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53화 (53/66)

53.

“크윽-!”

첫 방부터 코에 정타를 얻어맞은 해준이 억눌린 비명을 삼키고서 곧바로 방어에 나서려 자세를 바로세웠지만, 이미 첫 공격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입어 균형이 흐트러진 그는 이어져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내지 못한 채 다시 얼굴 정면으로 받아냈다. 조금 전 맞은 코 부위에 정확히 반복되어 날아온 두 번째 주먹으로 인해 가중된 통증을 느낀 해준은 이번에는 참아내지 못하고 크게 비명을 질렀다.

연달아 두 번이나 공격을 당한 부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살짝 대보자 곧바로 엄청난 통증이 밀려들었다. 부러졌는지 휘었는지 손끝에 만져진 코는 제 모습을 잃은 상태였다. 얼굴을 뒤덮은 통증만도 엄청난데 거기에 역한 피 비린내까지 끊임없이 콧구멍 속으로 밀려들어오자 당장 서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울 지경이 되었다.

단 두 방이었다. 단 두 번의 공격 만에 해준은 주변의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오래 전 지인들로부터 수영의 과거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들었던 해준은 애초에 몸싸움으로는 자신에게 승산이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고서 무모한 대항을 포기한 채 한시라도 빨리 지금의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단 몇 분 만에 갑자기 돌변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반쯤 마비되어 있는 그의 사고가 허용하고 있는 건 그저 그 정도의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해준의 바람 따위 애초에 관심조차 두고 있지 않은 수영은 말 그대로 무기력한 인간 샌드백이 된 해준을 기어이 근처 벽으로 몰아넣고서 자비 없는 공격을 이어갔다.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것 역시 상당량의 체력을 요하는 일임에도 수영의 싸늘하게 굳은 표정은 처음 이 방에 들어섰을 때와 비교해 거의 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단순히 얼굴만 놓고 보면 지금의 그는 평범하게 사무 일에 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으아아악--! 아악--!”

재차 코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감각에 이어 참기 힘든 고통이 밀려들어와 끝내 바닥에 허물어지듯 쓰러진 해준이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를 향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머리를 밟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면 그 다음엔 무방비가 상태가 되어버린 가슴과 배로 강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딱딱한 구두굽에 얼굴 정면을 걷어차인 것과 동시에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른 해준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지옥과 맞닥뜨려져 있었다. 정신없이 맞던 도중 이가 빠진 것인지 피와 침으로 범벅된 혀가 중간 중간 빈틈으로 삐져나가고 있었다.

몇 분 째 넓은 방안을 채우고 있는 건 해준의 입에서 나오는 비명과 신음뿐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숨을 죽인 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대로 돌았군.’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해준의 얼굴을 공 차듯 차고 있는 수영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여진이 속으로 혀를 찼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처음 알게 된 이래로 이렇게 진지하게 나서서 사람을 패는 수영의 모습을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는 여진은 지금의 수영이 겉으로 보이는 서늘한 얼굴과 달리 무척이나 감정적으로 변해있는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 여기저기 친한 무리들과 몰려다니며 주먹을 쓰던 당시에도 웬만해선 뒷짐만 지고 구경을 해왔던 수영은 어쩌다 그럴 기분이 되면 놀이의 일환으로 상대를 반죽음 상태까지 몰아넣었었다. 개중에는 겁 없이 반격에 나섰다가 수영의 신경을 긁어놓은 대가로 끝내 실명까지 된 녀석도 있었다. 평상시 학교에서는 차분히 수업에 임하는 잘생긴 우등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 자칫 고요해 보이는 그의 성격 안에 때때로 정도를 넘어설 정도의 흉폭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수영과 친하게 어울렸던 자들 사이에 공공연히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지금처럼 수영과 가까운 친분을 유지했던 여진 역시 그와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중요한 시기가 되자 제대로 수험생의 모습을 갖추더니 곧바로 노는 동안 떨어졌던 성적을 수직 상승시키고서 원하던 명문대학에 입학한 수영은 이후 과거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누가 보기에도 나무랄 데 없는 반듯한 길을 차근히 걸어갔다. 학창시절 직접적으로 폭력에 가담하는 것으로 발산시켰던 가학적 욕구는 서서히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이동해갔지만, 그와 몸을 섞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수영을 평가할 뿐이어서 제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의 말끔한 그의 모습만을 아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과거 그가 저질렀던 폭력적인 일에 대해선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한때 흥분에 취해 상대를 반죽음으로까지 몰아넣었던 무자비한 소년은 당시 그 상황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던 이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자신이 손해 보지 않는 선택은 하지 않는 영악한 남자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과거에 여진이 보았던 것과 달리 순수하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에 기인한 폭력이었다. 어느 기점부터 서서히 숨겨두었던 가학성이 드러나 움직임에 불을 지피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후에 자연스레 스며든 것일 뿐 애초부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던 과거의 패턴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구석에 공처럼 몸을 말고 속수무책으로 폭력을 감내하고 있는 해준의 비명은 이제 기어들어가는 수준으로 변해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발에 걷어차일 때마다 개처럼 깨갱거리더니 이제 더는 소리를 지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가해지는 폭력을 힘겹게 견디던 해준이 입에 잔뜩 고여 있던 피와 침을 삼키던 중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발길질을 멈추고 슬쩍 허리를 숙인 수영이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해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억지로 그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만... 크흑, 이제...제...발....”

가축 취급을 당하듯이 거칠게 끌어올려진 해준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는 손을 붙잡고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동안 이어지는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됐던 그의 얼굴은 보는 사람이 덩달아 아픈 기분을 느끼게 될 만큼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퉁퉁 부운 눈은 눈동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코의 중심부분은 심하게 내려앉아 있었으며 피로 범벅된 입은 벌어질 때마다 이가 빠진 흉한 빈틈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 눈에 띠는 얼굴도 심각한 상태이지만 얼굴 못지않게 정신없이 걷어차인 가슴이며 배, 다리 부위도 옷을 벗겨내면 검붉게 멍들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에 지금도 제대로 허리를 펴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일부 내장파열까지 진행된 상태인지도 몰랐다. 여진이 지켜본 바에 의하면 바로 조금 전까지 수영은 조금의 절제도 없이 휘두른 주먹과 발에 제대로 힘을 실었었다.

슬쩍 옆으로 시선을 옮긴 여진이 왼쪽 구석에 서있는 호연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일행이 무참한 폭력의 상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음에도 처음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서있는 호연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어쩌면 지금 그의 눈동자에 아무 것도 비치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진지하게 들게 만들 정도의 의연한 태도였다.

‘다 포기한 건가... 아니면 아직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건가...’

맞는 일행보다 폭력의 주체가 되고 있는 수영에게 집중된 시선을 보내고 있는 호연의 모습을 살피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여진이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조금이나마 패닉에서 벗어나 제동 없이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수영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윤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좀 전에 겪었던 일에 대한 충격이 아직까지 남아있기 때문인지, 혹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장면을 보며 새롭게 생겨난 것인지는 당장에 구분하기 어렵지만 지금 그의 얼굴 위에 드러나 있는 것은 의심할 것 없는 ‘두려움’의 감정이었다.

여진이 윤재를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우수영을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움직이게 만든 눈앞의 남자는 정작 이런 쪽의 세계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은 예상보다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선웅아.”

문득 들려온 수영의 목소리를 듣고 얼마 동안 윤재의 멍든 얼굴에 박혀 있던 시선을 옆으로 옮긴 여진이 수영의 부름에 따라 앞으로 걸어가는 선웅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선웅은 오랫동안 수영의 부친의 운전사 일을 해온 남자의 아들로, 수영과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지인관계-실제로는 주종관계에 가까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쉴 새 없이 몰아치던 공격을 잠시 멈추고서 재킷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낸 수영이 그 사이 곁으로 다가온 선웅에게 그것을 건넸다. 그 와중에도 그의 한 손은 지쳐 늘어진 해준의 멱살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내 차로 데려가서 좀 지켜봐줘.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네.”

짧게 대답한 선웅에게서 윤재에게로 시선을 옮긴 수영이 이윽고 미간을 좁혔다.

괜찮다며 선웅의 부축을 사양하고 혼자 힘으로 일어난 윤재의 걸음이 평소보다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혼자 걷지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비틀거리는 정도로 보아 당장에 많은 상처가 남아 있는 얼굴뿐 아니라 옷에 가려진 배와 다리 부분에도 적지 않은 충격이 가해졌던 것이 분명했다.

윤재에게 폭력이 가해지던 상황을 스치듯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가라앉혔던 분노가 순식간에 다시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는 수영은 이내 두 사람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잠시 동안 방치해두었던 해준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동안 뒤에서 무슨 짓거리 했어?”

억센 손아귀에 멱살을 잡힌 해준이 머리맡에서 내려온 질문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멀찍이 서있는 호연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슬쩍 미간을 찌푸린 호연은 이내 먼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야...”

미세하게 떨리는 대답을 듣고서 짧게 코웃음을 친 수영이 갑자기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싣더니 곧장 해준을 끌고 근처에 자리한 책상 앞으로 향했다.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갑작스럽게 책상에 머리를 쳐 박힌 해준이 억눌린 비명을 삼켰다. 이미 얼굴부터 몸 이곳저곳 어느 한 군데 맞지 않은 구석이 없을 만큼 심한 타박상을 입은 상태의 그는 상처 위에 가중된 충격에 제대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불과 십 여분 전까지만 해도 강자의 입장에 서서 윤재를 범할 생각으로 흥분해 있었던 그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쳐 박힌 자신의 입장을 냉정하게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온몸 곳곳에서 간헐적으로 느껴지고 있는 통증과 얼굴을 뒤덮은 피에서 풍기는 토할 것 같은 비린내도 반쯤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한꺼번에 밀어닥친 수많은 생각들이 끝내 수용 가능한 한계를 넘어선 것인지 이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정말로 꿈이라면 좋을 텐데 잊을 만 하면 되살아나는 끔찍한 통증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늘어져 있는 해준을 억지로 현실 안에 가둬두고 있었다.

“!”

자신의 오른손이 딱딱한 책상 위에 펼쳐지는 것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고개를 든 해준이 곧바로 수영을 쳐다보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대체 무슨 상황인 것인지 파악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찾아갔고, 찾아가서는 무슨 짓 했어? 괜히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방금 전 같은 씨도 안 먹힐 거짓말 하면 재미없어.”

조금 전 들었던 해준의 대답을 깨끗이 무시한 채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반복한 수영이 책상 한 켠에 놓여 있는 와인 오프너를 들어 그 끝의 나이프를 펼쳤다. 순식간에 섬뜩한 흉기가 된 그것을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해준의 손 위로 가져간 그는 1분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록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들릴 듯 말듯 희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끔찍한 비명이 방안을 뒤흔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으아아아악--!”

강한 힘을 싣고 내려온 나이프가 펼쳐진 손 중심에 정확히 찍힌 순간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른 해준의 몸이 이제 갓 뭍에 건져 올려진 물고기처럼 크게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꿰뚫린 부분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피가 서서히 책상을 적시는 것을 붉어진 눈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들어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수영의 시선을 마주한 그는 덜덜 떨리는 입을 열어 이제 제발 그만 놔달라고 애원했다. 동시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 방안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도와달라고 말과 눈빛으로 간절히 부탁한 그는 그러나 끝내 어느 한 사람 선뜻 앞으로 나서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고서 절망스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 끌어봐야 너만 손해야. 내가 지금 장난하고 있는 걸로 보여?”

이 방에 들어선 이후 수영이 보이고 있는 모든 행동들이 장난이나 허세가 아니라는 건 조금 전 자신의 손에 가해졌던 끔찍한 일을 통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는 해준이었다.

다시 한 번 도와달라는 뜻을 담아 호연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여전히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그의 태도에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문 해준은 마음 안에서 결정을 내렸다. 고집스레 함구한다고 해서 이대로 조용히 일이 마무리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현실로 인식한 지금, 늦게나마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지금의 그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

“...찾아간 건 세 번이야.”

해준의 입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자 줄곧 얼굴 위에 드리우고 있던 냉기를 한 꺼풀 걷어낸 수영이 눈짓으로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송해준!”

뒤에서 들려온 호연의 부름을 무시하고 단단히 마음을 다잡은 해준이 떨리고 있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말을 이었다.

“처음엔 호연이랑 같이 가서 잠시 얼굴만 봤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나 혼자 찾아가서 경고만 했었어.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손을 쓴 건 오늘이 처음이야.”

해준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수영이 다급하게 덧붙여진 ‘정말이야. 직접 확인해봐.’라는 말을 듣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이런 상황에까지 와서 굳이 거짓말을 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실제로 해준의 표정과 목소리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껏 애써 냉정을 가장하고 있던 호연의 얼굴 위로 확연히 드러나 있는 동요가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경고? 무슨 경고를 했는데?”

조금 전 나이프에 찍힌 손의 통증으로 인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로 이를 악물고 있던 해준이 이어진 질문을 받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당신과 헤어지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그와 잤다는 걸 주변 사람들한테 알리겠다고...”

해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그때까지 강하게 움켜쥐고 있던 해준의 손목을 놓아준 수영이 곧바로 몸의 방향을 돌려 멀찍이 서있는 호연에게로 다가갔다.

“!”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수영의 모습을 잠시 동안 당황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호연이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몇 발자국을 옮기기도 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다가온 수영의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은 그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크게 비틀거렸다. 광대뼈에 날아든 충격을 제대로 인식할 새도 없이 곧바로 이어 날아온 주먹에 코 아래 부분을 얻어맞은 호연은 결국 크게 뒤로 밀려 바닥에 나자빠지고 말았다.

양손으로 입을 감싼 호연의 눈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간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남들로부터 떠받들어지는 삶에 익숙해져 있는 그는 지금 얼굴을 뒤덮은 생경한 통증보다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입안을 가득 채운 비린 맛과 냄새가 조금 전 맞은 충격으로 인해 입안 어딘가가 찢어져있는 상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닥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혼란스런 머릿속을 서둘러 정리하던 호연이 곁으로 다가오는 수영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고개를 들었다. 한때는 달콤한 잠자리까지도 가졌던 연하의 남자를 상대로 이런 비참한 꼴에 처하게 된 자신의 모습이 그는 쉽사리 현실로써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조금 전의 해준처럼 목줄에 끌린 개 같은 취급을 당하기 전 알아서 몸을 일으킨 호연이 욱신거리는 입가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서 말했다.

“감히 나를 쳐...?”

어이가 없다는 듯한 호연의 태도에 수영이 코끝으로 웃었다.

“감히? 네가 뭔데?”

지금까지의 만남을 통틀어 수영이 연상인 호연을 상대로 ‘당신’이 아닌 ‘너’라는 호칭을 사용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그 별거 아닌 변화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있는 호연은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것 같은 표정 위로 애써 가면과 같은 미소를 떠올렸다.

“누구 탓 하지 마.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너니까.”

“애초에 누구든 마음 변하면 바로 헤어지자는 전제를 달고 시작한 관계인데 무슨 흉내야? 난 그 날 우리가 깨끗하게 헤어졌다고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너란 인간 자체를 지웠는데 넌 그동안 혼자서 잘도 이런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는 거네. 왜, 비련의 여주인공 흉내라도 내고 싶었어?”

경멸 섞인 수영의 말을 듣고 표정을 굳힌 호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한테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게 자존심 상했어? 그러면 항의를 하던 화풀이를 하던 직접 날 찾아와서 나한테 할 것이지, 왜 죄도 없는 그를 찾아가 괴롭혔어-!?”

“내가 널 찾아갔으면! 그러면 넌 순순히 다시 나한테 맘을 되돌렸을까? 나로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따라 움직인 것뿐이야!”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뻣뻣이 고개를 들고 소리친 호연이 갑자기 날아온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고 다시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순간적으로 얼굴을 덮쳐온 끔찍한 통증에 이어 그를 당혹시킨 건 혀 위에 놓여 있는 단단한 감촉이었다. 그것의 정체가 다름 아닌 빠진 앞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사고가 정지한 호연은 뻣뻣한 고개를 들어 바로 앞에 서있는 수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

바로 앞으로 다가온 수영이 바닥을 짚고 있는 호연의 손을 작정하고 힘을 실어 밟자 곧바로 커다란 비명이 방안을 뒤흔들었다. 수영의 구두 아래 깔린 손을 빼내기 위해 팔에 힘을 실으려다 위에서 한층 더해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세를 웅크린 호연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통으로 인해 길게 이어지던 비명은 이내 억눌린 신음으로 변했다. 이를 악문 호연의 얼굴과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잠시 후 호연의 손을 무참히 밟고 있던 발을 떼어낸 수영이 줄곧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여진을 불렀다.

“지금부터 연락해서 네가 데리고 있는 애들 중에 다섯 명쯤 골라서 여기로 불러.”

“아무나 상관없어?”

“아랫도리만 멀쩡하면 돼. 가능하면 지저분하고 거친 놈일수록 좋고.”

“수고비는 챙겨줄 거지?”

“일단 주기는 할 건데 아마 하다 보면 중간부터는 수고비 생각도 안 날 거야. 이 새끼 구멍 꽤 쓸 만 하니까.”

마치 사무적인 이야기로 하듯 수영의 입에서 침착한 목소리로 나온 말을 듣고 그제야 지금 흐르고 있는 상황을 이해한 호연이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수영의 팔을 붙잡은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고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묻자 재빨리 자신의 팔에서 호연의 손을 떼어낸 수영이 서늘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별로 대단한 거 없어. 네가 아까 윤재한테 하려고 했던 짓, 어떤 건지 직접 한 번 체험해 보라고. 마침 좋은 기회잖아?”

“뭐...?”

“아까 전 그가 그만하라고 애원할 때 넌 웃고 있었겠지? 지금 나처럼.”

그 사이 이미 누군가와 전화통화에 들어간 여진을 스치듯 쳐다본 호연이 잔뜩 경직된 얼굴을 하고서 입구에 시선을 던지자 곧바로 그의 머릿속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한 수영의 말이 이어졌다.

“안에 몇 명이 있을 줄 몰라서 몇 사람 데려와 밖에도 감시 역 하나 세워놨어.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하... 좀 전에 나를 더럽다고 욕했으면서 결국 너도 똑같은 짓을 하겠다고?”

호연의 말을 들은 수영이 코끝으로 웃었다.

“착각하나 본데 난 내가 깨끗하다고 말한 적 없어. 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도 않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별로 너와 다를 거 없어. 어쩌면 너보다 더한 인간일 수도 있지.”

“...그런 네가 날 책망하겠다고!?”

“누굴 패던, 협박하던, 강간하던, 네 마음대로 해. 내가 경찰도 아니고 따라다니며 막을 생각은 없으니까. 애초에 네가 건드린 게 김윤재만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에 올 일도 없었어.”

“.......”

“.......”

“...이대로 당하고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악에 받친 표정으로 말하는 호연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친 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그러지 못하게 제대로 입막음 용 증거물은 남겨둘 거야. 지금까지 아웃팅을 하겠다는 협박으로 그를 괴롭혔다고 했지? 만약 앞으로 또 허튼 수작하면 너는 그냥 말로만 된 아웃팅이 아니라 여러 남자들한테 돌려 박힌 구멍 사진이 인터넷에 떠다니게 될 거야. 혹시 알아? 평소에 네 도도한 얼굴만 알던 비즈니스 상대들이 그 영상 보고 감동했다며 더 계약하자고 달려들지.”

“우수영!”

“마음 같아선 당장 죽기 직전까지 패도 시원찮지만 지금 아래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걸로 참는 거야. 솔직히 이젠 더 이상 너한텐 닿는 것 자체도 구역질나고.”

“뭐...?”

“영상에 잘 나오게 하려면 얼굴은 아예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앞니 하나 빠진 정도는 괜찮겠지...”

나직한 수영의 중얼거림을 들은 뒤에야 어째서 그가 일개 하수인에 불과한 해준보다도 자신에게 더 약한 폭력을 행사했는지를 이해한 호연은 순간적으로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의 가슴 안에 자신을 향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불씨가 조금 전 들려온 말과 동시에 곧바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상황을 인식하고 이쪽으로 보복의 방향을 정한 수영은 그저 계획에 따라 행동했던 거였다. 중간에 잠시 평정심을 잃고서 호연의 얼굴을 주먹으로 쳐 이를 나가게 한 것이 유일하게 계획에서 벗어난 제어되지 않은 감정의 흔적이었을 뿐.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 당해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이렇듯 갑자기 수영이 이곳을 찾아온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호연은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이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진지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슬쩍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수영이 여진에게 시선을 던졌다.

“지금 오고 있는 거지?”

“응. 근처에서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여진의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수영이 입구로 향하자 곧바로 그의 뒤에서 호연의 외침이 들려왔다.

맞은 건 단 두 방뿐이었지만 그 두 방의 충격으로 변한 호연의 얼굴은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이 보아온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일례로 크게 입이 벌어질 때마다 보이는, 앞니 하나가 빠져 있는 큰 흔적은 꽤나 우스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정말 나를 이대로 두고 가려는 건 아니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호연에게서 시선을 거둔 수영이 냉소 섞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지금까지 뭘 들었어?”

“그만 멈춰줘! 알았어, 다신 안 할 테니까!”

“.......”

“이제 다시는 김윤재한테는 접근하지 않을게! 정말이야!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가지 마! 필요하면 뭐라도 할게, 뭐라도 할 테니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절규에 가까운 애원을 무시하고서 마저 걸음을 옮겨 입구로 향한 수영이 문을 열기 직전 마지막으로 여진을 돌아보고서 입을 열었다.

“다 끝나면 내 폰으로 바로 전송해.”

“저쪽 친구 것도 찍는 거지?”

“그래, 둘 다 못해도 두 번 이상씩은 돌려. 입막음용이니까 최대한 얼굴 또렷하게 나오게 찍고.”

“OK.”

산뜻한 얼굴로 대답한 여진이 곁에 있던 일행에게 눈짓을 보내 달아나려는 호연을 붙잡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수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이 방의 문을 열기 전까지도 아니길 바랐지만 결국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눈에 담고야 말았던 수영은 좀 전에 보았던, 해준의 아래서 웅크린 채 어떻게든 스스로를 지키려 했던 윤재의 모습을 떠올리고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중간에 선웅에게 부탁해 윤재를 내려 보낸 건 그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윤재에게 만큼은 평소 자신이 숨겨왔던 어둡고 더러운 면모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까 전 한때 자제심을 잃고 정신없이 해준을 패던 중간 스치듯 보았던 윤재의 표정이 지금도 그의 머릿속에 또렷이 남겨져 있었다.

마치 잔뜩 겁을 먹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잠시라도 그가 자신을 상대로 무섭다는 생각을 떠올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수영은 더없이 초조해졌다. 더불어 가슴 한켠이 욱신거려왔다.

일전의 방문으로 익숙한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 입구를 빠져 나간 수영은 곧바로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되어 있는 눈에 익은 차량 앞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 운전석에서 내린 선웅에게 몇 가지 주문을 건넨 수영은 그를 다시 문제의 방으로 되돌려 보낸 뒤 운전석에 올랐다.

문을 닫자마자 자연스레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윤재에게 시선을 던지고 ‘병원에 들를까?’라는 질문을 건넨 수영은 ‘괜찮으니 집으로 가주세요.’라는 미약한 목소리의 대답을 듣고 차를 출발시켰다.

바래다주겠다는 말에 군말 없이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장 윤재에게 실랑이를 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 하다고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린 수영은 운전하는 중간 중간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윤재의 상태를 눈으로 살피기만 할뿐 의식적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차창 쪽에 얼굴을 향하고 있는 윤재는 수영이 앉아 있는 위치에서는 상대가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혹은 잠들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일말의 기척도 내지 않고 있었다.

***

늦은 밤으로 가는 시간인 터라 모든 도로는 한산하게 변해 있어서 기본적인 교통신호에 걸리는 것 외에 중간에 차가 멈추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처음 예상보다 짧은 시간 내에 목적지인 윤재의 집 앞에 도착한 차는 낡은 빌라 근처의 적당히 비어있는 공간 한켠에 세워졌다.

여기까지면 충분하다는 윤재의 말을 듣지 않고 완전히 시동을 끄고서 운전석에서 내린 수영은 얼마간 망설인 끝에 결국 앞서 걷기 시작한 윤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던 중간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윤재의 어깨를 재빨리 손으로 받아 지탱해준 그는 잠시 후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언젠가 자신이 외워뒀던 번호 그대로를 입력하는 윤재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먼저 거실로 들어선 윤재가 자연스레 불을 켜기 위해 벽으로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베란다 너머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밝혀지고 있는 집안은 어스름했지만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로 우두커니 서있는 윤재의 뒷모습을 수영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까 전 바(bar)에서 심각한 일을 당했던 윤재의 심리 상태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어떤 말도 섣불리 건넬 수가 없는 그였다. 가슴 안에 가득 차있는 말들 중 어느 하나를 꺼내면 그 다음부터는 빈 구멍을 통해 일시에 모든 말들이 한꺼번에 우루루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이대로 쉬게 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수영이 윤재의 어깨로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이게... 마지막인 걸로 해요.”

문득 들려온 윤재의 말을 뒤늦게 인식한 수영이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질문을 받은 윤재는 여전히 수영에게 등을 보인 채로 서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지요?”

“.......”

“.......”

“...어째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질문을 담은 목소리의 끝이 조금 날카로워져 있는 것을 느낀 수영이 미간을 좁혔다. 혹시라도 왜 나에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냐고, 어째서 전화를 받지 않았냐는 책망의 말이 무심코 입에서 흘러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적어도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던 그는 결국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 지금 더없이 무거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어차피 당신과 헤어지면 다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뭐...”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처럼 간결하고도 또렷한 대답이었다.

“있지요... 전 지금까지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이 뭐라던 특별히 불행하다는 생각도 한 적 없었고요. 밤을 새거나 취객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조금씩 식당 일을 배워가는 건 꼭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벽처럼 단단한 윤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영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그런데... 당신과 다시 만난 뒤로 뭔가가 조금씩 달라졌어요. 그동안 내 주위엔 늘 평범한 사람들만 있었으니까 아무렇지 않았는데 당신과 만나면... 때때로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어쩌면 많이 초라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윤재의 말을 듣고 뭔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던 수영이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막 그의 머릿속을 스친 건 언젠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났던 휘영으로부터 멸시어린 대접을 받았던 윤재의 모습이었다. 더없이 무례한 휘영의 말을 듣고서 모멸감에 힘들었을 텐데도 자신은 괜찮다며 애써 미소를 띠우던 그때의 애처로운 얼굴이 바로 몇 분 전의 일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 날의 일을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 수영이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네가 옳은 거야. 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지껄이는 말은 신경 쓸 가치도 없어.”

“그래요. 그동안 나도 쭉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사실은 그들이 옳고 내가 혼자서 허세를 부리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요.”

“김윤재.”

“전에도 말했죠. 당신과 있으면 힘들다고...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요...”

“.......”

“당신과 있으면 난... 어느 순간 원치 않아도 초라한 인간이 돼버려요. 그게 얼마나 비참한 기분인지 알고 있나요? 이제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내 앞에 다시 나타났어요? 난 그냥 지금까지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난 당신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는데... 왜... 이런...”

어렴풋한 빛 속에서 윤재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수영이 곧바로 윤재의 팔을 붙잡아 그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영은 일시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거실 창 너머에서 비쳐 들어오는 오렌지색 불빛에 비친 윤재의 뺨이 물기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오래 전 부친의 죽음을 고하던 순간에도 담담함을 잃지 않았던 윤재가 퉁퉁 부어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채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수영은 이어 가슴을 강하게 조여 오는, 말로는 형용되지 않는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버려 당장에 건넬 어떤 말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사실이 그랬다. 윤재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온 그가 이런 끔찍한 일을 겪게 된 이유라면 오로지 자신과 만났다는 사실 바로 그것 하나뿐이었다.

가슴이 찢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애써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윤재의 모습이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수영의 가슴을 무참히 찔러대고 있었다. 이런 건 알지 못했다. 이전까지 이런 극심한 심적 고통은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수영이었다. 정말로 가슴이 깨어지다 못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험한 책망의 말을 듣는 편이 나았다. 자신을 때려서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린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맞아줄 수 있었다.

누구를 탓할 것 없이 결국 모든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누군가와 쉽게 관계를 가지고 이내 끝내버렸던 무절제한 자신의 과거가 거대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아닌, 이 세상 유일하게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로.

눈앞에서 울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바라보며 수영은 자신 스스로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 전 부친의 죽음을 고하던 윤재에게 귀찮다는 듯 이별을 통보했던 자신과, 재회한 뒤 질릴 때까지만 상대해달라며 윤재를 상대로 가벼운 말을 던졌던 자신을.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윤재에게 상처를 줬던 자신을 숨이 끊어질 때까지 패버리고 싶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윤재가 그 무심한 말들을 듣고 어떤 심정이었을지, 그때는 스치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다.

그때의 수영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서 우는 윤재를 보는 것이 이렇게나 가슴 아픈 일이 될 날이 찾아올 거라고는. 일회용 물건처럼 잠시 쓰고 버렸던 그를 이렇게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어스름한 거실 속에서 한참동안 미동 없이 서있던 수영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뻗은 손으로 윤재의 손목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수영은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곧바로 벗어나려는 윤재를 긴 팔로 감아 단단히 감싸 안았다. 품에 끌어안긴 마른 몸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눈을 감은 수영이 미간을 좁히고서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부탁이야. 제발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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