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50화 (50/66)

50.

“어, 이거 우리가 시킨 거 아닌데...”

테이블에 내려진 냄비를 확인한 아주머니 손님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곧바로 들고 있던 쟁반을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 계산서를 들어 확인한 윤재가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가져온 건 김치찌개인데 계산서에 표시되어 있는 건 두부고추장찌개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빨리 다시 만들어서 가져오겠습니다.”

평소 좀처럼 실수를 하는 일이 없는 윤재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은 채 테이블에 놓여 있는 냄비를 쟁반으로 옮기려 하는 것을 재빨리 손으로 막은 아주머니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유, 괜찮아. 그냥 이거 먹지, 뭐. 사실 주문하기 전에 우리들끼리 김치찌개로 시킬까 두부고추장찌개로 시킬까 고민했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김치찌개 먹을 날이었나 보네.”

“그러게.”

“이 집은 안주가 다 맛있어서 고르기가 참 힘들단 말이야.”

평소 자주 이곳을 찾는 단골 아주머니 손님들은 미안해하는 윤재에게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섞어 말했다. 간혹 별 거 아닌 실수에도 크게 화를 내며 어떻게든 계산할 돈을 깎으려 드는 몇몇 손님들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사처럼 자애로운 반응이었다.

“그나저나 윤재 총각 머리 잘랐나봐? 깔끔하니 예쁘네.”

자주 얼굴을 보는 아주머니의 칭찬에 빈 접시를 쟁반에 옮겨 담던 윤재가 잠시 손을 멈추고 어색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일이 바빠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눈을 찌를 정도로 자란 머리카락을 한동안 그대로 방치해온 윤재는 어제 오후 모처럼 시간을 내 동네 미용실을 찾았었다. 요즘 유행하는 머리라며 몇 가지 스타일을 추천하는 미용사에게 그냥 간단히 길이만 잘라달라고 주문했던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짧게 절라진 머리를 확인하고 조금은 생소한 기분을 느꼈었다. 특별히 바라고 있던 스타일도 없었던 만큼 실망을 느끼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단순히 머리카락 길이가 짧아진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많이 변한 것 같아 하루가 지난 오늘도 화장실에 들러 거울을 볼 때마다 매번 익숙지 않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그였다.

“이제 봄인데 잘 잘랐네. 이렇게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니까 전보다 훨씬 깔끔하고 시원해 보여. 근데 지금 이렇게 보니까 윤재 총각 목이 진짜 기네. 가늘기도 하고. 거기다 피부까지 하얘서 누가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아가씨 목인 줄 알겠어.”

“아유, 다 큰 총각이 여자인 우리들보다 목이 더 가늘면 어떻게 해? 남자는 자고로 목이랑 허리가 두꺼워야 힘을 잘 쓴다는데 이것 봐, 손목도 엄청 가늘지. 내 절반밖에 안 되겠네.”

“에이, 그건 자기 손목이 많이 두꺼워서 그런 거고. 것보다 그동안 앞머리에 가려져 있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이마가 참 예쁘게 생겼네. 어쩜 여드름이 하나 없지? 뭐... 하기사, 전에 왔을 때 보니까 어머님이 원체 피부가 좋으시더라고.”

“원래 피부는 유전적인 영향이 크다잖아. 우리 딸내미는 날 닮아서 피부가 누런데다 툭하면 뭐가 잘 일어나거든. 일 년에 몇 번이나 피부과에 가는데도 별로 나아지질 않아서 어찌나 고민인지... 에휴, 다 엄마 잘못 만난 탓이지 뭐.”

칭찬과 함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아주머니들 틈에서 잠시 어색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윤재가 이제 막 주방에서 나온 성호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자신도 잠시 동안 놓고 있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퇴근시간 직후의 1차 피크 시간이 지난 터라 서서히 빈자리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간혹 심야 시간대에도 2차다 3차다 해서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에 홀의 테이블은 영업이 끝나는 시간까지 늘 깨끗하게 정리해두고 있어야 했다.

주방으로 돌아와서 빈 접시를 씻기 시작한 윤재가 조금 전의 실수를 떠올리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주문을 받아놓고도 태연히 다른 음식을 만들어 내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성격 좋은 단골손님 앞에서의 실수였으니 망정이지 만약 덜 온화한 손님이 상대였다면 또다시 한바탕 큰 소리가 나올 만한 상황이 벌어질 뻔 했었다. 만약 그렇게 일이 커질 경우 실수를 저지른 입장에서 웬만한 쓴 소리는 군말 없이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윤재는 다행히 상황이 좋게 마무리된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째서 이런 실수가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따로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결심으로 수영과 만났던 날의 일이 꼬박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 윤재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전에 들었던 해준의 말대로 자신이 마음먹고 밀어내려 하면 자존심 강한 수영은 곧 미련 없이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던 윤재는 이틀 전 예상 밖으로 단호하게 나오는 수영의 태도를 목격한 이후 그와 같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단순하고 안일했는지를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한 행동들이 너한테 아무 것도 전달하지 못했다면 지금부터라도 다시 알려줄게. 네가 알 때까지.’

설마 수영이 그렇게까지 나올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던 윤재였다. 과거의 그를 생각하면 예상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그래서 윤재는 이제부터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마치 깊은 정글 한복판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동안에도 일초 이초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한시도 마음을 편히 가질 수가 없었다.

만약 정말로 해준의 협박대로 불시에 주위에 아웃팅을 당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윤재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은 아니라고 무작정 부정을 하는 방법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제대로 된 육체관계를 가진 상대는 수영이 유일한 만큼 자신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혹은 바이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윤재는 일방적으로 자신을 게이라고 단정 짓는 아웃팅의 상황에 처해지는 것에 여러 의미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로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도 그와 같은 강제된 상황에서 스스로의 평범치 않은 정체성을 수긍하기란 현실적으로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인 모친과 줄곧 가장 친한 친구의 자리를 지켜와 준 준석에게 그와 같은 얘기가 제삼자에 의해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무엇보다 두려운 기분이 앞섰다. 사실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 그저 들은 말만을 믿고 싸늘하게 변해갈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상상하는 것 역시 윤재에겐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운 일이었다.

만약 소중한 지인으로부터 혐오가 담겨 있는 시선을 받게 된다면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넘길 수 있을까. 모친이라면 충격을 받을망정 끝내 아들인 자신의 손을 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외의 지인들의 달라진 태도를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장사를 해야 하는 윤재의 입장에선 혹시나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 가게 영업에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는 경우에 대한 우려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 설거지는 그냥 두세요. 제가 할게요.”

문득 뒤에서 들려온 성호의 목소리를 듣고 간신히 현실로 돌아온 윤재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냐. 다 했어. 같이 씻게 가져 온 거 여기에 놔.”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손은 쉬지 않았던 덕분에 몇 분 전만 해도 꽤나 높이까지 쌓여 있었던 설거지감은 상당수 사라져 있었다.

눈치껏 자리를 잡고서 깨끗이 씻긴 접시들을 싱크대 옆 건조대로 옮기기 시작한 성호가 옆에 서서 일하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잠시 힐끔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장님 머리 자르시니까 훨씬 나은 것 같아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을 듣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스치듯 미소를 짓고서 ‘그래?’라고 짧게 대꾸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때가 되어 자른 것뿐인데 주변 사람들로부터 꾸준히 칭찬을 듣고 있는 게 오히려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고 있는 그였다. 대부분은 순수한 칭찬이 이어지는 가운데 개중 몇몇 손님들은 ‘혹시 실연당하신 거예요?’라는 진부한 농담을 던져 와서 윤재의 마음을 조금 심란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아까 밖에 있는 단골손님이 물어보시더라고요. 사장님 머리 자르니까 인물이 확 산다고, 혹시 선보러 가는 거 아니냐고요.”

선이라는 말에 무심코 미간을 좁힌 윤재가 수세미를 든 손을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지금 막 들려온 성호의 말에 윤재가 반응한 것은 이틀 전 수영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절대로 맞선을 보지 말라던 단호한 목소리가.

단순한 허세가 아닌, 확실히 무슨 행동을 보일지 모르는 수영의 협박성 발언이 신경 쓰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만약 그와 같은 협박이 없었다고 해도 어차피 윤재가 맞선을 보러 나가는 일은 없을 터였다. 애초에 그 날 그가 꺼낸 맞선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병원에서 모친으로부터 맞선 이야기를 들은 것까지는 사실이었지만, 그 제안을 들은 직후부터 병실을 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윤재는 한 결 같이 거절의 뜻을 고수했었다. 일단은 현재의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진지하게 누구와 만남을 시도하는 것 자체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당장의 도피처로 이용하고 싶지도 않은 그였다. 나중의 일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윤재는 불안정한 현재의 생활과 정신이 어느 정도 안정될 때까지 오롯이 <민들레>를 꾸려가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후 딸랑거리는 입구의 종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서둘러 주방을 나서는 성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은 윤재가 이내 고개를 되돌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썬 무슨 말을 듣게 되던지 자연스레 그 날의 일로 생각이 연결이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평소 하지 않던 실수가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여기, 양파 오징어 한 접시 더 갖다 주세요!”

문득 밖에서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를 듣고 그쯤에서 깊어지는 생각을 멈춘 윤재는 마지막으로 씻은 접시를 물로 헹군 뒤 곧바로 고무장갑을 벗고 옆쪽 싱크대로 자리를 옮겼다. 또다시 불필요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은 오직 일에만 집중하자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은 그는 서둘러 조금 전 바깥에서 들려온 말에 따라 추가로 주문받은 안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

엘리베이터가 1층 로비에 도착한 뒤 한꺼번에 내리는 사람들 틈 속에 섞여 걸으며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던 수영이 문득 뒤에서 들려온 부름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우대리님도 오늘은 야근 안 하시나 보네요? 저희 지금부터 술 마시러 가려고 하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대리님도 같이 가시겠어요?”

붙임성 좋게 생글거리는 얼굴을 하고서 제의를 해온 건 평소 수영이 사무실 내에서 비교적 가깝게 지내고 있는 두 사람인 영진과 세민이었다. 오늘 아침 브리핑 도중 실수를 저질러 양과장으로부터 쓴 소리를 듣고 점심시간 식당에서 내내 우울한 표정을 지었던 영진은 다행히 퇴근 무렵이 되자 어느 정도 원래의 페이스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앙금마저 지금부터 가질 술자리에서 말끔히 해소하고 나면 내일 아침이면 늘 그렇듯 특유의 싱글거리는 얼굴로 책상을 지키게 될 터였다.

“난 선약이 있어서. 두 사람 즐겁게 놀아.”

“아... 선약이 있으시구나... 혹시 데이트 하러 가시는 거 아니세요?”

장난스런 표정으로 슬쩍 질문을 던져오는 세민에게 ‘그냥 귀찮은 일이야.’라고 적당히 대답한 수영은 이어 내일 보자는 형식적인 인사를 남긴 뒤 걸음의 속도를 올려 두 사람보다 먼저 건물을 빠져나왔다. 일단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 관계인만큼 기본적인 친분은 유지하고 있지만 퇴근 이후의 사적인 시간까지 회사 동료들과 어울릴 생각은 조금도 없는 그였다. 좋든 싫든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서 다함께 모이는 회식자리에는 가능한 한 참석을 해오고 있지만, 사실 참석이라고 해봐야 단지 자리를 메우고 있을 뿐인 그는 대부분의 회식자리에서 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괜히 혼자서 자리를 비워 쓴 소리를 듣지 않도록 형식적으로나마 자리를 메우는 것은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였다. 물론 이마저도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에나 배운 처세술로, 사회인이 되기 전까지 그야말로 철저히 자신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만 살아온 수영을 아는 자들은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제대로 된 사회인의 모습을 갖춰나가는 그를 보고 ‘사람이 변하려면 변할 수 있구나’라는 취지의 감탄 섞인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갈 수 있을까.’

운전대를 잡은 수영이 시간을 확인하고 미간을 좁혔다. 지금부터 그가 소화해야 할 일정은 아까 전 영진에게 말했던 대로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현재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만남이었다.

직감이 가미된 계산에 따라 <민들레>와 윤재가 살고 있는 자택 부근에 각각 사람을 심어둔 지 나흘째가 되는 오늘까지 형식적인 보고 외엔 따로 올라온 게 없었다. 적어도 그동안 두 장소에서 특별한 이상 동향은 포착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후미진 동네인 탓에 가게 근처에는 그 흔한 감시카메라도 설치되어 있지 않아 그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현재로선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어서 결국 수영은 기다리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퇴근을 앞둔 두 시간 전 아주 오랜만에 연석에게 먼저 연락을 취해 만날 약속을 정한 것은 그 뜻에 따른 수순이었다.

수영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하는 일은 좀처럼 없기 때문인지 뜻밖의 전화를 받고 꽤나 놀란 듯한 반응을 보인 연석은 그러나 오늘 당장 만나자는 갑작스런 제안에도 시원하게 승낙을 해왔다. 수영의 입장에서 일단 하나의 문제는 해결이 된 셈이었다.

7시 35분.

약속장소인 바(bar)가 위치한 부근의 거리에서 차를 세운 수영이 먼저 시간을 확인하고서 차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많게는 두 세 번씩 찾았던 화려한 거리가 지금은 무척이나 낯설게 비쳐지고 있었다. 단 몇 개월 만에 자신 안에서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확인할 것만 확인하면 곧바로 헤어질 예정인 만큼 연석과의 만남에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을 터였다. 사실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목적이라면 전화로도 충분했지만, 상대가 말하는 것이 거짓인지 사실인지 그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서 직접 얼굴을 마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수영은 일부러 다소의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고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었다.

화려한 밤거리를 거닐고 있는 행인들을 지나쳐 약속 장소인 바(bar)로 향하던 수영이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중간 뜻밖에 누군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이제 막 건너편 건물의 입구를 빠져나온 건 그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아...”

예상치 못한 만남에 마찬가지로 놀란 듯 수영과 시선을 마주하고 몇 초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상대가 이내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고 수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런 데서 만나니 조금 신기하네.”

웃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온 건 안본 사이 조금 야윈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호연이었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바짝 곁으로 다가선 호연의 얼굴을 마주한 수영이 직접적인 대답 대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재와 관련된 최근의 골치 아픈 일들을 생각하면 결코 잘 지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사실이 그렇다고 해서 이미 헤어진 남자를 상대로 굳이 지금의 일을 솔직하게 전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오랜 만에 보는 호연은 여전히 세련된 패션 감각과 미모를 유지내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일부러 한껏 꾸민 듯한 주변 행인들의 기를 단숨에 죽일 만큼 그는 군중들 틈에서 명백히 눈에 띠는 존재였다. 그나마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전보다 조금은 살이 빠진 것 같은 인상이랄까. 그런 눈앞의 남자를 수영은 잘 알고 있었다. 웃을 때의 목소리와 벗은 몸의 굴곡, 가장 잘 느끼는 몸 속 깊은 부분까지도.

그러나 헤어진 뒤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깨끗이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던 존재를 마주한 지금 수영은 현실적으로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호연과의 지난 일들이 마치 오래 전 빛바랜 기억처럼 느껴지는 조금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잠깐 어디 가서 얘기라도 좀 하는 게 어때? 지금부터 가게로 돌아갈 예정인데 같이 가지 않을래? 최근에 선물 받은 좋은 술도 내줄 테니까.”

“지금부터 약속이 있어.”

“아... 그래? 취소하기 어려운 약속인가 보지? 그래... 그러면 이번 주나 다음 주 중에라도 한 번 봐. 나 저녁 시간 때엔 좀 여유가 생기니까 퇴근하기 전에 미리 연락주면 웬만해선 만날 수 있을 거야.”

한 번 거절을 당한 시점에서 희미하게 표정을 굳힌 호연이 곧바로 다시 한 번 태연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줄곧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던 상대를 뜻밖에 마주한 지금 호연은 내심 이 상황을 앞으로 수영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로 삼아야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오늘 이 부근에 들른 것은 근 한 달만의 일로, 단순히 돈 거래를 위한 짧은 방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굳이 그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리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필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 그였다.

애초에 거절당하는 일보다는 거절하는 쪽에 익숙하지만, 일단 한 번 상대로부터 거절당하면 그걸로 미련 없이 물러서는 것이 이제껏 호연이 취해온 태도였다. 그런 과거에 비춰보면 이미 한 번 분명한 거절을 당하고서 어떻게든 만남의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지금 그의 모습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무척이나 생소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수영이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자 자연스레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지금 상황은 당연히 거절을 당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적당히 웃으며 넘겨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좀처럼 물러서지 않고 고집을 부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호연의 태도는 끝내 수영의 입에서 한숨을 뱉어내게 만들었다.

“우리, 끝난 걸로 아는데.”

한숨에 이어 들려온 무미건조한 수영의 목소리는 자존심을 버려가며 끈질기게 승낙을 기다리고 있던 호연의 가슴을 순간적으로 철렁이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미소를 머금은 그가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뭐야... 헤어졌다고 이제 두 번 다시 만나면 안 되는 거야? 요즘 같은 세상에?”

“.......”

“나도 그렇지만 당신도 별로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는 타입은 아니잖아? 예전에 놀았던 상대들과 가끔씩 모임에서 만나 술도 같이 마신다고 전에 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별로 깊이 생각할 것도 없잖아? 나도 특별히 깊은 의미로 한 말은 아니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웃는 얼굴이 부자연스러운 건 아닐까. 혹여 일부러 덧붙인 웃음소리가 어색하게 들리고 있지는 않을까.

죽어도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도 깨끗하게 손을 털고 보낼 수가 없었다. 눈앞의 도도한 얼굴을 비웃으며 너 따위 내 쪽에서 사절이라고 시원하게 욕을 날리고서 먼저 돌아서서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도 마지막까지 실낱같은 가능성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병신 새끼. 간도 쓸개도 없는 새끼.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호연은 웃었다.

알고 있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자신은 눈앞의 남자를 상대로 언제까지나 약자의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고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스스로의 감정에 미칠 듯이 화가 나도, 결국 현실로 돌아오면 자신은 제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매일처럼 반복되는 끔찍한 악몽과 다를 바 없었다.

“호연씨.”

문득 이름을 불려 고개를 든 호연이 수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차피 당신 주위엔 내가 아니더라도 만날 사람 많잖아? 끝난 사람과 술자리 못 가질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가질 필요성도 솔직히 말해 난 못 느끼겠어. 무엇보다 지금은 그럴 여유도 없고.”

수영의 입에서 ‘그럴 여유도 없고.’라는 말이 나온 것과 동시에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호연이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태연한 목소리를 내서 물었다.

“그럴 여유가 없어? 왜? 일이 많이 바빠? 아니면 지금 애인이랑 한창 잘 되가나 보지?”

“.......”

“뭐야, 우리들 꽤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헤어졌다고 이젠 술자리 친구도 못 해주겠다는 거야? 그냥 편하게 여기면 별 문제도 아니잖아? 아니면 그냥 가벼운 친구로는 둘 수 없을 만큼 내가 그렇게나 의식 돼?”

떠나겠다는 남자 바지 붙잡고 매달리는 여자라도 된 것 같은 비참한 기분에 속이 뒤틀려왔지만 제어를 벗어난 말들이 멋대로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사람 마음이란 게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내버릴 수 있는 것인지, 대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 것인지 호연은 지금 위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시선을 받으며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행인들은 마주한 두 사람을 차례로 한 번씩 훑어보며 스쳐 지나고 있었다. 평소 좀처럼 보기 힘든 미남을 동시에 둘이나 볼 수 있는 상황이 신기한 듯 일부는 걸음까지 멈춰 세운 채로 제법 진지하게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주변을 의식하고서 일단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수영이 슬슬 움직여야 할 때임을 인식하고 다시 호연에게 시선을 옮겼다.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갈게.”

어떻게든 관계 회복을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처절하게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노력했음에도 결국 제대로 된 대답은커녕 인사말조차 듣지 못한 호연이 냉정히 등을 돌린 수영의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

끝내 발을 멈추지 않고 행인들 틈으로 섞여 들어가는 수영의 뒷모습을 붉어진 눈으로 노려본 호연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 본 수영의 시선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호연은 버려지듯 남겨진 지금 이 순간 끔찍한 상실감과 동시에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사랑했던 만큼 느끼고 있는 상실감과 배신감은 너무도 커서 그는 당장 곁을 스쳐 지나는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단한 이에 강하게 눌린 입술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레 다시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찾아올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안고 있던 자신이 한심하다 못해 비참하게까지 느껴지고 있는 호연은 이런 상황에서도 잠시 수영과 만났던 사실만으로 여전히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눈치 없이 솔직한 심박수의 변화는 차라리 증오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씨발... 좆같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욕설을 내뱉은 호연이 붉어진 눈을 가늘게 떴다.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곱게 물러나줄 생각은 없는 그였다. 지금까지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또 비참하게 바닥에 내팽개쳐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오기로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것은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를 떠난 것이었다.

물론 현재의 정황상 실제로 수영과 재결합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낮은 가능성이라도 거기에 희망을 거는 것이 이대로 비참한 패배자가 되어 물러나는 것보단 낫다고 호연은 생각했다. 모든 걸 떠나 자신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남자가 지금의 소중한 상대와 희희낙락하는 꼴은 죽어도 지켜볼 수 없는 그였다. 치졸한 질투든 추한 복수극이든 그 외의 어떤 말로 불려도 상관없었다.

‘고작 그런 새끼 때문에 날 찬 게 네 실수야.’

수영이 사라진 방향에 줄곧 고정하고 있던 날카로운 시선을 거둔 호연이 뒤늦게 자신을 향하고 있는 행인들의 시선을 의식하고서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한 뒤 재킷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느 샌가 평소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온 그는 멀찍이 세워둔 차를 향해 조금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입구에 시선을 두고 있던 연석이 잠시 후 입구 안으로 들어서는 손님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띠는 장신의 남자를 발견하고 천천히 자세를 바로 잡았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가 싶더니 이내 이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은 여전히 그 자체로 훌륭한 그림이어서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연석의 입꼬리는 자연스레 위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일제히 자신들에게 향해오는 시선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는 역시 눈앞의 남자는 함께 있으면 최고의 액세서리 역할을 해준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리고 있었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당신한테서 먼저 연락이 다 오다니.”

살짝 비꼬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 연석은 그러나 말과 달리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이대로 자연스레 완전히 관계가 끊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그로선 어떤 이유에서건 먼저 연락을 취해온 수영과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된 지금의 상황이 충분히 반갑게 느껴질 만도 했다. 현재도 주변에 잠자리를 가질 만한 상대를 충분히 많이 두고 있지만, 간혹 섹스프렌드로서 관계를 가질 때마다 최고의 쾌락을 선사해주었던 수영과의 관계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에 대해 그는 내심 쭉 아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구태여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당장의 눈요깃감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남자이기도 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재킷을 벗어 옆자리에 내려놓는 수영을 지켜보던 연석이 마침 앞을 지나는 바텐더를 불러 먼저 술을 주문하자 연석에 이어서 바텐더의 시선을 받은 수영이 무난한 논알콜의 음료를 주문했다.

‘...차를 가져온 건가.’

느슨하게 풀려 있는 수영의 넥타이를 보고서 역시 센스가 좋다는 생각을 떠올리던 연석이 잠시 후 자신의 앞으로 나온 칵테일을 건네받았다. 평범한 둥근 잔에 담겨 있는 건 예쁜 호박색의 러스티네일이었다.

“먼저 만나자고 연락해 놓고 입도 안 뗄 거야?”

술로 가볍게 목을 적신 연석이 그렇게 묻자 그제야 잠시 이어지던 혼자만의 생각을 끝낸 수영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기고서 말했다.

“확인할 게 있어서 연락했어.”

이것저것 볼 것 없이 목적대로만 움직이겠다는 듯한 수영의 딱딱한 태도에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역시나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으로 조용히 상황을 수긍한 연석이 순식간에 무거워진 주변의 공기를 읽어내고 희미하게 표정을 굳혔다. 수영이 갑자기 연락을 취해왔을 때부터 이미 심상치 않은 뭔가를 느끼고 있었던 그는 비교적 담담히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도 그 남자와 만나고 있어? 그때 지하주차장에서 본.”

질문을 받은 수영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하는 것을 두고 나름대로 해석한 연석이 손에 들려 있는 잔을 천천히 돌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타입이라 꽤 신선했지.”

“...어디까지 알고 있어?”

급격히 차가워진 수영의 목소리를 들은 연석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냥 한 번 떠본 것뿐인데 즉각 이런 날 선 반응이 돌아오다니 꽤나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어디까지라니... 그 날 지하주차장에서 본 게 다야. 묻고 싶은 걸로 따지면 오히려 내 쪽이 훨씬 많아. 진짜 아직도 그 남자랑 계속 만나고 있는 거야?”

당장에 진위여부를 가리기 어려운 연석의 대답을 듣고서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수영이 바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혀로 스며드는 씁쓰레한 맛을 느끼며 미간을 모은 그의 머릿속은 몇 가지 생각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수영이 형과 모친에 이어 연석을 다음 의심 타깃으로 삼은 건 다름 아닌 연석이 예전에 지하주차장에서 윤재를 목격했던 일 때문이었다. 윤재에게서 뚜렷한 이상 징후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밀려나 있었던 그 날의 일이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의심이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었다.

“지금 사람 사서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나 모르게 그와 단둘이서 만난 적 있어?”

“!”

뜻밖의 질문을 받고 무심코 눈을 크게 뜬 연석이 대답 대신 반문했다.

“내가 왜?”

“.......”

“뭐야... 혹시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 있는 거야?”

“대답부터 해.”

강경한 수영의 태도에 미간을 찌푸린 연석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갑자기 연락을 해 오길래 무슨 대단한 일이 생겼나 했더니... 결국 이 얘기 하려고 보자고 한 거였나 보지? 듣자하니 난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한 용의자고?”

“내 지인들 중에 그 남자를 본 사람은 몇 없어. 넌 그 중 한 사람이야.”

이제 아예 대놓고 자신을 의심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수영을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연석이 곧바로 불을 붙인 담배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신통치 않은 근거로 졸지에 용의자로 몰리게 된 사실엔 불쾌감이 일었지만 그 덕분에 이제 두 가지는 명확해졌다. 현재 수영과 그 절름발이 남자 사이가 평탄치 않다는 것과 수영이 일부러 자신을 찾아올 만큼 그 남자와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 후자는 결코 환영할 수 없었지만 전자와 관련해서는 곧바로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 연석은 내심 비웃음을 흘렸다.

그냥 슬쩍 한 번 말을 흘려본 것뿐인데 정말로 움직인 건가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온갖 도도한 척은 다 하더니 결국 질투 앞에선 별 수 없었던 모양이지...’

화가 날망정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자신은 그래도 양반이었다는 생각이 든 연석은 이 이상 불쾌하고 억울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잠시 손에 들었던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 남자를 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심받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 말은 내가...”

“사람 보내거나 아니면 직접 찾아간 적 있어, 없어? 그거나 대답 해.”

강압적인 수영의 태도에 울컥한 연석이 이내 서늘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딱딱하게 취조하는 말투 쓰지 마. 그렇게 안 해도 알아서 대답해. 나도 괜한 억울한 누명 뒤집어쓰고 싶지 않으니까.”

자신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수영을 잠시 가만히 쳐다보던 연석이 한층 진지해진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남자가 그래? 누가 자길 협박했다고?”

“일단은 내 짐작이야. 지금 확인하고 있는 중이고.”

“뭐야, 그냥 짐작에 불과한데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가?”

예리한 남자의 짐작이니 가볍게 볼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솔직하게 불쾌한 심기를 내보인 연석이 말을 이었다.

“직접 들은 게 아니면 확실한 건 없잖아. 그냥 당신 혼자만의 지레짐작일 수 있는 건데 겨우 그것 때문에 이 자리까지 찾아온 거라고? 언제부터 그렇게 엉덩이가 가벼웠어? 내가 만나자고 그렇게 연락할 때는 그 무거운 엉덩이 떼지도 않더니 몇 달 새 완전히 변해서는...”

“끌지 말고 대답부터 해.”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수영을 잠시 동안 가만히 노려보던 연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끌어봤자 자신에 대한 의심만 키울 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그는 이쯤에서 스스로를 보호해줄 답을 내놓기로 했다.

“다 됐고... 그 남자를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의심받고 있는 거면 나 말고 다른 용의자도 있어.”

“...뭐?”

“나 말고 그 남자에 대해 또 아는 사람이 있다고.”

수영의 눈이 미세하게 커지는 것을 바라본 연석이 반대로 눈을 가늘게 떴다. 모처럼의 기회인데 답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하드한 섹스를 내걸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지금 수영의 얼굴 위로 떠오른 살벌한 표정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그건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고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린 연석은 그대로 잠시 침묵을 지켰다.

수영의 입에서 좀 전과 달라진 질문이 나온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누구야?”

“알면 놀랄 걸.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누구냐고?”

“.......”

“정연석.”

매서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린 연석이 이쯤에서 뜸들이기를 멈추기로 하고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의 사장님.”

대답을 들은 것과 동시에 가늘어져 있었던 수영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지금 이 타이밍에 호연의 이름이 나오는 것인지 좀 전까지 부지런히 움직이던 그의 뇌가 일시적으로 사고를 멈췄다.

예상대로 놀란 기색을 보이는 수영을 잠시 그대로 지켜보던 연석이 줄곧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윤재에 대한 정보를 흘린 건 단순히 그 도도한 장호연의 면상을 잠시나마 일그러뜨려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에 의한 것이었지만, 만약 정말로 그 때의 일이 호연을 움직여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장호연이 어떻게 그를 알아? 넌 그 사실을 또 어떻게 알고?”

“내가 말했으니까.”

“...뭐?”

“세 달 전쯤인가 우연히 바에서 만났을 때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그 남자에 대한 얘기가 나왔어. 보통 상대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확실히 그 남자는 지금까지 당신 옆에 있던 상대들과 많이 달라서 좀 신기했거든.”

연석의 대답을 듣고 난 뒤 수영은 빠르게 머리를 식혀 생각을 전환했다.

세 달 전쯤이면 자신이 호연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던 시점이었다. 만약 호연이 그 상황에서 곧바로 윤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면 그가 자신이 차이게 된 원인을 윤재에게서 찾은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실이야 어찌됐든 조금 무리해서까지 연결지어보려 하면 정황상 모든 것은 얼추 들어맞고 있었다. 한참 전 윤재가 그답지 않은 행동을 보였던 것도 시기적으로 보면 호연과 헤어진 뒤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있었던 일이었다.

현재로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감에 차있는 연석의 말투와 표정은 수영으로 하여금 직감적으로 이것이 단순한 허세나 거짓말이 아니라 것을 확신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윤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연석뿐이라면 모를까, 호연까지 알고 있다면 두 사람 중 윤재에게 불순한 의도로 손을 뻗을 가능성이 높은 건 누가 봐도 직접적으로 이별 통보를 받은 호연 쪽이었다.

이별 후 몇 차례 호연에게서 왔던 전화와 메시지를 깨끗이 무시했던 일을 뒤늦게 떠올린 수영은 바로 아까 전 우연히 만났던 호연의 제안을 냉정히 거절했던 것을 이어서 떠올렸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

등 뒤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왔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나중이라, 그건 이미 헤어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이야기였다.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아직까지는 무엇 하나 명확하게 나온 것이 없는 상태였지만 밝혀진 몇 몇 정황은 어느 샌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호연을 지목하고 있었다.

“잠깐, 아직 얘기 도중이잖아.”

어느 정도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곧바로 재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놀란 얼굴로 덩달아 일어난 연석을 쳐다보고 말했다.

“갈게.”

“가다니, 우리 만난 지 아직 삼십분도 안 지났는데! 갑자기 사람 부르더니 용건 끝났다고 바로 돌아가겠다는 거야?”

수영의 팔을 붙잡은 연석이 주변의 시선을 잊고 소리치자 곧바로 차갑게 그의 손을 떨쳐낸 수영이 말했다.

“내가 지금 할 일이 있어서 그냥 가는 걸 다행으로 여겨.”

“...뭐?”

“당장 주변에 사람만 없었으면 넌 벌써 앞니 몇 개는 나갔어.”

수영의 말을 듣고 움찔한 연석이 뭔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결국 그대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괜한 누명을 쓸 수 없다는 생각 하에 곧바로 실토하긴 했지만, 냉정히 판단하면 자신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그였다. 다른 걸 차치하고서 호연에게 멋대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흘린 사실 하나만으로 수영의 분노를 자아내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언제 다시 만나자는 말은커녕 형식적인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등을 돌려 입구로 향하는 수영의 모습을 미동 없이 지켜보던 연석이 잠시 후 수영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 짧게 혀를 차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바테이블에 놓아둔 담뱃갑에서 새로 담배를 꺼내려다 생각을 바꿔 주인을 잃은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 그는 조금 전 보았던 매서운 표정의 수영과 오래 전 보았던 호연의 도도한 얼굴을 교차로 떠올리고서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모처럼 차리고 나왔는데 만나자마자 버려진 신세가 된 자신의 처지야 어쨌든 앞으로 꽤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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