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52화 (52/66)

52.

단정한 유니폼 차림을 하고 있는 직원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윤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처음 이곳 바(bar)에 발을 들여놓은 뒤로 쉼 없이 들려오고 있는 빠른 템포의 음악과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고 있는 대화 소리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웅성거리는 소음들은 앞선 직원의 안내에 따라 3층의 복도로 진입하자 서서히 귀에서 멀어져갔다.

떠들썩한 1, 2층과 달리 각각 차단된 룸의 형태로 이뤄져 있는 3층의 복도는 적은 수의 손님과 직원들이 간간이 오고가고 있을 뿐이어서 무척이나 고요했다. 계단과 먼 안쪽은 오픈되어 있지 않은 공간인지 3층 복도의 절반을 지나자 2층의 계단 부분까지만 해도 적잖이 곁을 스쳐가던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눈에 띠지 않고 있었다.

긴 복도를 덮고 있는 고급 카펫과 어딘가에서 줄곧 풍겨오고 있는 좋은 향기. 좀 전까지 보았던, 가끔씩 양손에 쟁반을 든 채로 곁을 스쳐 지나는 직원들은 모두가 입고 있는 옷차림만큼이나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울 만큼 화려하고 고급스런 분위기의 이곳 바(bar)는 확실히 평소 술을 잘 마시지도 않지만 만약 마신다고 해도 자연스레 서민적인 분위기의 가게를 찾는 윤재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조금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직원이 긴 복도 끝의 문 앞에 서서 노크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대자 잠시 후 안에서 들어오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주고서 안으로 들어가라고 눈짓을 보내오는 직원을 슬쩍 쳐다본 윤재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서 멈춰 있던 다리를 움직여 방안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좀 늦었네. 차가 막힌 모양이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넓은 방안 한켠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있는 해준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 사이 잠시 동안 입구 근처에 머물러 있던 직원이 해준이 보내는 눈짓에 따라 윤재를 남겨두고 홀로 방을 떠났다. 주변이 고요한 탓일까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다.

“누구 달고 온 건 아니지?”

대답대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윤재가 잠시 후 해준과 마주한 위치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무심코 눈을 크게 떴다.

“표정 보니 내가 누군지 기억하고 있는 것 같네.”

지금 막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상대가 일전에 <민들레>에 손님으로 왔었던 사실을 윤재는 곧바로 기억해냈다. 만난 것은 단 한 번뿐이지만 이 정도로 눈에 띠는 미남이면 굳이 일부러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머릿속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장소에 함께 있는 해준과 호연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직후부터 윤재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져갔다. 해준 한 사람의 일이면 몰라도 ‘그 날’ 함께 <민들레>를 찾았던 두 사람이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찾아온 장소에 나란히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지금 윤재는 당혹감과 동시에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앉아.”

손을 까닥이며 자신을 부르는 해준을 윤재가 말없이 쳐다보았다. 마음을 굳게 다잡고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태연하게 협박이라는 수단을 써가며 자신을 이곳에 부른 두 사람과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마주하고 싶지는 않은 그였다.

제법 큼직한 책상과 소파에 이어 냉장고까지 구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곳은 접객 용도로 만들어진 공간은 아닌 듯 했다. 벽지의 색깔부터 시작해서 방안을 채우고 있는 가구와 장식물들은 대부분이 수수한 디자인을 하고 있어서 언뜻 보면 바(bar) 안의 공간이라기보다 그냥 일반적인 사무실처럼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조금 전 지나쳐온 화려한 공간과 대비되는 통에 한층 더 그런 인상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노골적인 경계심을 내보이며 좀처럼 서있는 자리에서 움직이려하지 않는 윤재를 얼마간 가만히 지켜보던 해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윤재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는 호연의 시선이 자연스레 해준에게 향했다가 곧 그가 마주한 윤재에게로 옮겨졌다.

“새삼스럽게 여기까지 와서 뭘 그렇게 경계하는 거야?”

웃음 섞인 질문을 던진 해준이 윤재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으려하자 재빨리 고개를 돌린 윤재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명백히 자신의 손길을 피하는 윤재의 태도에 잠시 뻗었던 손을 허공에서 멈춘 해준이 쓴웃음을 머금고서 말했다.

“머리 잘랐네. 잘 어울려.”

“.......”

“이왕이면 염색도 한 번 해보지 그랬어? 지금 머리색도 청순해 보여서 좋긴 하지만 당신은 피부가 희니까 밝은 색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런 시시한 얘기를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요.”

용건만 말하라는 윤재의 딱딱한 태도에 얼굴에 스며있던 웃음기를 지워낸 해준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말없이 소파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호연과 짧게 시선을 교환한 그는 갑자기 윤재의 팔을 붙잡더니 곧바로 호연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해준의 행동에 놀란 윤재가 반사적으로 저항에 나섰지만 완력에서 상대를 당해내지 못한 그는 잠시 후 결국 호연과 마주한 의자에 강제적으로 앉혀졌다.

“피곤한 성격이네. 까칠한 공주님 흉내라도 내는 건지.”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묘하게 귀에 익었다.

역시나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정도로 눈에 띠는 얼굴이라면 쉽게 잊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사실 그보다도 윤재가 호연을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못한 건 한참 전에 <민들레>를 찾았던 당시 호연이 보였던 무례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간 많은 손님들을 상대해 와서 어느 정도의 힘든 일에는 면역이 생긴 윤재도 일부러 음식 포장을 주문해놓고 그냥 떠나버리는 손님을 겪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만큼 그 날의 기억이 유독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지금까지 윤재가 겪어온 진상 손님들의 상당수가 단순히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거나 돈을 깎기 위해 작은 일을 꼬투리 잡아 막무가내로 우기는 성향의 사람들이었다면 이와 반대로 호연이 보인 것은 멀쩡한 정신 상태에서 대놓고 보여 온 멸시의 태도였다. 굳이 어느 쪽이 더 낫고말고 구별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 호연이 보였던, 마치 더러운 벌레라도 보는 듯한 시선을 받는 대상이 되는 것은 특히나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견뎌내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날에 겪었던 것과 같은 불쾌한 상황이 또다시 윤재의 눈앞에서 재연되고 있었다. 아까 전 이 방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순간에 자신을 향하고 있는 호연의 멸시어린 시선을 알아차린 윤재는 몇 분 째 이어지고 있는 불편한 침묵 속에서 애써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려들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머리카락의 길이가 짧아진 탓일까 이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분위기가 바뀐 듯한 윤재의 모습을 관찰하듯 위아래로 훑어보던 호연이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피부는 좋고 체형도 나쁘지 않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질리도록 봐온 주변의 미남미녀들과 비교하면 딱히 눈에 들어오는 외형은 아니라는 것이 지금 그가 윤재를 보며 느끼고 있는 감상이었다. 굳이 자신 급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수영이 이전에 만났던 파트너들과 비교하면 솔직히 말해서 다른 조건을 빼고 순수하게 외모만으로 따져도 최하위급이었다.

‘한눈에 봐도 싸구려 옷에 싸구려 신발...’

마주하고 앉아 있는 윤재가 입고 있는 옷차림을 훑어본 호연이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타깃이 된 남자가 자영업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전해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규모의 가게를 운영하고 있을 거라는 예상을 했던 호연은 막상 <민들레>를 찾았을 당시 목격했던 너무도 초라한 외관과 내부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었다. 오죽하면 자신이 찾은 것은 작은 지점으로, 본점은 따로 존재할 거라는 생각까지도 했던 그였다.

김윤재라는 남자의 초라한 실체에 대해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그 날, 호연은 어이가 없다 못해 참담한 기분까지 느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그런 남자에게 져서 뒤로 밀린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단순한 분노를 넘어서 굴욕적인 기분까지도 끌어안아야 했던 그였다.

윤재와 처음 대면했던 당시의 불쾌한 기억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리던 호연이 그쯤에서 회상을 접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오랜만이야. 나 기억하지?”

자연스레 반말을 사용하는 호연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뿐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알아서 해석한 호연은 그 이상 고집스레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옆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해준에게 슬쩍 시선을 던졌다가 천천히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입에 문 그는 마치 물건을 품평하듯 냉정한 눈으로 윤재를 훑어보았다.

이런 비쩍 마른 나무막대기 같은 남자도 수영에게 안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자연스레 실소가 터져 나왔다. 침대 위에서 보이는 수영의 다소 과격한 모습을 알고 있는 호연은 벌거벗은 채 엉켜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상상하다 쓰게 웃었다. 정말 질 나쁜 취미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간의 변덕이 아닌 벌써 몇 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관계라니, 평소 상대를 고르는 취향이 까다로운 수영을 알고 있는 호연으로선 불쾌한 기분이야 어쨌든 김윤재라는 남자에 대해 이제 슬슬 진지하게 관심이 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한테 이 남자를 보낸 게 당신입니까?”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윤재가 처음으로 꺼낸 질문을 듣고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린 호연이 쥐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툭툭 털어내며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날 가게에 찾아왔던 건 날 염탐하기 위해서였군요.”

“대체 어떤 대단한 분이신가 궁금했거든. 끝내주는 미남이던가 돈이 터지게 많던가 둘 중 하나는 될 줄 알았지.”

대놓고 비웃음 섞인 대답을 내놓은 호연이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해준과 시선을 마주한 채로 말을 이었다.

“이 친구한테서 대부분의 얘긴 전해 들었겠지. 듣자하니 겉보기엔 얌전한 것 같아도 꽤 고집이 세다던데. 그래서... 언제까지 버틸 작정이야?”

순식간에 차가워진 목소리로 호연이 묻자 윤재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좀 전까지만 해도 멸시의 감정만이 존재했던 호연의 시선에 어느 순간부터 명백한 증오가 담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윤재는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었다. 끝내 이런 상황까지 오도록 만든 걸 보면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지금 눈앞의 상대가 자신에게 일방적인 적대감 내지 증오심을 품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호연이 보내는 날카로운 시선을 얼마간 말없이 마주하던 윤재가 입을 열었다.

“나와 그 사람의 문제에 왜 당신이 관여하는 겁니까?”

뜻밖에 직설적인 질문을 받은 호연이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해준에게 미리 전해들은 대로 이 눈앞의 비쩍 마른 남자는 과연 생긴 것처럼 다루기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그래봤자 결국엔 자신의 아래 굴복할 수밖에 없게 될 터였지만.

낯선 곳에 불려와 잔뜩 겁먹은 상태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허세일망정 주눅 들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윤재를 보며 호연은 속으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주제에 대체 어떤 대단한 재주로 수영을 꼬드긴 건가 하는 의문이 이로써 조금은 해소되고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의외성을 대입하면 마냥 얌전해 보이는 분위기와 달리 침대 위에선 꽤나 적극적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그림이 그의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질문은 내가 해. 넌 대답하기 위해 여기 온 거고.”

“.......”

“아웃팅 얘기까지 나왔는데도 계속 버티는 이유가 뭐야? 내 말이 장난 같아서 무시하는 거야, 아니면 버티다 보면 혹시 떡고물이라도 떨어질지 모른다고 내심 기대하고 있는 거야?”

“무슨 말이에요?”

일부러 자신의 얼굴 앞으로 길게 연기를 내뱉는 호연을 노려보며 윤재가 물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요구하지 그래? 별로 자랑할 생각은 없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 모르는 사람한테도 2,3천정도 적선할 정도의 여유는 있거든.”

지금 호연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인식한 것과 동시에 윤재의 표정이 굳어졌다.

‘적선’이라는 단어를 태연하게 사용하는 눈앞의 남자에 대한 분노가 줄곧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던 윤재의 가슴을 크게 뒤흔들고 있었다. 흡사 돈 많은 귀족나리께서 땅에 바짝 엎드린 천민을 내려다보기라도 하듯 처음 가게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윤재를 상대로 한 결 같이 내보이고 있는 호연의 태도는 이미 무례하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2,3천 만 원을 적선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가졌다는 조금 전 호연의 발언에 윤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들려온 그 장난과 같은 가벼운 말은 그로 하여금 당장 빠듯한 <민들레>의 운영상황이나 밀려 있는 모친의 병원비를 마련할 생각으로 하루하루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새삼 깨닫게 만들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늘 다음 날에 대한 걱정부터 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과, 이런 좋은 장소에서 멋진 옷차림을 하고 도도하게 살아가는 눈앞의 남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고 있는 윤재는 절망에 가까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호연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신을 하찮다는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인지 이제야 윤재는 제대로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한눈에도 좋은 환경에서 떠받들린 채 자랐을 것 같은 호연이 낡고 비좁은 <민들레>를 보고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는 굳이 직접 그의 입을 통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옷가지들과 시계, 구두를 비롯해 아까 전부터 은은하게 주변을 감싸고 있는 향수까지 당장 눈앞의 남자가 지닌 모든 것이 질 좋은 고가의 제품들이리라는 것은 아무리 명품에 대해 어두운 윤재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냉정한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이렇듯 일방적으로 멸시어린 시선을 받는 상황을 윤재는 결코 용납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호연과 비교해 더 나은 조건 하나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금까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아온 스스로를 한 치도 부끄럽게 여기고 있지 않은 그였다.

“돈뭉치를 던져줄 테니까 우수영을 놔달라는 건가요? 꼭 드라마에서 자주 본 것 같은 얘기네요.”

목까지 차오른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윤재가 서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호연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줄곧 그의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해준의 얼굴에도 덩달아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행히 이해는 한 모양이네. 그래서... 흥정할 마음이 조금은 생겼어?”

“뭔가 했더니 마지막으로 만나서 하자는 말이 결국 이거였군요. 정말 상종하기도 싫을 만큼 지저분하네요.”

“!”

곧바로 이어진 윤재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호연이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뭐?”

“지저분하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당신 같은 인간.”

“하, 뭐라고? 누가 더럽고 불쌍하다고?”

옆에 앉은 해준과 짧게 시선을 교환한 호연이 대놓고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더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를 보며 그가 초라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판단한 그는 한층 더 오만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잘난 것처럼 지껄이는데 꿈에서 나와서 현실을 봐. 주제파악부터 좀 하라고.”

“주제파악이요? 내 주제가 뭐가 어떤데요? 난 누구한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살고 있어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이래라저래라 명령들을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아- 그래? 부끄럽지 않다고? 하여튼 말은 청산유수야. 근데 좀 솔직해 지지? 부끄럽지 않으면? 그런 다리 꼴로 질질 절며 사는 게 자랑스러워? 지금 여기서 아무리 잘난 척 떠들어봐야 남들 보기에 넌 구멍가게나 지키고 사는 불쌍한 다리병신일 뿐이야. 알겠어?”

일부러 보란 듯이 윤재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던진 호연이 이어서 비웃음을 흘렸다. 겉으로는 최대한 냉정한 척 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 조금 전 뜻밖에 강하게 나오는 윤재의 태도를 마주한 직후부터 그의 페이스는 옆에 앉아 있는 해준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크게 흐트러져있는 상태였다.

“우수영이랑 엮이고 나니까 지금은 네가 꼭 뭐라도 된 거 같지? 근데 그게 얼마나 갈 거 같아? 혹시 그 남자가 얼마나 제멋대로인 성격인지는 알고 있어? 왜, 넌 뭐 혼자만 특별할 것 같아?”

“당신, 그를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죠.”

갑자기 들려온 윤재의 말을 듣고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호연이 곧바로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뭐...?”

“좋아하는 사람을 나 같은 하찮은 다리병신한테 뺏긴다고 생각하니까 자존심 상해요? 만약 내가 좀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자존심 상하진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않나요?”

“하...”

“좀 전에 당신이 나더러 불쌍한 다리병신이라고 했지요. 그래요. 다리병신인 거야 틀릴 것도 없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내가 불쌍하다고는 생각 안 해요. 이런 다리 가지고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잘 살고 있으니까 남한테도 손가락질 받을 이유도, 나 스스로한테도 부끄러울 것도 전혀 없어요.”

“.......”

“당신은 잘 생기고 가진 것도 많으니까 지금까지 참 편하게 살았겠네요. 그래서 세상에 내 뜻대로 안 되는 거 없다고 생각하나 보죠? 당신보다 못 배우고 못 사는 사람이면 어차피 하찮은 존재니까 더러운 벌레 보듯 보고 아무렇지 않게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죠? 그게 당신한텐 당연한 이치인 거니까.”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을 듣자마자 곧바로 숙이고 들어올 거라는 짐작을 완벽히 벗어나는 윤재의 강경한 태도에 잠시 할 말을 잃은 호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살벌하게 변했다.

줄곧 옆에서 빠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해준은 이쯤 되면 슬슬 호연의 분노가 목까지 차올라왔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첫인상만 보고 얌전한 샌님으로 취급했던 남자로부터 설마 이런 얘기까지 들을 거라곤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호연이 어떤 반격에 나설지 아직까지는 그로부터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은 상태의 해준은 철저히 방관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그 역시도 윤재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오리라는 짐작은 하지 못했던 만큼 조금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호연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네가 나한테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줘? 벌레? 그 정도로 보이면 우대해준 거지. 이렇게 마주보고 서있으니까 네가 나랑 동급이라도 된 양 착각하는 모양인데 평소 같으면 너 같은 건 아예 처음부터 상대도 안 했을 나야.”

서늘한 눈을 하고 있지만 미세하게 비틀려 있는 입가에서 지금 호연이 꽤나 감정적으로 변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읽어낸 해준이 곧바로 마주한 윤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윤재의 표정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타고난 자제력 덕분인지 줄곧 놀랄 만큼 침착한 태도를 유지해온 그도 이제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하긴, 당연한 거였다. 아마 자신이었다면 여기까지 오기 한참 전에 이미 자제심을 잃고서 한바탕 크게 난리를 부렸을 거라고 해준은 생각했다.

좀 전에 들은 말로 인해 바짝 약이 오른 상태의 호연이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지요. 그 약속 지켜주세요.”

윤재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인식한 호연의 눈이 일시적으로 가늘어졌다.

그렇게 푹푹 찔러대는데도 얌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게 그런 목적 때문이었던 건가하고 지금까지의 상황을 납득한 호연은 이내 날씬한 다리를 꼬고서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 입원해 계신 데가 xx병원이라고 들었는데.”

갑자기 전환된 화제에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윤재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 대화가 끝나면 앞으로 나한테도, 내 주위 사람한테도 일절 관여하지 말아주세요.”

“6인실이면 사람 많아서 시끄럽지 않아? 1인실로 옮기게 해줄까? 마침 거기 병원 원장이 내가 아는 지인이거든. 내가 몇 마디만 하면 바로 VIP병실에라도 갈 수 있...”

거기까지 얘기하던 호연이 갑자기 앞에서 뻗어져온 양손에 멱살을 잡혀 쥐고 있던 담배를 손에서 놓쳤다.

“적당히 해! 당신!”

자신의 멱살을 쥔 채 소리치는 윤재를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본 호연이 상황을 이해한 것과 동시에 싸늘하게 표정을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당황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는 해준을 의식하고 쓴웃음을 머금은 그는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윤재의 손을 붙잡아 거칠게 떼어냈다.

“일하던 중간에 나온다고 손도 제대로 못 씻었어? 이 병신새끼가 지저분한 비린내 나는 손을 어디다 갖다 대고 지랄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 높이 팔을 치켜든 호연이 곧바로 마주하고 선 윤재의 얼굴에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처음 조준하고 있던 위치에서 살짝 빗겨간 주먹이 윤재의 눈 밑을 강하게 치고 간 것과 동시에 넓은 방안에 억눌린 신음소리가 짧게 울렸다.

얻어맞은 뺨을 한손으로 감싼 윤재가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것을 지켜보며 뺨을 누그러뜨린 호연은 이제 막 제대로 일어선 윤재의 멱살을 거칠게 쥐고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광대뼈에 이어 단단한 이에 닿은 주먹이 일시적인 고통을 호소했지만 윤재의 입술에 묻어난 피를 보고 한층 더 흥분한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허물어진 윤재의 배를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찼다. 비쩍 마른 몸에 부딪친 발끝이 딱딱한 감촉을 전하고 있었다.

“아윽-!”

양팔로 배를 감싼 채 이를 악문 윤재를 내려다보는 호연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

처음 알게 된 이후 줄곧 머릿속을 차지해왔던 눈앞의 남자는 호연에게 있어 너무도 증오스러운 존재였다.

한때는 동반 해외여행까지 계획했던 자신과 수영의 사이를 단숨에 갈라놓은 원흉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스란히 자신에게 향했던 수영의 시선을 현재 대신해서 차지하고 있는 존재.

자신의 마음이 괴로움으로 썩어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이 뒤엉킨 채로 침대 위에서 뒹굴었을 것을 상상하면 호연은 단 한 순간도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좀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자존심 상하진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않나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조금 전 윤재가 했던 말은 정답이었다.

실상 제대로 내세울 것도 없는 초라한 인생을 사는 주제에 감히 자신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간 윤재의 존재를 호연은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졌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한 결 같이 주변인들로부터 떠받들어져왔던 호연이었다. 소위 말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거쳐 하고 싶은 공부를 위해 유학을 다녀온 뒤 이후 바뀐 뜻에 따라 대규모 인기 바(bar)를 운영하며 지분을 늘려가고 있는 현재까지 그가 밟아온 것은 그야말로 남들의 부러움과 동시에 시기어린 시선을 받기에 충분할 만큼 호화로운 길이었다. 그런 대단한 조건들에 더해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자연스레 빼앗을 정도의 뛰어난 미모까지 갖춘 그가 스스로에게 갖고 있는 자긍심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런 대단한 조건을 갖추고도 눈앞의 초라한 남자에게 졌다는 비참한 사실은 호연으로 하여금 끔찍한 굴욕감과 함께 패배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그저 순수하게 격앙된 감정대로 움직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정말로 미칠 것만 같았다. 분하고, 또 분해서.

이어지던 잔기침을 간신히 멈추고서 걷어차인 배를 한 팔로 안은 채 몸을 일으키는 윤재를 서늘한 눈으로 쳐다본 호연이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해준을 불렀다.

“이제 네가 좀 데리고 놀아 봐.”

호연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 해준이 천천히 윤재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신과의 거리가 서서히 좁혀지자 무심코 뒷걸음질을 치는 윤재를 보며 그는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단정한 분위기를 유지했던 윤재의 얼굴이 몇 분 사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눈가 주변을 빗겨 맞은 탓에 퉁퉁 부은 뺨 아래에서는 시퍼런 멍이 올라오고 있었고, 찢어진 입술엔 반쯤 마른 피가 달라붙어 있었다. 조금 전 스스로의 손으로 대충 닦아낸 피로 인해 그의 턱과 뺨에는 스치듯이 지나간 붉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한 것일까,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문을 향해 몸을 돌려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윤재의 뒤를 곧바로 쫓은 해준이 손쉽게 윤재의 손목을 붙잡아 거칠게 그를 바닥에 눕혔다. 절뚝거리며 달리는 모양새가 우스웠던 건지 무리한 행동에 나선 상황이 우스웠던 건지 해준의 아래 내리눌러진 채로 어떻게든 상황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윤재를 쳐다보고 있는 호연이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어머니 걱정보다 당장 네 뒷구멍 걱정부터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위에서 윤재를 제압하고 있는 해준과 짧게 시선을 교환한 호연이 천천히 두 사람의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 친구가 너한테 마음이 좀 있는 모양인데... 마침 좋은 기회니까 한 번 넣게 해주지 그래? 어차피 틈 날 때마다 우수영한테 박혔을 구멍인데 이제 와서 뺄 것도 없잖아?”

위에서 내려오는 말을 인식한 것과 동시에 차갑게 얼굴을 굳힌 윤재가 다시 한 번 지친 몸에 힘을 실어 필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은 해준이 양손으로 윤재의 목을 감고 조르기 시작했다. 애초에 죽일 마음은 없었던 만큼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서 양손에 들어가 있던 힘을 일시에 빼낸 해준은 한계까지 몰렸다가 숨통이 트여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한 윤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기침을 하는 윤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좀 적당히 할 걸 그랬나. 심하게 맞아서 카메라에 얼굴이 예쁘게 나오지는 않을 것 같네.”

호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바로 고개를 돌려 곁에 서있는 그를 올려다본 윤재가 여전히 이어지는 잔기침을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무슨 짓 하...려는 거... 당... 신들...”

“걱정하지 마. 일단은 소장용으로만 가지고 있을 테니까. 마지막 만남인데 기념품 하나는 남겨둬야지.”

희미한 웃음이 섞인 호연의 말을 듣고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낀 윤재가 곧바로 놓으라고 소리치며 없는 힘을 짜내 다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 윤재는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온전하게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멍든 뺨과 찢어져 부은 입술에서 느껴지고 있는 통증이 가시기도 전에 한 차례 강하게 목을 졸림으로써 적지 않은 기력이 빠져나간 상태인 그는 저항이 약해진 사이 손쉽게 자신의 옷을 벗기고 있는 해준의 양 손목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멀쩡한 얼굴이었으면 바로 키스부터 했을 텐데 지금 하면 피 맛이 나겠지. 난 비린 건 질색이라서.”

엷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해준이 곧바로 고개를 숙여 조금 전 그의 손에 조여졌던 윤재의 목에 거친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저항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내던 윤재가 이를 악문 채 힘껏 무릎을 들어 올려 해준의 가랑이 사이를 가격하자 곧바로 위에서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큭-!”

바지 위로 가격당한 급소를 양손으로 감싼 채 몸을 웅크린 해준이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하고 있는 윤재의 움직임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재빨리 손을 뻗어 윤재의 팔을 붙잡았다.

“이 새끼가 진짜, 귀엽다고 봐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정말로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는 해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짧게 웃음소리를 낸 호연이 잠시 후 해준의 억센 손아귀 힘에 이끌려 다시 바닥에 내리 눌러진 윤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남의 일처럼 설렁설렁하더니 이제야 제대로 할 마음이 생긴 듯한 해준의 달아오른 모습이 그의 눈에 제법 만족스럽게 비쳐지고 있었다. 딱히 싸움실력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비쩍 마른 장애인 하나 상대하는 건 그에게도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일 터였다.

“귀찮은데 아예 도망칠 엄두도 못 내게 한쪽 다리를 부러뜨리지?”

웃는 얼굴로 잔혹한 제안을 건넨 호연이 그 말을 듣고 진지한 표정이 된 해준과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손에 들려 있는 비싼 카메라의 포커스를 윤재의 얼굴에 고정시키고 있는 그는 이 와중에도 바닥이 드러난 체력을 짜내가며 저항을 이어가는 윤재를 향해 보란 듯이 비웃음을 흘렸다. 만약 이 일로 문제가 생긴다고 해봤자 가진 연줄과 돈으로 적당히 무마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는 버젓이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는 현 상황과 맞지 않게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엉망으로 짓밟히고 있는 윤재를 보자 이제야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은 후련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그였다.

“오랄은 못 시키겠네. 들이대면 바로 깨물 것 같아서.”

아쉬운 듯 중얼거리는 해준에게 ‘스릴 있는데 모험 차 한 번 시도해 보던가.’라고 농담을 던진 호연이 문득 입구 쪽에서 들려온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잠긴 상태의 문을 밖에서 여는 기척이 느껴져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힌 그가 ‘누구야?’라고 날카롭게 묻자 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에서 유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저 지금...”

“부를 때까지 오지 말라고 말했잖아!”

-“네, 죄송합니다. 그런데-”

조금 다급한 유민의 목소리를 듣고 미간을 찌푸린 호연이 다시 바닥에 누워있는 윤재에게 시선을 돌린 찰나 갑자기 바깥에서 열쇠가 꽂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문의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호연과 해준의 시선이 곧바로 문이 열리고 이어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남자에게 향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남자들에게.

방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건장한 체격을 한 네 명의 남자들로, 그들 가운데에는 믿을 수 없게도 지금 이 시간 절대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남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째서...?’

몇 시간 전 거리에서 차갑게 자신을 남기고 떠났던 수영의 모습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호연이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윤재의 위에 올라탄 채로 뜻밖의 상황을 맞이한 해준 역시 호연과 마찬가지로 모든 움직임을 멈춘 상태였다.

두 사람이 당장 아무리 머릿속을 짜내도 지금 이것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수영...”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뒤 바로 앞의 상황을 몇 초간 눈동자에 담던 수영이 뒤에서 들려온 여진의 말을 무시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곧장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에는 윤재의 위에 올라타 있는 해준이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수습하고 쭈뼛거리는 해준의 멱살을 쥐고서 억지로 그를 윤재에게서 일으켜 세운 수영이 그 상태에서 고개를 숙여 윤재의 모습을 확인했다.

제대로 눈뜨고 보기 힘들 만큼 심한 꼴이었다.

멍들고 찢어진 얼굴도 얼굴이지만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잔뜩 구겨진 채로 벗겨지다 만 셔츠는 바로 조금 전까지 윤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증명해주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떨리는 손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는 윤재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낸 수영이 잠시 동안 움켜쥐고 있던 해준의 멱살을 놓자마자 곧바로 마주 선 그의 얼굴 정면에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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