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55화 (55/66)

55.

가느다란 한숨으로 머릿속을 환기시키고 일단 성호에게 연락을 취한 윤재는 짧은 시간동안 적당히 만들어낸 변명을 넣어 오늘 하루 가게를 쉬게 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지금 얼굴 상태로 봐선 내일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가능하면 내일부터는 가게 문을 열려고 마음먹고 있는 그는 오늘의 휴무에 대해서만 알려주었다.

어젯밤 흐지부지한 형태로 헤어지게 된 것을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던 듯한 성호가 괜찮으냐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왔을 때 무심코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윤재는 재빨리 별 일 아니라는 대답을 재차 반복했다. 다만 만약 내일 출근을 확정짓고서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경우를 염두에 둔 그는 마지못해 어제 지인과 만난 자리에서 작은 몸싸움이 일어났었다는 정도의 말을 간단히 뒤에 덧붙였다. 그러자 곧바로 수화기 너머에서 잔뜩 흥분한 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새끼에요-!? 사장님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보고만 있어도 아기사슴처럼 가냘파서 뭐라도 하나 더 먹이고 싶은 사장님인데!]

과격한 톤으로 이어지는 성호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윤재가 이내 쓴웃음을 머금고서 말했다.

“아기사슴이라니, 그게 뭐야... 이래봬도 난 성호 너보다 연상인데 아기라는 말은 좀...”

[연상이라도 아기사슴 같은 건 아기사슴 같은 거예요. 물론 성격적으로 사장님은 굉장히 어른스러운 분이시지만... 그러니까 제가 아기라는 말을 붙인 건 믿음이 안 간다는 게 아니라 저절로 보호본능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아후, 아무튼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하셨다니 진짜 열 받네요. 그 새끼 누군지 아시면 말씀 좀 해주세요. 몰래 가서 테러라도 해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으니까.]

“다행히 어젯밤에 원만하게 해결됐어.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 안 써도 돼.”

내일 만나면 하나부터 열까지 꼬치꼬치 다 물을 기세인 성호를 상대로 적당히 마무리 짓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끈 윤재는 마지막으로 나중에 보자는 말을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

옷으로 숨길 수 있는 부분에 난 상처였다면, 하다못해 하루나 이틀이면 얼추 지워지는 정도의 흔적이었다면 굳이 성호에게 걱정 끼칠 만한 얘긴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일 혹은 이틀 뒤 만나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랄 성호를 생각해 미리 짧게나마 언질을 주고 통화를 마친 윤재는 조금은 후련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찜찜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기사슴이라니.

자신이 줄곧 성호의 눈에 그렇게 비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복잡한 기분이 든 윤재가 가벼운 한숨을 내쉰 뒤 습관적으로 거실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11시 42분.

수영이 집을 나선 뒤로 아직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윤재는 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간단한 집안일이라도 하고 있자는 생각으로 어제 이 시간 때쯤 털어 널어놓은 옷가지들을 걷어내기 위해 베란다로 향했다.

커다란 창문을 열자마자 훅 하고 불어온 바람이 윤재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밀려들어오고 있는 적당한 온기를 품은 바람은 지금이 한창 따뜻한 계절로 들어서고 있는 시점이라는 사실을 새삼 증명해주고 있었다.

베란다 난간 너머로 시선을 던져 잠시 동안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동네 주변을 오가는 행인들의 모습을 시야에 담던 윤재가 슬슬 마른 옷가지들을 걷기 위해 안쪽으로 이동하던 중간 뜻밖에 뭔가를 발견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베란다 난간과 연결되어 있는 작은 선반으로, 그 위에는 윤재 자신이 이곳에 내어놓은 기억이 없는 작은 그릇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릇에 담겨져 있는 건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들이었다. 지금은 마른 상태이지만 아마도 처음엔 물에 젖어있었을 휴지 벽이 수북이 쌓인 꽁초들 아래 놓여 있었다. 정황 상 이 그릇을 이 자리에 가져다놓은 것이 수영일 것은 따로 의심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당장 보기에도 그릇을 채우고 있는 담배꽁초가 열 개 이상은 되어 보였다.

어젯밤 수영이 홀로 이곳 베란다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윤재는 잠시 그 자리를 지키고 선 채로 짐작해 보았다. 딱히 아픈 구석도 없어 보이는 수영이 오늘 아침 병가를 내겠다는 결정을 한 건 오늘 새벽 동안 이곳에서 떠올렸던 생각들을 정리한 끝에 나온 결과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얼마동안, 또 얼마나 깊은 생각을 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생각의 시간들이 적어도 이 많은 담배꽁초들이 만들어져 모일 동안은 유지되었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자존심이 센 만큼 일에 대한 욕심도 많은 남자가 차후에 일을 벌충해야 하는 리스크를 짊어지면서까지 갑작스런 병가를 신청했다는 사실은 윤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어째서 수영이 반드시 오늘 다소 무리해서까지 자신과 함께 있으려고 하는 것인지는 보통의 머리만 있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무자비한 폭력에 열중해 있던 내내 믿기 어려울 만큼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수영의 얼굴이 잠시 자신을 향하던 찰나 순간적으로 뚜렷한 변화를 보였던 것을 윤재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차’하는 듯한 눈이었다.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나자마자 수영이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자신을 지인에게 인도해 밖으로 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반 강제로 방을 나서는 동안에도, 또 수영의 차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조금 전 받은 충격이 가라앉지 않은 탓에 의식의 일부는 몽롱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스치듯 짧게 마주했던 수영의 시선만은 윤재의 머릿속에 달라붙은 채로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흑백의 색만으로 이뤄진 그림들 가운데에 홀로 선명한 색을 입은 그림을 눈동자에 담아내고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잠시 한 자리를 지키고 선 채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윤재를 현실로 끌고 온 것은 ‘고장 난 컴퓨터나 냉장고 삽니다~’라는, 멀찍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귀에 익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평소 때때로 이 목소리로 인해 뜻하지 않게 잠에서 깬 적이 있는 윤재는 일단 짧게 한숨을 내쉰 뒤 근처 빨래걸이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을 차례로 걷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울 때의 수영이 손을 난간 밖에 내놓고 있었던 것인지 중간에 슬쩍 코를 대본 마른 옷가지들에 담배 냄새는 배어있지 않았다.

수영이 돌아온 건 그가 미리 언급했던 시간을 조금 넘긴 뒤였다. 집에 들르는 김에 옷을 갈아입겠다고 말했던 대로 다시 돌아온 그는 평소 윤재가 봐온 수트 차림 대신 엷은 회색 셔츠에 슬림한 라인의 청바지를 걸쳐 입고 있었다.

단순히 입고 있는 옷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전체적인 인상 자체가 확 바뀌어 지금의 수영은 딱딱한 회사원보다는 그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직업을 가진 사람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연극배우라고 하면 연극배우처럼 보였고, 소설가라고 하면 또 틀림없는 소설가로 보이기도 했다. 어느 직업이 되던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미남이라는 수식어는 반드시 붙을 터였지만.

윤재와 함께 부엌으로 들어선 수영은 들고 있던 종이백 안에서 포장물들을 꺼내 차례대로 식탁 위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가 점심 식사로 사온 것은 아까 전 외출 시 중간에 있었던 윤재와의 통화에서 결정된 유명 프랜차이즈 안심 돈가스와, 아직까지는 먹기에 살짝 시기가 이른 듯한 냉모밀이었다.

“배고팠지?”

“괜찮아요.”

슬쩍 소매를 걷어 벌써 두 시에 가까워져가고 있다는 걸 확인한 수영이 윤재의 앞으로 포장용기에 담긴 돈가스와 냉모밀을 밀어주었다. 정작 집에서 필요한 서류 파일을 찾아 회사에 보내주는 중요한 일을 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여기서 집까지 오가는 데에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늘 같은 평일은 늘 회사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했던 터라 아주 오랜만에 수트가 아닌 일상복을 입고 홀로 음식 포장을 위해 가게를 찾았던 수영은 다소 생소한 기분을 느꼈었다. 윤재의 얼굴에 심한 멍이 남아 있지만 않았다면 그를 밖에 불러내고 싶었을 만큼 오늘 바깥 날씨는 무척이나 화창해서 평일임에도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수는 눈에 띠게 많았다.

어젯밤에 겪었던 심각한 일들이 오히려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 분위기가 넘쳐 나는 가게 앞에 줄을 서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수영은 자연스레 지금쯤 혼자 집에 있을 윤재를 떠올렸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오늘 아침 잠시 붙였던 눈을 뜨고 난 이후로 그가 윤재의 존재를 머릿속에 담고 있지 않았던 건 자택에 들러 파일을 찾아 회사에 보냈던 단 십여 분 정도의 시간뿐이었다.

일 외에 무엇, 혹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열중해본 경험이 없는 수영은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포장해 나온 음식이 담긴 종이백을 건네받고 몸을 돌린 순간 쓰게 웃었다. 스스로도 어떻게 된 건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윤재에 대한 생각들을 머리 밖으로 밀어낼 생각은 들지 않았던 그였다. 당장 내일 출근을 한 뒤엔 원치 않아도 일에 집중해야 할 테니 시간적 여유가 있는 동안만큼은 순수하게 윤재와 자신의 일에 대한 생각을 하고 싶었다.

식사가 시작된 뒤로 얼마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오간 대화의 내용이라고 해봐야 맛이 어떠냐는 수영의 질문에 윤재가 맛있다고 대답한 것이 전부였다.

두 사람 모두 식사 도중에는 가능한 한 말을 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이유로 인해 고요하다 못해 엄숙하기까지 한 분위기로 진행된 식사는 마지막까지도 그 분위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성호에겐 연락했어?”

잠시 후 깨끗이 정리된 식탁 위에 놓인 컵으로 손을 뻗으며 수영이 물었다. 컵에 담겨 있는 건 특유의 향을 품고 있는 녹차였다.

“네. 오늘은 쉰다고 말했어요.”

“오늘만? 내일은 출근하려고?”

“...가능하면요.”

윤재의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수영이 손에 든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현재의 정황이나 성격 상 윤재가 그렇게 행동하리란 건 이미 수영의 예상 범위 안에 들어있던 것이었다.

“베란다에 있던 그릇... 치웠어요.”

“그릇?”

갑작스런 얘기를 듣고 윤재를 쳐다본 수영이 이내 뭔가를 떠올리고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재떨이가 안 보이길래 적당히 하나 꺼내서 썼어.”

“...네.”

짧게 대답한 윤재가 자신 분의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까 전 돈가스와 냉모밀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던 그는 아직까지 완전히 식지 않은 녹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가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입 안쪽, 많이 찢어진 거야?”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은 수영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묻자 윤재가 ‘조금이요.’라고 작게 대답했다.

얼굴 군데군데 남아 있는 멍 자국만도 볼 때마다 속이 상하는데 당장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도 어제 당한 폭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수영은 한동안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맞싸우는 것은커녕 제대로 된 방어조차 할 줄 모르는 윤재를 상대로 이런 가차 없는 폭력을 신나게 휘둘렀을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그 두 사람에게 달려가고 싶은 심정의 그였다.

“어제... 제가 나가고 어떻게 되었나요?”

문득 진지한 목소리로 들려온 윤재의 질문을 이해하고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힌 수영이 앞에 놓인 컵에 시선을 던졌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이 되고 나면 윤재가 그 일에 대한 질문을 해올 거라는 짐작을 하고 있었음에도 막상 상황이 닥치자 조금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그는 그러나 얼굴 위로는 일체 그와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널 찾아갈 생각 못할 정도로 적당히 패고 경고하는 걸로 끝냈어.”

자신이 목격한 부분까지만 하더라도 이미 ‘적당히’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선은 넘어섰다고 생각한 윤재는 일단 그와 같은 생각을 뒤로 하고 다시 질문을 이었다.

“...다른 한 사람도요?”

윤재가 본 것은 해준이 맞는 것까지였으니 그가 지금 언급한 다른 한 사람은 호연일 거라고 짐작한 수영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주는 윤재의 아량에 쓴웃음이 난 그는 다시 두어 모금의 녹차를 입안으로 흘러 넘겼다. 아까보다 한층 떨떠름한 맛이 깊어진 건 기분 탓인지도 몰랐다.

“먼저 맞은 사람... 중간에 잘못되거나 한 건 아니죠?”

진지한 윤재의 질문이 이어졌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당시 윤재의 눈에 비친 해준은 참담할 정도로 얻어맞고 있었으니 그가 그런 진지한 의문을 갖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물론 자신이 나간 뒤 더 심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나라도 사람을 죽이진 않아. 아까운 젊음 버리고 교도소에 가서 썩을 생각은 없으니까.”

실제로 어젯밤 호연과 해준을 앞에 두고서 한 순간이나마 정말로 죽여 버릴까 하는 강한 충동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마지막 선을 지킬 정도의 이성은 유지하고 있었던 수영이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그 두 사람...이 다시 널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

윤재를 따라 그다지 내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수영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윤재에게서 시선을 거둬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tv라도 볼까?”

이 이상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막기 위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거실에 있는 tv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묻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윤재도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세 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크기의 소파에 윤재와 나란히 앉은 수영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구식 디자인의 tv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보고 싶은 방송 있어요?”

“아니. 네가 보고 싶은 걸로 봐.”

리모컨을 든 윤재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tv화면은 약간의 텀을 두고 공중파에서 쇼프로그램으로, 뉴스로, 드라마 채널로 변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아... 아앗! 거긴...!>

갑자기 화면 전체가 살색으로 뒤덮인 가운데 난데없는 하이톤의 야릇한 신음소리가 좁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아흐... 아아! 남편이 곧 올 거예요! 아...>

자연스레 바로 앞 tv화면에서 옆에 앉은 윤재에게로 시선을 옮긴 수영이 이내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윤재가 손에 쥔 리모컨 버튼을 손가락이 하얘지도록 꾹꾹 열심히 누르고 있었다. 오래된 tv라 중간에 렉이라도 걸린 것인지 윤재가 몇 번을 더 누른 뒤에야 화면은 간신히 다음의 건전한 채널로 이동했다.

사람의 체온과 살갗이 익숙한 수영에게 있어 저런 3류 에로 영화정도야 조금도 흥분할 거리가 되지 못했지만, 당장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윤재에겐 꼭 그렇지도 않은지 간신히 다른 채널로 넘어간 뒤에도 윤재의 얼굴엔 여전히 긴장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뜻밖에 나온 에로 영화 한 장면을 넘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리모컨을 누르던 조금 전 윤재의 모습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수영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로 윤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본인이 일부러 의도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지금 수영의 눈에 윤재는 너무도 사랑스럽게 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껏 그가 심심치 않게 만나온, 일부러 코맹맹이 소리를 내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등 의식적인 행동으로 스스로를 어필을 해왔던 상대들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솔직하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감정이었다.

결국 윤재가 선택한 채널은 흔해 빠진 동물 다큐였다. 내용은 해안 속 생물의 체계적인 먹이사슬 관계를 다룬 것으로 지금 주인공으로 카메라에 잡히고 있는 건 거대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크릴새우였다.

<크릴새우의 몸길이는 약 6센티미터로, 부화한지 약 2년이면 완전히 성숙합니다. 가슴다리에 여러 개의 외지가 있고 배다리에는...>

귀에 익은 묵직한 성우의 목소리로 이어지는 내레이션을 얼마 동안 집중해서 귀에 담고 있던 윤재가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일순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소파 등받이에 바짝 몸을 붙인 채 한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는 수영이 눈을 감고 있었다. 피로해서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 건가 싶어 그대로 얼마간 시선을 고정해봤지만 아무래도 그새 정말로 잠이 든 건지 윤재의 시선이 향하는 내내 수영은 단 한 차례로 눈을 뜨지 않았다.

자연스레 윤재는 아까 전 베란다에서 봤던 많은 양의 담배꽁초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젯밤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생각이 많아졌을 수영이 아마도 밤새 많은 시간 잠을 이루지는 못했을 거라는 짐작이 뒤늦게나마 들었다.

가로로 긴 쌍커풀 없는 시원한 눈매와 샤프한 턱 선, 평소 따로 관리라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깨끗한 피부. 쭉 뻗은 콧날은 적당히 날카로운 각을 이루고 있었다.

이미 타고난 외모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기는 충분했지만, 모처럼 잘 타고난 외모를 꾸미는 데에도 인색하지 않은 수영은 불시에 어디를 보더라도 마땅히 지적할 부분이 없는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로로 긴 형태를 하고 있는 손톱의 길이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였고, 늘 그렇듯 왁스로 잘 세팅되어 있는 헤어스타일은 깔끔하면서도 댄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있는 수영의 얼굴을 윤재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쉽지 않은 성격은 친해지기에 문제가 있지만, 단순히 외모만으로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벌떼같이 그의 주변에 몰려드는 것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그 남자도 이런 겉모습에 반한 걸까...’

수영을 사이에 두고 자신을 향해 잔뜩 날을 세우던 호연의 모습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리고서 미간을 좁힌 윤재가 문득 커피라도 끓일까 하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킨 순간, 갑자기 그의 오른쪽 손목에 강한 힘이 휘감겼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느새 눈을 뜨고 자세를 바로 세운 수영이 한손으로 윤재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윤재의 시선에서 놀란 기색을 읽어낸 수영이 잠시 동안 강한 힘이 실려 있던 손에서 일시에 힘을 빼내고 윤재의 팔을 놓아주었다.

“어디 가려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수영이 물었다. 옅은 잠에 빠져 있었던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나간 스스로의 행동에 조금은 당혹스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그는 ‘커피를 좀 끓이려고요.’라는 윤재의 대답을 듣고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곁을 떠나려는 미약한 기척에 곧바로 손이 나가다니, 우습게도 한 순간나마 마치 현관문을 나서려는 엄마에게 어디 가냐고, 가지 말라고 보채는 어린애라도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피곤하면 제대로 자는 게 낫지 않겠어요?”

멀지 않은 부엌에서 주전자에 물을 채우며 윤재가 건네 온 질문을 들은 수영이 ‘괜찮아.’라고 짧게 대답했다.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한 탓에 서서히 누적된 피로가 몰려들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처럼 만에 윤재와 함께 보내고 있는 시간을 허무하게 소모하고 싶지는 않은 그였다.

“내 것도 좀 타 줄래? 진하게.”

윤재에게 짧은 부탁을 남기고 피로한 눈가를 손끝으로 매만진 수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내일 출근한 뒤엔 오늘의 휴식을 벌충해야 할 텐데 이런 상태가 유지된다면 제대로 일에 집중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고 있었다.

옅은 잠에서 깨어난 뒤로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는 지루한 내레이션을 들으며 tv화면에 시선을 두고 있던 수영의 무표정한 얼굴이 잠시 후 해양의 포식자라는 이름을 단 상어가 등장한 뒤 조금은 흥미가 가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유명 영화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얼굴이 시퍼런 바다의 색과 어우러져 제법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커피믹스 특유의 향이 좁은 집안을 서서히 채우기 시작하고 얼마 뒤 커피가 담긴 머그잔 두 개를 들고 돌아온 윤재가 그 중 하나를 수영에게 건네고서 자연스레 tv화면에 시선을 던졌다가 일순 어깨를 움찔했다.

하필이면 악명 높은 백상아리가 게걸스럽게 물개를 먹어치우는 모습이 바짝 클로즈업된 채로 화면 가득 잡히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가 박힐 때마다 시뻘건 피가 쭉쭉 뿜어 나오며 바닷물을 물들이는 모습은 끔찍하다 못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처음 자신이 자리를 뜨기 전까지만 해도 잠시 다큐의 주인공으로 설명이 되었던 물개가 처참한 걸레조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던 윤재가 문득 옆에서 들려온 수영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저런 거, 무서워?”

진지한 수영의 질문을 받고 다시 tv화면으로 시선을 옮긴 윤재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다들 무서워하지 않나요? 저런 끔찍한 장면은...”

“...그래?”

화면 가득 펼쳐지고 있는 것은 분명 잔혹한 장면임에도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현실적인 생각이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인지 끝내 수영은 눈앞의 잔혹한 장면이 마무리될 때까지도 윤재의 말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인간의 입장에선 다소 잔혹하게 보이더라도 냉정한 시각으로 보면 자연의 생태계에선 지극히 당연한 일상에 불과하다는 판단은 마지막까지도 감정보다 높은 위치를 점했다.

뜬금없이 동물 다큐를 감상하며 새삼 자신의 정서가 꽤나 메말라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수영이 들고 있던 머그컵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옆에서 들려온 윤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무섭다는 생각 같은 거 한 번도 한 적이 없나요? 굳이 저런 무서운 동물이 아니더라도 깊은 물이라던가... 높은 곳이라던가... 귀신같은 거...”

윤재의 질문을 받고 잠시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생각에 잠긴 수영이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글쎄... 별로 그런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웬만큼 잘 만들지 않으면 공포 영화는 대부분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고, 높은 곳도 무섭다는 생각은 안 들어. 어릴 적에 친구들이랑 몰려다니며 가끔씩 윈드서핑이나 번지점프를 했을 때도 그냥 재미있다는 생각밖엔 안 들었으니까.”

“.......”

“너는?”

되돌아온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고개를 들어 tv화면을 쳐다보았다. 그 사이 새로운 주인공이 되어 화면을 채운 건 강한 독성을 가졌다는 설명이 따라붙는 해파리 떼였다.

“어릴 적엔 귀신이 무서웠어요. 부모님 두 분이 다 일을 하셔서 집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았는데 어느 날인가 한 번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던 중간에 시퍼런 얼굴을 한 귀신 얼굴이 나온 적이 있었거든요. 그냥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었는데 그때 너무 많이 놀라서 한동안 잘 때도 불을 끄지 못했었죠.”

윤재의 말을 듣고서 당시의 상황을 잠시 머릿속에 그리던 수영이 아직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커피를 몇 모금 목 안으로 흘러 넘겼다. 처음엔 단순히 어린 시절 그런 일을 겪으면 충분히 놀랄 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던 그는 이어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이어갔다.

“어릴 적 집에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았어?”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 수영에게 시선을 던진 윤재가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를 머금자 그런 그의 반응을 나름대로 해석해 받아들인 수영이 반쯤 비어있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일찍 철이 드는 아이들의 상당수는 어릴 적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던 오래 전에 들었던 누군가의 말이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타고난 기본적인 성격까지 전부 바꿀 수는 없겠지만 만약 윤재가 형제가 있는 떠들썩한 집에서 태어나 듬뿍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애교 있는 성격으로 자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수영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애교가 있는 시점에서 이미 윤재는 자신이 아는 윤재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소소한 일상에 관한 것이었다.

수영의 회사 이야기, <민들레>의 이야기.

묻는 것은 주로 수영이었고, 윤재는 대답을 하거나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을 때는 고갯짓으로 간단하게 대꾸를 해주었다.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이야기에 집중을 하면서도 좀처럼 적극적인 태도로는 돌아서지 않는 윤재의 모습은 몸을 이곳에 둔 채로 마음은 어딘가 먼 곳에 두고 있는 것만 같아 수영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 순간도 완전히 마음의 빗장을 풀어내지 않고 있는 윤재의 모습은 수영에게 있어 마치 여차 하면 금방이라도 달아날 수 있도록 미리부터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물론 윤재가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이유에 대해서라면 충분히 알고 있는 수영은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안타깝고 초조해져 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윤재가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그를 품을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수영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것 외에 달리 그가 택할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문득 천천히 팔을 뻗은 수영이 나란히 앉은 윤재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손에 쥐었다.

“머리 잘랐네.”

갑작스럽게 느껴진 손길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윤재가 수영과 마주하던 시선을 이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요 며칠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던 탓에 자신이 머리카락을 잘랐던 사실을 까맣게 머릿속에서 잊고 있었던 그는 당장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곧바로 떨어져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수영의 손길이 좀 더 세심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움직임으로 번져가는 것을 느낀 윤재는 한참 동안 잊은 채로 살아왔던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귓가에 살아난 매미울음소리로 기억해낼 수 있었다.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후텁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침대 위에 엎드린 채로 옅은 잠에 빠져 있었던 자신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손길이 내려왔었다. 누구라고 해봐야 당시 방안에 있었던 건 자신 외에 단 한 사람뿐이었지만.

묵직한 무게가 바로 옆에 내려앉은 것 외에 달리 들려온 소리는 없었다. 지금에 와서 비교적 또렷이 기억되고 있는 건 나른한 상태에서 다시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간헐적으로 머리 위로 내려앉았던 손길 뿐. 그것은 마치 깨어지기 쉬운 소중한 물건을 다루는 듯한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위에서 거칠게 몰아쳤던 남자의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상냥하던.

수많은 아픈 기억들 중에서 몇 남아 있지 않았던 달콤했던 기억의 일부가... 그간 필사적으로 지워내려 노력했던 기억이 거짓말처럼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있는 윤재의 얼굴이 어느 순간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몽롱한 의식 너머로 기억되고 있었던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이 이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와 똑같이 자신의 머리 언저리에서 조심스레 맴돌고 있었다. 마치 사이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고 되돌아온 것처럼.

순식간에 밀려드는 많은 감정들을 애써 억누른 윤재가 고개를 들자 잠시 동안 다정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멈췄다.

자신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던 손이 거두어지는 것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수영을 바라본 윤재의 얼굴은 어느 샌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변해 있었다.

잠시 텀을 두고서 묘하게 낮아진 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네가 나한테 무서운 게 없느냐고 물었지?”

“.......”

“아까는 없다고 말했지만 지금 막 생각났어.”

그게 뭐냐고 물기로 일렁이는 눈으로 묻는 윤재를 향해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어 보인 수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우는 거.”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듣고 눈의 깜빡임을 멈춘 윤재가 이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보는 앞이던, 혹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든 네가 어젯밤처럼 운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

바짝 미간을 좁힌 채로 그렇게 말한 수영이 차츰 붉어지는 윤재의 귀를 확인하고 거두었던 손을 다시 뻗어 조금 전 그의 손길에 흐트러진 윤재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겨주었다. 멈추지 않고 다정하게 이어지는 수영의 손길이 중간 중간 윤재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잘 참아낸 윤재는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수영의 앞에서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절반은 무겁고, 절반은 애달프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

그 사이에도 tv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처럼 반듯한 목소리로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는 내레이션이 나란히 입을 다문 두 사람을 대신해 좁은 거실을 채우고 있었다.

***

“이만 갈게. 피곤해 보이는데 내가 간 뒤에 푹 쉬어.”

자신도 수면부족으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띠게 피로감이 쌓여가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윤재 역시 어제의 일로 인해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닐 거라는 판단을 한 수영이 슬쩍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5시 22분.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른 시점이었지만 각자 내일 있을 일정을 생각하면 슬슬 헤어지기에 적당한 때인지도 몰랐다.

“내일 하루 정도는 더 쉬는 게 좋을 같지만, 정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가게에 나가더라도 무리는 하지 마.”

짧은 당부를 남기고 돌아선 수영이 현관문 손잡이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문득 그의 등 뒤에서 윤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 해볼게요.”

“!”

갑작스런 윤재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수영의 얼굴 위로 조금 놀란 기색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수영의 얼굴을 잠시 그대로 마주하던 윤재가 작은 망설임을 떨쳐내고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지금과 똑같은 답이 그대로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은 우리들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이어지는 윤재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서있던 수영이 잠시 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만약, 그때에도 제 대답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건가요?”

“.......”

“.......”

“그럼 그땐 다시 생각할 시간을 또 줄게.”

“.......”

“전에 말했잖아. 기다릴 각오는 충분히 하고 있다고.”

마지막까지도 자신을 포기하겠다고는 말은 해오지 않는 수영을 조금 복잡한 마음을 안은 채로 바라본 윤재는 잠시 후 푹 쉬라는 짧은 당부를 남긴 그가 현관을 나선 뒤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줄곧 긴장된 상태에 있었던 몸 안의 힘이 일시적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한동안 머물러 있던 현관 앞을 떠나 거실로 향하며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던 윤재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아까 전 수영의 손길이 머리카락 사이에 남겨 놓은 감촉이 그 후로 얼마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은 채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다정한 각인 같다고, 윤재는 쓰게 웃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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