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41화 (41/66)

41.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서점의 한 켠에 자리를 잡은 채 책장에 꽂힌 책의 제목을 차례로 눈으로 훑어보던 윤재가 문득 손을 뻗어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지금 막 그의 손에서 꺼내 펼쳐진 책의 제목은 ‘대장암을 극복하는 식습관’이었다.

현재 대장암 3기 상태에 있는 모친이 얼마 뒤 큰 수술을 받게 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나흘 전 이모로부터 전해들은 윤재는 하루하루 수술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모친에 대한 생각을 하는 횟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그간 가게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병원을 찾지 못했던 터라 모친을 떠올릴 때마다 늘 마음 한켠이 무거웠었던 그는 얼마 전 찾았던 병원에서 이번에 수술이 잘 되면 경과를 봐서 퇴원도 가능하다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난 뒤 일단은 크게 한 시름을 놓은 상태였다. 물론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퇴원하는 순간까지도 결코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겠지만, 최근 주치의로부터 모친의 몸 상태와 관련해 전달 받았던 이야기들은 몇 개월 전 당시 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희망적이어서 윤재의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냥 아예 사버리는 게 나을까...’

처음엔 몇 가지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요리법만 추려서 보려고 했던 윤재는 짧게 고민을 한 끝에 지금 손에 들려 있는 두꺼운 책을 아예 구매하기로 했다. 인터넷을 찾아서 배우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일일이 검색해서 찾는 것보다는 상세한 설명에 이어 친절하게 요리과정의 사진까지 붙여져 있는 책을 한 권 가지고 있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하에서였다.

평소 스스로를 돌보는 데에 인색한 모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윤재는 부족하게나마 자신이라도 옆에서 모친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삶에 매진하느라 하나 남은 가족을 크게 신경 쓰지 못하는 삶을 살아온 그도 모친의 건강에 직접적인 이상이 생긴 뒤부터는 조금은 제대로 된 아들노릇을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거, 고른 거야?”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어느 샌가 곁으로 다가와 있는 수영을 확인하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식사를 마친 뒤 인근의 백화점에 들른 두 사람은 사야 할 책이 있다는 수영의 말에 따라 현재 백화점 안의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맡은 프로젝트와 관련된 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수영은 서점 내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필요한 책들을 모두 골랐는지 약 30여 분 만에 윤재가 다시 만난 그의 손엔 조금 복잡한 제목의 책들이 수북이 쌓인 채 들려져 있었다. 개중에는 영문 서적도 몇 권 포함되어 있었다.

“더 고를 거 있어?”

“아뇨. 일단 이 책 한 권만 사면 될 것 같아요.”

윤재의 손에 들려 있는 책 제목을 스치듯 눈에 담은 수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 패스트푸드점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에 윤재로부터 모친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전해 들었던 그는 현재의 윤재가 그 일로 인해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행히 상태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말에 조금은 안도의 기분이 느껴지긴 했지만 자신이 아는 지인들 중에 호전되고 있는 상태에서 수술을 받은 뒤 뜻밖에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케이스를 본 적이 있는 수영은 수술 후에도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구태여 그 비관적인 사례를 윤재의 앞에 꺼내놓지는 않았지만.

윤재와 나란히 각자의 계산을 마치고 서점을 나선 수영은 책이 잔뜩 들어 있는 묵직한 종이가방을 한손에 든 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말이라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백화점 안은 다소 과한 난방과 사람들의 열기가 합쳐져 만들어진 텁텁한 공기로 인해 숨을 쉬는 게 괴로울 지경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사람 많은 것을 굳이 싫어하지는 않지만 주변 공기에는 다소 민감한 수영으로선 그다지 오래 있고 싶은 상태의 실내 환경은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샀으니 이제 한 시라도 빨리 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더운 백화점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수영은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응당 보여야 할 남자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멈췄다. 곧바로 몸을 돌린 그의 시야에 멀지 않은 위치에 서있는 윤재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하철역과 이어지는 넓은 구역을 빌려 펼쳐진 가판대에 놓여 있는 각종 주방 용품들이 지나가는 주부들을 시선을 끌어 모으고 있는 가운데 윤재도 자리에 멈춰 서서 어느 한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살 거 있어?”

윤재의 곁으로 다가간 수영이 슬쩍 근처의 가판대를 훑어보며 묻자 잠시 신중한 태도로 바로 앞에 매달려 있는 냄비를 만지던 윤재가 대답했다.

“지금 가게에서 쓰고 있는 냄비와 프라이팬이 좀 많이 닳아 있어서요. 시장에서 새로 사려고 했는데 거기보다는 여기 있는 물건들이 훨씬 좋은 거예요. 마침 세일도 하고 있고...”

원가대로라면 결코 손이 가지 않을 물건들이었지만 특집 세일전이라는 타이틀에 맞춰 60퍼센트 가격 선에서 판매되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쉽게는 지나쳐지지 않는 윤재였다. 하루에도 수많은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직업의 특성 상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주방용품을 선택하는데 까다로워진 그는 더 나은 조리 환경을 위해서 기존에 쓰던 것보다는 좀 더 좋은 품질의 물건을 갖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보고 갈래? 보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사고.”

“...시간 괜찮아요?”

“어차피 다른 약속 없어. 오늘은.”

수영의 제안에 잠시 동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인 윤재가 한창 주부들로 북적거리는 곳을 비집고 들어가 새로 바꾸어야할 품목들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60퍼센트 세일이라고 해도 평소 사용해오던 것들과 비교하면 비싸긴 하지만 기존보다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이었다.

“이거 더 큰 사이즈 냄비는 없어요?”

“그게 제일 큰 거예요.”

“이거 바닥 진짜 안 긁히나요?”

“험하게 사용하거나 오래 쓰면 살짝은 벗겨질 수 있지만 조심히만 사용하시면 안 긁힙니다.”

“조금만 더 깎아주시면 안 되나요?”

“아이고, 아주머니. 60프로만 해도 엄청난 건데 거기서 어떻게 더 깎아드려요? 우리도 먹고 살아야죠.”

여기저기서 판매자와 구매자들 간의 질의와 응답이 들려오는 사이 평소 주방에서 자주 사용하는 크기의 프라이팬과 양푼을 차례로 골라 바구니에 담은 윤재는 이어 다음 코너로 자리를 옮겨 마찬가지로 자주 사용하는 크기의 냄비를 발견하고 곧바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윤재가 선점한 냄비의 손잡이를 거의 동시에 누군가가 붙잡았다.

“저, 제가 먼저 잡았는데요.”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냄비인 걸 확인한 윤재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뒤늦게 손잡이를 붙잡은 아주머니가 바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난 내가 먼저 잡은 거 같은데? 일단 놔 봐요. 내가 먼저 보고 아니면 다시 드릴 테니까.”

얼굴만 허옇게 뜰 정도로 진한 화장을 한 아주머니가 냄비 손잡이를 쥔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자 윤재가 ‘제가 먼저 잡았으니 먼저 보겠습니다.’라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라면 쉽게 양보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하필 그가 들고 있는 건 여기 있는 종류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크기의 품목이라 벌써 나머지는 다 팔리고 간신히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귀한 냄비였다.

“아니, 젊은 사람이 좀 양보하지 그래?”

“죄송합니다. 저도 가게에 꼭 필요해서요.”

일과 관련해서는 제법 고집스런 면이 있는 윤재가 물러서지 않고 말하자 그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하게 변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냄비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문득 뒤에서 뻗어온 누군가의 손이 냄비의 한 면을 붙잡았다.

‘!’

갑작스런 상황에 옆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중간에 난입해 들어온 사람이 다름 아닌 수영인 것을 확인하고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아까 제가 보니 이쪽 남자 분이 먼저 집으신 거 같던데요.”

들려온 말을 통해 수영이 지금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위치를 내세워 슬쩍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연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아차린 윤재가 다시 아주머니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니, 그래도...”

잘생긴 남자의 등장에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바뀐 아주머니가 뭔가 반론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다시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제3자의 등장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리기 시작한 것이 아무래도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수영이 지금 눈앞의 아주머니를 상대로 특별히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가 의도한 바든 아니든 그는 이런 평범한 일상의 상황에서마저도 상대로 하여금 대적하고 싶지 않은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존재였다.

잠시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어쩔 수 없이 줄곧 고집스럽게 냄비 손잡이를 붙잡고 있던 손을 거둔 아주머니는 마지막으로 윤재를 흘깃 쳐다본 뒤 먼저 골라 바구니에 담아둔 것들을 계산하기 위해 멀찍이 떨어진 계산대로 향했다.

“다 골랐어?”

저렴한 가격에 좋은 품질의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처음 계획보다 많은 물건을 골라 바구니에 담은 윤재가 수영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많이 낡은 상태로 사용했던 주방용품들이 일시에 싹 좋은 물건들로 교체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조금은 들뜨는 기분이 들고 있는 그는 그러던 중간 문득 자신이 꽤나 이쪽 일에 몰입해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굳이 이 일이 아니더라도 예전에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도 책상이나 컴퓨터가 새롭게 바뀔 때면 일의 효율이 부쩍 오르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긴 했던 그였다.

“다 골랐으면 줘. 내 거 계산하는 김에 같이 하게.”

갑작스런 수영의 말에 윤재가 재빨리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말했지만 이미 한 발 앞서 윤재의 바구니를 빼앗아 계산대 앞으로 간 수영이 태연하게 지갑 안에서 꺼낸 카드를 캐셔에게 건네고 있었다. 조금 전 그는 ‘자신의 것을 계산하는 김에’라고 말했지만 실제 그가 고른 것은 작은 주전자 하나가 전부였다.

“오늘 저녁 식사에 쓰려고 했던 돈이 굳었잖아. 여기에라도 쓰게 해줘.”

“아뇨, 제가 가게에서 쓸 거잖아요. 제가 계산하고 싶어요.”

“내가 자주 가는 가게잖아. 전에 맛있는 반찬도 얻어먹었고. 그냥 내가 앞으로 더 좋은 음식 먹고 싶어서 투자하는 거라고 여겨줘.”

“이런 거 사주지 않으셔도 좋은 음식 대접해드릴 수 있어요.”

“이대로 집에 가면 난 미안해서 잠도 못 잘 거야.”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수영의 강직한 태도에 잠시 고민을 하던 윤재가 혹시나 싸움이 났나 싶어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빠르게 둘러본 뒤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점원이 부른 액수는 십칠만 원 정도로 남한테 떠넘기기에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지만, 조금 전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을 지금까지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듯한 수영이 이렇게라도 조금이나마 미안함의 표시를 하고 싶어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윤재는 이쯤에서 마지못해 수영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윤재의 인사를 받은 것과 동시에 슥 한 번 그를 쳐다본 수영이 무거운 주방용품이 가득 담겨 있는 커다란 비닐봉투를 들고서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것인 만큼 당연히 자신이 들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뻗어온 윤재의 손에 무거운 냄비가 든 비닐봉투 대신 아까 전 서점에서 사온 책이 든 종이가방을 건넨 그는 이번에야 말로 정말 주차된 차로 향하기 시작했다.

“지금에서야 말인데 전에 네가 준 반찬들 맛있게 잘 먹었어.”

갑작스런 말을 듣고 자연스레 옆에 선 수영에게 시선을 던진 윤재가 짧은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그냥 기본적인 거예요. 그 정도는 누구나 조금만 신경 쓰면 다 만들 수 있어요.”

“글쎄... 분명 어려워 보이진 않는데 그래도 네가 만든 건 뭔가 다른 것 같아. 평소 여기저기 외식을 하며 다른 밑반찬들도 많이 먹어봤는데 별로 입에 맞는 걸 못 찾았어. 그냥 네 요리가 내 입맛에 잘 맞나봐.”

“.......”

“근데 너무 빨리 다 먹어버려서...”

“.......”

“.......”

“혹시... 지금 또 만들어 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윤재의 진지한 질문에 잠시 텀을 두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수영이 ‘또 부탁해도 돼?’라고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수영의 질문을 받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윤재는 이제 막 백화점 입구의 문이 열린 것과 동시에 들어온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는 순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뺨에 닿아온 물기가 기분 탓은 아니었는지 새까만 하늘에서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혹시나 책이 젖을까 싶어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입구 부분을 접은 채로 품에 안은 윤재는 수영과 나란히 비로 젖은 거리를 조금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

결국 간단히 저녁만을 먹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던 윤재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건 저녁 아홉 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서였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가도 되지?”

무거운 주방용품을 집까지 옮겨다주는 수고를 한 수영이 그렇게 묻자 윤재가 ‘잠시만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계세요.’라고 대답한 뒤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평소 습관대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환기를 시키기 위해 윤재가 반쯤 열어둔 베란다 창문 틈으로 아직까지도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는 빗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는 대신 재킷만을 벗어 소파에 내려놓은 수영은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베란다 가까이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베란다 앞에 놓인 테이블 가까이로.

‘새로 그린 건가...’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놓여 있던 윤재의 스케치북을 집어 든 수영이 가장 최근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그림을 훑어보았다. 이것이 첫 장인 것으로 보아 이전에 쓰던 스케치북은 마지막 장까지 다 사용한 모양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 보이는 그림은 정물화였다. 양푼에 가득 담겨져 있는 양파가 주인공이 되는. 채색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단순한 스케치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지만 양파의 껍질을 표현한 섬세한 터치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문득 그림을 그리는 윤재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수영이 흘깃 주방 쪽을 쳐다보았다.

주전자가 올려져 있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가만히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는 윤재는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미동조차 없었다. 마치 그 자체가 멈춰진 시간의 일부가 된 것처럼.

마침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김에 지금 시야에 들어오는 윤재의 모습을 그림으로 한 번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수영이 손에 든 스케치북을 한 장 넘긴 뒤 근처의 테이블에 놓여 있는 연필을 집어 들었다. 이어 그는 곧바로 망설임 없이 연필을 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그리고 있는 것은 오직 윤재 한 사람만으로, 그의 주변을 이루고 있는 배경은 깨끗이 제외되고 있었다.

연필을 움직이면서도 수영은 지금의 자신이 어딘가 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머리털이 난 이래 스스로가 나서서 그림 같은 걸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그 결과 제대로 마음을 먹고 그림을 그렸던 것도 고등학교 미술 시간이 마지막이었다. 그나마도 미술 교사가 만만한 타입의 여선생으로 바뀌었을 땐 대놓고 수업 자체를 빼먹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연필을 쥐고 뭔가를 그리고 있는 지금의 이 상황은 확실히 과거의 그를 아는 자가 보면 절로 눈이 휘둥그레질 법한 희한한 상황임에 틀림없었다.

그림 자체를 그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지금 눈에 보이는 윤재를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손을 움직이던 수영은 잠시 후 주전자 안의 물이 끓기 시작하자 그제야 현실로 돌아와 문득 이쪽으로 시선을 던져온 윤재와 짧게 눈을 맞추었다.

처음엔 수영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윤재가 잠시 후 수영의 손에 연필이 쥐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단 뜨거운 물을 부은 잔을 쟁반에 담아 들고 거실로 나온 윤재가 먼저 근처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서 수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뭘 쓴 거예요?”

“그냥. 기다리는 동안 심심해서 널 한 번 그려봤어.”

“!”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윤재의 시선이 자연스레 수영이 들고 있는 스케치북으로 옮겨졌다. 당연히 그림이 아닌 글을 쓰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윤재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봐도 되요?”

조심스런 윤재의 질문에 수영이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건넸다.

손바닥에 남아 있는 물기를 바지에 대충 닦아낸 뒤 수영의 손에서 스케치북을 건네받은 윤재는 펼쳐져 있는 페이지에 그려진 그림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일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가까스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내지 못한 윤재가 잘게 어깨를 떨며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굉장한 그림이었다.

모델은 분명 자신인 듯 한데도 그림 속에 있는 얼굴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많이 과장되어 있는 커다란 눈은 중심으로 몰려 있었고, 코는 길었으며 입은 앞으로 튀어 나와 있었다. 덧붙여 인체비례를 깡그리 무시한 몸의 어깨 부분은 로봇처럼 각이 져 있었다. 결론적으로 전체적인 얼굴의 느낌이 사람들이 흔히 머릿속에 떠올리는 ‘모기’ 혹은 ‘두더지’의 이미지와 매우 흡사했다.

이제껏 자신의 얼굴이 특별히 잘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그럭저럭 단정한 느낌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온 윤재는 지금 막 수영이 표현해낸 자신의 모습에 조금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물론 받은 충격은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실제로 그가 손에 들린 그림을 보고 떠올린 건 대부분이 그저 너무나 우습고 재미있다는 긍정적인 방향의 생각이었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잔웃음을 흘리는 윤재를 지켜보던 수영이 근처에 던져 놓았던 재킷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뒤 문이 열려 있는 베란다 앞으로 다가갔다. 입구 근처의 벽에 등을 기댄 채 길게 한 차례 연기를 내뱉은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웃으면 상처 받아.”

“아... 크...흑... 죄송...큿...해....요...”

중간에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사과를 하는 윤재를 바라보다 열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한 차례 연기를 내뱉은 수영이 이내 자신도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별로 윤재를 웃기겠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린 건 아니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결과적으로 무모한 도전을 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이것으로 자신의 미술적 재능이 전무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긴 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 실기점수가 거의 바닥이었어. 수학이나 과학에서 실컷 점수 올려놔도 미술이나 음악에서 평균을 많이 까먹었지.”

그 말대로였다. 집안 내력인지 부친이나 형과 마찬가지로 이과 쪽 두뇌가 발달한 수영은 안타깝게도 예술적인 재능은 그다지 없었다. 어차피 평범한 삶을 사는 데에 있어 그림을 못 그린다고 것이 흠이 될 일은 없으니 별로 상관없다고 쿨하게 넘겨오긴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그림을 본 친구들이 대놓고 웃을 때면 솔직히 조금은 기분이 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일까, 윤재의 잘 그린 그림을 볼 때마다 수영은 감탄과 동시에 문득 머릿속 한켠으로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조용히 떠올리곤 했다.

“음악도 잘 못했나요?”

간신히 웃음기를 잠재운 목소리로 윤재가 묻자 수영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냥 과목 자체에 흥미를 못 가졌다고 할까. 악보 읽는 것도 짜증났고 작곡가 이름 외우는 것도 귀찮았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가 억지로 피아노랑 바이올린 교습을 시켰는데 그때 기억이 좋지 않아서 더 싫어진 것 같기도 해.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음악시간에 차례가 되서 노래를 불렀다가 같은 반 놈한테 엄청 못 부른다는 얘기 듣고 그 자식이랑 대판 크게 싸운 기억도 있어.”

수영의 말하는 목소리는 매우 좋아서 그가 노래를 하면 분명 멋질 것 같다는 얘길 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실제로 그들 가운데서 수영의 노래를 직접 들은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회식 차 직장 상사 및 동료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더라도 끝까지 상황을 잘 넘겨 마이크를 잡지 않았던 그였다.

맡은 일마다 늘 최고의 결과를 내고 있는 만큼 굳이 노래방에서 딸랑거리는 짓은 하지 않더라도 위에서 태클이 내려올 위험성은 없다는 것이 수영으로 하여금 그같이 당당한 태도를 취하게 만들고 있었다. 뒤에서 뻣뻣하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인간들도 더러 있겠지만 별로 상관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아직도 손에 들려 있는 그림을 보며 피식거리는 웃음소리를 내고 있는 윤재를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수영이 짧아진 담배꽁초를 베란다 너머로 던져버리고 다시 소파 근처로 다가가 옆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잔을 들었다.

윤재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이런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때때로 이런 웃긴 역할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수영이었다.

잠시 그 상태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수영이 문득 진지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취해서 여기에 데려다 준 그 날... 내 멋대로 책장에 꽂혀 있던 네 앨범을 꺼내서 봤어.”

갑작스런 수영의 말에 줄곧 윤재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엷은 웃음기가 일시에 사라졌다.

윤재의 미소를 좀 더 보고 싶은 바람을 눌러가며 수영이 갑자기 진지한 이야기를 꺼낸 건 그 날 앨범을 본 뒤로 계속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던 생각을 이 기회에 윤재에게 제대로 전하고 싶어서였다.

“서있지 말고 좀 앉아.”

자신의 말을 듣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 이윽고 싸구려 카펫이 깔려 있는 거실 바닥에 천천히 엉덩이를 내려놓는 윤재를 바라보던 수영이 손에 든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느새 식어 미지근하게 변해있는 커피 몇 모금을 목 안으로 넘긴 그는 얌전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윤재를 바라본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허락 없이 본 거에 대해선 일단 먼저 사과할게.”

“......”

“어쨌든 그래서 그 날... 지금 이 자리에서 앨범을 봤어. 아주 어릴 적에 홀딱 벗고 찍은 사진도 봤고 친구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사진도 봤어. 나와 처음 만났던 당시의 네가 찍혀 있는 사진도. 그걸 차례대로 보면서 이런저런 많은 생각이 들었어.”

“.......”

“예전의 너는 잘 웃는 아이였던 것 같아. 그때도 활발한 인상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지금과는 많이 달라 보였어. 그래서 언제부터 웃음이 그렇게 사라진 걸까 하는 생각으로 다시 사진을 거꾸로 따라가서 보니까 그게 보이더라.”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수영과 말없이 시선을 마주하던 윤재가 잠시 후 이어진 말에 무심코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의 일, 정말로 유감이야. 그 때의 일과 관련해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분명하게 사과하고 싶어. 진심이야.”

“.......”

“.......”

“...어째서... 지금...”

“사실은 지금도 그래. 누구의 가족이 안 좋은 일을 당했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아. 솔직히 말해서 너의 아버지의 일도 내겐 바로 와 닿는 게 없었어. 당시에도 그랬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달라진 게 없었지. 그런 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러니까 아마도 필요했다면 앞으로도 쭉 거기에 맞게 연기를 했을 거야. 이게 솔직한 얘기야.”

냉정한 수영의 고백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떨군 윤재가 다시 이어지는 말을 귀에 담았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이 집에 들러 네 앨범을 보는 내내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어. 그냥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게 실체로 보이니까, 네가 아버지 옆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사진으로 직접 보고 나니까 그 뒤부터 더 이상은 그 과거의 일이 예전처럼 그냥 남의 일처럼 쉽게 넘겨지지가 않게 됐어. 아버지와 나란히 찍힌 사진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던 네가 그 소중한 사람을 잃고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짐작할 수 있게 되고 나니까.”

진지하게 이어지는 수영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던 윤재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랫동안 억지로 머릿속에서 지워두려 했던 일이 순식간에 처음부터 되살아나자 그의 눈가는 곧 붉어졌다.

이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억지로 살을 꿰어 봉합해두고 있었을 뿐 안의 상처는 아문 것이 아니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윤재를 지켜보고 있는 수영 역시 가슴의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실컷 울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자신의 앞에서 끝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윤재의 모습이 지금 수영에겐 더 아프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문득 침묵을 깨고서 윤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보일러 수리하는 일을 하셨는데 아주 성실하신 분이셨어요.”

한참 만에 입을 연 윤재는 경직된 얼굴 위로 애써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부친의 죽음 이후 그와 관련된 기억을 억지로 가슴에 묻어두고 있었던 그는 아직 한창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서 말을 이어갔다.

“외아들인 저를 많이 예뻐하셔서 일을 쉬는 날이면 저랑 같이 놀아주셨죠.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자리보다도 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주고 싶어 하셨어요. 평소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셨는데 저한테도 늘 그렇게 말씀하셨죠. 잠시만 눈을 감고 화를 삭이면 곧 바람은 지나간다고요. 아주 오래 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한테 크게 사기를 당하신 적이 있는데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로 그때 아버지가 죽으려고 하셨었대요. 아마도 그 때 이후로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 오신 것 같아요.”

“.......”

“아버지는... 뺑소니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새벽녘 차에 치어 방치된 채로 발견되셨죠. 나중에 범인이 붙잡혔지만 보험금 몇 푼 받은 거 외에 나아진 건 아무 것도 없었어요. 마음에도 없는 말뿐인 사과를 반복하면서 실제로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던 눈앞의 그 남자를 그때는 정말로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고개 숙인 채 의식적으로 억누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윤재가 문득 가까이로 다가오는 수영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소파에 앉아 있던 수영이 어느 샌가 윤재와 마주한 위치의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어제의 일처럼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

“그러면... 나와의 일도 전부 다 기억하고 있어?”

“!”

“내가 너한테 못할 짓 한 것도?”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듣고 무심코 숨을 멈춘 윤재가 마주한 수영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드리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가 다 잊었다고 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면 죄책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너한테 미움을 받는 것보다 너한테서 잊혀진 과거의 인간으로 남는 게 난 더 견딜 수 없어.”

잔뜩 감정이 실려 있는 수영의 말을 들은 윤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로 하여금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남자가 정말 우수영이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만큼 조금 전 들려온 말은 너무도 솔직하고 거침이 없었다. 평소에도 수영이 거짓말을 하거나 에둘러 말을 하는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코 자신이 가진 패의 전부를 펼쳐 보여주지는 않았던 그였다.

대답을 기다리는 수영에게서 시선을 거둬낸 윤재가 잠시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잊었다고 했다. 수영에게도 자신 스스로에게도. 이제 모두 잊었으니 아무렇지 않다고.

그러나 사실 윤재는 알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만을 봉인한 채 그 사이에 억지로 두터운 벽 하나를 세워두고 있었을 뿐 정말로 그 기억들이, 당시 느꼈던 감정들이 전부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수영과의 짧았던 만남도 필사적으로 묻어두려 노력했다는 것을.

수영과의 아픈 이별보다도 더 간절히 지우고 싶어 했던 건 그와 공유했던 행복했던 시간에 대한 기억들이었다. 다시 손에 넣지 못할 그 짧지만 행복한 순간들을 윤재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떻게든 깨끗이 지워내고 싶었다. 혹시라도 그 때를 그리워하며 상실감에 스스로가 무너지게 될까봐,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두 사람 사이에서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동안 대신해서 좁은 거실을 채우고 있는 건 베란다 너머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빗소리였다.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겨울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행인의 발소리가 뜸한 조용한 밤 골목을 적시고 있었다.

잠시 동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윤재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마주친 시선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사이에도 수영이 줄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적거리는 빗소리를 배경으로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영을 얼마 동안 가만히 마주 바라보던 윤재가 간신히 마음의 정리를 끝내고서 솔직한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딩동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려온 초인종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현관 쪽으로 향했다.

오후라면 늘 출퇴근하듯 이곳을 찾는 종교관련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아홉시를 훌쩍 넘긴 밤 시간이었다. 나흘 전 통화에서 이모가 며칠 내에 한 번 집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챙겨가겠다고 했던 것을 뒤늦게 머릿속에 떠올린 윤재는 다시 한 번 초인종 소리가 반복된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나야.”

곧바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를 인식한 순간 윤재의 얼굴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그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수영과 짧게 시선을 마주한 뒤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