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이야- 오랜만에 본다. 이준석. 그동안 잘 지냈어?”
“나야 뭐 그냥 그렇게 지냈지. 넌 어때? 딸 태어나고 나니까 행복해서 죽겠지?”
“행복은 무슨, 이제부터 뼈 빠지게 돈 벌어서 키울 생각 하니까 눈앞이 깜깜하지.”
말과 다르게 싱글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는 성훈을 향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준석이 잠시 후 점원이 가져다준 맥주를 컵에 따라 차례로 성훈과 자신의 앞에 놓았다.
준석이 성훈과 만나는 것은 근 반 년만의 일이었다. 결혼한 뒤로 총각 시절 그렇게나 좋아했던 술자리에 전혀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성훈은 얼마 전 딸이 태어난 뒤에야 모처럼 직접 친구들을 모아 거창한 술자리를 마련했었는데 그것이 반 년 전의 일이었다.
준석이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인 성훈은 얼마 전 2년여에 걸쳐 잘 다니던 회사를 갑자기 그만 둔 뒤로 치킨 집을 열어 운영하고 있었다. 본인은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죽을 맛이라고 통화를 할 때마다 볼멘 하소연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얼마 전 그의 가게에 놀러 갔던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럭저럭 당장 망하지 않을 정도의 손님은 오가고 있는 듯 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친구들을 불러놓고 시원하게 돈을 쓰던 성훈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리 길지 않은 세월 사이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는 생각이 드는 준석이었다. 당시만 해도 설마 평소 그렇게 술과 친구를 좋아하던 성훈이 몇 년 뒤 가정에 충실한 애 아빠가 되어 밤낮으로 닭을 튀기게 될 거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사람의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준석이 너 안 본 사이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일이 많아?”
성훈의 질문을 받은 준석이 과일안주가 담긴 접시로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일이야 늘 많지.”
“일만 하면 무슨 재미로 사냐. 적당히 해. 어차피 지금 회사에 뼈를 묻을 것도 아니잖아.”
좋아하는 표고버섯 전을 우적우적 씹으며 그렇게 말한 성훈이 문득 표정을 바꾸고 말을 이었다.
“근데 너 지금도 솔로야? 그 사이 여자 친구 새로 안 생겼어? 전에 사귀던 여친이랑 헤어지고 꽤 오래 지났잖아.”
성훈의 질문을 받고 무심코 쓴웃음을 머금은 준석이 토끼모양으로 다듬어져 있는 사과에 포크를 찔러 넣었다. 이곳의 직원도 나름 신경을 써서 깎아놓은 듯 했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윤재가 만든 토끼 쪽이 훨씬 완성도가 높았다.
“일이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없다.”
“에이- 시간이야 만들면 되는 거지. 내가 한 명 소개시켜줘?”
묘하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성훈을 슬쩍 한 번 쳐다본 준석이 입에 넣은 사과를 아삭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성훈의 말대로 굳이 연애를 하겠다면 시간이야 만들면 되는 거겠지만, 현재의 준석은 구태여 그 시간을 만들고 싶은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만약 정말 연애할 생각만 있다면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지금쯤 충분히 연애를 시작하고도 남았을 그였다. 그에게 그 정도의 능력은 있었다.
“먼저 결혼한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하는데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 놔라. 나중에 결혼하고 나면 총각 때 연애 실컷 못 한 거 다 후회로 남는다.”
“그래서... 지금 후회하고 있는 거야?”
문득 진지해진 준석의 질문을 받은 성훈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라고 슬쩍 한 발 물러섰다. 당장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몇 초 사이 그의 얼굴엔 달달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성훈의 아내인 소은을 준석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는 정도가 아니라 꽤나 친하게 지내온 친구 관계였다. 대학 시절 같은 학과를 전공하며 다 함께 알게 된 준석과 성훈, 소은 세 사람은 1년 전 성훈과 소은이 결혼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평등한 친구의 관계를 유지했었다. 물론 당시에 소은과 성훈은 각각 다른 연인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준석은 설마 평범한 친구로만 보였던 두 사람이 몇 년 뒤 부부의 연을 맺게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소은이랑은 요즘에도 잘 지내나 보네.”
문득 들려온 준석의 말에 고개를 든 성훈이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야 천생연분이니까. 근데 소은이가 요즘 애 보느라 나한텐 아예 신경도 안 쓴다. 여자들은 아기 낳고 나면 남편은 뒷전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봐. 그래서 좀 서럽다 요즘.”
장난스레 울적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이내 다시 웃음을 머금고서 비어있는 잔을 채워 입으로 가져간 성훈이 ‘그런데 너, 언제부터 소은이를 여자로 본 거야?’라는 준석의 질문을 받고 슬쩍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잠시 후 짧게 기억을 떠올린 끝에 답을 찾아낸 그가 손에 든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대답했다.
“4년 전쯤이었나... 소은이가 사귀던 애인한테 차이고 엄청 힘들어 했잖아. 그 때 같이 술 마시면서 위로해 주는데 엉엉 우는 걸 보니까 너무 안쓰럽더라고. 그러다가 자꾸 생각이 나고... 뭐, 그렇게 된 거지.”
아무래도 연민이 사랑이 된 케이스인 듯 했다. 그런 경우라면 이전에 몇 번 목격한 적이 있지만 성훈과 소은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는 준석의 입장에선 역시 조금은 신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잠시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준석이 그러던 중 문득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준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새부터인가 줄곧 평범한 친구라고 여겼던 상대에게 우정이 아닌 다른 감정을 품게 된 건.
성훈 커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와 같은 감정을 품게 된 상대가 이성이 아닌 동성이라는 점뿐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그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네가 그 마음을 솔직하게 전했을 때 소은이 반응은 어땠어?”
이성인 소은과 동성인 윤재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한 번 질문을 던져 본 준석은 당시의 상황이 또렷이 기억나는지 확연히 진지해진 표정을 짓고 있는 성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 자식이 무슨 미친 소릴 하나...하는 얼굴로 한참동안 날 쳐다보더라.”
“.......”
“소은이는 그 때도 여전히 날 편한 친구로만 생각했었어. 내 앞에서 실컷 술주정 다 부리고 토하는 것까지도 다 보여줬었잖아. 헤어진 애인 얼굴 보고 싶다고 울며 진상도 피우고...”
마치 아주 오래 전의 일인 것처럼 깊은 표정으로 회상을 하며 그렇게 말한 성훈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그러니까 사실 그런 반응이 당연한 거였지.”
“.......”
“.......”
“그러면 넌... 만약 소은이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냥 친구로 남아 있을 생각이었어?”
이어진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성훈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답을 꺼내놓았다.
“모르겠어. 아니, 솔직히 친구로 남고 싶지는 않았어. 그 말을 꺼내는 이상 예전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러니까 만약 소은이가 끝까지 날 남자로 볼 수 없다고 했다면 지금 우린 떨어져서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었겠지.”
성훈의 솔직한 대답을 들은 준석은 당장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친구였던 두 사람이 부부가 된 사실에 은연중 자신과 윤재를 대입해 생각해 보기도 했던 그는 나름 비장하기까지 했던 성훈의 각오를 전해 듣고 한층 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것을 얻거나, 혹은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잃게 되거나.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너무나도 큰 도전이었다.
조금 전 성훈은 그대로 영원히 헤어져서 끝이 나는 상황도 감수하고 고백을 감행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과거의 일이라 담담하게 말하고 있을 뿐인 건지 몰라도 어쨌든 당시의 성훈에겐 너무도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을 만한 상황이었을 것이 틀림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그것이 적어도 준석이 처해 있는 것보다는 여러모로 나은 상황이었던 건 분명했다.
일단 소은은 여자였고, 그녀는 무척이나 활달한 성격으로 꼭 성훈이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친구들을 곁에 두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준석은 윤재를 잃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고백이 곧 윤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을 수 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선택지를 고를 만큼 비정하지 못했다.
윤재가 고백을 받아준다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 될 터였다. 부족한 잠에서 깨어 회사에 출근하고 또 꼬박 야근으로 밤을 새는 피곤한 상태에서마저 행복감에 콧노래를 흥얼거릴 터였고, 심지어는 상한 음식을 먹는대도 웃는 얼굴로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해피엔딩을 생각하면 한 시라도 빨리 그렇게 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자신의 고백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은 상황에서 그 낮은 확률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지 모를 만큼 준석은 어리석지 않았다.
차라리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눈 딱 감고 고백을 해버리고 싶었다. 나는 너를 결코 순수한 친구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고.
사실은 그랬다. 윤재를 더 이상 친구로 볼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준석은 태어나 처음으로 동성애와 관련 지식을 찾아 남자끼리의 섹스에 대한 공부도 진지하게 했었다. 당시에도 고백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었는데 어째서였을까, 마치 금방이라도 윤재와 그런 걸 하게 될 날이 올 것처럼 묘하게 들떠서 남자들끼리의 섹스 동영상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이제껏 여자와 사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만큼 게이 동영상에 나오는 적나라한 행위를 받아들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상대가 윤재라고 상상하면 혐오감은 자연스레 흥분으로 바뀌었고 그와 같은 상황은 준석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순간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만들어 주었었다.
윤재를 안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몰랐다. 분명 현실이 아님에도 평소의 생각이 영향을 미친 탓인지 꿈속에서조차 윤재는 자신의 고백을 한사코 거절하고 거부했다. 그러던 중 달아나는 윤재를 붙잡아 억지로 바닥에 눕히고 사나운 짐승처럼 그의 안에 침입하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준석은 아래로 손을 뻗어 한창 발기되어 있는 상태의 자신을 확인한 순간 스스로에게 견딜 수 없을 만큼의 혐오감을 느꼈었다. 결국 그 꿈에 대한 후유증으로 인해 이후 얼마간은 일부러 윤재와의 만남을 피하기도 했던 그는 그 후 제법 긴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그 날의 ‘추악한 꿈’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 윤재를 범하는 꿈을 꾼 건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지금도 준석은 윤재를 볼 때마다 종종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게 될 때가 있었다.
윤재에게서 거절을 당한다면 자신은 그를 보내줄 수 있을까. 조금 전 성훈이 말했던 것과 같이 자신 역시 어긋난 상태에서 윤재와 다시 친구로 돌아갈 자신은 없는 준석이었다. 이미 균열이 생겨버린 유리구슬을 원래의 매끈한 상태로는 되돌릴 수 없듯이 고백이 있은 뒤의 윤재와 자신이 결코 예전의 편안한 사이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준석은 잘 알고 있었다. 윤재는 애써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노력하겠지만 결국 그와 같은 노력은 준석에게 있어 그저 슬픔이자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는 없었다.
친구로 남아서 평생을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마음속에 무거운 짐을 하나 지고 있는 채로 살아가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윤재의 가장 가까운 곁을 오랫동안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준석은 생각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다정한 친구의 얼굴을 유지해 왔었다. 윤재가 힘들 때면 언제라도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기 위해서 그는 지금까지 스스로를 억누르고 속이는 일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 들여왔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준석은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윤재의 집에서 우수영이라는 남자와 마주쳤던 그 날, 준석은 자신이 윤재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자리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넌 소은이랑 다시 못 만나게 된대도 상관없었어?”
한동안 안주도 없이 술만 조용히 넘기던 준석이 문득 그렇게 질문을 던져오자 일순 의아한 표정을 지은 성훈이 곧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관이 없지는 않았지. 그래도 인간은 어떻게 되든 결국 상황에 적응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으니까 차이면 차이는 대로 혼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성훈의 대답을 들은 준석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참고를 위해 몇 번이나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들었음에도 결국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성훈이 고백 전 각오했듯이 자신도 더 이상 윤재를 보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경우를 각오할 수 있을까.
윤재에게서 가장 편안한 휴식처를 빼앗아버린 상태로 정작 자신은 다른 누군가와 새롭게 만나 연애를 하며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살 수 있을까.
은연중 윤재를 떠올리며 슬픔이나 아픔,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저 빛바랜 과거처럼 덤덤하게 가슴 한 구석에 묻어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
혹시라도 지나는 길에서 절뚝거리며 걷는 사람을 보고 윤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늘 그렇듯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을 머릿속 한 구석으로 밀어낸 준석은 이 이상 모처럼 만의 만남에서 심각한 분위기를 이어가지 않도록 자신 쪽에서 먼저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예진이라고 했지? 지금 참 예쁘겠네.”
“우리 공주님? 그럼~ 엄청나게 예쁘지. 날 안 닮고 소은이를 닮아서 얼마나 예쁜지 몰라.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크면 미인이 될 거라고 다 같이 입을 모아 얘기하더라. 지금도 이목구비가 또렷한데 나중에 크면 얼마나 더 예뻐질지 상상만 해도 흐뭇한 거 있지. 나중에 남자들 등 뒤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거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된다니까.”
귀여운 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함박웃음을 머금고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딸 자랑에 나선 성훈에게 미소로 가볍게 대꾸해준 준석은 비어있는 성훈의 잔을 먼저 채워준 뒤 이어 새롭게 채운 자신의 잔을 들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
3월 중순.
느릿하게나마 조금씩 계절이 변화를 거치고 있는 것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꽁꽁 얼려버릴 것처럼 사납던 바람의 위세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 목에서 머플러를 풀어내면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의 추위는 남아 있었지만, 한동안 행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빙판이 사라진 이후 단 한 번도 눈이 내리지 않고 있는 걸로 보아 이제 두어 번의 비가 내린 뒤엔 곧바로 봄이 찾아올 듯 했다.
며칠 사이 서늘한 수준으로 변한 바람을 맞으며 집 근처의 슈퍼마켓에 도착한 윤재는 곧바로 필요한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코너로 향했다. 늘 그렇듯 그리 넓지 않은 규모의 마켓 안은 토요일 오후임에도 평일과 다름없이 한산했다.
‘라벤더보다는 코튼앤크림 향이 좋은데... 다 팔렸나...’
세탁용 세제와 섬유유연제, 치약과 샴푸를 가장 교체가 시급한 순서대로 골라 바구니에 담아 넣은 윤재는 이왕 슈퍼에 들른 김에 간식거리도 같이 사기 위해 과자들이 진열되어 있는 코너로 이동했다.
텅 비어 있는 다른 곳과 달리 과자 및 라면 등의 식료품이 진열되어 있는 코너엔 몇 명의 손님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었다. 안주로 쓸 과자를 고르려는 것인지 소주만으로 채워진 바구니를 들고 있는 대머리 아저씨가 다른 손님들 틈에서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로 진열된 과자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제 막 대머리 아저씨의 곁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간 윤재도 진열되어 있는 많은 종류의 과자들을 차례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평소 군것질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씩 식욕이 없을 때면 과자와 주스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그는 언제라도 내키면 먹을 수 있도록 항시 주방 한켠에는 여분의 과자를 따로 보관해두고 있었다. 덧붙여 가끔씩 주말에 찾아오는 준석에게 대접할 겸도 해서.
좋아하는 몇 가지 종류의 과자를 차례로 골라 바구니에 집어넣던 윤재가 문득 옆에서 들려온 툭-하는 작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좁은 틈을 비집고 지나던 아가씨의 손이 닿는 바람에 진열대에 놓여있던 과자 봉지 중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며 난 소리였다. 슥 한 번 뒤를 돌아본 아가씨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과자를 발견하고도 그대로 무심히 몸을 돌려 과자 코너를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휑해진 자리에 홀로 남겨진 윤재가 계산대로 향하고 있는 여자를 대신해 떨어진 과자를 집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천성적으로도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그는 <민들레>를 운영한 뒤 부쩍 주변을 정리정돈을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살 것을 모두 담은 바구니를 들고 계산대로 향한 윤재가 잔돈을 거슬러 받는 것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슈퍼마켓 입구로 향하려던 중간 문득 뒤에서 들려온 주인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는 잘 계셔?”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온 주인아저씨는 윤재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이곳 가게를 운영해온 사람으로, 그간 수없이 이곳을 드나들었던 윤재 모자와는 기본적인 친분을 쌓아오고 있는 상대였다. 평소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동네에서 그다지 좋은 얘기는 듣지 못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타고난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며칠 전에 수술을 받으셔서 지금 병원에 계세요.”
“수술은 잘 됐어?”
“몇 가지 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결과가 나오겠지만 수술 자체는 나쁘지 않게 진행 됐다고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래? 그거 참 다행이네.”
“네.”
그쯤에서 돌아서려던 윤재가 또다시 이어진 부름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돌아보는 윤재를 향해 스치듯 미소를 지어 보인 주인아저씨가 슬쩍 가게 안을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윤재는 결혼 생각 없어?”
갑작스런 질문을 받았음에도 이미 오지랖 넓은 몇몇 주변 사람들로 인해 어느 정도 결혼 얘기에 익숙해져 있는 윤재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지금은요.”
“왜? 이제 슬슬 자리 잡을 나이잖아.”
“일단 가게 일이 워낙 바빠서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여유 자체가 없어요. 또 아직 결혼이 급한 정도의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래. 뭐, 아직 나이로는 급할 게 없긴 하지. 그래도 이왕이면 빨리 가정을 이루고 정착하는 게 여러모로 안정적이긴 하거든. 내 주변 사람들을 봐도 말이야.”
주인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또다시 ‘중매이야기인가.’하는 생각을 한 윤재가 잠시 후 그의 예상대로, 그러나 동시에 조금은 예상을 벗어난 질문을 받고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저기, 윤재는 국제결혼에 편견 같은 거 없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하는 의문이 담겨 있는 윤재의 표정을 잠시 눈으로 살피던 주인아저씨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사실 내 친구가 이번에 베트남 아가씨랑 결혼을 했는데 말이야, 그 아가씨의 여동생도 한국 사람이랑 결혼하길 원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내가 사진으로 보니까 참 참하게 생겼던데 친구 말 들으니까 실제로도 착하다고 하더라고. 친구가 주변에 괜찮은 총각 있으면 중매 좀 서보라고 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까 윤재 네가 제일 먼저 생각나지 뭐야.”
주인아저씨의 입에서 결혼 얘기가 나온 시점에서 이미 그가 자신에게 하려는 말이 뭔지를 짐작하고 있었던 윤재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아까 전 전했던 말을 반복했다.
“저는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지금으로선 전혀 결혼 생각이 없어요.”
“그래,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어차피 인연이란 만드는 거니까 직접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인연이 아니다 싶으면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내면 되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고.”
“생각해 주신 건 고맙습니다만 이 일은 사양하겠습니다.”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에이- 아깝네. 두 사람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쉬워하는 아저씨를 등 뒤에 남기고 몸을 돌려 슈퍼마켓을 빠져나온 윤재가 정면으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채워 올렸다. 묵직한 짐이 담긴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든 채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는 조금 전 슈퍼 주인아저씨에게서 들었던 말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째서 아저씨가 중매의 대상으로 자신을 선택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있는 윤재였다. 당장 자신 또래의 미혼 아들을 둘이나 두고 있는 아저씨가 어째서 그 참하다는 베트남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이할 생각은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면 결코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깨끗이 거절한 상황에서 구태여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윤재는 조금 전 들었던 말을 곧바로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가게를 운영한 뒤로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날이 많아 심신이 모두 지쳐있는 상태의 그에겐 당장 쓸데없는 일에까지 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며칠 정도 휴일을 내서 쉬는 게 나을까. 성호에게도 휴가 좀 주고...’
얼마 전 모친의 수술이 끝난 것과 동시에 그동안의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것을 느끼고 있는 윤재는 요 몇 달 자신이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일에만 매진해왔다는 것을 뒤늦게야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당장 일과 관련된 것을 빼놓고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은 너무도 적었다. 기껏해야 휴일 날 그림을 그렸던 것과 간혹 친구들과 만났던 일들 정도... 그것을 제외하고 비교적 또렷이 윤재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수영과의 일뿐이었다.
몇 개월 전 우연히 수영과 재회를 했을 당시만 해도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다가서려는 노력을 기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윤재였다. 그 날의 재회가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될 거라고 틀림없이 믿었던 그로서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이 상황이 여전히 온전한 현실로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포기할 생각 없으니까.’
-‘그래서 앞으로 필요한 만큼 더 시간을 가질 거야. 그게 얼마가 되던 그렇게 할 거야. 난 그럴 각오를 하고 있어.’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던 수영의 얼굴을 잠시 동안 가만히 머릿속에 떠올리던 윤재가 문득 울리기 시작한 익숙한 벨소리를 듣고서 점퍼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 찍혀 있는 건 모르는 번호였다.
의아함을 품은 채 잠시 동안 그대로 손에 들려 있는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고 있던 윤재가 일단 통화버튼을 누르고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여보세요.”
[나야.]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과 동시에 윤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뜻밖에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영으로, 뒤늦게 얼마 전 그에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던 사실을 떠올린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어쩐 일이에요?”
[올 거면 미리 연락부터 하고 오라고 했잖아. 그래서 건 거야.]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 윤재의 발이 제자리에 멈췄다.
“오늘... 오려고요?”
[응.]
“안 돼요, 오늘은. 병원에 가야 해요.”
[그래? 그럼 더 잘 됐네. 안 그래도 어머니 수술했다는 얘기 듣고서 너랑 같이 문병 가고 싶었는데. 아직 출발한 거 아니지?]
“잠깐만요, 오늘은 정말 안 돼요.”
[왜? 어머니한테 날 소개하는 게 부담 돼서?]
정곡을 찔린 윤재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곧 수영의 말이 이어졌다.
[걱정하지 않아도 거기 가서 이상한 소리는 안 해. 널 달라고 폭탄 선언할 생각도 없어.]
수영의 목소리가 신기할 정도로 다정한 톤을 띠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통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정말로 수영인지를 두고 윤재가 진지한 의구심을 품고 있는 사이 수화기 너머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한 수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른 뜻은 없어. 그냥... 너희 어머니시잖아. 수술을 잘 받으셨는지 직접 뵙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목소리였다.
사실은 수영이 어째서 이제 와 새삼 자신의 모친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인지 윤재는 이해하고 있었다. 얼마 전 수영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던 말로 인해.
-‘그냥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게 실체로 보이니까, 네가 아버지 옆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사진으로 직접 보고 나니까 그 뒤부터 더 이상은 그 과거의 일이 예전처럼 그냥 남의 일처럼 쉽게 넘겨지지가 않게 됐어. 아버지와 나란히 찍힌 사진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던 네가 그 소중한 사람을 잃고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짐작할 수 있게 되고 나니까.’
그 말이 거짓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기적일망정 수영이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해가며 연기할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윤재는 알고 있었다. 그건 짐작이 아닌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그런 의미’로 자신을 보고 있는 수영을 떳떳하게 모친에게 소개하는 것에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는 윤재가 끝내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문득 수화기너머에서 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청바지에 검정색 패딩 점퍼 입고 있지?]
들려온 말의 의미를 인식한 것과 동시에 재빨리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본 윤재가 저 멀리에서 다가오고 있는 고급 승용차 한 대를 발견하고 시선을 고정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건 예상대로 수영이었다.
정확히 자신의 앞에서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수영을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본 윤재가 곧바로 현실로 돌아와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사촌 누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오는 길에 너한테 전화 건 거야. 예식장이 근처였거든.”
대답을 들은 뒤에야 어째서 수영이 굳이 휴일 오후에까지 깔끔한 수트 차림을 한 채로 지금 이 자리에 와있는 것인지를 이해한 윤재는 이제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모친과 수영은 이전에 <민들레>에서 한 차례 만난 적이 있는 만큼 기억력이 좋은 모친이라면 수영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얌전한 성격상 친구를 많이 두고 있지 않은 아들이 가끔씩 새로운 친구를 데려올 때마다 눈에 띠게 기뻐하던 모친을 생각하면 순수하게 수영의 방문 자체가 모친에게 좋은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윤재였다.
물론 수영이 철저하게 친구의 역할을 수행해주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미리 연락하고 오라고 한 건 서로 약속을 정하고 만나자는 얘기에요.”
“알아.”
“별로 아는 것 같지 않은데요.”
“알고 있어. 일단 알고는. 그래도 네가 정 불편하다면 다음부터는 제대로 약속부터 정하고 올게. 대신 너도 무작정 거절하거나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약속’이라는 명확한 단어에 조금 곤란한 기분이 든 윤재가 즉답을 내놓는 대신 적당히 말을 돌렸다.
“이것 좀 집에 옮기고 올게요. 옷도 좀 갈아입어야 하니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알겠다고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운전석에 오르는 수영을 쳐다본 윤재가 곧바로 다리를 움직였다. 집은 여기서 1분 거리이니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데에 길게 잡아도 10분이면 충분했다.
마침 부근을 스쳐 지나던 이웃과 짧게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선 윤재는 자신의 앞으로 온 우편물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었다. 평소대로 일단 장을 봐온 물품들부터 각각의 자리에 놓아둔 뒤 방으로 들어선 그는 줄곧 걸치고 있던 점퍼를 벗어 벽에 걸어놓고 곧바로 옷장 문을 열어 나란히 걸려 있는 옷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몇 종류 없는 외투 가운데에서 적당한 두께의 재킷을 골라 옷장 밖으로 꺼낸 윤재는 재킷을 걸치기 전 먼저 입고 있던 옷들도 새롭게 갈아입었다. 사실은 새롭다고 해봐야 벌써 몇 년에 걸쳐 쭉 입어온 옷들이었지만 평소 사적인 외출이 많지 않은 그는 시간적으로 오래 된 옷들도 비교적 새 옷처럼 깨끗하게 사용해 오고 있었다.
몇 가지 외출복으로 입을 만한 코디를 떠올린 끝에 슬림한 인디고 블루 청바지 위에 연노랑 색 스웨터를 입은 윤재가 조금 늘어나 있는 소매를 걷어붙이던 중 문득 들려온 핸드폰 벨소리를 듣고 벽에 걸려 있는 점퍼로 손을 뻗었다. 혹시 빨리 내려오라는 수영의 독촉 전화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낸 그는 뜻밖에 액정에 찍혀 있는 ‘이모’라는 글자를 확인하고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이모?”
[그래, 지금 어디니?]
“지금 집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이제 곧 병원에 가려고 준비 중인...”
[윤재야, 엄마가 상태가 좀 안 좋아져서 방금 수술실에 들어갔어. 지금 좀 와줄래?]
걱정에 잠긴 목소리가 전해온 말을 듣고서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윤재가 일단 곧 가겠다는 대답을 한 뒤 전화를 끊고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얼마 전 수술을 받았던 모친에게서 아직까지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던 상황에 내심 안도하고 있었던 윤재로선 조금 전 들려온 이모의 말이 너무도 당혹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모의 목소리에서 정도를 벗어난 다급함이나 심각성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서 유일한 위안이 되고 있었지만, 정확히 자신의 눈으로 상황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속단할 수 없었다.
건물 앞에 대기하고 있는 차량을 확인하고 달리듯 다가간 윤재가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옆에 앉아 있는 수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xx병원이에요, 지금 출발해요!”
아까 전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와 달리 눈에 띠게 서두르는 기색이 느껴지는 윤재를 조금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 수영이 희미하게 미간을 좁히고서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병원에 빨리 가봐야겠어요! 어머니 상태가 안 좋아지신 것 같아요!”
윤재의 대답을 듣고 표정을 굳힌 수영이 그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