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51화 (51/66)

51.

“여기, 맥주 두 병 더 갖다 줘요!”

“네!”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하고 골뱅이를 무치던 손을 멈춘 성호가 황급히 비닐장갑을 벗으려는 것을 슬쩍 손을 뻗어 막은 윤재가 자신이 대신해 맥주 두 병을 들고 주방을 나섰다.

한꺼번에 들이닥쳤던 손님들이 조금 전 일시에 빠져나가고 난 뒤 조금은 여유가 생긴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까지 편하게 앉아 쉴 정도의 시간은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피크시간을 넘긴 만큼 평소대로 조금씩 손님의 수가 줄기 시작하면 조만간 늦은 저녁이나마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길 터였다.

가게가 떠나가라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손님들의 곁을 지나 여기라고 손을 흔드는 단골 아저씨 일행이 자리하고 있는 테이블에 술병을 내려놓은 윤재가 문득 울리기 시작한 전화벨 소리를 듣고 서둘러 계산대 앞으로 향했다.??

“네- 민들레입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한 윤재가 장난전화인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들고 있던 수화기를 귀에서 떼려는 찰나 문득 수화기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걸로 봐서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네.]

“...누구세요?”

[전화 목소리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 나야. 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을 인식한 것과 동시에 윤재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내 급격히 가슴이 뛰기 시작한 것을 느낀 그가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지금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틀림없는 해준이었다.

결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가 영업 중에 태연히 가게로 전화를 걸어온 것을 두고서 결코 좋은 방향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윤재는 지금 당장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행여 당장의 기분에 따라 행동했다가 나중에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손발을 묶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등 뒤에 손님들이 있다는 사실마저 하얗게 머릿속에서 지운 채 수화기를 들고 서 있던 윤재가 잠시 후 이어져 들려온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어쩌지? 당신이 꾸물거리는 통에 결국 우리 고용주가 제대로 화가 나 버렸어. 당신 사정 봐줬다는 이유로 나까지 진탕 뒤집어쓰게 생겼다고.]

“.......”

[그래서 말인데...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데로 좀 와줘야겠어. 우리 고용주가 더는 날 못 믿겠으니 직접 당신과 얘기를 하겠다고 하시거든.]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몇 초간 얼어붙어 있던 윤재가 이내 간신히 현실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지금 손님이 많아 가게를 비울 수 없어요. 또 내가 거기에 가서 당신 고용주와 만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아... 이유가 필요해? 그럼 만들어 주지 뭐.]

“이유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난 가지 않을 테니까요.”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나 지금 당신한테 제안하거나 부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좋게 말할 때 듣는 게 좋을 거야.]

“끊겠습니다.”

[하, 끊겠다고? 아- 그래. 그러시던가. 그럼 이쪽도 다 생각이 있지. 지금부터 거기로 친구들을 좀 보내서 한바탕 휘저어볼까? 아니면 당신 어머니 계신 병원에 단체로 문병이라도 가? 아무래도 선물은 꽃보다는 음료수가 낫겠지? 어머니 어떤 음료를 좋아하셔?]

해준의 입에서 나온 ‘어머니’라는 단어에 순간적으로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낀 윤재가 그럼 끊겠다는 해준의 말을 듣고 곧바로 ‘잠깐만요.’라고 말했다.

갑작스럽게 돌아가는 지금의 이 상황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지만, 그런 와중에도 단 한 가지, 해준이 뒤에서 움직이는 것을 이대로 방치해서 안 된다는 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가뜩이나 수술 후 몸의 회복 상태도 좋지 않은 모친에게 해준이 흘리는 일방적인 이야기가 들어가는 걸 그저 얌전히 눈뜨고 지켜볼 수는 없는 윤재였다. 자신이 뒤늦게 변명에 나선다고 해도 일단 한 번 그 이야기가 들어간 시점에서 모친이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는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만은 반드시 막아야한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생각들 가운데서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다고 판단을 내린 윤재가 잠시 동안 이어지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난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협박에 끌려 다닐 생각 없어요. 이런 식으로 한 번 들어주기 시작하면 당신은 필요할 때마다 또 같은 협박을 반복하겠지요.”

[거기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늘 만남으로 다 끝낼 거니까.]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미간을 좁힌 윤재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손님의 부름을 듣고 고개를 돌리자 마침 주문받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나온 성호가 윤재를 대신해 지금 막 손을 든 손님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수선한 주위를 의식한 윤재가 조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나한테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믿든 믿지 않던 그건 당신 마음이니까 강요는 안 해. 하지만 분명히 말해서 사실이야. 우리 고용주도 이제 슬슬 지겨워하고 있거든. 그래서 마지막으로 쌈박하게 한 번 만나서 깨끗이 대화나 하고 끝내려는 모양이야. 그렇게 안 하면 영 미련이 남아서 안 되겠다고 하네.]

“.......”

[그래서 어떻게 할래? 올 거야, 말 거야? 난 가능하면 우리들끼리 조용히 얘기하고 마무리 지었으면 싶지만 선택권은 당신에게 있으니까 뭐.]

마지막 말을 들은 순간 윤재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나왔다.

명백한 협박을 하고 있는 주제에 선택권을 줬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고 있는 상대의 뻔뻔함에 분노가 일었다. 그런 와중에 그나마 윤재의 머리를 냉정하게 가라앉혀주고 있는 것은 조금 전 해준이 스치듯이 언급한 마무리라는 단어였다. 조금 전 스스로가 말했듯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상황에서 딱히 일을 해결할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는 윤재는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이틀 전 봤던 모친의 초췌한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자신을 향해 인자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상상하자 그의 가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얼마의 시간에 걸쳐 간신히 생각을 정리한 윤재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 정말 믿어도 되는 겁니까?”

윤재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믿어도 돼. 말했잖아. 우리 고용주도 슬슬 지겨워하고 있다고.]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워진 해준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어디 알리지 말고 조용히 혼자서 와. 이것만 지키면 다음부터 귀찮게 찾아가거나 연락하는 일 없을 거야. 당신도 이 일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려지는 건 싫지?]

“.......”

[장소 알려줄게. 필요하면 받아 적어.]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고 해준으로부터 가야할 장소를 전달받은 윤재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전화를 받는 동안 다행히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지 않은 덕분에 주방 안에 있는 성호는 잠시나마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성호야. 미안한데 나 갑자기 볼일이 생겨서 좀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네?”

“지금 나가면 아마 그대로 퇴근하게 될 거야.”

윤재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은 성호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까지 함께 일해 온 몇 개월 동안 윤재가 혼자서 먼저 가게를 떠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던 만큼 지금 성호가 보이고 있는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남아있는 손님들까지만 신경 쓰고 더 이상 새로운 손님은 받지 마. 지금 계신 손님들 다 나가면 바로 가게 문 닫고 돌아가면 돼. 청소는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문만 잠그고 가줘.”

“갑자기 무슨 일 생기신 거예요? 조금 전 어디에서 전화 온 것 같던데 혹시 병원에서 온 건가요?”

너무도 갑작스런 상황에서 제일 먼저 병원에 입원 중인 윤재의 모친부터 머릿속에 떠올린 성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윤재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아는 사람이 급하게 좀 보자고 해서. 별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무튼 가게 좀 부탁할게. 미안해.”

“저한테 미안해하실 건 없는데... 정말 괜찮은 거죠?”

“응.”

최대한 평상시와 가까운 목소리를 내 대답한 윤재는 곧바로 앞치마를 벗고 외출채비에 나섰다.

사실은 처음 가는 낯선 장소에서 자신을 협박하는 상대와 만날 것을 생각하면 두려운 기분이 앞섰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병원으로 달려가 모친과 만나겠다는 해준의 말을 단순한 허세로 무시하고 넘기는 도박을 할 수 없다면 현재로써 이 외에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 만남으로 다 끝낼 거니까.]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그걸로 된 거라고 애써 희망적인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가게를 빠져나온 윤재는 마침 앞에서 손님을 내려준 한 대의 택시를 붙잡아 뒷좌석에 오른 뒤 지금부터 가야할 곳의 위치를 앞에 앉은 기사에게 전달했다.

***

를 행선지로 두고 운전대를 잡은 수영이 예상보다 막히는 도로 상황을 확인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 우연히 만났을 때의 호연이 가게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얘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수영은 연석과 헤어지자마자 고민할 것도 없이 곧바로 다음 행선지로 를 선택했지만, 사실 지금도 그의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였다.

분명히 말해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건 없었다. 조금 전 바(bar)에서 연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사실인지의 여부도 현재로선 파악할 수 없었다. 지금 수영이 가지고 있는 건 단지 새롭게 알게 된 정황적 증거와 직감뿐으로, 이것이 과연 자신이 유추하고 있는 답에 근접할 열쇠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는 이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인 사실이야 어쨌든 수영은 이미 마음 안에서 호연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단순히 이전에 윤재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을 두고 의심의 화살을 연석에게 겨누면서도 줄곧 ‘어째서?’라는 의문을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못했던 그는 연석의 자리에 호연의 이름을 대신 집어넣자 이제야 위화감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시원치 않은 부분은 남아 있었다. 우선적으로 든 의문은 자신으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듣던 당시 깨끗하게 물러났던 호연이 정말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그와 관련되어 있었던 소문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쉽게 믿기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헤어진 이후로 중간 중간 한 번씩 안부 차 문자를 보내왔던 그의 행동을 떠올리면 어쩌면 그것이 미련의 증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고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선 그와 같은 생각이 억측인지 여부조차 분명히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만약 정말로 연석으로부터 윤재에 대한 얘길 전해들은 호연이 뒤에서 손을 쓴 게 사실로 밝혀진다면 그때 수영은 그동안 자신 앞에서 태연하게 연기를 펼친 호연과 함께 그간 윤재에게만 신경을 쏟느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일절 알아차리지 못한 스스로에게도 분노의 화살을 겨눌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몰랐다는 사실 만으로 깨끗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좀처럼 뚫리지 않는 정체구간의 상태를 바라보며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수영이 문득 들려온 벨소리를 듣고 조수석에 놓아둔 재킷에서 핸드폰을 찾아 꺼냈다. 액정에 떠있는 번호를 확인하고 살며시 미간을 좁힌 그는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움직임이 없는 앞 차도의 상황을 살피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무래도 좀 전부터 사이렌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주변에 뭔가 큰 사고가 일어난 듯 했다.

“여보세요.”

[접니다.]

곧바로 들려온 건 양선웅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의 굵은 목소리로, 그는 수영이 며칠 전부터 윤재의 가게 근처에 감시 역으로 심어둔 지인이었다.

일을 맡긴 뒤로 오늘까지 정해진 시간에만 형식적인 보고를 해온 선웅이 갑작스럽게 연락을 해온 상황을 두고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낀 수영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앞 차량을 따라 서서히 속도를 올렸다.

“듣고 있으니 말해.”

[조금 전 김윤재씨가 가게를 나와서 바로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수영의 눈이 커졌다.

“택시...? 옷차림이 어땠는데? 중간에 잠깐 나간 건 아니고?”

[제대로 외투까지 갖춰 입고 가게를 나선 걸로 봐서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아직 가게 문을 닫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시점에서 홀로 가게를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는 것은 결코 그냥 넘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수영이 알고 있는 윤재는 웬만한 일로는 알바생인 성호에게 가게를 떠맡기고 혼자서 자리를 비울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결국 달리던 중간 차도를 벗어나 대충 눈에 보이는 골목 안 한 자리에 차를 세운 수영이 자세를 바로잡고 질문을 이었다.

“지금 넌 뭐하고 있어?”

[택시 뒤를 따라가는 중입니다. 다행히 잠깐 화장실에 가려던 차에 가게에서 나오는 걸 봐서 바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어디야?”

[이제 막 xx구청 앞을 지났습니다. 계속 가는 중이라 아직 목적지는 모르겠습니다.]

선웅의 대답을 듣고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와의 거리를 계산한 수영은 일단 계속 뒤쫓아가달라는 말을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윤재와 직접적으로 통화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선웅과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윤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아.’

신호가 이어지는 것을 길게 기다려 봤지만 두 차례를 더 반복해 걸어도 끝내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이틀 전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혹시 자신의 전화를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인가 싶어 이번에는 <민들레>로 전화를 건 수영은 짧게 신호가 이어진 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성호의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성호? 나야. 우수영 대리.”

[아... 네. 대리님. 안녕하...]

“지금 사장님 거기 있어?”

윤재의 미행을 지시한 사실을 먼저 밝힐 수 없는 만큼 답이 뻔한 질문부터 던진 수영은 예상대로 들려온 ‘아니요.’라는 대답을 듣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핸드폰으로 전화했더니 안 받던데 혹시 어디 갔는지 알아?”

[아... 어디로 가신다고는 말씀 안 하셨어요. 그냥 좀 전에 급하게 나가시긴 했는데...]

“급하게?”

급하게 가게를 비우고 나갈 일이란 게 무엇일지 생각하다 제일 먼저 윤재의 모친을 떠올린 수영이 한층 심각해진 표정으로 질문을 이었다.

“혹시 병원에서 온 연락받고 나간 거야?”

[아뇨. 병원에 가는 건 아니라고 하셨어요.]

일단 모친의 건강과 관련된 것은 아니라는 말에 안도한 수영은 그러나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유지한 채 이어져 들려오는 성호의 말을 들었다.

[누구와 약속이 있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나가시면서 저한테 가게 뒷정리를 맡기신 걸로 봐서 오늘은 다시 가게에 돌아오지 않으실 것 같아요.]

일하는 도중에 무책임하게 혼자서 가게를 빠져나간 것만 해도 충분히 심상치 않은 일인데 거기에 성호로부터 뒷정리까지 부탁받았다는 말까지 전해 듣게 되자 아까 전 선웅의 보고를 받은 뒤부터 줄곧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있던 수영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윤재를 중심으로 벌써 몇 번째 연이어 발견되고 있는 완벽한 이상한 징후들은 그로 하여금 최근 들어 자신이 보고 느끼고 있는 것들이 단순한 기분 탓으로 넘길 만한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만들고 있었다.

성호에게 자신을 대신해 윤재가 있는 장소를 전화로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할까를 두고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던 수영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나간 윤재가 이 일과 관련이 없는 성호에게 순순히 사실을 실토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을 내리고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통화가 연결된 시점에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는 어수선한 소음을 뒤늦게 제대로 인식한 수영은 지금쯤 혼자서 바쁘게 가게를 보고 있을 성호의 입장을 생각해 이쯤에서 전화를 끊기로 했다.

“혹시라도 윤재... 사장님한테 뭔가 연락이 오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줘.”

[아... 네. 그렇게 할게요.]

“그래, 바쁠 텐데 수고해.”

전화를 끊은 수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윤재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지금 통화로 당장 윤재가 향한 곳이 병원은 아니라는 것과, 현재 그가 일하던 도중 성호에게 가게를 떠넘기고 나갈 정도의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건 파악이 되었다.

이후 몇 차례 더 윤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연결이 되지 않는 상황에 점점 더 초조함을 느낀 수영이 잠시 후 문득 울리기 시작한 벨소리를 따라 곧바로 액정에 시선을 던졌다.

윤재만큼이나 기다리고 있던 선웅의 연락이었다.

[지금 xx동 거리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전 김윤재씨가 택시에서 내리는 것까지는 봤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밀려들어서 그만 뒤를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뒤를 놓쳤다는 선웅의 말에 수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조금 전 선웅으로부터 보고받은 익숙한 장소의 이름을 인식한 직후 온몸에 가벼운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있는 그는 당장에 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화를 억지로 잠재우고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그가 내린 곳 근처에 혹시 xx호텔이 있지 않아?”

직감대로 질문을 던진 수영이 곧바로 들려온 ‘네.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실소를 흘렸다.

역시 그랬던 건가-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 그는 차라리 안도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윤재의 행방을 놓쳐버리는 최악의 경우는 지금 막 돌아온 선웅의 대답으로 막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수영이 언급한 xx호텔은 가 자리한 건물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이것으로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석의 입에서 호연의 이름이 나온 뒤부터 호연에게 강한 의심의 시선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냉정히 그가 범인이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수영은 윤재가 일하던 도중 무책임하게 가게를 내팽개치고 향한 곳이 다름 아닌 라는 사실을 확인한 시점에서 모든 생각을 깨끗이 하나로 정리했다.

우연이나 억측? 여기까지 오면 그건 말장난밖에 되지 않았다.

곧 도착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건네고서 선웅과의 통화를 끝낸 수영은 급하게 차를 출발시킨 뒤 다른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수영아.]

마치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곧바로 전화를 받은 상대의 목소리를 확인한 수영이 잠시 틈을 보인 앞 차량을 빠르게 추월하고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좀 올래?”

[지금? 나 지금 우리 애인이랑 재밌는 시간 보내는 중인데...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급하니까 당장 와.”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오자마자 몇 가지 간략한 사항을 전하고서 전화를 끊은 수영은 좀 전보다 다소 풀린 바로 앞 도로상황을 확인하고 차의 속력을 올렸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마지막으로 보았던 윤재의 처연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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