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일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는 사이 토요일은 금세 찾아왔다.
얼마 전까지는 일을 하고 싶어도 손님의 수가 적어 가게 안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머꼬머꼬>가 공격적인 마케팅을 중단한 뒤 전세는 역전되어 신 메뉴의 인기를 등에 업은 <민들레>의 손님은 조금씩 그 수가 늘어가는 반면 <머꼬머꼬>는 눈에 띠게 한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음식의 맛이 혹평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가격적인 경쟁률마저 사라지자 곧바로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양새였다. 일전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가게들을 여럿 봐온 윤재는 아마도 <머꼬머꼬> 역시 지금의 이 흐름이 유지된다면 머지않아 이전에 사라진 가게들과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전 저쪽으로 가서 갈아타면 돼요. 사장님은 이쪽으로 내려가셔야 하죠?”
“응.”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가는 지하철 플랫폼 한 쪽에 멈춰선 윤재가 성호의 질문을 받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모친을 문병하고 싶다는 성호의 뜻에 따라 가게를 쉬는 주말 오후에 만나 함께 병원에 다녀온 두 사람은 오후 다섯 시가 갓 넘은 시각, 앞으로 있는 각자의 일정에 맞춰 움직이기 위해 슬슬 헤어질 분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 병원에 같이 가줘서 고마웠어.”
“고맙기는요. 당연히 찾아뵈어야하는 걸 너무 늦게 가 뵈어서 오히려 제가 죄송한데요. 그나저나 사장님 어머님 진짜 미인이시던데요. 사장님이 어머님 닮아서 그렇게 뽀얗고 예쁘신가 봐요.”
“예쁘다니... 이제 아저씨 나이에 가까워져 가는데...”
“스물여덟이면 한창이죠, 무슨 아저씨에요? 가끔 말씀하시는 거 보면 너무 어른스러워서 살짝 아저씨 냄새 날 때도 있지만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말을 듣고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슬쩍 소매를 걷어 다음 약속 시간에 가까워져 가고 있음을 확인한 뒤 성호와 마지막으로 짧게 인사를 교환하고 계단을 내려와 스크린도어 앞에 섰다.
오늘 앞 쪽의 약속은 성호와의 것이었지만 사실 윤재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한낮을 훌쩍 넘긴 지금 시간까지 줄곧 뒤에 있을 수영과의 약속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며칠 전 처음 약속을 정한 이후로 그 약속에 대한 생각을 단 한시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내지 못하고 있는 그였다. 의식적으로 다른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리려고 노력 해봐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상태로 온전히 일상에 집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터라 마침내 줄곧 머릿속에 두고 있었던 약속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윤재는 차라리 조금은 후련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지하철에 오른 지 약 30여분의 시간이 지나 익숙한 역에서 내린 윤재는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하고서 조금 서둘러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왔다. 꾸물꾸물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았지만 오늘 아침에 본 일기예보가 제대로 들어맞는다면 비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내리기 시작할 터였다.
지하철역에서부터 제법 긴 거리를 걸어 약속장소인 한적한 작은 공원 앞에 도착한 윤재는 한쪽에 주차되어 있는 눈에 익은 고급 승용차를 확인한 것과 동시에 주위를 둘러봤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 때문일까, 평소 이 시간 때면 간간이 눈에 띠던 동네 주민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 주변은 무척이나 한산해서 멀찍이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유독 키가 큰 남자의 모습은 곧바로 윤재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고도 특별한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은 수영이 천천히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던 윤재가 뒤늦게 자신도 수영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평소의 차가운 느낌이 드는 무채색 계열의 단정한 수트 차림 대신 머스타드 색의 니트 위에 엷은 회색 하프 코트를 걸쳐 입고 있는 수영은 마치 흑백의 배경 속에서 혼자만이 색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선명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만약 이곳이 사람 많은 장소였다면, 아니 그냥 보통의 음식점 정도만 되었어도 지금쯤 그는 충분히 많은 이들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 약속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건 윤재였다.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갈 대화의 내용을 생각하면 사람 많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그는 가뜩이나 눈에 띠는 수영의 외모도 계산에 넣어 일부러 평소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한 장소 중 한 곳을 고른 것이었다. 덧붙여 이미 수영이 몇 번 찾아오기도 했던 자택을 후보에서 제외시킨 것은 얼마 전 집에서 있었던 준석과 수영의 좋지 않은 만남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언제 왔어요?”
거리가 좁혀진 뒤 윤재가 묻자 수영이 ‘얼마 안 됐어.’라고 짧게 대답했다.
“어디, 다른 데로 옮길 거야?”
“...아뇨. 여기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윤재를 살짝 미간을 좁힌 채 바라본 수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던 중 저 멀리 공용 운동기구에 올라 열심히 허리를 비틀고 있는 아주머니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주민 사람들 운동하러 오는 장소인 것 같네. 별로 인기는 없는 것 같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으니까요. 가끔 지나다 보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항상 많았어요.”
“너도 가끔 여기 들러서 산책을 하거나 운동기구를 사용하거나 해?”
“지나는 길에 몇 번 와본 적은 있지만 특별히 운동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와본 적은 없어요. 여기 앉을까요?”
공원의 안쪽에 위치한 벤치들 중 유리판으로 만들어진 지붕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다가간 윤재가 먼저 자리에 앉자 수영도 곧 그의 옆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시간임에도 하늘에 잔뜩 구름이 끼어 있는 탓에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수영이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드문드문하게 보이던 사람들도 어느 샌가 깨끗하게 자취를 감춰서 당장 눈에 보이는 풍경은 다소 스산한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흙먼지 뒤섞인 비린내가 묻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조만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할 것 같았다. 밤 늦게부터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우산도 준비하지 않은 채 외출한 윤재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수영은 코트 안쪽에서 꺼낸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평소 금연구역에서는 철저히 금연을 해오고 있는 그였지만 어차피 이곳은 사방이 뚫린 밖인데다 주변에 사람도 없으니 한 두 개비 핀다고 해봐야 문제될 것도 없을 거라고 판단한 그는 모처럼 솔직하게 욕구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 최근에 무슨 일 있었어?”
먼저 깊이 한 모금의 연기를 들이마신 수영이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미리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질문을 받은 윤재가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자신에게 향해오는 수영의 시선을 뺨으로 느끼면서 짧게 생각의 정리를 끝낸 윤재가 잠시 후 문득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는 운동기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오늘 낮에 성호랑 같이 어머니 뵈러 병원에 갔었어요.”
대답 대신 돌아온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린 수영이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확인하고 담배를 쥐고 있는 손을 슬쩍 뒤로 뺐다. 그에 따라 이제 막 윤재에게로 향하던 연기가 곧바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듣고 싶은 마음에 지금 대화에 오른 화제를 억지로라도 바꿔야하는지를 두고 잠시 고민하던 수영은 일단 윤재의 모친에 대한 근황을 듣기로 하고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어머니가 성호를 본 건 오늘이 처음인데 무척 마음에 들어하시더라고요. 인상이 참 좋다고 하셨어요. 성호에 대해선 제가 중간에 한 번씩 얘기를 했었거든요. 가게 일을 참 성실하게 잘 돕는 착한 친구라고요.”
“...어머니 몸 상태는 좀 나아지셨어?”
성호의 이야기보다는 모친의 상태가 더 관심사인 수영이 툭툭 재를 털어내며 묻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윤재가 ‘어머니 말씀으론 좀 나아진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런데...’라고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어딘가 시원치 않은 윤재의 대답을 듣고 불안감을 느낀 수영이 질문을 이으려는 찰나 문득 쿠릉-하는 제법 큰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자연스레 동시에 고개를 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부쩍 강해진 흙 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코끝에 닿아왔다.
“비 올 것 같은데 어디 근처 가게라도 들어가자.”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윤재가 앉은 상태에서 수영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여기가 좋아요.”
“곧 비 올 거야.”
“상관없어요.”
어쩐 일로 고집을 부리는 윤재를 어딘가 서늘한 기분을 느끼며 잠시 내려다보던 수영이 어쩔 수 없이 발의 방향을 바꿔 다시 벤치에 앉았다. 그나마 다행히 두 사람이 자리한 벤치 주위로 제법 튼튼해 보이는 지붕이 세워져 있어 당장 비가 내린다고 해도 흠뻑 젖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머지않아 또다시 쿠릉-하는 소리가 이어진 뒤 곧 주변 바닥 위로 작은 점들이 무수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중간 중간 불고 있는 바람과 부딪친 뺨과 옷에는 선명한 물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기상예보보다 많이 앞서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앞으로 얼마나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점차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보건대 적어도 당분간은 이 상태가 유지될 것 같았다.
수영이 다시 자리에 앉은 뒤에도 정면에 시선을 향한 채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오늘 병원에서 어머니가 다시 맞선 얘기를 꺼내시기에... 승낙했어요.”
예상하지 못한 윤재의 말을 듣고 새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손을 멈춘 수영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수영의 목소리가 눈에 띠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수영의 머리를 뒤덮은 건 그저 당혹감이었다.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 왔고 또 그에 따른 방안을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지금 들려온 말은 수많은 예상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었다. 적어도 수영이 아는 윤재는 이렇듯 하나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다른 일을 추진하는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다.
명백한 당혹감이 느껴지는 수영의 목소리를 듣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을 지은 윤재가 여전히 멀찍이 떨어진 풍경 어딘가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이제... 여기까지 해요.”
수영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몇 번이나 생각해 봤지만... 역시 안 될 것 같아요.”
“안 되다니. 뭐가?”
“알잖아요?”
대답대신 반문해오는 윤재를 향하고 있는 수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최근 명백히 자신을 피하고 있는 윤재의 태도를 보며 여러 가지 좋지 않은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던 만큼 지금의 상황 역시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범주 안의 일임에도 막상 윤재의 입을 통해 분명한 이별의 뜻을 전달받은 수영은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앞으로 제대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선 침착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의 흔들리는 감정 상태를 의지대로 냉정하게 유지하는 것은 수영에게 있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근에 네가 의식적으로 날 피하고 있다는 거 알아. 얼마 사이 완전히 태도가 변한 것도 눈치 채고 있었어.”
“.......”
“대체 무슨 일이야?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솔직하게 말해.”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이건 그냥 계속 나 혼자 생각해왔던 거예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분명한 답을 찾은 거고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며칠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날 피하던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지금 나한테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처음부터 줄곧 그렇게 내내 자신을 피해왔다면 지금 들려온 윤재의 말을 믿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지금은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에 윤재와 함께 모친의 병실을 찾았었고, 그 날 윤재는 자신의 포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아도 이전처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을 수영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엔 일부러 신경 써서 포장한 반찬들까지 선물처럼 건네주었던 윤재였다. 그것이 곧 헤어지려 마음먹은 사람의 행동인 것일까?
최근 <민들레>에 들러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부드러워진 윤재의 태도를 목격할 때마다 수영은 조금씩 변해가는 상황을 통해 마음 안에서 희망이 커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진득한 섹스는커녕 손을 잡는 일조차 없는 풋내 나는 관계에도 그가 욕심 부리지 않고 만족했던 건 다름 아닌 한참동안이나 그저 헛된 바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일이 어쩌면 정말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가슴 안에서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자신을 향해 편안한 말투로 대꾸를 해주는 윤재를 볼 때마다, 그가 스치듯 미소를 내보일 때마다 수영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감을 느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윤재가 조금씩 마음을 열어 언젠가 정말로 자신에게 와준다고 한다면 얼마의 기다림이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수영이었다. 그런 바람과 각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서두르지 않고 윤재의 곁으로 다가서는 더딘 걸음을 조심스레 반복해왔던 것이었다.
“하... 맞선이라고? 내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보고 있을 것 같아?”
조금 격화된 수영의 목소리가 짧게 주변을 울렸다. 평소였다면 더 먼 곳으로 날아갔을지도 모르지만 한창 쏟아지는 빗줄기에 가로막힌 그의 목소리는 오직 가까운 곳에 위치한 윤재에게만 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그 여자를 찾아가 내가 당신과 그런 관계였다고 폭로하기라도 할 건가요?”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윤재를 향하고 있는 수영의 눈이 일시적으로 가늘어졌다.
확실히 이상했다. 지금껏 연애에 관심조차 두지 않아왔던 윤재가 대뜸 맞선을 보겠다는 얘기를 꺼낸 것도, 답지 않게 강한 태도로 대꾸를 해온 것도 모두가 작심에 의한 행동처럼 수영의 눈엔 비치고 있었다. 넓은 시야로 보면 걸리는 건 또 있었다. 한참 전에 평소답지 않게 완전히 술에 취해 있었던 윤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던 일 역시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상신호의 초기단계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무슨 일이야?”
“말했잖아요. 오랫동안 생각해온 답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라고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해준과의 일을 털어놓을까를 두고 고민했던 윤재는 그러나 결국 그와의 일을 수영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만약 해준과의 일이 수영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가 앞으로 더더욱 자신을 놓지 않으려 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해준의 협박만이 무서웠다면 수영을 믿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지도 몰랐다. 사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 방법을 선택지 중 하나에 넣기도 했었던 윤재였다. 그러나 정작 윤재에게 있어 아웃팅이라는 협박보다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이제껏 당연하게 밀어내왔던 수영을 진심으로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한 번 무언가에 빠지면 얼마나 맹목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윤재는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첫사랑이었던 수영을 깊이 사랑하게 되며 그때까지 자신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던 정체성과 모럴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선택까지도 감행했었던 윤재는 결과적으로 그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 믿고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깨끗이 버려진 뒤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었다.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서 그 모든 아픔과 슬픔을 견뎌야 했던 과거의 기억을 윤재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잊었다고 했지만 잊을 리 없었다. 어쩌면 평생이 다 가도록 끝내 잊을 수 없을 지도 몰랐다.
만약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또다시 같은 사람에게 모든 마음을 주게 된다면... 그래서 또다시 일방적으로 버려지는 일이 되풀이 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두 번 다시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서지 못할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수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지금 윤재에게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것이었다. 마음 안의 방어막이 서서히 얇아진 끝에 마침내 웅크리고 있던 감정이 다시 눈을 뜨게 되는 것. 머리를 배신하고 수영에게 향해가는 감정을 더는 이대로 모르는 척 방관할 수는 없었다.
눈 딱 감고 반대로 생각해 만약 다시 수영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하더라도 당장 넘어야 할 것은 너무도 많았다. 지금까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일 없이 남들이 보기에 재미없을 만큼 평범한 삶을 살아온 윤재에게 있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수영은 함께 하기에 너무도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수영과 이어진다면 적어도 그와 함께 하는 동안은 모친은커녕 주변 어느 누구에게도 그의 존재를 솔직하게 내보일 수 없을 터였다. 그것은 곧 자신이 소중한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긴 고민 끝에 윤재는 선택했다. 정말로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정리하자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싶은 소박한 바람을 가진 윤재는 오직 그 생각만으로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과 있으면 힘들어요.”
일부러 수영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다. 굳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길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하는 내내 그가 자신에게 보인 것은 모두가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윤재는 이것 외에 더 좋은 선택지를 알지 못했다.
“너...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느끼고 있었어? 나와 있으면 힘들다고.”
한참 만에 들려온 수영의 목소리는 무거운 음색을 띠고 있었다. 늘 자신감에 차있던 표정과 목소리는 심각한 무게를 담고 있었다.
“지금도 나를 원망하고 있어?”
수영의 질문을 받은 윤재가 고개를 숙인 채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끝낼 거라면 차라리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윤재는 차마 헤어지는 상황에서 수영에게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재회 후 한 결 같이 자신을 도와주려 노력했던 남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너한테 전하고 있었던 것들이 너한테는 하나도 닿지 않았어? 넌 정말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어?”
수영의 입에서 나온 건 책망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윤재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긍정을 대신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수영이 갑작스런 윤재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많은 도움 주신 거 기억하고 있어요.”
“마지막인 것처럼 말하지 마.”
수영이 일어서자마자 곧바로 두 사람의 눈높이가 역전되었다.
굳어 있는 수영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던 윤재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마지막인 것처럼’이 아니라 마지막이에요. 이제 다시 난 내 생활을 되찾을 거고, 당신도 그렇게 되겠지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 인연은 이미 ‘그때’ 끝이 났던 거예요.”
미리 머릿속에 두고 있었던 말을 침착하게 꺼내놓은 윤재가 ‘안녕히 가세요.’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 곧바로 몸을 돌려 다리를 움직였다. 지붕을 벗어나자 줄곧 위에서 쏟아지고 있던 빗줄기에 그대로 노출이 된 윤재의 몸은 금세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절뚝절뚝 걸어가는 모습은 쓸쓸하다 못해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중간에 어딘가에 발이 걸렸는지 잠시 휘청한 그는 곧바로 균형을 다시 잡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차츰 멀어져가는 윤재의 뒷모습을 잠시 동안 말없이 지켜보던 수영이 문득 다리를 움직였다. 배수가 잘 되지 않아 빗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바닥 위를 달리자 찰박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긴 다리로 순식간의 윤재의 뒤를 따라잡은 수영이 팔을 뻗은 것과 동시에 고개를 돌린 윤재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어느 샌가 커다란 손에 붙잡혀 있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놓으세요.”
“집까지 바래다줄게.”
“괜찮아요. 어차피 멀지 않으니까.”
조금 강한 어조로 사양을 반복한 윤재는 그러나 강하게 팔을 죄어오는 수영의 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로 결국 그의 차 조수석에 태워졌다. 이미 흥건히 젖은 상태에서 차를 더럽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망설이는 그를 억지로 조수석에 밀어 넣은 수영은 곧바로 자신도 운전석에 올랐다.
이미 다 끝난 상황에서 수영의 배려를 받는 것을 원치 않는 윤재가 문에 록이 걸린 뒤 어쩔 수 없이 차창에 시선을 둔 채 불편한 침묵을 지키는 동안 이제 막 출발한 차는 늘 그렇듯 최고의 승차감을 자랑하며 목적지를 향해 미끄러져갔다.
뜻밖에 일찍 내리기 시작한 비로 인해 뒤늦게 짐을 싸기 시작한 노점상 상인들을 지나쳐 점차 익숙하게 변해 가는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윤재는 잠시 후 문득 옆에서 들려온 한숨소리를 듣고 무심코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나 차로 이동하는 동안 운전대를 잡은 수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운전 외에 차에 올라서 한 유일한 행동은 ‘춥지 않아?’라는 질문에 이어 히터를 튼 것뿐이었다.
더없이 불편한 침묵 속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내던 윤재가 걱정과 달리 제대로 집 앞에 도착한 것 확인하고 인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알게 해줄게.”
“!”
갑작스런 말에 반사적으로 옆으로 시선을 옮긴 윤재가 뒤늦게 자신에게 시선을 돌려오는 수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그동안 한 행동들이 너한테 아무 것도 전달하지 못했다면 지금부터라도 다시 알려줄게. 네가 알 때까지.”
굳건한 각오가 담겨 있는 수영의 말을 듣고 몇 초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윤재가 이윽고 미간을 좁히고서 말했다.
“그만해요. 난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살고 싶어요.”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해줄게.”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윤재가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런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수영이 말을 이었다.
“조용히 어떻게 살고 싶은데? 사람 없는 시골에 내려가서 둘이 농사라도 지을래? 그러고 싶으면 그래, 그렇게 하자.”
단순히 말의 내용만 들으면 그저 일단 꺼내놓고 본 빈말일 거라고 생각되면서도 막상 마주하고 있는 수영의 눈동자에서 더없이 침착한 눈빛을 읽어내고 있는 윤재는 아무래도 그의 진의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우수영이 땀 흘리며 농사를 짓는다...?
이제껏 늘 화려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부족할 것 없이 살아온 그가?
급한 대로 곡괭이를 든 수영의 모습을 상상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너무도 언밸런스한 그림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오려 하는 것과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일부러 모르는 척 했지만 사실은 모르지 않았다. 수영이 지금까지 자신에게 해온 말과 행동들 속에는 고스란히 진심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조금 전 수영이 꺼냈던 농담 같은 말 역시 지나가는 농담도, 거짓도 아니라는 것을 윤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되돌릴 순 없었다.
“그러지 마세요. 이미 전 결심했어요.”
윤재의 말을 들은 수영이 무거운 한숨을 내쉰 뒤 먼저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잠시 텀을 두고 윤재도 뒤따라 조수석에서 내렸다. 아직까지 비가 내리고 있는 탓에 자연스레 차에서 내리자마자 건물 입구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젖은 우산을 접고 곁을 스쳐 지나는 이웃주민의 시선을 받은 채 서로를 마주보았다.
“감기 걸리기 전에 들어가서 씻고 쉬어.”
“부탁이에요. 이제...”
“네가 지금 당장 아무 것도 말하지 않겠다면 강요 안 할게. 대신 너도 나한테 널 포기하라고 강요하지 마.”
지금으로선 어떤 말을 해도 윤재의 마음을 돌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수영은 내키지 않지만 이쯤에서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은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의해서였다.
“잠시 머리 식힐 시간을 갖자. 그러다 보면 둘 중 한 사람은 생각이 바뀔 지도 모르니까.”
뭔가 대꾸를 하려는 윤재를 등 뒤에 남겨둔 채 곧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차로 향하려던 수영이 문득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끝내 확답을 듣지 못해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가 자신에게 향해온 시선을 마주하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맞선 절대 보지 마. 나 진짜 무슨 짓 할지 몰라.”
진지한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은 수영이 이내 마저 걸음을 옮겨 운전석에 오르는 것을 조금 커다래진 눈으로 지켜보던 윤재는 낡은 동네를 배경으로 세워져 있던 고급 승용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기껏 마음의 준비를 하고서 계획하고 있던 말들을 쏟아냈는데 결국 해결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수영을 설득시키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실제 마주한 그는 윤재의 예상을 뛰어넘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 왔다. 무엇보다 설마 수영의 입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말까지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윤재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정말로 뒤통수를 한 대 제대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었다. 차라리 농담이었다며 웃길 바랐지만 수영은 떠나는 마지막까지도 한 결 같이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었다.
며칠째 이어진 두통을 적어도 당분간은 더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깊은 고뇌에 빠져든 윤재는 새로운 주민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무거운 동시에 후련한 마음 상태로 귀가를 하게 될 거라는 예상이 빗나가버린 지금 윤재는 다소 허망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역시 우수영이라는 남자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고 있는 그였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처음부터 생각을 해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서 푹 쉬고 싶은 바람을 안고 있는 윤재는 복도 중간에 멈춰 서서 젖은 외투의 물기를 털어낸 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코에 닿아온 익숙한 집 냄새가 줄곧 곤두서있던 그의 기분을 조금은 달래주고 있었다.
*
“어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 상대를 확인한 수영이 일단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이에요. 형님이 곧 손님이 올 거라고 했는데 그 손님이 수영씨였나 보죠?”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온 건 휘영의 불륜상대인 효린이었다.
이전에 한 번 휘영의 문제로 상담할 것이 있다며 회사에 찾아왔던 효린과 짧게 만났던 기억을 떠올린 수영은 곧바로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때도 애인의 친동생에게까지 대놓고 추파를 던지는 꼴이 우습다 생각했는데 뜻밖에 마주친 지금의 상황에서도 역시나 그때와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효린의 모습이 수영에겐 무척이나 역겹게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발정 난 암캐처럼 여기저기 교태를 흘리고 다니는 여자라도 좋다고 몇 년째 그녀를 끼고 도는 휘영의 순애보는 한심함을 넘어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물론 그런 개인적인 사정이야 어쨌든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만 없으면 아무래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주의의 수영이었지만.
“주말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해요.”
“어머, 아니에요. 방해는요. 가끔 형제끼리 만나서 술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고 하면 좋죠.”
마치 자신이 형수님이나 된 것처럼 말하는 효린을 향해 스치듯 미소를 지어 보인 수영은 ‘또 뵙죠.’라는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고서 그녀의 곁을 지나 복도를 걸었다. 곧바로 효린의 짧은 인사가 되돌아왔지만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마저 걸음을 옮겨 휘영의 집 앞에 멈춰선 그는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자 곧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네가 황금 같은 주말 시간에 여길 찾아오다니 별 일이다.”
“좋은 시간 보내고 계셨던 것 같은데 방해한 것 같네요.”
수영의 말을 듣자마자 뭔가를 떠올린 휘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오다가 만난 거야?’라고 물었다.
“그냥 인사만 했어요.”
짧게 대답한 뒤 넓은 거실을 크게 한 번 둘러보고 소파에 앉은 수영은 부엌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맥주 캔 두 개를 가지고 돌아온 휘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자신에게 건네진 캔을 차를 가져왔다는 말로 사양한 그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캔을 따서 입으로 가져가는 휘영의 모습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았다.
불과 조금 전까지 효린과 한바탕 정열적인 시간을 보낸 모양인지 휘영의 머리카락은 아직 물기로 젖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 스쳐 지나던 때의 효린에게서도 바디로션 향이 강하게 풍겼던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수영은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두 사람의 좋은 시간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현실로써 자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별로 미안함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지금 당장 효린이 돌아와 두 사람이 엉겨 붙게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고 해도 수영은 중간에 자신의 일을 양보하고 자리를 비켜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네가 갑자기 만나고 싶다고 해서 솔직히 좀 놀랐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라고 수영은 생각했다. 휘영과는 레스토랑에서의 좋지 않았던 마지막 만남 이후로 오늘까지 쭉 서로 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지내왔으니. 어차피 평소에도 특별히 우애 좋은 형제는 아니었던 만큼 각자의 바쁜 인생을 사느라 안부 전화를 자주 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최근에 있었던 마지막 만남이 최악의 형태로 기억에 남아 있는 터라 자연스레 두 사람 모두 그 날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오늘 이곳을 찾은 수영은 슬쩍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윤재와 헤어지고 곧장 귀가한 뒤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은 터라 시각은 늦은 밤 시간대에 진입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왔어요.”
급격히 진지해진 수영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게 시선을 던진 휘영이 손에 들고 있던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평소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동생이 굳이 일부러 황금 같은 주말 시간에 이곳을 방문할 이유란 단순한 친목이 아님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그였다.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휘영의 모습을 잠시 가만히 쳐다보던 수영이 입을 열었다.
“혹시 저한테 숨길 일 하신 적 없으세요?”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휘영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숨길 일? 내가 너한테 뭔가 숨길 일을 하지 않았냐고 묻는 거냐?”
의아함에 이어 단호한 부정으로 바뀌는 휘영의 표정을 진지한 눈으로 관찰하던 수영이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전에 레스토랑에서 형이 모욕했던 남자에 대한 얘기입니다.”
수영이 말을 덧붙인 뒤에야 지금 이야기의 포커스를 파악한 휘영이 곧바로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 일로 평소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동생이 여기까지 걸음을 한 건가 싶었던 그는 이제야 그 이유를 납득한 동시에 불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날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불미스런 일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노력했던 그로썬 일부러 비싼 몸 이끌고 여길 찾아와 그 싫은 기억을 헤집어 놓는 수영을 결코 고운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나한테 묻고 싶은 게 정확히 뭐냐?”
“제 앞에서 대놓고 그 남자를 모욕할 만큼 그의 존재를 용납 못하는 게 형이죠. 정확히는 동생의 짝으로서 말입니다.”
“하, 짝이라니. 그런 단어 쓰기가 부끄럽지도 않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럼 떳떳하다는 거냐? 사람들 다 보는데 네 짝이라고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상대야? 그 남자가?”
“왜, 못 내놓을 이유가 뭡니까? 남자라서? 아니면 몸이 온전치 않아서요?”
“너...”
“네, 얼마든지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상대에요. 그 남자가 괜찮다고 허락만 하면 전 내일 당장이라도 아는 지인 다 모아놓고 말할 겁니다.”
지금 들려온 수영의 대답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휘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아는 지인을 다 모아놓고 커밍아웃이라니, 주변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는 휘영의 입장에선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더 두렵게 만들고 있는 건 자신의 동생이 마음만 먹으면 정말로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는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잔뜩 경직되어 있는 휘영의 표정이 뒤에서 손을 쓴 사실이 들통 난 데에 대한 당혹감 때문인지 혹은 조금 전 자신의 발언에 의한 충격 때문인지 아직 명확히 분간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단 한 차례 감정을 가라앉힌 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혹시 저 모르게 그 남자 뒷조사하거나 직접 찾아가서 저랑 헤어지라고 말한 적 있으세요?”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휘영이 곧바로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자 수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세요. 사람까지 샀으니 결국 다 알아낼 겁니다. 만약 나중에 가서 형이 거짓말을 한 걸로 밝혀지면 그때 저, 가만히는 안 있어요.”
“글쎄, 아니라고 했잖아. 믿지도 않을 거면 처음부터 왜 묻는 거냐? 네가 그 날 그렇게 날 협박하고 떠난 뒤로 솔직히 괘씸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한 건 사실이지만 그땐 나도 한창 일이 바빠서 네 일에 크게 신경 쓸 여력도 없었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끝날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고.”
대답하는 휘영의 말투와 표정은 무척이나 단호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가족의 입장으로써 우휘영이라는 남자를 가까이에서 경험해 온 수영은 지금 들려온 대답이 어쨌든 거짓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간혹 거짓말을 할 때의 휘영은 불안정한 시선처리를 하거나 코를 긁적이는 등 예리한 수영의 관찰력 안에 고스란히 잡히는 뚜렷한 버릇을 보여 왔기 때문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집중력을 발휘해 눈앞의 반응을 신중하게 관찰한 결과 휘영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일말의 흐트러짐도 찾아내지 못한 수영은 적어도 이 일에 관해서 만큼은 휘영이 결백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라도 빨리 지금의 이 불안정한 상황을 만든 원인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 싶었던 그는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의심점이 사라진 지금 오히려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남자랑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냐?”
주말 늦은 시간 수영이 한 걸음에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분명 둘 사이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거라고 판단한 휘영이 내심 기대를 품은 채 묻자 곧 대답 대신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직접적인 대답은 없었지만 지금의 한숨이 긍정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휘영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자신의 예상대로 그리 오래 가지 않아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나는 분위기로 가고 있는 건 휘영의 입장에서 충분히 환영할 만 한 일이었지만, 관계를 이어가려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수영 쪽인 건 그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혹시 형이 그 남자에 대한 얘길 어머니한테 전한 적 있으세요?”
하나의 의심점이 사라진 직후 곧바로 다음 타깃으로 포커스를 옮긴 수영은 곧바로 돌아온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
“자꾸 맞선 얘기가 나와서 네가 지금 누군가랑 만나고 있는 모양이라고 슬쩍 흘리긴 했지만 상대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는 한 적 없어. 안 그래도 최근 혈압이 높아져서 고생하시는 어머니한테 소중한 차남에게 다리 저는 남자 애인이 있다는 말을 전할 만큼 난 불효자가 아니니까.”
휘영의 대답이 사실이라면 모친에게 향하던 의심의 화살은 거두어질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무작정 뒷조사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수영의 뒤만 미행해도 당시 어울리던 상대를 찾아낼 수 있었겠지만, 술자리와 섹스를 근절한 현 상태에서 그의 건전한 생활을 캐내봐야 사귀는 상대라고 짐작될 만한 후보가 나올 리 만무했다. 만약 윤재의 존재를 알았다손 치더라도 고작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수영이 들르는 가게의 사장일 뿐인 윤재를 두고 그런 방향의 의심을 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걱정 안 해도 어머니는 지금도 네가 누구와 만나고 있는지 모르실 거다.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네가 회사 근처로 찾아온 어머니랑 맞선 상대 아가씨한테 엄청나게 창피를 줬다면서? 어머니가 그 날 이후로 나한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그 얘기를 하신지 알기나 해? 하긴, 평소 제일 아끼던 아들한테 그런 일을 당했으니 충분히 배신감 느끼실 만도 하지.”
“.......”
“어쨌든 그 일로 인해 요즘엔 네 결혼 얘긴 안 꺼내고 계시긴 한데 또 모르지, 지금도 한창 다른 상대 알아보고 계신지도. 수영이 네가 뭘 의심하고 있는지도 알겠고, 내가 너한테 그런 의심받을 정도로 믿음 못 받고 있겠다는 것도 알겠는데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도 어머니도 네가 의심하고 있는 일은 안 했다. 일단 난 네가 그 남자랑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어.”
덧붙여진 휘영의 말을 듣고서 곧바로 고개를 돌려 그에게 시선을 던진 수영이 미간을 좁힌 채로 물었다.
“그 말은 만약 앞으로 나와 그 남자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필요에 따라 뒤에서 손 쓸 생각도 있다는 뜻이에요?”
추궁에 가까운 수영의 질문을 받고 쓴웃음을 머금은 휘영이 반쯤 비워져 있는 맥주 캔을 집어 들고서 대답했다.
“나중의 일은 모르는 거 아니냐?”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하지 않는 휘영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진 수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하지 마세요. 하나뿐인 형과 평생 원수지고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아니, 사내자식 하나 때문에 친형이랑 원수라도 지겠다고?”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요? 각자의 인생에 터치하지 말자고. 그것만 지켜주시면 앞으로도 아무 문제없어요. 형이 지금 애인이랑 결혼을 하든 아니면 또 새롭게 어린 여자를 만나 새 장가를 들던 전 전혀 상관 안 합니다. 정 저한테 훈계를 하고 싶으면 형이 먼저 주변 여자 싹 정리하고 나서 말하세요. 그럼 그땐 듣는 척이라도 해볼 테니까.”
휘영에게서 여자를 뺀다는 건 애초에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는 수영은 ‘알았으니 갑자기 결혼한답시고 사내놈 데리고서 집에 인사하러 오지만 마라.’라는 대꾸로 한 발 물러서는 휘영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최근의 좋지 않은 정황 상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이 휘영이었던지라 곧바로 이곳을 찾긴 했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자신부터가 큰 약점을 안고 있는 데다 애인과의 즐거운 생활에 한창 몰입해 있는 휘영이 뒤에서 손을 썼을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은 것이었다. 만약 그가 움직였다면 그건 아마도 모친의 명령에 의한 것일 터였지만 휘영은 아직 모친에게 윤재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밝힌 만큼 잠시나마 두 사람을 향해 있었던 화살은 이제 좀 더 현실적인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이는 정황과 감에 의하면 분명 윤재에게 외압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어쩌면 정말 윤재가 말한 대로 순수한 그의 의견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는 수영은 우선 지금은 최대한 전자의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움직이기로 했다.
‘다음 주에는 회사에 출근해도 일에는 집중 못 하겠군...’
답답한 상황에서 길게 한숨을 내쉰 수영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후 휘영과 최근의 안부를 주제로 간단한 대화를 이어가던 수영은 적당한 타이밍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온 목적이 사라진 이상 굳이 길게 오래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잘 가라. 다음번엔 좀 좋은 일로 찾아오고. 기왕이면 주말 밤은 좀 피해서.”
떠나는 동생을 배웅하기 위해 현관까지 나온 휘영이 농담을 섞어 말하자 구두를 신고 허리를 편 수영이 나중에 식사를 하자는 짧은 인사로 답을 한 뒤 곧장 몸을 돌려 문을 열고 현관을 나섰다.
방문객이 떠나고 다시 넓은 집안에 혼자 남겨진 휘영은 슬슬 술기운으로 열이 오르기 시작한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침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