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40화 (40/66)

40.

“자네 가게는 늘 호황이군. 이러다간 술 한 잔 마시겠다고 줄을 서야겠어.”

“다 사장님 덕분입니다.”

“겸손하기는. 자네처럼 성실한 젊은이를 보면 나도 많이 배운다네. 열심히 뛰어다니던 과거의 일들도 떠오르고 말일세.”

이어지는 칭찬에 쑥스럽다는 듯 엷은 미소를 머금은 호연이 문득 들려온 노크 소리에 따라 슬쩍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과일안주와 이곳에서 가장 비싼 양주병을 차례로 테이블에 내려놓은 유민이 곧바로 의식적으로 낮춘 목소리로 호연에게 해준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했다.

“복도 끝 방으로 안내한 뒤에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줘. 술과 안주 준비해주고.”

“네.”

짧게 대답하고 문을 나서는 유민의 모습을 잠시 눈으로 쫓던 호연이 슬쩍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약속대로 해준과 만나고 있어야 했지만 조금 전 뜻밖에 중요한 지인이 찾아온 탓에 그와의 만남은 자연스레 뒤로 미뤄지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호연이 마주하고 앉아 있는 상대는 몇 년 전 호연이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친척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윤사장이라고 불리는 중년의 남자로, 한때 부동산과 관련된 거물 중 한 명으로 손꼽혔던 그는 현재 대한민국 전역에 대형 음식점 여러 곳을 운영하고 있는 준 재벌급의 큰손이었다. 사업 초기 몇 차례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을 인연으로 호연은 지금까지도 가끔씩 이곳을 찾는 윤사장과 만날 때마다 진지하게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보통이었다면 지금도 마찬가지로 한창 사무적인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겠지만 이미 선약이 있는 호연의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오늘 윤사장이 이곳을 찾은 것은 다른 약속상대와 만나기 위해서였고, 그런 이유로 호연은 그 상대가 올 때까지만 적당히 윤사장과 시간을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불과 2개월 전에도 가게 확장 건과 관련해 도움을 받았던 만큼 비록 솔직하게 즐겁지는 않더라도 그 중요한 지인에게 잠시간의 대화상대가 되어주는 것 정도는 호연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다.

“전에 철우가 그러더군. 호연이 자네가 그렇게 예의가 바르다고 말이야. 처음 봤을 땐 외모만 번듯한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게 윗사람을 공경하는 법을 안 다고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 중간에서 소개해준 입장에서 괜히 나까지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졌지 뭔가.”

“그런... 과찬이십니다. 박사장님과 만나서 저도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오히려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중간에 나서주신 윤사장님께도요.”

“하하. 어디 내가 뭐 한 게 있나. 나중에 철우까지 셋이 한 자리에 만나서 즐겁게 술자리나 한 번 갖자고.”

“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려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에도 호연은 마음속으로 윤사장의 약속 상대가 빨리 나타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앞으로도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은 중요한 상대인 만큼 적당히 대해서 안 된다는 생각 하에 평소보다 많은 신경을 기울여 윤사장을 접대하고 있는 그는 지금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애써 짜증스런 기분을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이미 충분히 사회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그에게 있어서도 일방적으로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누군가를 상대하는 건 정신적으로 고된 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불편한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기다리던 노크 소리가 들려온 뒤 이윽고 잘 차려 입은 옷차림의 중년 남자가 넓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눈에도 윤사장의 약속 상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중후한 인상의 남자는 윤사장 못지않은 뚱뚱한 체격을 하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중간에 필요한 게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또 보세.”

마지막까지도 정중한 태도를 유지한 채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호연은 얼마 동안 억지로 만들어낸 미소를 짓느라 뻣뻣해진 얼굴 근육을 적당히 풀며 해준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해준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며칠 전의 전화 통화에서 ‘그 일’에 대한 대강의 보고를 받긴 했지만 단순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만으로는 당시 상황의 정확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없었던 만큼 호연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일정이 비는 시간을 골라 만남을 제안했고 그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고급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지나 미리 지정해두었던 방 앞에 선 호연이 형식적인 노크를 한 뒤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배불뚝이 사장님 접대는 잘 하고 왔어?”

인사 대신 들려온 질문에 쓴웃음을 머금은 호연이 해준의 건너편 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다리를 꼬았다. 이어 재킷 안에서 담배를 꺼내 그 끝에 불을 붙인 그는 우선 깊이 한 모금의 연기부터 빨아들였다. 비흡연자인 윤사장과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내내 담배 생각이 간절했던 그는 이제야 답답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넌 정말 자영업을 하길 잘 한 것 같다.”

갑작스런 해준의 말에 슬쩍 그에게 시선을 던진 호연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는 담배 끝부분을 재떨이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네가 누구 아래서 일했으면 엉큼한 상사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겠어.”

“어디 게이가 그렇게 흔한 줄 알아?”

“네가 조금만 꼬시면 노말도 그냥 넘어가잖아. 뭐, 너라면 오히려 기회로 여기고 전세를 역전시키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웃은 해준이 테이블에 놓여 있는 호연의 담뱃갑으로 손을 뻗어 한 개비의 담배를 가져갔다. 찰칵거리는 소리에 이어 피어난 매캐한 연기가 이미 뿌옇게 변해 있는 방안을 한 차례 더 휘감았다.

조금 전 말 그대로였다. 오래 전 대학시절의 호연이 멀쩡한 노말을 건드려서 아예 이쪽 길로 들어서게 했던 일을 당시에도 꾸준히 그와 어울렸던 해준은 알고 있었다. 그래놓고 호연은 정작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다른 남자에게로 옮겨갔지만. 신의 불공평을 증명해주는 탁월한 조건을 두루 갖고 태어난 덕분에 늘 당연하게 선택하는 입장에 있었던 그가 이제껏 데리고 놀던 상대의 숫자는 해준이 아는 것만 해도 스무 명은 거뜬히 넘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그런 화려한 전적을 가진 호연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도, 호연으로 하여금 그 스스로가 가장 질색하는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끄는 모습을 갖게 만든 것도 그간 누구보다 가까이서 호연을 지켜봐온 해준이 아는 한 이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 봐온 가운데에서는.

“그 날 일에 대해서 다시 말해 줘.”

예상하고 있던 말이 들려온 것과 동시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해준이 먼저 한 차례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전에 통화로 얘기했던 게 다야.”

“좀 더 자세하게 들어야겠어.”

급격히 진지해진 호연의 표정을 확인한 해준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평소대로 있다가도 ‘그 남자’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순식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호연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는 그러나 어쨌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전에 통화로 얘기한대로야. 그냥 일차적으로 간단히 알아듣게 경고했어. 안 그래도 비쩍 말라서 비리비리해 보이는 친구를 상대로 처음부터 주먹질 할 생각도 없었고 그 남자도 얌전했고.”

“하, 약자 상대로는 손을 안 쓰신다고? 그럼 얼마 전에 내가 들은 건 뭐야? 가게에 있는 여자애 얼굴을 시퍼렇게 멍들도록 때렸다면서.”

“누가 그런 소문을 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건 과장된 얘기야. 뺨 두 대 때린 건데 조금 부은 정도였어. 겁 없는 계집애가 돈도 다 안 갚은 상태에서 갑자기 그만 두겠다고 하잖아.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가볍게 몇 대 때린 것뿐이야.”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짧게 혀를 찬 해준이 비싼 양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룸살롱의 점장 역을 맡게 되면서 가능하면 뒷선으로 물러나 지시만 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아래 직원이나 여자들을 다루었던 예전의 기질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해준은 지금도 여전히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생각 하에 직접 손을 쓰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물론 윗사람이 앞에 나서는 것이 남들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한창인 서른 중반의 나이로 벌써부터 뒷방 늙은이처럼 얌전히 지내는 생활을 하는 건 이제껏 와일드한 삶에 익숙해져 있는 그의 성미에 영 맞지 않았다.

단숨에 비워진 잔에 새롭게 술을 채우는 해준을 잠시 관찰하듯 지켜보던 호연이 툭툭 담뱃재를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은 잘 알아듣는 눈치야?”

고개를 들어 호연의 예리한 시선을 마주한 해준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아들었겠지. 그 정도로 친절하게 말해줬으면.”

“또 몰라. 겉으로는 얌전해 보여도 속으로는 어떤 인간인지. 평범한 인간이면 우수영이랑 그렇게 어울릴 수는 없지.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랑 달리 분명 속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수천마리는 들어앉았을 거야.”

“글쎄... 그럼 연기가 뛰어난 건가. 나랑 있을 때 그러던데 자기들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해준의 말에 순간적으로 미간을 좁힌 호연이 그 사이 새로 꺼낸 담배 끝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그런 사이가 아니면 뭔데?”

“내 말이. 그래서 그럼 가까워지기 전에 끝내는 게 좋을 거라고 했더니 그 남자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비웃음이 섞여 있는 해준의 질문에 호연이 슬쩍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그럼 자기가 우수영을 사랑하면 문제없는 거냐고 묻더라.”

“하, 미친 새끼.”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린 호연이 아까 전 해준이 채워준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생각 외로 꽤나 순진한 인상을 하고 있던 윤재의 모습을 보고 난 뒤 그래도 혹시나 중간에 오해가 있었나 하는 한 가닥 의문을 품고 있었던 호연은 지금 해준이 전해 준 말을 들은 것과 동시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의문과 동정을 일시에 가슴 안에서 지워버렸다.

하긴, 그러는 게 당연했다. 그 정도의 뻔뻔함은 갖추고 있어야 대등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 비슷한 정도로는 그 영악한 남자를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결국 겉으로 보이는 순진한 낯짝은 그저 잘 만들어진 가면일 뿐이었던 거다.

“수영씨랑 연락은 잘 돼?”

문득 들려온 해준의 질문에 잠시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호연이 현실로 돌아왔다. 평소 좋아하던 술이 유달리 쓰게 느껴지는 상태에서 젖은 혀로 입술을 살짝 한 번 핥은 그는 마주한 해준을 향해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제는 통화로 가볍게 안부를 나눴어. 곧 한 번 가게에 들를 거야.”

“그래? 그래도 다행이네. 하긴 그 쪽도 널 포기하는 게 내키지 않겠지.”

“어쨌든 <민들레>는 계속 주시하고 있어. 상황 봐서 다시 가야 할 테니까.”

“그래, 알았어.”

들려온 대답을 듣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 호연이 빈 잔에 새롭게 술을 채웠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웃고 있지만 실상 지금 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조금 전 수영과 관련해 그가 해준에게 건넨 말은 순전히 새빨간 거짓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영이 이별을 통보하러 이곳을 찾았던 이후 호연은 중간의 지인을 통해 그의 소식을 간간이 전해 듣고 있었을 뿐 단 한 차례도 그와 직접적인 만남을 가진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짧은 전화통화조차도.

결국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친 호연이 두 차례 자존심을 버려가며 먼저 연락을 취했지만 수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이후에 따로 연락을 취해오지도 않았다. 상황이 이런 만큼 혹여 수영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이 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호연의 마음 안에서 점점 더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수영과 자신 사이의 문제에 해준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상당수 진실을 그에게 털어놓았던 호연도 차마 지금의 이 상황을 전부 있는 그대로 그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상대에게 이런 비참한 상황을 솔직히 밝히는 것은 호연의 입장에선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영과의 관계가 예외적일 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선 여전히 독보적으로 우위에 있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그는 그렇기 때문에 이 비정상적인 예외의 상황을 더욱 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호연이 너, 정말 푹 빠져있구나.”

문득 들려온 말에 줄곧 잔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들어 해준을 쳐다본 호연이 희미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마음 같아선 자신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든 상대를 두고 한 판 신나게 까대고 싶었지만 정작 그렇게 해봐야 자신의 입장만 더 불쌍해질 뿐이라는 걸 호연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런 상대와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어 안달이 난 건 자신 쪽이었으니까.

호연이라고 해서 이런 보기 흉한 입장을 고수하고 싶을 리는 없었다. 얼마 전엔 실제로 수영과의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의지로 제법 괜찮은 상대와 잠자리를 갖기도 했던 그였다. 그 결과 오히려 수영과의 관계에 대한 미련만 한층 더 깊어지고 말았지만.

괜찮다는 소문을 들었던 남자에게 안기는 동안에도 호연은 머릿속으로 수영과의 섹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미 몸 안을 채우는 성기의 사이즈에서부터 큰 차이가 벌어져 있었지만 그보다 더 호연에게 실망을 안겨준 건 낯선 남자의 존재 그 자체였다. 제법 괜찮은 남자의 얼굴도, 몸도, 섹스 테크닉도 이미 수영이라는 남자와 그의 섹스를 알고 있는 호연에게 있어선 그저 그런 수준으로만 느껴질 뿐이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안기는 기쁨을 알게 된 호연에게 있어서 단순히 몸뿐인 관계가 주는 쾌감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최상품을 몸에 걸치고 살다가 그보다 훨씬 아래 등급의 물품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듯이 호연 역시 그랬다. 나서서 자랑하고 싶은 남자를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던 그 빛나던 시절을 그는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마셔. 오늘은 좀 취하자.”

갑작스런 호연의 말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해준은 이내 미소를 머금고서 호연이 내미는 잔에 자신의 잔을 가져다댔다.

“장호연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위해.”

농담 섞인 해준의 말에 하-하고 짧게 헛웃음 소리를 낸 호연은 곧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체념어린 표정을 짓고서 빠른 페이스로 잔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

사람들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떠오르는 즐거운 토요일 저녁.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있는 윤재의 얼굴 위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오늘 그가 수영과 함께 찾은 이곳은 유명한 고급 레스토랑이 속해 있는 고층 건물로, 물론 이제 곧 함께 할 이곳에서의 식사는 얼마 전 새벽 두 사람 사이에 정해진 약속에 의한 것이었다.

잠시 누군가와 사무적인 내용의 통화를 하던 수영이 탑승한 엘리베이터가 목적한 층에 다다른 것과 동시에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재킷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여긴 나오는 요리들이 다 맛이 좋아서 인기가 많아. 특히 주말엔 미리 예약해두지 않으면 앉을 자리도 없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고급스런 레스토랑의 전경에 한층 더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 윤재는 그 사이 카운터에 서있는 직원과 간략하게 예약 사항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수영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조금 전 수영이 한 말대로 주말 저녁 시간대의 넓은 홀은 많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곳에 올 때까지 수영은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가 알아서 미리 예약을 해둔 듯 안내를 맡은 직원이 앞서 향하고 있는 곳은 보통의 테이블 석이 아닌, 넓은 유리창 너머의 풍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망 좋은 창가 쪽의 자리였다.

앞에서 걷고 있는 수영에게 한 차례 먼저 향했다가 다음 수순으로 자연스레 자신의 다리로 향해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윤재는 잠시 후 문득 근처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발을 멈췄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 장소와 어울리게 고급스런 옷차림을 하고 있는 서른 초반 정도쯤 되어 보이는 고운 인상의 여성으로, 그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엔 먼저 걸음을 멈춘 수영이 서 있었다.

“도련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이어 낯익은 얼굴을 확인한 수영이 자연스레 그녀와 마주한 위치에 앉아 있는 상대에게 시선을 던졌다. 역시나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낯익은 얼굴의 남자였다.

“수영이 네가 여기엔 웬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한 것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휘영이었다.??

확실히 신기한 우연이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만남은 아니었다. 이곳의 코스요리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가족모임의 장소가 필요할 때면 늘 앞장 서 이곳을 추천한 것이 형수였으니.

“도련님도 식사하러 오셨어요? 혹시 동행하신 분도 괜찮다고 하시면 같이 식사할까요?”

주말 저녁 모처럼 만에 부부동반으로 외식에 나선 듯한 형님 부부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수영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서있는 윤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순식간에 어색한 상황에 놓이게 된 윤재는 어쨌든 수영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만난 이상 그냥 모르는 척 무시할 수 없다는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고서 천천히 세 사람이 모여 있는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윤재의 비정상적인 걸음을 보고서 처음 얼마간 의아한 표정을 짓던 휘영이 이내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것과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가까이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윤재의 모습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한 번 훑어본 휘영이 마주 서있는 수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인사하잖아요. 무시하실 거예요?”

미간을 좁히고 있는 수영의 얼굴을 잠시 가만히 쳐다보던 휘영이 문득 수영의 팔을 붙잡더니 곧바로 그를 윤재와 조금 떨어져 있는 빈 테이블 근처로 데려갔다.

뒤에 남겨진 윤재가 형수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것을 눈으로 슬쩍 확인한 수영이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던 휘영의 손이 떨어져나간 것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행동이에요? 사람 인사 무시할 정도로 경우 없는 분 아니시잖아요?”

“경우? 무슨 경우? 저 남자냐? 네가 요즘 빠져 있다는 게?”

“목소리 낮추세요. 여기서 절 커밍아웃이라도 시키고 싶으세요?”

커밍아웃이라는 단어에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힌 휘영이 그제야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가장 가까운 테이블 옆에 서있는 윤재와 아내의 위치라면 조금 전 수영과 자신 사이에 오고갔던 대화가 충분히 들렸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상관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다행히 아직 주변 테이블은 예약손님이 도착하지 않은 탓에 비워져 있는 상태인지라 전혀 상관없는 남의 귀에 지금의 불편한 대화가 들어갈 일은 없었으므로.

아내를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각자 동행의 이야기에 한창 심취해 있는 상태였다. 상황이 이런 만큼 구태여 당장 목소리를 낮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휘영은 오히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가 동생의 낯선 남자 애인의 귀에 제대로 전달되길 바라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는 윤재에게 중간 중간 시선을 던지고 있는 수영의 모습을 확인한 휘영이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도 어머니가 너를 꼭 선 자리에 나가게 하라고 우리 집에 와서 얼마나 진지하게 부탁을 하셨는지 알아? 그래도 난 네 뜻을 생각해서 힘들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대체 이게 뭐냐!”

“뭐냐니, 뭐가요?”

평소와 다름없이 냉정한 수영의 태도에 한층 더 화가 치밀어 오른 휘영이 곧바로 몸을 돌려 아내와 나란히 서있는 윤재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저런 남자를 네 짝이라고 데려와서 지금 나한테 들이미는 거냐? 고작 저런 몸도 성치 않은 사내새끼한테 코가 꿰어서 그 좋은 자리를 마다하겠다는 거야?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까지 거절하면서?!”

날카로운 휘영의 말이 쩌렁하게 주변을 울리자 그의 말을 들은 윤재의 표정이 희미하게 굳어졌다. 당연히 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한 차례씩 휘영과 수영에게 향해졌지만 다행히 말의 내용까지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은 듯 했다.

평소 누구보다 남의 이목을 중요하게 여겨온 휘영이었지만 지금은 차라리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근까지도 모친으로부터 수영의 맞선과 관련된 문제로 끈질긴 부탁을 받고 있는 그로서는 예상한 것 이하인, 아니, 상상한 가운데에서도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를 눈에 들인 지금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행실이 나쁜 건 사실이지만 이제껏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보면 누구의 앞에서도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을 만한 동생이었다. 그런 그가 대체 뭐가 부족하고 아쉬워서 저런 한 눈에도 뻔히 하자 보이는 상대와 엮인 것인지 휘영의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비교적 열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만큼 상대가 남자라고 해도 의사나 고급 공무원처럼 흠 잡히지 않을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언젠가 모친의 앞에 동생의 배필로 좋게 소개시켜줄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던 그였지만, 아무리 그런 그라도 도저히 이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수영이 순간적으로 이상한 취미에 빠졌다고 하면 그 편이 받아들이기 쉬울 것 같았다.

자신들을 향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거두어진 뒤에도 좀처럼 흥분을 삭이지 못하던 휘영이 다시 말을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려던 중간 갑자기 강한 힘에 팔을 붙잡혀 억지로 수영과 마주하게 되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아무리 형이라도 못 참습니다.”

이상할 만큼 차가운 수영의 말투에서 잠재된 분노를 읽어낸 휘영은 그러나 자신 역시 수그리고 들어가지 않았다.

“못 참으면? 나를 상대로 그 잘난 주먹이라도 휘두를 거냐?”

“아뇨.”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한 수영이 일순 눈을 가늘게 뜨고서 말했다.

“오늘 이렇게 모처럼 만에 부부가 오붓이 외식을 하러 나오신 걸 보니 보기가 좋네요.”

갑작스런 수영의 말에 의아한 기분을 품은 휘영은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수영의 희미한 웃음소리를 들은 즉시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져 들려온 말은 휘영의 신경을 긁어놓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안효린씨라고 했나요... 형이 만나고 있는 그 분, 어제 잠시 형의 문제로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면서 불쑥 회사로 절 찾아왔었는데 알고 계셨어요?”

“!”

“형 얘기를 하면서도 저한테 은밀하게 추파를 던지더군요. 한눈에 봐도 엉덩이가 가벼워 보이는 천박한 여자던데 그런 여자라도 형은 좋으신가 보죠?”

“...우수영.”

분노가 깔린 목소리로 휘영이 이름을 부르자 그런 그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수영이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당장 형수님과 이혼하실 생각은 없으시죠? 그럼 당연히 그 천박한 여자 얘기가 형수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원치 않으실 거고요.”

“너 정말...”

“형이 사는 방식에 터치할 생각 없다고 말했었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형도 제가 사는 방식에 터치하지 마세요.”

친형을 상대로 태연하게 협박을 하는 동생을 잠시 당혹스런 기분으로 쳐다보던 휘영은 문득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의 일행을 발견하고 애써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있던 수영은 이제 막 낯선 일행이 곁을 스친 뒤에야 줄곧 휘영에게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윤재의 곁으로 다가온 수영이 근처에 서있는 형수에게 시선을 던지고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네요. 식사는 다음에 같이 해요. 형수님.”

“아... 죄송해요. 도련님. 저 사람이 요즘 일 때문에 신경이 좀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라... 이쪽 분께도 사과의 말씀을 드릴게요.”

형수의 말에 스치듯 쓴웃음을 머금은 수영은 곧바로 윤재에게 시선을 옮겨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댔다가 떼며 말했다.

“나가자. 다른 데 가서 먹는 게 좋겠어.”

마지막으로 형수에게 나중에 다시 보자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서 윤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건물을 빠져나온 수영은 근처에 세워둔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즐거운 토요일 저녁의 거리는 웃음을 머금은 연인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무심히 지나쳤을 주변의 웃음소리는 지금 이 순간 수영의 귀엔 더없이 불쾌한 소음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채 걸음을 옮기고 있는 수영의 모습을 간간이 살피며 윤재도 조용히 다리를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수영은 의식적으로 윤재의 느린 걸음에 걸음 속도를 맞춰주고 있었다.

“형수님... 좋은 분 같아요.”

“........”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희석시키기 위해 윤재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수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의 관계를 그런 쪽으로 생각하신 거라면... 형님의 입장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거 알아요. 이해해요.”

“...뭘 이해한다는 거야?”

“말했잖아요. 그런 말 듣는 거에 이제 익숙...”

“씨발, 그딴 거에 익숙해지지 마! 너도!”

문득 걸음을 멈추고서 뒤를 돌아보며 소리친 수영이 마침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윤재를 쳐다보았다.

그런 수영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는 윤재는 조금 놀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감정적이 되어서 크게 소리치는 수영의 모습은 처음으로 목격하는 그였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수영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화내고 있다는 걸 윤재는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침묵이 잠시 이어지자 주변에서 싸움구경을 하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떠나가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빼어난 수영의 외모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도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여럿 있었지만 수영은 지금 자신에게 향해지는 시선을 깨끗이 무시하고 있었다.

속이 상했다.

윤재가 자신으로 인해 그런 지저분한 말을 듣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는 사실에 수영은 너무나도 화가 났다. 만약 친형만 아니었다면 맹세코 절대로 걸어서는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을 터였다. 그런데도 정작 눈앞의 이 순둥이는 그 같은 불합리한 상황마저도 어떻게든 이해하고 넘기려하고 있었다. 자신은 괜찮다며 익숙해져 있다면서. 그것이 더욱 더 수영의 속을 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네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억울하지 않아? 넌?”

“.......”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윤재를 바라보는 수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간 윤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인내하고 살아왔을지. 자신이 곁에 없는 동안에도 그는 지금까지 쭈욱 이와 같은 삶을 살았을 터였고 그 가운데에는 분명 오늘 이상으로 지랄 같은 일을 겪은 적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니 그가 조금 전 겪었던 부당한 일도 그저 그 수많은 지랄 같은 상황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수영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할망정 감정적으로는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을 들여 억지로 처음의 흥분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수영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아까 전 들은 얘기는 그냥 깨끗이 지워버려. 내가 대신 사과할게.”

“.......”

“그리고 앞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다 해. 억지로 삭이지 마. 그러다간 속병만 생겨.”

여전히 화가 누그러지지 않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수영을 잠시 쳐다보던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당신처럼요?”

“그래, 나처럼.”

단호한 수영의 대답에 윤재의 뺨이 희미하게 누그러졌다.

실제로 수영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당당하게 살려면 그처럼 우월한 조건을 갖춰야 가능한 것이었다. 당장 회사에서 잘려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어야 했고, 누구한테 헤어지자는 말을 듣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연인을 사귈 수 만큼 상대를 찾는 일에 힘들지 않아야 했으며, 시비를 거는 누군가와 맞설 때 이기지는 못해도 적어도 대등하게 싸울 정도의 주먹 실력은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수영의 저 자유롭고 대범한 성격은 타고난 천성이 반, 축복받은 그의 태생적 조건 반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일 거라고 윤재는 생각하고 있었다.

수영이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는 사실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는 윤재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확신을 담아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로 자신과 비슷한 위치로 내려오지 않는 한 이미 넘칠 듯이 많은 것을 손에 쥔 수영으로선 평생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거라고.

그러나 지금 수영이 자신에게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 요지를 충분히 알고 있는 윤재는 반론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배고픈데... 저기 들어가서 먹을까요?”

갑작스런 윤재의 말에 이제 막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던 수영이 윤재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따라 자신도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란히 향하고 있는 곳은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햄버거 먹으려고?”

예약해 두었던 40만원 상당의 코스 요리를 위약금을 물어가며 포기하고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수영이 미간을 좁힌 채로 진지하게 묻자 윤재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치즈버거 좋아해요.”

“.......”

“혹시 싫으시면 다른 곳으로 가도 괜찮고요.”

“...별로 싫지는 않아.”

짧게 대답하고 앞서 걷기 시작한 수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수트를 입기 시작한 뒤로 패스트푸드를 거의 입에 대지 않아온 그는 주말 저녁이라 가게 안에 꽉 들어차 있는 손님들을 귀찮다는 표정으로 훑어본 뒤 자신의 순서에 맞춰 주문을 했다.

잠시 후 주문해 나온 메뉴가 담긴 쟁반을 들고서 윤재의 건너편 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은 수영이 먼저 쟁반에 놓여 있던 치즈버거를 집어 들어 윤재에게 건넸다.

“이런 게 좋아?”

윤재의 손에 들려 있는, 한눈에 보기에도 부실해 보이는 얇은 햄버거를 쳐다보며 수영이 물었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이제 곧 서른인데도 아직까지 입맛은 크게 변하지 않았나 봐요.”

“넌 별로 햄버거 같은 건 안 먹을 것 같은 이미지인데.”

“그러면 전 어떤 걸 먹을 것 같은 이미지인가요?”

“주로 채식. 상추나 케일 같은 거.”

즉답을 들은 윤재가 조금 황당해 하는 표정을 짓다 이내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전 초식동물이 아닌데요. 특별히 풀 종류를 좋아하진 않아요.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말한 윤재가 그 사이 껍질을 벗겨내고 자신보다 먼저 햄버거를 크게 한입 베어 문 수영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늘은 수트 차림이 아닌 덕분일까, 의외로 양손에 햄버거를 손에 든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수영이었다. 지금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치킨버거였다.

잠시 입을 움직여 어느 정도 맛을 보던 수영이 문득 콜라를 들어 몇 모금 빨아들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걸로 주문하고 올게. 먹고 있어.”

말을 마친 것과 동시에 곧바로 등을 돌린 수영은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했다.

기시감.

윤재는 지금 이 순간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습게도 벌써 몇 년 전, 지금과 똑같이 치킨버거를 시켜 한입 맛보고 다른 걸 주문하겠다고 일어나 멀어지던 수영의 모습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혀져 있었던 그 일이.

“.......”

마치 아직 어리던 시절의 그 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아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기분이 든 윤재는 잠시 후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영을 발견하고 그제야 한참 손에 들고만 있던 치즈버거를 입으로 가져갔다.

오랜만에 크게 한입 베어 문 치즈버거는 역시 좋아하는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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