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연석의 곁으로 다가간 수영은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고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가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짓는 연석을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앉아 있는 연석의 얼굴 위로 길게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수영이 풍기고 있는 위압감은 당장 주변에서 보기에도 상당한 것이었다.
설마 오늘 이곳에서 수영과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터라 그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가장 먼저 놀란 표정을 지었던 연석은 이어서 반갑다는 생각을 떠올렸는지 곧바로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어쩐 일이야? 당신이 여길 다 오고.”
순수하게 반가운 기색이 묻어나는 연석의 얼굴을 마주한 수영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
“조용한 데?”
갑작스런 제안을 들은 연석이 의아한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줄곧 그의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일행이 갑자기 손을 뻗어 연석의 어깨에 턱 하니 올렸다. 자신의 파트너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가 남자의 부리부리한 눈동자 안에 담겨져 있었다. 이목구비로만 따지면 나름 봐줄 만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느끼한 인상이 강한 남자는 번쩍이는 체인 금목걸이에 커다란 장식이 달린 벨트, 끝이 뾰족한 구두, 기이한 문양의 반지 등 그저 튀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요란한 물건들을 몸 여기저기에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단 시간 내에 일부러 열심히 만든 듯 보이는 장식용 근육을 과시하고 있는 남자를 잠시 가만히 쳐다보던 수영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남자를 눈앞에 둔 수영의 얼굴 위엔 명백한 멸시의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잠시 후 다시 자신에게로 옮겨진 수영의 시선에서 어딘가 서늘한 기운을 읽어낸 연석이 무심코 표정을 굳혔다. 처음엔 달콤하게만 들렸던 ‘단 둘이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조금 전의 말도 지금 당장 마주한 수영의 얼굴과 진지하게 매치해 보면 아무래도 좋은 방향으로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그였다.
“저기...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면 안 될까? 지금은 일행도 있고...”
“난 지금 얘기해야겠어.”
곧바로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수영을 보고서 역시나 좋지 않은 예감을 사실로 확신한 연석이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서 일행을 돌아봤다.
도움을 요청하는 연석의 시선을 받자마자 때는 이때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망설임 없이 수영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높이 면에서는 수영이 월등히 앞섰지만, 지나칠 정도로 키운 비대한 근육 덕분에 가로의 부피는 남자 쪽이 우세했다.
거만한 표정을 짓고서 짧은 목을 천천히 돌리며 같잖은 허세를 부리는 남자를 잠시 쳐다보던 수영이 귀찮은 방해꾼을 무시하기로 하고 연석의 곁으로 한 발 다가서려다 그 사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선 남자의 손에 팔을 붙잡혔다.
“지금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잖아? 오늘은 나랑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으니까 따로 약속을 정해서 만나던가.”
“이 손 치워.”
마치 더러운 벌레라도 보는 듯한 수영의 시선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어낸 남자는 그럼에도 당장 주변의 많은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려 있다는 현실을 의식하고 오히려 수영의 팔을 쥔 손에 한층 더 힘을 실었다.
“줄을 서라고. 줄을. 당신, 유치원에서 공중도덕도 못 배웠...”
순식간에 날아온 주먹에 턱을 얻어맞은 충격으로 휘청거린 남자가 급하게 자세를 바로 세우자 잠시 낯선 남자의 손이 닿았던 팔 부분을 툭툭 털어낸 수영이 여전히 감정이 읽히지 않는 얼굴을 유지한 채 말했다.
“남의 파트너하고 자려고 했으면 맞을 각오도 했어야지. 억울하면 너도 따라 나와.”
내뱉듯 그렇게 말하고서 근처에 앉아 있는 연석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자리에서 일으킨 수영이 그대로 입구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잔뜩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주변의 구경꾼들은 조금 전 수영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직후부터 질질 밖으로 끌려 나가는 연석의 뒷모습을 향해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샌가 그들 대부분은 지금의 이 소란이 이런 장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치정싸움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증거로 좀 전까지만 해도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수군거리던 사람들까지도 부럽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좋겠다며 키득거리는 사람들의 웅성임을 뒤로한 채 수영의 손에 강제로 끌려 밖으로 나온 연석은 그렇게 계속해서 끌려가는 내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얼마를 기다려 봐도 조금 전 자신이 빠져나온 입구에선 어느 누구도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오늘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 좀 전의 남자는 수영의 박력에 눌린 채로 빠른 포기를 감행한 듯 했다.
‘씨발 새끼... 그런 덩치를 하고서 겁은 더럽게 많아갖고... 병신.’
두 시간 전에 다른 술집에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뭐라도 된 양 허세를 떨던 남자를 향해 속으로 진득하게 욕설을 내뱉은 연석이 문득 발에 걸리는 무언가에 균형을 잃고 크게 휘청였다가 간신히 자세를 바로 세웠다. 잠시 후 수영의 손에 끌려 그가 도착한 곳은 인적 드문 골목에 자리한, 한창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 중으로 보이는 낡은 건물 내부였다. 늦은 밤 시간이라 인부들이 전부 철수한 터라 당연하게도 건물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한참 동안 강한 힘에 의해 옭죄어 있던 팔이 해방을 맞이한 것을 반길 새도 없이 곧바로 날아든 주먹에 얼굴 정면을 얻어맞은 연석이 억눌린 비명을 흘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통증보다도 자신이 갑작스런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연석은 어느새 자신의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는 수영의 손에 이끌려 다시 강제로 바닥에서 일으켜졌다.
“아악-!”
멱살을 붙잡힌 채로 다시 날아온 주먹에 얼굴을 가격당한 연석의 입에서 채 억누르지 못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코에서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한 액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굳이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이후 세 차례 연이어 날아온 주먹에 뺨과 턱 부분을 골고루 얻어맞고 바닥으로 허물어진 연석은 얼굴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느껴지고 있는 극심한 통증을 견디며 몸을 웅크린 채로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이런 낯선 장소에 억지로 끌려온 시점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의 폭력을 당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는 어느 정도 처음의 혼란과 충격이 가시자 서서히 마음 안에서부터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적지 않은 시간에 걸쳐 일정의 친분관계를 유지해 오는 동안 연석은 겉보기엔 그저 냉정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수영이 외형과 다르게 거칠게 행동하는 것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들 대부분은 침대 위에서 목격했던 것들이었다.
자신의 뒷구멍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거친 움직임을 이어갔던 수영으로부터 당시 받았던 것은 통증을 동반한 강렬한 쾌감으로, 그 날 처음으로 자신 안에 숨겨져 있던 부분을 깨닫게 된 연석은 수영과 관계를 가질 때면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찾아 적극적으로 그를 조르곤 했었다.
그 외에 연석이 목격했던 수영의 거친 행동은 몇몇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었던 상황에서 나왔던 것으로, 사회인인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서인지 감정적으로 흥분하기 좋은 상황에서도 그는 반드시 먼저 상대가 폭력을 행사한 뒤에야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였었다. 사실 움직였다고 해도 상대에게 그리 심한 정도의 타격을 가하지는 않았었지만, 단 몇 분 만으로도 그의 실력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인지 웬만큼 취해서 정신이 나가지 않은 한 대부분의 상대는 일찍이 먼저 손을 털고 급하게 자리를 빠져나가곤 했었다.
어쨌거나 이제까지 봐온 것은 그저 새빨간 남의 일이었던 만큼 강자의 일행이 된 입장에서 덩달아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기도 했었던 연석은 순식간에 일행에서 폭력을 당하는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처지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눈앞의 남자가 영원히 자신의 편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적도 없었지만, 정작 이런 상황에 처해지자 동시에 밀려오는 서운함과 배신감에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혼란한 머릿속을 대강 정리하고 욱신거리는 턱을 감싼 채로 고개를 든 연석이 천천히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수영을 올려다보았다.
“얘기하자고 끌고나오더니 이게 무슨 짓이야-!?”
울분에 찬 연석의 질문에 수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어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연석의 얼굴은 미약한 근처 가로등 빛을 받은 채로 눈에 띠게 굳어져갔다. 주변을 채우고 있는 당장의 밝기로는 그의 얼굴에 어느 정도의 흔적이 남았는지는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지만, 못해도 당분간 남들 앞에 보이기 어려울 정도의 얼굴 상태는 되어있을 거라고 수영은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아까 전 바(bar) 안에서 여진의 말을 듣고 연석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곧바로 그에게 시선을 던졌던 수영은 평소와 다름없이 즐거운 듯 일행을 옆에 끼고 앉아 웃고 있는 연석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마음 안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윤재는 비열한 협박에 시달리다 끝내 무참한 폭력까지 당한 끝에 평소라면 결코 남 앞에 보이지 않을 눈물을 비칠 만큼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정작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는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일인 양 평소대로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 없었던 수영이었다. 호연과 해준이 용서받을 수 없는 악랄한 짓을 저지른 건 분명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그렇게 움직인 데에 연석이 크게 일조했다는 사실 역시 명확한 것이었다.
어스름한 거실에 서서 소리 죽여 울던 윤재의 모습을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날 느꼈던 가슴의 통증이 순식간에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 수영은 이런 와중에도 오로지 자신이 얻어맞았다는 데에 분노하고 있는 연석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고서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들면 어떡해!? 내일도 당장 출근해야 하는데!”
“너 때문에 죄 없는 누구도 얼굴이 엉망이 돼서 며칠이나 제대로 일을 못했어.”
지금 수영이 언급한 ‘죄 없는 누구’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차린 연석이 살짝 비꼬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복수라도 하려고 찾아온 거야? 왜, 그 남자가 억울하니까 관련자들 죄다 잡아서 족쳐달라고 해? 잔뜩 얻어맞고서 쪼르르 당신한테 달려가서 이르기라도 한 거야?”
“그러게. 그렇게 해줬으면 나도 손을 좀 덜었을 텐데 말이야.”
냉소를 머금은 채로 수영이 말했다.??
주변을 지나는 차들이 동시에 내는 요란한 경적소리가 한동안 길게 이어지다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수영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또다시 어깨를 움찔한 연석이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에도 공사자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건물 안을 채우고 있는 진한 시멘트 냄새가 연신 연석의 코를 찔러대고 있었다.
“당신... 어떻게 했어?”
“.......”
“장호연, 아무리 한때는 같이 잔 사이였다고 해도 그냥 용서해주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자신의 질문을 받고 말 대신 쉬이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묘한 미소를 머금는 수영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연석은 순간적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절름발이 남자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은 자신에게도 이 정도의 거침없는 폭력을 행사한 남자인데, 정황상 그간 꾸준히 뒤에서 수작을 부린데다 결정적으로 절름발이 남자의 얼굴까지 망쳐놓은 호연이 수영으로부터 가벼운 처분을 받고 풀려났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었다. 적어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곁에서 수영을 봐온 연석은 그것만큼은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다.
단 한 번 스치듯 만난 것뿐이었던 남자의 얼굴을 연석은 진지하게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비쩍 마른 체형, 특별히 눈에 띠는 구석이 없는 얼굴은 눈 여겨 보지 않으면 또렷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수수한 인상이었다.
그간 수영과 친분을 유지해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의 취향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 연석은 설마 그 날 스치듯이 봤던 남자가 이렇게까지 수영을 움직이게 만들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오히려 멀쩡한 사람들 다 놔두고서 굳이 다리를 저는 장애인을 섹스 상대로 고른 수영을 두고 이 무슨 질 나쁜 장난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던 그였다.
그러나 기어이 이런 상황까지 맞이한 지금, 연석은 그냥 질 나쁜 수영의 변덕에 어울렸던 상대일 뿐이라고 가볍게 지나쳤던 그 절름발이 남자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대단한 장호연마저 움직이지 못했던 수영의 마음을 고스란히 손안에 넣었다는 사실을 복잡한 기분으로 되뇌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하네. 그간 알고 지낸 시간이 있는데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나마도 전에 힌트를 제공한 걸 감안해서 이 정도로 끝내는 거야.”
냉정한 수영의 대답에 쓴웃음을 머금은 연석이 무심코 뺨을 쓸어내리던 중간 갑자기 덮쳐온 통증을 느끼고서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뺨에 번지는 선명한 통증으로 인해 잠시 윤재의 존재를 떠올리는 동안 잊고 있었던 현실로 돌아온 그는 지금쯤 엉망이 되어 있을 자신의 얼굴을 짐작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30여분 전까지만 해도 머리는 나빠 보이지만 침대 위에서 제법 힘은 쓸 것 같은 남자와 뜨거운 밤을 보낼 생각으로 나름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연석은 그와 같은 기대가 산산조각이 나버린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날 기력조차 잃은 상태였다. 당장 확인할 수 없지만 살짝 누르는 것만으로도 곧바로 느껴지는 통증의 강도로 보아 아마 지금쯤 벌써 시커먼 멍이 올라오고 있을 얼굴 꼴을 하고서 몇 시간 뒤 출근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그래도 저번에 헤어지기 직전 수영으로부터 들었던 살벌한 발언을 떠올리면 그나마 입 부분은 건드리지 않은 그의 아량에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준석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슬쩍 던진 말로 인해 그 절름발이 남자가 괜한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이 꼭 그렇게 억울하게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찾아가 사과할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그래서... 일부러 날 기다린 거야? 거기서...?”
손에 묻은 코피를 콘크리트 바닥에 문질러 닦으며 연석이 묻자 잠시 텀을 두고서 수영의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 본 건 우연이야. 한 번은 다시 만나서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얘기? 패는 게 목적이 아니라?”
“뭐, 그게 더 정확하긴 해.”
솔직한 수영의 대답에 실소를 흘린 연석이 먼지로 엉망이 된 앞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욱신거리는 이마를 매만졌다.
제길, 얼마나 골고루 패놨는지 얼굴 어느 부위 하나 만지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런 어스름한 장소에서도 기어이 목표한 바를 이뤄내는 수영의 정확성에 절로 욕 섞인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연석이었다.
“만나고 싶으면 직접 연락하지 그랬어?”
“네 휴대폰 번호 얼마 전에 삭제해놔서. 그렇지 않아도 다른 녀석한테 잠깐 알려달라고 할까 생각하던 중이었어.”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듣고 일순 할 말을 잃은 연석이 욱신거리는 얼굴을 매만지던 손을 그대로 멈추었다. 이내 완전히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고서 바짝 미간을 찌푸린 그가 말을 이었다.
“삭제하다니...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삭제했다고.”
“...왜?”
“이젠 필요 없으니까.”
필요 없다는 말을 너무도 간단히 입에 담는 수영의 담담한 모습에 화가 난다기 보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연석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말했다.
“난 우리들이 겨우 이 정도 일로 쉽게 헤어질 만한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 일? 너한테는 겨우 이 정도 일인 모양인데 나한테는 아니야. 그리고 난 애초에 우리 관계가 별로 깊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그럼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나와 만난 건...!”
“뭘 거창하게 해석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선 굳이 잘라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둔 것뿐이야. 그리고 이제는 그 ‘잘라낼 이유’란 게 생긴 거고.”
“하....”
자신의 존재가 마치 순식간에 잘라내야 할 암 덩어리가 된 것 같은 비참한 기분에 말 대신 실소를 흘린 연석은 정작 그토록 잔인한 말을 뱉어내고서 평소와 다름없는 침착한 태도로 툭툭 옷에 묻어난 먼지를 털어내고 있는 수영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지금 수영의 손에 털어져나가는 하찮은 먼지에 무심코 자신의 입장을 대입해본 그는 실제로도 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코 언저리에 말라붙어 있는 피의 비릿한 냄새와 얼굴 곳곳에서 동시에 느껴지고 있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로 하여금 현재 스스로가 처해있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자각하게끔 만들어주고 있었다.
절망스럽게도 이 악몽 같은 상황은 꿈이 아니었다.
“이걸로 마지막이야. 정연석. 이제 앞으로 우리가 다시 지금처럼 대화하는 일은 없을 거야. 우연히 다시 만나더라도 난 널 무시할 테니까 너도 그렇게 해.”
“...뭐?”
자신이 할 말만을 마치고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입구로 향하는 수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연석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우수영.”
“.......”
“우수영-!”
자신의 부름에 돌아보지 않은 채 차츰 멀어져가는 수영의 등에 대고 연석이 소리쳤다.
“우수영, 이 개자식아! 너 진짜 나쁜 새끼야! 알아-?!”
악에 받친 연석이 던진 비난의 말들이 몇 차례 더 이어졌지만 수영은 단 한 번도 걸음을 멈추거나 고개를 돌려오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까지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수영이 그대로 먼저 입구를 빠져나간 뒤 졸지에 홀로 텅 빈 건물 안에 남겨진 신세가 된 연석이 꾹 말아 쥐고 있던 주먹으로 있는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 거친 콘크리트 바닥에 쓸린 손에서 곧바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금의 연석은 그것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참담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근 4년 동안 이어진 인연이었다.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그 인연의 시간이 단 몇 분전을 기점으로 이제 완전히 멈춰버린 것이었다. 이렇게나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문득 핸드폰 벨이 울릴 때면 혹여나 수영에게서 온 연락이 아닐까 가슴부터 두근거리던 과거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시간들이 너무도 억울하고 허망해서 연석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에서야 처음부터 돌이켜보면 자신은 수영과 만난 이후 늘 첫사랑에 빠진 서툰 소년과 같았다고, 연석은 쓰린 마음을 안은 채로 생각했다.
“씨발...”
다시 한 번 나직이 욕설을 내뱉은 연석이 가까운 벽에 등을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는 그였다.
이런 얼굴 꼴이 되어서 당장 내일 아침 출근할 일이 걱정이 된 연석이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몇 번째인지 모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통틀어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하루의 끝이었다.
*
시간이 갈수록 점차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가게의 유리창과 문이 전부 닫힌 상태임에도 바깥에서 쏟아지는 빗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오고 있어서 몇 테이블을 채우고 있지 않은 손님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중간 중간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창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초여름으로 들어서는 계절의 변화를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 며칠 사이 부쩍 온도가 오른 상태에서 모처럼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는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었다. 비록 그 단비로 인해 오늘 이곳 <민들레>를 찾은 손님의 수는 평소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었지만.
“와... 엄청 쏟아지네요. 안 그래도 올 봄은 가뭄이어서 좀 건조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비가 쭉쭉 쏟아지는 걸 보니까 이제 슬슬 여름이 오려나 봐요.”
빗물로 번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 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잔을 손에 들고 있는 혜리였다. 평소라면 회사 동료들 혹은 친한 친구들과 이곳을 찾았을 그녀는 어쩐 일인지 조금 전 홀로 이곳을 찾아왔다.
“성호씨는 안 보이네요?”
“성호는 감기에 좀 심하게 걸려서 조금 전에 먼저 들여보냈어요. 오늘은 날씨가 이래서 손님들 수도 많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
윤재의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혜리가 문득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서 옆자리에 놓여있던 핸드백을 들더니 곧바로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안에서 움직이던 그녀의 손에 들려 핸드백 밖으로 꺼내진 것은 새하얀 봉투였다.
“자, 받으세요.”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봉투를 잠시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던 윤재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봉투 안에서 나온 건 연보라색 수국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카드로, 앞면에는 혜리의 이름과 나란히 어떤 남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네, 청첩장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은 혜리가 곧바로 돌아온 ‘축하해요.’라는 윤재의 인사를 받고 고맙다고 대답했다.
“좀 전에 근처에 들러 카드 완성본을 확인하고 몇 장 가져온 거예요. 아직 회사 사람들한테도 돌리지 않은 뽀송뽀송한 녀석인데 윤재씨한테 제일 먼저 드리는 거예요.”
뜻밖에 상황에 놀라면서도 자신이 제일 먼저 귀한 청첩장을 받았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을 느낀 윤재가 어쨌든 다시 한 번 혜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도 자신이 청첩장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다소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의 얼굴을 마주하고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혜리가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등 뒤로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한 달 뒤 23일 일요일이에요. 여기는 일요일에 낮부터 문을 여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냥 여유가 있으면 오시라는 거지, 특별히 무리하게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혹시라도 부담 가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전 <민들레>가 좋고, 윤재씨도 좋으니까... 또 앞으로도 여기에 자주 올 거니까 충분히 청첩장을 드려도 될 거라고 생각해서 드리는 건데 사실 윤재씨 입장에선 좀 생뚱맞다는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긴 하거든요.”
“아뇨. 그런 건...”
“어쨌든 부담 저~언혀 가지실 필요 없어요. 안 오시면 좀 서운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원망하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살짝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서 곧바로 농담이라는 말을 덧붙인 혜리는 조금 전 윤재가 내어온 어묵탕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맛을 보자마자 얼굴 가득 만족스런 표정을 머금은 그녀는 이어 어묵과 푹 익힌 무도 차례로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옮겼다. 아까 전 퇴근 후 동료들과 식사를 같이 하고 온 터라 어느 정도 배가 차있는 상태임에도 적당히 감칠맛이 나는 어묵과 국물이 자꾸만 수저를 쥔 그녀의 손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축축한 밤에 따뜻한 어묵탕이라, 멋진 조합이었다.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때쯤 가게 일로 지방에 오갈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요.”
솔직하게 대답을 하는 윤재를 향해 ‘네, 괜찮아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혜리는 한동안 정신없이 입으로 옮기던 수저를 내려놓고서 어느 샌가 미지근하게 변해버린 녹차를 목으로 넘겼다. 사실 오늘은 청첩장만 주고 가겠다는 생각으로 <민들레>를 들렀던 그녀는 마침 근처에 앉은 손님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 어묵탕을 눈으로 확인하고서 결국 자리를 잡아 같은 것을 주문한 뒤 지금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어묵과 무, 다시마가 풍성하게 담긴 냄비가 자신 앞에 놓인 순간엔 잠시 곧 있을 결혼식을 위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맛있는 국물을 한 숟가락 입에 댄 이후부터 그와 같은 처음의 걱정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사실은 오늘 여기에서 다 같이 회식을 하기로 일주일 전에 미리 약속을 정해 놨었는데 오늘 오후에 갑자기 중요한 문제가 발견되는 바람에 회식이 취소된 거예요.”
“아... 그래요?”
“네. 우리 팀 사람들은 다들 <민들레>에서 회식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싸고 맛있고 분위기도 좋아서요. 특히 저랑 영민씨가 적극적으로 밀고 있죠. 같은 자리에 계실 땐 우대리님도 항상 한마디씩 거들어주시고요.”
문득 들려온 수영의 얘기에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윤재가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 곧바로 이어 들려온 혜리의 말을 귀에 담았다.
“아, 들리는 말에 의하면 우대리님 곧 과장으로 승진하실 것 같아요.”
갑작스런 얘기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과장으로요? 그럼 양과장님은 어떻게...”
“양과장님은 지사로 발령 나실 모양이에요. 인사과 친구한테 들은 거라서 거의 확실한데 아내분이 지방에서 교사 일을 하셔서 그쪽으로 가길 희망하고 계신대요.”
“아...”
가끔씩 이곳을 찾은 양과장이 술에 취할 때마다 집사람이 보고 싶다며 쓸쓸한 표정으로 말하던 것을 윤재는 곧바로 기억해냈다. 오랜 시간 아내와 주말 부부로 살아온 양과장이 혼자서 생활을 하며 많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듯 하다고, 술에 취해 코를 훌쩍이며 아내 얘길 꺼내는 양과장을 볼 때마다 윤재는 내심 생각했었다.
그보다 과장으로 승진이라니, 이제 겨우 서른하나의 나이로 대기업의 과장직에 오른다는 것이 결코 평범한 케이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윤재는 문득 회사 안에서의 수영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와 같은 생각이 목소리를 거쳐 나간 건 무의식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우대리님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것 같네요.”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온 윤재의 말을 듣고 그 사이에도 열심히 입으로 나르던 숟가락을 멈춘 혜리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답했다.
“네. 일단은 열심히 일하시기도 하지만 뭣보다 맡은 일에 대한 성과를 항상 잘 내고 계시죠. 최근에도 혀재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계속 야근을 하고 계시고요. 그래서 아마 오늘 회식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고 해도 우대리님이 속해 있는 1팀은 여기에 못 왔을 거예요.”
최근 들어 수영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건 윤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실제로 수영이 평일에 <민들레>를 찾는 일은 눈에 띠게 뜸해진 상태였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항상 주말엔 잠깐이라도 집이나 가게에 찾아와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고, 만나지 못하는 평일엔 하루에 한 통 이상씩 핸드폰으로 꾸준히 안부 전화를 해오고 있었다.
“그럼 오늘도 야근을 하시는 건가요?”
“네. 이번 주는 1팀 전체가 계속 야근을 하고 있어요. 2팀에 속해있는 저는 그보단 좀 덜 바쁜 편이라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요.”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은 혜리가 슬쩍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가 슬슬 일어날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잔을 들어 남아 있는 식은 녹차로 가볍게 입가심을 했다.
“빈 말이 아니라 정말로 바쁘시면 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나중에 저 결혼식 올린 거 그냥 말로만 들으시면 괜히 서운하실 것 같아서 윤재씨한테도 청첩장 드린 거예요. 물론 정말로 윤재씨가 와서 축하해주시면 많이 기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요. 아, 자꾸 부담 갖지 말라고 하면서 계속 이런 얘기를... 죄송해요. 윤재씨.”
애교 섞인 혜리의 사과를 받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윤재는 ‘지금 당장 확답 못 드려서 저야말로 죄송해요.’라고 말했다.
“아이 참,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아, 나중에 성호씨 오면 성호씨한테도 얘기 좀 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그럼 나중에 또 봬요.”
그 자리에서 바로 계산을 마친 혜리가 조금 서둘러 가게를 떠난 뒤 그녀가 앉았던 자리의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한 윤재는 문득 좀 전에 들었던 얘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우대리님 곧 과장으로 승진하실 것 같아요.’
똑 부러진 수영의 성격 상 맡은 일을 대강대강 처리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모르는 회사 내에서의 수영의 모습을 조금 전 혜리의 증언을 통해 조금은 알게 된 윤재는 최근 전화 통화로 들었던 수영의 목소리에서 피로감을 느꼈던 것이 단순히 자신의 기분 탓이 아니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뒤로 한 달여가 지난 지금.
최근 회사의 일이 바빠 예전만큼 얼굴을 비추지는 못해도 꾸준히 전화연락을 취해오고 있는 수영은 이전과 다름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가는 대화의 내용은 대부분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얘기들로, 윤재의 예상과 달리 수영은 중간에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재촉하거나 답의 방향을 종용하지 않았다. 다만 때때로 문득 듣는 윤재가 놀랄 만큼 다정한 목소리를 낼 때가 있는 그는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
잠시 동안 수영의 얼굴을 가만히 머릿속에 떠올리다 문득 의자가 뒤로 밀려나는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는 그 사이 앞에 놓인 냄비와 그릇을 싹 비우고서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손님 일행을 확인하고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오늘은 비가 많이 내려서 손님이 없네요.”
계산대 앞에 선 손님이 휑한 가게 안을 둘러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와중에도 함께 온 일행은 세 접시나 추가로 주문한 양파 오징어가 엄청나게 맛있다는 칭찬을 연이어 늘어놓고 있었다.
음식에 대한 칭찬을 듣고 기분 좋은 얼굴로 손님들을 보낸 윤재는 잠시 후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손님들까지 상냥한 인사로 떠나보낸 뒤 완전히 휑해진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몇 없던 손님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떠나는 동안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지 않은 탓에 이제 테이블을 채우고 있는 건 단 한 손님뿐이었다.
윤재가 기억하기로 처음 이곳에 들어온 지 세 시간 이상은 지난 듯한 손님은 얼핏 보기에 서른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로, 그의 앞엔 벌써 깨끗이 비워진 소주 네 병이 빈 접시와 함께 놓여 있었다.
“여기 소주 두 병 더 갖다줘어-”
역시나 예상대로 진득하게 술에 취한 듯 보이는 남자의 말꼬리가 길었다.
이미 제어력을 잃은 상태에서 몸을 가누기가 힘든지 의자를 뒤로 빼려다 크게 휘청거리는 남자를 보고 서둘러 그의 곁으로 달려간 윤재가 또다시 자세를 바로잡으려던 중간 테이블에 세게 어깨를 부딪친 남자를 걱정스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괜찮으세요?”
다가온 윤재의 얼굴을 보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남자가 이내 뺨을 누그러뜨리고서 오버스러울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차나. 괜차나. 끄으떡 없어!”
“.......”
“그보다 소주 어딨어? 내가 분명히 세 병 가져오라고 했는데... 아니, 네 병이었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상태가 되어서도 여전히 술을 찾는 남자를 잠시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던 윤재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손님. 지금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오늘은 이만 일어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밖에 비도 많이 내리는데 집까지 돌아가시려면 여기서 더 취해서는 안 될 것 같...”
“아, 거 참. 손님이 가져오라면 가져올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쭝얼쭝얼쭝얼... 네가 무슨 내 마누라라도 돼?”
“손님...”
“어디 보자... 근데 얼굴은 곱상하니 내 취향이네. 진짜 내 마누라 해볼래?”
끼익 하고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린 직후 갑작스럽게 뻗어온 손이 윤재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확히는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의 손등이 윤재의 뺨을 쓸어내린 것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취객의 농담으로 받아넘겨야 하는 것인지를 두고 잠시 갈등하던 윤재는 그 사이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선 남자의 얼굴 위에 떠올라 있는 비릿한 웃음을 확인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로 많이 취하셨네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취해? 누가? 내애~가? 지금 우리 예쁜 마누라가 나 걱정해주는 거야? 응?”
거리를 벌려 뒤로 물러나는 윤재를 보고서 이상한 웃음소리를 낸 남자가 제대로 수염을 깎지 않아 푸르스름한 턱을 만지며 입술을 핥았다. 말끔한 옷차림과 달리 그의 얼굴은 지저분한 기름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성호가 있었다면 눈앞의 취객을 조금은 더 쉽게 설득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윤재 혼자서 일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취하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남자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윤재는 아마도 지금 그의 행동에 악의는 없을 거라는 판단을 내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유형의 손님을 상대로는 화를 내기보다 달래는 편이 낫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윤재였다.
어쨌든 다른 손님이 오기 전 지금의 이 상황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겨 다시 남자의 곁으로 다가간 윤재가 테이블에 놓인 계산서를 들어 남자의 앞에 내밀었다.
“전부 해서 3만 3천원이 나왔는데 그냥 3만원만 주세요. 그리고 지금 밖에 비가 많이 오는데 필요하시면 택시를 불러드릴까요?”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계산서를 슬쩍 쳐다보고서 다시 고개를 들어 윤재를 쳐다본 남자가 이내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앞으로 뻗어나간 그의 손이 가까이 다가와 있던 윤재의 엉덩이를 움켜쥔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딸랑
자신의 엉덩이에 남자의 손이 닿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익숙한 종소리를 들은 윤재가 반사적으로 입구에 던졌다가 그대로 숨을 멈췄다.
비에 흠뻑 젖은 우산을 한 손에 든 채 지금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선 건 믿을 수 없게도 지금 이 장소에 있을 리 없는, 여느 때와 같이 단정한 수트 차림을 하고 있는 수영이었다.
“비가 엄청 와서 그런지 오늘은 손님이 없네...”
거기까지 말하던 수영이 잠시 후 시야에 들어온 상황을 이해한 것과 동시에 들고 있던 우산을 바닥에 내던지고서 멈춰있던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