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뭘 이런 걸 다 사왔니?”
“대장암에 블루베리가 좋다고 들어서요. 아는 가게에서 직접 짠 진액인데 한 번 드셔보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가져왔어요.”
그렇게 대답하며 근처의 선반에 종이박스를 내려놓은 준석이 고맙다고 말하는 정심을 향해 ‘그보다 몸은 좀 어떠세요?’라고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회사 퇴근길에 들른 터라 평소 볼 때와 달리 단정한 수트 차림을 하고 있는 준석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던 정심이 질문을 받고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 아직도 가끔씩 속이 안 좋을 때가 있긴 하지만 며칠 전이랑 비교하면 많이 나아진 거야.”
“그래도 다행이네요.”
진심이 담겨 있는 준석의 말에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서 고개를 끄덕인 정심이 문득 냉장고 쪽으로 손을 뻗었다.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린 준석이 다시 정심에게 시선을 옮기고 물었다.
“뭐 좀 가져다드릴까요? 목마르세요?”
“아니, 준석이 너 뭐 좀 마시라고. 냉장고 안에 아는 사람들한테서 받은 주스가 들어 있거든. 어제 윤재가 가져다놓은 과일도 있고.”
“전 괜찮아요.”
정심이 자신을 신경 써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미안한 기분이 든 준석이 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윤재로부터 정심의 수술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난 뒤로도 한동안 회사 일이 바빠 병원을 찾지 못했던 준석은 더 늦기 전에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오늘 일부러 저녁 회식을 패스하고 이곳에 걸음 한 것이었다. 만약 윤재가 오늘 가게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하면 그와 동행을 했겠지만 최근 라이벌 가게가 생긴 이후 <민들레>의 운영 상황이 그리 좋게 흘러가고 있지 않는 듯 해서 오늘은 윤재에게 자신 혼자만 문병을 하겠다고 미리 말해두었던 준석이었다.
‘벼룩의 간을 내먹지 진짜...’
왜 하필 몫도 안 좋은 곳에 떡하니 라이벌 가게가 생겨난 것인지 생각하면 짜증부터 치밀어 오르는 준석은 잠시 후 문득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손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부터 근처에 놓여 있던 종이 가방 안에 손을 넣어 부스럭거리던 정심이 그 안에서 꺼내 준석에게 내민 것은 랩으로 꽁꽁 둘러싸여 있는 떡이었다. 시간상으로 퇴근 후 분명 식사도 하지 못하고 병원을 찾아왔을 준석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 정심은 어떻게 당장 허기를 채울 만한 간단한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동생인 은심이 스스로의 식사대용으로 사다둔 떡을 꺼내 준석에게 건넨 것이었다.
“저녁 아직 안 먹고 왔지?”
“전 정말 괜찮아요.”
“괜찮기는.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뭐라도 먹어야지. 이거, 윤재 이모가 먹는 떡인데 맛이 꽤 좋은가봐. 한 번 먹어 봐.”
어차피 조금 뒤 돌아가는 길에 <민들레>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준석은 잠시 망설이던 끝에 결국 정심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떡을 받아들어 먼저 그 끝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본의 아니게 은심의 식사를 가로채게 된 것에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천천히 꼭꼭 씹어 쫄깃거리는 떡을 맛보던 그가 어느 순간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떡보다는 빵을 좋아해서 명절이 아니고서야 일부러 돈을 내고 떡을 사서 먹는 일이 없었던 준석도 지금은 순수하게 맛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콩가루인가요? 엄청 고소하네요.”
“그래, 고소하지? 안에 든 건 쑥떡인데 맛이 진할 거야. 우리 고향인 시골 동네 할머님들이 직접 산에서 캔 걸 사다가 만든 거거든. 시중에 파는 거랑 비교해 쑥의 양을 훨씬 많이 넣어서 향이 깊지.”
“아... 그래서 그런가, 향도 좋고 정말 맛있네요.”
“윤재 이모도 좋아하지만 사실 이 떡은 윤재가 더 좋아해. 그 애가 식탐이 강한 편이 아닌데 이 쑥떡은 한 자리에서 몇 개씩이나 먹어치우더라고. 참, 그리고 남은 콩가루에 밥을 비벼서 김치랑 같이 먹으면 그것도 맛있어.”
정심의 말을 듣자 없던 허기가 생겨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준석이 슬쩍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여덟시 이 십 삼 분.
처음 병실에 들어섰을 때로부터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가 있었다. 얼마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겠다고 미리 계획을 세워둔 건 아니지만 모처럼만에 병원을 찾은 만큼 상대가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시간은 이곳에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는 갑자기 살아난 허기를 일단 한 번 누르고 손에 묻어 있는 콩가루를 툭툭 털어냈다.
“준석이 넌 요즘 회사 일이 많이 바쁘니? 윤재한테 들으니까 야근이 잦은 것 같던데 끼니는 잘 챙겨먹고 있는 거지?”
마치 친어머니처럼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정심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인 준석이 ‘일 많이 시키는 대신 밥이나 야식 같은 건 잘 나와요. 회사에서.’라고 대답했다. 단순히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낸 대답이 아니라 그 말 그대로 야근이 있을 때의 사무실 안은 여러 종류의 다양한 음식 냄새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사실 준석이 좋아하는 건 한식이었지만 다른 직원들과 같이 주문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다수결에 의해 정해지는 메뉴는 주로 배달이 용의한 치킨이나 족발 및 피자였다. 그로 인해 야근이 잦아지는 시점에서부터 눈에 띠게 살이 불어나고 있는 동료직원들은 준석의 주변에선 심심치 않게 목격되고 있었다.
“일이 그렇게 많아서 어떻게 하니. 그러고 보니까 전체적으로 살도 좀 빠진 것 같네... 요즘엔 윤재랑 자주 만나지도 못 하겠구나.”
“네, 최근엔 자주 못 봤어요.”
“그래... 일이 바쁘니까... 가게에 가면 윤재한테 맛있는 것 좀 많이 만들어 달라고 해. 나 없는 동안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많이 늘었어요. 노력도 많이 하고 있고요.”
곧바로 윤재의 편을 들어 대답한 준석이 그 말을 듣고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짓는 정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개발한 신메뉴가 꽤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래? 나한테는 얘기가 없었는데 윤재 혼자서 뭘 새롭게 개발한 거야?”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정심에게 ‘네.’라고 짧게 대답한 준석이 곧바로 옆에 놓아두었던 서류가방을 뒤적이더니 그 안에서 전단지 한 장을 꺼내 정심의 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얼마 전 윤재로부터 새롭게 받았던 <민들레> 홍보 전단지로, 평소 준석이 지인들에게 홍보할 기회가 있으면 보여주기 위해 쭉 샘플용으로 가방에 넣어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건네받은 전단지를 차근히 살펴보던 정심이 신메뉴라는 글자 옆에 붙어 있는 사진을 발견하고 시선을 고정했다.
“이거니? 양파 크림맛 소스 오징어... 이게 이번에 윤재가 개발한 거야?”
“네.”
“그렇구나. 양파랑 크림소스라... 맛이 어떨지 모르겠는데...”
“젊은 여자 손님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도 먹어 봤는데 양파의 감칠맛에 크림이 섞여서 적당히 부드럽고 맛있어요. 오징어의 물렁한 식감이랑도 잘 어울리고요.”
제법 까다로운 준석의 입맛을 알고 있는 정심은 그의 입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증언을 들은 뒤에야 간신히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랫동안 운영해온 가게의 이름이 걸려 있는 만큼 원주인이 된 입장에서 검증되지 않는 어설픈 메뉴가 손님들의 테이블에 나가는 것을 용인할 마음은 없는 정심이었다. 물론 꼼꼼한 성격의 아들이 그렇게 어설프게 일을 처리할 리 없다는 믿음은 가지고 있는 그녀였지만, 윤재가 가게를 맡은 지 아직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한 가닥 불안한 마음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 혼자서 가게를 살려보겠다고 전단지도 만들고 신메뉴도 개발하고 있는 윤재의 노력을 전해 듣게 되자 대견한 한 편으로 안쓰러운 기분이 든 정심이 손에 들려 있는 전단지를 얼마간 가만히 바라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하게도 누구보다 윤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모친인 정심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일에 매진하고 있지만 사실 얌전하고 모질지 못한 성격의 윤재가 다수의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맞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간 아픈 모친을 상대로 윤재가 가게를 운영하며 느끼고 있는 애로사항이나 고충에 대해 직접적으로 털어놓는 경우는 없었지만, 몇 가지 객관적인 정황만 놓고 보더라도 현재 가게의 운영이 결코 쉽지 않으리란 걸 정심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심적으로 가장 힘들게 만들고 있는 건 그와 같은 상황을 알면서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없는 스스로에게 느끼고 있는 무력감이었다.
“준석아.”
“네.”
마음 같아서는 곁에서 윤재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어도 준석 역시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정심은 결국 지금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똑같이 전달하지는 못했다.
“가끔 시간 나면 윤재 만나서 같이 얘기도 하고 그래. 서로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하면서 푸는 게 좋잖아. 스트레스는 쌓아두면 병이 되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얼굴로 말하고 있는 정심이 사실 정말로 자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눈치껏 알아차린 준석은 일단 ‘네.’라고 순순히 대답했다. 사실 최근까지 얼마간 윤재와의 거리를 두고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 한편으로 우수영이라는 남자를 떠올리면 윤재를 홀로 방치해두는 것에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 준석이었다.
“그런데 준석이 너... 혹시 우수영이라는 사람 아니?”
“!”
갑자기 들려온 질문에 곧바로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준석이 정심을 쳐다보았다. 마치 머릿속을 읽힌 것 같다는 생각에 일시적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낀 그는 어째서 ‘그 남자’의 이름이 대뜸 정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한 불쾌한 의문을 뒤로 접어두고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금... 알고 있는데 왜 그러세요?”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준석이 잠시 후 돌아온 정심의 대답을 들은 순간 무심코 움직임을 멈췄다.
“얼마 전에 윤재가 친구라고 여기에 데려와서 나한테 소개시켜줬었거든. 굉장히 훤칠하고 잘 생긴 남자던데 어딘가 분위기가 윤재랑은 많이 다른 타입이라서 좀 놀랐었어.”
“.......”
“.......”
“윤재가... 데려왔었나요? 여기에...”
굳어지려 하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펴며 간신히 질문을 건넨 준석의 머릿속엔 이미 그 날의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윤재와 그 키 큰 남자가 모친이 누워 있는 침대 앞에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윤재와 친구면 준석이 너와도 아는 사이가 아닌가 해서...”
통성명을 하기는 했지만 아는 사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관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 잘라 전혀 모른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준석이 너도 알다시피 윤재는 사교성이 좋은 편이 아니라 친구가 많지 않잖니. 그래서 난 가끔씩 윤재가 스스로 친구를 데려와서 소개시켜주면 기쁘기도 하고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애도 평범하게 사회생활을 잘 해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 윤재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 마음이란 게 어쩔 수 없이 눈만 뜨면 자식 걱정을 하게 되는 모양이야.”
“.......”
모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준석은 자꾸만 굳어져가는 표정을 애써 관리해가며 동조의 의미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실 지금 준석은 어째서 윤재가 수영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인지 그 상황이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짐작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윤재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준석의 눈에 우수영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윤재와 나란히 두고 봤을 때 너무도 이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심을 빼고 보더라도 두 사람은 너무도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어서 대체 어떻게 만나 지금의 친분을 쌓게 된 것인지 준석으로선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물론 준석이 수영을 직접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건 단 한 번뿐으로 그 시간조차 무척이나 짧았지만, 적지 않은 사회생활 경험으로 인해 첫 대면만으로 어느 정도 상대방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준석은 직감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한눈에도 어딘가 어색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품고 있는 두 사람은 결코 서로를 편안하게 인식하는 그런 평범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사실 차라리 이와 같은 짐작이 그저 자신의 앞서 나간 헛된 망상이길 바라고 있는 준석이었지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도 한 번 굳혀진 그와 같은 생각에는 일말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윤재한테 제일 친한 친구는 준석이 너잖아. 그치?”
기분 좋으라고 해준 것 같은 정심의 말을 듣고 도리어 쓴 기분을 느끼고 있는 준석은 혹시나 수영에 대해 아느냐며 이어진 몇 가지 질문에 잘 모른다고 솔직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한 번 제대로 만나서 얘기해야겠네...”
모처럼 숫기 없는 아들이 친구를 데려왔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는 정심의 모습을 얼마간 말없이 지켜보던 준석은 잠시 후 적당한 타이밍에 돌아온 윤재의 이모-은심을 확인하고 그쯤에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가려고?”
“네. <민들레>에 좀 들렀다가 가려고요.”
“그래... 아직 식사도 안 했을 텐데 많이 배고프겠다. 가면 윤재한테 먹고 싶은 거 만들어달라고 얘기해.”
“네. 어머니. 또 올게요. 그동안 꾸준히 건강 챙기시고요.”
“그래. 준석아. 오늘 와줘서 고맙다. 나중에 또 보자.”
마지막까지도 정중한 태도를 유지한 채 병실을 빠져나온 준석은 먼저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분 전에 떠오른 화제로 인해 단숨에 식욕이 사라진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그의 목적지는 변경되지 않았다.
지금쯤 바쁘게 일하고 있을 윤재의 모습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린 준석은 곧 멈춰져 있던 다리를 움직여 텅 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뚜벅이는 그의 단단한 구두 굽 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
평소답지 않게 제법 많은 행인들이 오가는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선 뒤 눈에 익은 가게 앞에 차를 멈춰 세운 준석은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이리로 직행했음에도 중간의 몇몇 구간에서 정체를 겪은 탓에 그 사이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굴을 덮쳐온 바람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준석은 늘 그렇듯 습관대로 <민들레>의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던 중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험악한 목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졌는지 주변을 지나던 몇몇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어느 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끄러운데 싸울 거면 다른 데 가서 좀 싸우지.’
주택가 부근인 만큼 귀가하던 취객끼리 시비가 붙은 것인 모양이라고 대충 짐작 하고 몸을 돌리려던 준석이 잠시 후 예상치 못하게 들려온 목소리를 캐치하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엄연히 상도란 게 있는 건데 진짜 이런 식으로까지 해서 지저분하게 장사할 거예요, 아저씨?!”
준석이 평소 들은 적 없던 날카로운 말투로 내뱉어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틀림없는 성호였다. 어째서 한창 영업 중인 시간에 가게 안이 아닌 가게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느끼면서도 일단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긴 준석은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진 뒤 시야에 들어온 두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 곧바로 미간을 좁혔다. 주변의 구경꾼들 사이에서 거의 주먹다짐 직전의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며 대치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은 역시나 준석의 짐작대로 성호가 맞았다.
“어린놈의 자식이 어디서 함부로 눈을 치켜뜨고 지랄이야?”
“그러게 나이 먹었으면 나잇값을 해요, 아저씨!”
“뭐? 나잇값? 이 새끼가 진짜...!”
아무래도 곧 몸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상황을 인식한 준석이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을 지나쳐 급하게 성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뒤에서 다가온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성호는 뒤에 나타난 사람이 다름 아닌 든든한 아군임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반색했다.
“준석 형님!”
“뭐야, 지금? 무슨 일이야?”
일단 상황부터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준석이 묻자 마주한 남자를 손끝으로 가리킨 성호가 울분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성토하기 시작했다.
“이 아저씨, 지금 저 앞에 새로 오픈한 가게 사람인데요. 저 가게가 오픈 이래로 오늘까지도 계속 행사를 하고 있거든요? 그 탓에 안 그래도 우리 가게가 엄청 타격을 입고 있는데 아까 보니까 우리 가게로 오는 손님들을 중간에 부르더니 뭐라고 구슬려서 자기네 가게로 데려가는 거예요, 글쎄. 제가 본 것만 세 번이니까 안 본 동안엔 더 많이 데려갔겠죠!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다지만 기본적인 상도도 안 지키고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뭐? 돈에 눈이 멀어!? 듣자듣자 하니까 이 자식이 진짜...! 억울하면 너도 행사해서 우리 손님 데려가 보던가! 가게 꼴 보니 그럴 돈이나 있는지 모르겠다만 경쟁 사회에서 경쟁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그렇다고 남의 가게 들어가는 손님까지 꼬드겨서 가로채요?!”
“가로 채긴 뭘 가로채?! 그 손님 니네 거라고 맡아놓기라도 했어-?!”
또다시 격화되는 분위기에 일단 중간으로 나서서 한 번 상황을 진정시킨 준석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데에는 새로 오픈한 라이벌 가게의 점원이 <민들레>로 향하는 손님을 중간에서 가로챈 것이 발단이 된 듯 했다. 이건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분명 새로 오픈한 <머꼬머꼬> 측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둘 중 누구도 물러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팽팽한 상황에서 싸움 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는 사람들을 스치듯 한 번 둘러본 준석은 일단 먼저 발단을 제공한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행사하는 것까지는 자유입니다만 남의 가게 손님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건 누가 봐도 옳은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점잖은 말투로 자신을 공격해오는 준석을 향해 곧바로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인 <머꼬머꼬> 측의 직원이 보란 듯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댁은 또 뭐야? 뭔데 중간에 나서?”
다짜고짜 반말부터 해오는 개념 없는 직원을 바라보는 준석의 눈이 일시에 매섭게 변했지만, 가능하면 이 정도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는 그는 목까지 차오른 거친 말들을 다시 눌러 가라앉혔다. 일이 커지게 되면 결국 양측 다 가게 운영에 차질을 빚게 될 거라는 냉정한 생각이 그의 감정을 제어해주고 있었다. 물론 상대측 가게가 망하든 말든 그건 준석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사실은 망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그로 인해 상대뿐 아니라 덩달아 <민들레>까지 손해를 입게 된다면 결코 그와 같은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다.
“내가 아까도 말했잖아, 꼬우면 당신들도 그렇게 하라고! 누가 못하게 손 묶어두기라도 했어? 아니면 우리가 뭐 범죄라도 저질렀냐고?”
이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가식적으로나마 미안한 시늉을 할만도 한데 오히려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상황에서 지는 꼴을 보이기 싫다는 오기가 작동한 것인지 <머꼬머꼬>측의 직원은 끝까지 뻔뻔한 태도를 고수했다. 이 정도면 차라리 먼저 자신을 때려달라고 대놓고 도발하는 수준이었다.
중재에 나선 입장에서 자신이 흥분해선 안 된다고 준석이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는 사이 조금 전 들은 발언으로 인해 한층 더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의 성호가 <머꼬머꼬>측 직원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래, 어디 서로 죽어보자 이거지?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야! 우리도 가만히는 안 있을 거니까! 알았어?!”
더는 존칭어를 써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성호가 반말을 사용하자 자신보다 적어도 열 다섯 살은 아래로 보이는 상대로부터 반말을 들었다는 사실에 격한 분노를 느낀 직원이 곧바로 팔을 뻗어 성호의 멱살을 쥐었다. 그에 당연하게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생각이 없는 성호 역시 직원의 멱살을 맞잡자 좀 전까지 고요하던 주변이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말로 해, 성호야. 그쪽 아저씨도 손 놓으세요. 다 큰 어른들이 이게 뭡니까? 애들도 보고 있는데.”
몸싸움이 벌어지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중간에 나선 준석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서로에 대한 악감정이 깊어진 두 사람은 상대의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이대로 몇 마디만 오가면 곧바로 주먹질이 시작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였다.
“성호야, 그만해!”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준석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있는 윤재의 모습을 확인하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장 유리창 너머로 <민들레> 안에 몇몇 손님이 자리하고 있는 게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윤재는 손님이 있는 가게를 비워두고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혼자서 열심히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을 그로서도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상황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음이 분명했다.
성호의 곁으로 다가온 뒤에야 뒤늦게 옆에 서있는 준석의 존재를 알아차린 윤재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자 곧장 그의 곁으로 다가간 준석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너 손님은 어떻게 하고?”
“서빙은 다 끝난 상태라서 급하게 잠깐 나왔어.”
대답을 끝내기 무섭게 멱살을 쥐고 있는 두 사람의 곁으로 바짝 다가간 윤재가 성호의 팔을 잡고서 말했다.
“아직 가게 안에 일도 많이 남았는데 일단 이 손 놓고 들어가자.”
“사장님, 이 아저씨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완전 배 째라에요. 앞으로도 계속 손님 빼 갈 거니까 억울하면 니들도 똑같이 하래요.”
성호의 말을 듣고 미간을 좁힌 윤재가 바로 앞에 서있는 <머꼬머꼬>측 직원을 쳐다보았다. 처음 <머꼬머꼬>가 문을 연 뒤 하루하루 불안한 기분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입장에서 애초에 좋은 감정으로는 대할 수 없는 상대는 조금 전 성호의 말을 들은 뒤 더욱 좋지 않은 감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윤재라고 해도 상대가 이 정도로 뻔뻔하게 나온다면 역시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가게에 손님이 많은 것 같은데 굳이 다른 가게에 들어가려는 손님까지 중간에서 채가야겠어요? 장사도 좋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좀 지켜주세요.”
평소 듣기 어려운 윤재의 딱딱한 말투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성호가 그 사이 중간에 나서서 양측의 손을 풀어내는 준석의 행동에 따라 손에서 힘을 빼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일단 성호가 먼저 멱살을 풀자 마지못해 자신도 성호의 멱살에서 손을 뗀 <머꼬머꼬>측 직원은 그러나 사과 없이 오히려 잔뜩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예의니 상도니 따지는 것도 우습지 않아? 그렇게 다 따져가면서 장사하면 뭐 남겠어?”
“보아하니 사장님은 아니신 것 같은데 당신이 중간에 이렇게 막무가내 식으로 행동하면 결과적으로 가게와 주인에게 오히려 폐가 될 겁니다.”
“뭐야, 댁이 지금 우리 가게랑 사장님 걱정까지 해주는 거야? 근데 그거라면 걱정 안 해도 돼. 나도 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 받고 하는 거니까.”
직원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힌 윤재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준석을 쳐다보고서 말했다.
“준석아, 미안한데 가게 들어가서 잠깐 좀 봐줄래?”
갑작스런 윤재의 부탁을 받은 준석이 곧바로 되물었다.
“넌 뭐 하려고?”
“직접 가서 가게 주인 좀 만나보려고.”
짧게 대답한 윤재가 걸음을 옮기자 곧이어 그를 뒤따라 나선 준석보다 한 템포 앞서 몸을 움직인 <머꼬머꼬>측 직원이 뒤에서 윤재의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팔을 붙잡혀 뒤를 돌아다본 윤재가 ‘얘기는 여기서 나랑 해.’라고 말하는 직원의 손에서 팔을 빼내려 힘을 쓴 것과 동시에 도리어 한층 강해진 힘이 그의 팔을 꽉 죄어왔다.
“우리 가게 사장님이 댁 만나줄 만큼 한가하신 분인 줄 알아? 당신 가게야 손님 없어서 한가하겠지만 우리 가게는 지금도 손님으로 가득 차 있다고!”
“그렇게 장사도 잘 되는데 왜 남의 가게 손님들까지 빼 가는 겁니까?!”
“장사치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손님 끄는 거야 당연한 거 아냐? 행사비로 나가는 돈만 해도 엄청난데 조금이라도 더 채워 넣어야 할 거 아니야?”
자신이야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당당한 태도로 말한 직원이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윤재를 완력으로 끌어당긴 순간, 갑자기 앞에서 뻗어온 커다란 손이 그의 멱살을 거칠게 쥐어왔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란 표정을 지은 직원의 앞에 서있는 건 다름 아닌 좀 전까지 차분하게 중재를 위해 노력했던 준석이었다.
“보자보자 하니까 장사 한 번 더럽게 하네. 진짜.”
“뭐라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 준석을 잠시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던 직원이 주변의 웅성거림을 듣고 곧바로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준석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거 안 놔?!”
“안 놓으면 어쩔 건데 이 병신 새끼야.”
“뭐? 아니 이 새끼가...!”
결국 먼저 흥분한 직원이 날린 주먹이 준석의 턱을 스치고 지나간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 사이엔 본격적으로 주먹이 오가기 시작했다.
“준석아!”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윤재가 싸움을 말리기 위해 가운데로 나서려하자 뒤에 서있던 성호가 위험하다며 그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과연 당당한 태도로 나올 만큼 소싯적에 싸움 좀 해본 것 같은 직원과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운동신경을 갖추고 있는 준석이 얼마의 시간에 걸쳐 거의 대등한 정도로 주먹과 발을 교환하는 사이 주변엔 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중간 중간 험한 욕설이 들려왔지만 그것은 모두 흥분한 <머꼬머꼬>측 직원이 내뱉은 것으로, 준석은 입을 다문 채 상대를 공격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주먹질이 오가고 있는 상황에서 혹시나 누군가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 할지 모른다는 우려에 더는 상황을 참고 볼 수가 없어진 윤재가 급하게 성호를 돌아보고 말했다.
“가서 같이 좀 말리자! 준석이 내일도 회사에 가야하는데 다치면 안 돼!”
“하지만...”
살벌하게 맞붙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성호가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 못한 채 망설이자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한 윤재가 직접 불편한 걸음을 옮겨 준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준석아, 이제 됐어, 그만해!”
“넌 가까이 오지 말고 빨리 가게로 돌아가!”
다가오는 윤재를 스치듯 쳐다본 준석이 평소 들을 수 없는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미 한바탕 싸움을 치른 그의 입술이 찢어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 덤벼오고 있는 상대의 얼굴 역시 비슷한 상태였다.
“성호야!”
다시 한 번 윤재의 부름이 이어진 뒤에야 다리를 움직인 성호가 잠시 떨어진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가 직원을 붙잡자 그 사이 윤재가 준석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운 건 시간상으론 불과 몇 분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과격한 주먹질과 발길질이 오간 탓에 양측의 얼굴에는 긁힌 상처며 멍이며 보기 흉한 싸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전달받고 가게 밖으로 나온 <머꼬머꼬>의 사장은 주변에 몰려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윤재에게 먼저 짧게 사과를 한 뒤 이후 손님을 가로채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전해왔다.
비록 구두약속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일의 발단이 된 문제가 간신히 해결이 된 후 가게로 돌아온 윤재는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손님들을 먼저 크게 한 번 둘러보고서 뒤따라 들어온 준석을 불러 주방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도록 했다.
남아 있던 손님들이 하나 둘씩 계산을 마치고 나간 뒤 급격히 한산해진 가게 안은 아직 남아 있는 일부의 손님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소리만으로 간간이 채워지고 있었다.
“입술 찢어졌잖아. 이마에도 상처 생겼고... 너 내일 회사 가야하는데 어쩔 거야?”
“.......”
대답 없이 윤재의 손에서 낚아채듯 연고를 빼앗은 준석이 성호가 가져다 준 손거울에 얼굴을 비춰보고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좀 전까지 잔뜩 격앙되어 있었던 그는 싸움이 흐지부지 끝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쪽 사장과 얘기할 때까지만이라도 좀 참고 있지 그랬어.”
책망이라기보다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윤재의 말을 듣고 여전히 침묵을 지킨 준석이 연고를 푹푹 짜서 상처 난 부위에 바르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다쳐도 연고 같은 건 따로 바르지 않아온 준석이었지만 조금 전 윤재의 말대로 내일 당장 회사에 출근을 해야 하는 입장을 생각하면 동료들로부터 귀찮은 말들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상처가 아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 나이 먹고 욱해서 주먹질이라니... 대체 뭘 하는 건지...’
중반까지만 해도 점잖게 성호를 말리던 입장에서 졸지에 사고를 친 당사자가 되어버린 준석이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망가진 얼굴을 보고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제 와 냉정해진 머리로 생각하면 윤재의 말대로 그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보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까 전 준석이 눈에 담았던 상황은 그로 인해 그와 같은 냉정한 생각을 떠올릴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었다.
뻔뻔한 얼굴을 한 남자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윤재를 조롱하듯 억지로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본 순간 준석은 마치 머릿속의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이후에 나간 행동은 그야말로 순수한 충동에 의한 것이었다.
그 결과 얼굴과 주먹엔 흉한 흔적이 남았지만 오히려 마음은 한층 후련해졌다. 최근 동안 줄곧 머릿속에 품고 있던 여러 가지 생각들에 의한 스트레스가 아까 전 한바탕 크게 날뛰며 에너지를 쏟아내는 통에 조금은 해소된 것인지도 몰랐다.
“잠깐, 그렇게 대충 바르면 어떡해.”
“어차피 잘난 것도 없는 얼굴인데 대충 좀 바르면 어때.”
“잘난 거 없어도 얼굴은 중요한 건데 상처 남으면 안 되잖아. 봐, 여기는 아예 덩어리로 남아 있잖아.”
“그렇다고 또 잘난 거 없다고 그렇게 바로 인정 하냐. 섭섭하게. 너도 참 알고 보면 은근히 가차 없는 놈이라니까.”
그렇게 말하고 피식 작게 웃음소리를 낸 준석이 보다 못해 직접 자신의 얼굴 위로 뻗어온 윤재의 손을 붙잡았다.
“됐어. 내가 할게.”
“가만히 있어 봐. 나 때문에 다친 건데 흉 오래 가면 보는 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아서 그래.”
“뭘 또 너 때문에 다친 거야? 그냥 나 혼자 흥분해서 난리 친 거지. 만지면 아프니까 이건 그냥 놔두고 가서 밥이나 가져다 줘. 나 아직까지 저녁도 못 먹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윤재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태연하게 화제를 바꾼 준석은 그쯤에서 손을 거둔 윤재가 주방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근처에 앉아 있는 성호에게 시선을 옮겼다.
“혼자 해결하기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연락 해. 윤재는 가능하면 밖으로 나오지 않게 하고.”
“...네.”
“오늘 일이 있으니까 당분간은 조용하겠지만 만약 저쪽에서 또 지저분한 짓 하면 꼭 연락해.”
아까 전 단호한 태도를 취하던 윤재를 보면 그가 어련히 나서서 할까 싶으면서도 혹시나 몸싸움으로 번지는 상황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마음 놓고 두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가 없는 준석이었다. 남들의 눈엔 이와 같은 자신의 행동이 그저 다 큰 남자를 감싸고도는 과보호로 비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윤재를 볼 때마다 늘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는 느낌을 받고 있는 그는 앞으로도 자신은 친구든 그 외에 뭐가 되든 지금처럼 늘 윤재의 가장 가까운 곁을 지켜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며칠을 꼬박 생각했던 끝에 나온 가장 명확한 결론이었다.
한바탕 힘을 쓴 탓에 기력이 떨어진 상태의 준석은 아까 병원을 나선 뒤 윤재에게 반드시 던지겠다고 머릿속에 두고 있던 질문을 일단은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이런 이야기는 좀 더 진지한 분위기에서 단 둘이 있을 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아무래도 더러운 기분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아까 저녁에 성호랑 먹었던 부대찌개 데운 거야. 밑반찬도 가져올게.”
갓 지었는지 윤기가 자르르 도는 하얀 쌀밥과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다시 주방으로 향하는 윤재의 모습을 슬쩍 쳐다본 준석이 고개를 돌려 냄비 속을 쳐다보았다.
국물이 잘 스며들도록 얇게 잘라진 스팸 햄과 송이버섯, 프랑크 소시지와 김치 등의 건더기가 풍성하게 들어 있는 진한 붉은색 국물이 기막힌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시각과 후각의 동시 공격에 더는 허기를 참아내지 못하고 밥부터 크게 한 숟가락을 떠먹은 준석은 곧바로 국물을 떠서 입으로 옮겼다.
‘와.’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윤재의 부대찌개는 역시나 준석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정말로 끝내주는 맛이었다.
어느 샌가 늦은 저녁 식사에 몰두한 준석은 입을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마저 까맣게 잊은 채 수저를 움직이고 있었다.
*
“저, 그럼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래. 수고했어. 조심히 들어가.”
늘 그렇듯 성호가 먼저 가게를 나서는 것을 지켜본 뒤 주방으로 들어가 가스 점검 및 냉장고 안 재료들의 양과 상태를 체크한 윤재는 영업이 끝나자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을 느끼고 천천히 눈가를 매만졌다. 오늘은 특히나 떠들썩한 사건이 중간에 일어났던 탓에 마지막 뒷정리까지 끝내고 가게 밖으로 나온 윤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극도의 피로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읏차-하는 소리를 내며 최후의 힘을 짜내 셔터 문을 내린 윤재가 자물쇠를 채우기 위해 무릎을 구부리고 앉으려다 문득 뒤에서 들려온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대다수의 가게가 문을 닫은 한산한 새벽 시간인 터라 쾅-하고 닫힌 차문에 이어 들려온 누군가의 발소리가 제법 크게 주변을 울리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귀가한 누군가가 집으려 돌아가는 중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윤재는 그와 같은 예상과 달리 점점 가깝게 들려오는 발소리에서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 서둘러 자물쇠를 채운 뒤 몸을 일으켰다. 가능한 빨리 자리를 떠나려 다리에 힘을 실은 그는 어느 샌가 거리를 좁혀 다가와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무심코 움직임을 멈췄다.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에 반쯤 드러난 얼굴은 이전에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만남으로.
“늦은 새벽까지 수고가 많네.”
최대한으로 동요한 티를 내지 않은 윤재가 아무런 대꾸 없이 그대로 곁을 스쳐 지나려하자 위협하듯 넓은 어깨로 그의 앞을 막아선 남자가 쓴웃음을 머금고서 말했다.
“얘기 좀 하지?”
“할 말 없어요.”
“그럼 듣기라도 해.”
대놓고 대화를 거부하려 하는 윤재의 태도에 짜증 섞인 표정을 지은 남자-해준이 끝내 고집스럽게 곁을 스쳐지나가는 윤재를 돌아보고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간까지 기다린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지.”
“.......”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말이야... 당신 어머니, 소중한 아들이 남자 좆에 뚫려서 앙앙댄다는 거 알고는 계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돌려오는 윤재를 바라본 해준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차에 타. 집까지 바래다줄게. 가는 길에 조용히 둘이서 얘기 좀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