩이를 피해 주차해놓았던 자신의 승용차 앞으로 향했다.

“!”

축축한 바닥을 내딛는 기분 나쁜 감촉에 살짝 미간을 좁힌 채로 걸음을 옮기던 수영이 잠시 후 문득 뒤에서 들려온 윤재의 목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가게에서 나온 듯한 윤재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서둘러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고스란히 내리는 비를 맞고서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그의 손엔 작은 종이백이 들려져 있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윤재에게로 다가가 그의 머리 위에 우산을 받혀준 수영이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종이백을 받아들었다.

“유자차 담아놓은 병이에요. 감기 기운 있을 때 먹으면 좋아요.”

짧게 말을 덧붙인 윤재가 가게 안에 있는 손님들을 떠올리고 곧바로 서둘러 몸을 돌리려다 문득 뒤에서 들려온 수영의 부름을 듣고 다시 고개를 돌려왔다.

“고마워. 잘 마실게.”

수영의 인사를 받은 윤재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쑥스러운 듯 웃었다.

“가세요. 전 손님이 계셔서...”

짧은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가게로 향하는 윤재의 뒷모습을 그대로 서서 지켜보던 수영은 잠시 후 윤재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백을 내려다보았다.

“.......”

아까 전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을 가만히 떠올린 수영은 잠시 제자리에 머물러 있던 발길을 돌려 차로 향했다.

못 참고 오늘 이곳에 온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조금 전 뜻하지 않게 봤던 윤재의 미소가 뇌리 깊이 남아버린 탓에 당분간은 회사에서도 일에만 집중할 수는 없을 것만 같은 곤란한 예감이 드는 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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