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약간의 술이 들어간 상태에서 꾸벅 졸고 있던 성호가 문득 들려온 입구의 종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이제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낯선 아저씨 손님들을 확인하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상으로는 이미 폐점 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지만 아직까지 뒷정리를 하지 않은 탓에 가게가 지금도 장사 중이라고 생각하고 태연히 안으로 들어선 두 손님은 자연스레 가장 가까운 자리를 잡아 앉으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지금은 영업이 끝난 뒤라서요. 이제 청소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중한 말로 투덜거리는 손님을 다시 밖으로 내보낸 성호가 흘깃 벽에 시선을 던졌다. 자신도 모르게 꾸벅 졸았던 사이 어느 샌가 수영과의 전화통화를 끝낸 뒤로 30여분이 흘러가 있었다. 수영의 집이 어딘지는 몰라도 순수하게 여기까지 오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갑자기 일어나서 준비를 하려면 일정의 시간이 더 필요할 거라고 나름의 계산을 한 성호는 멀쩡한 사람을 깨워놓고 늦네 마네 할 수 없는 스스로의 입장을 되새기며 길게 하품을 했다.
그 사이에도 윤재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중간에 약간씩 자세를 바꾸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워낙에 숨소리가 작은 탓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서 숨소리를 확인하지 않는 한 당장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보이는 움직임이 없었다. 눈만 감았다 하면 드르렁거리기 시작하는 시끄러운 친구놈들을 주로 봐온 성호에겐 신선하게마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자는 자세도 성격을 닮나...’
흔히 사내아이는 드세서 키우기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이런 아들이면 오히려 딸보다도 키우기가 쉬울 것 같다고 뜬금없이 부모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본 성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이곳에서 윤재를 상대로 면접을 봤을 때는 그냥 만만한 사람 정도의 인상만을 받았던 성호는 조금씩 얼굴을 마주 대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처음엔 그저 곱상한 인상의 젊은 사장님으로만 인식했던 윤재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성숙된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알아가고 있었다. 현실적인 나이 차는 불과 몇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윤재와 함께 있을 때의 성호는 종종 자신이 마치 아주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는 조금은 부끄러운 경험을 하곤 했다. 물론 성호는 자신이 특별히 어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윤재가 나이에 비해 너무 어른스러운 것뿐. 사실 나이 상으로 충분히 어른이니 어른스럽다는 말도 이상하긴 했지만.
‘!’
물끄러미 마주 앉은 윤재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성호가 문득 입구 쪽에서 들려온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아...”
이제 막 안으로 들어선 훤칠한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평소대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던 성호가 곧바로 지금의 상황을 떠올리고 표정관리를 했다. 새벽 시간에 사람을 깨워놓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다가오는 수영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피로한 기색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한층 더 깊어진 그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수영은 새벽 시간과 어울리지 않게 넥타이만 제외된 상태의 단정한 수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머지않은 만큼 아예 미리부터 출근 준비를 하고 온 듯한 차림새였다.
“저...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눈치껏 상황을 파악한 성호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건네자 그때까지 잠시 윤재를 바라보고 있던 수영이 성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가 오겠다고 한 거니까 네가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성호에게 짧게 한 마디를 건넨 수영이 다시 윤재에게 시선을 옮기고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술병과 잔을 차례로 훑어봤다. 소주병 하나는 완전히 비워진 상태였고 다른 병 안의 술은 3분의 1 가량이 남아 있었다.
“저 앞 두 병 모두 사장님 혼자서 다 마신 거야?”
“네? 아니, 아뇨. 저기 한 병은 아까 나가신 손님들이 드신 거고 옆의 병이 사장님이 드시다가 남기신 거예요. 저도 같이 마셨고요.”
그렇다면 별로 취할 정도의 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의 기준에선.
그러나 윤재처럼 알코올에 취약한 체질의 사람을 동료들 가운데에서 두 명 정도 알고 있는 수영은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어나가지 않았다.
“차 가져 오셨어요?”
“밖에 세워놨어.”
“네, 그럼 그리로 옮겨야겠네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수영의 얼굴을 쳐다보고 눈치껏 먼저 움직이기로 한 성호가 서둘러 테이블을 돌아 윤재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참동안 테이블 위에 불편한 자세로 엎드려 있던 윤재는 성호가 손을 뻗어 부축을 하려하자 잠시 억지로 눈을 뜨려는 시도를 하는 듯 하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사장님. 이제 집에 가셔야죠~”
성호의 팔이 자연스레 윤재의 허리에 감기는 것을 본 것과 동시에 수영의 다리가 움직였다.
“내가 부축할게.”
“아... 그러시겠어요?”
대답 없이 성호로부터 윤재를 넘겨받아 부축한 수영이 잠시 품안에 안겨 늘어진 윤재의 모습을 살폈다. 비쩍 말랐음에도 몸에 거의 힘이 실리지 않자 제법 무거운 체중이 실려 왔다.
“뒷정리 좀 해줄래?”
“아, 네. 제가 하고 갈게요.”
“그래. 부탁해.”
그렇게 말하고 품에 안긴 윤재를 부축해 입구로 향하던 수영이 문득 중간에 발을 멈추고 그 사이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한 성호를 돌아봤다.
“혹시 어제 사장님한테 무슨 일 있었어?”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테이블을 정리하던 손을 멈춘 성호가 잠시 허공에 시선을 던지고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특별한 일은... 어제 저녁에 이상한 진상 손님이 한 명 들어와서 잠깐 난리를 치기는 했는데 평소에도 취한 손님 대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서요. 결국엔 좋게 좋게 해결해서 보냈고요.”
“그럼 혹시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다거나... 비슷한 거라도 아는 거 있어?”
이어진 수영의 질문에 쓴웃음을 머금은 성호가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저도 알고 싶지만... 사장님은 개인적인 이야기는 남한테 잘 안 하세요.”
돌아온 대답을 어렵지 않게 납득한 수영은 마지막으로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윤재를 부축한 채 입구를 나섰다.
취한 윤재를 조수석에 앉힌 뒤 곧바로 운전석에 올라 차를 출발시킨 수영은 이제 새벽 다섯 시를 조금 넘긴 시점에서 아직까지 어스름한 색을 입고 있는 도로를 달려 윤재의 집으로 향했다. 그가 집에서 출발해 <민들레>로 향할 당시만 해도 거의 비워져 있다시피 했던 차도 는 새벽 운행을 시작한 버스와 이른 출근길에 나선 승용차들로 서서히 채워져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운전을 하는 동안 중간에 한 번씩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윤재에게 시선을 던져 그의 상태를 확인한 수영은 어딘가 윤재답지 않은 모습을 확인한 지금 여러 의미로 말끔하지 못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귀가를 하기 전 <민들레>에서 잠시 윤재를 마주하고 느꼈던 위화감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금의 이 상황이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물론 윤재가 단 몇 잔을 마셔도 금방 취하는 체질이라는 걸 알고 있는 만큼 단순히 그가 취해 있는 사실만을 놓고서 남들처럼 괴로움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취하도록 마셨다는 결론을 내리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평소 술을 잘 입에 대지 않는 그가 가게의 뒷정리도 미룬 채 즉흥적인 기분대로 움직였다는 건 그냥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성호의 문자를 확인하고 처음 몇 초간은 짜증스런 기분에 머물러 있었던 수영은 문자 가운데서 윤재의 이름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몽롱하던 정신이 일시에 깨어나는 것을 느꼈었다. 물론 뜬금없는 상황에 대한 의구심은 분명히 가슴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윤재의 이름이 나온 이상 그대로 모르는 척 다시 잠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호에게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침대를 벗어난 수영은 최소한의 과정으로 외출채비를 마치고서 집을 나섰다. 평소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새벽 다섯 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집을 나서서 차에 오르는 건 그에게 있어서도 무척이나 낯선 일이었다. 무엇보다 최근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은 이후 일에 매진하느라 안 그래도 적은 수면 시간이 더 줄어들어 있던 상태인지라 뜻밖의 방해로 인해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상황은 그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있을 중요한 미팅을 생각하면 최소한의 수면시간은 채워둬야 한다는 냉정한 판단이 내려진 상황에서도 결과적으로 수영은 윤재의 이름을 확인한 이상 성호의 문자를 모르는 척 깨끗이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건 선택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중력과 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오히려 의문을 갖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상황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스스로에게 수영은 정의 내릴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이전에 몇 차례 와본 적이 있는 후미진 골목 안으로 들어선 수영은 이른 출근길에 나선 사람들의 시선이 적어도 한 번씩은 자신의 차에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것을 꾸준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낙후된 동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차종이니 당연한 반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과한 시선을 받는 것이 수영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 사는 동네에선 겨우 외제차를 몬다는 사소한 이유로 이런 선망과 질투가 뒤섞인 시선을 받는 일이 없었던 터라 동시에 조금은 낯선 기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스쳐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이전에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낡은 빌라 건물 앞에 차를 세운 수영은 곧바로 운전석에서 내린 뒤 앞으로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 집으로 오는 사이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버린 윤재의 상태를 확인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는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부축하는 대신 윤재를 등에 업었다.
‘56... 7?’
예상한 것보다도 더 가벼운 무게를 등으로 느끼며 조금은 걱정스런 기분마저 든 수영은 마침 밖으로 나오는 주민을 스쳐 낡은 빌라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라 따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있지 않은 탓에 계단을 오르는 짧은 시간 동안 아침 산책에 나서는 몇 사람과 연이어 마주친 그는 ‘아이고~ 술이 떡이 됐네.’라며 쯧쯧 혀를 차고 지나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소주 달랑 몇 잔에 이렇게 된 것뿐이었지만 구태여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붙잡고 속사정을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 윤재의 집 문 앞에 다다른 수영은 비밀번호 입력식 도어록을 앞에 두고 일단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업고 있던 윤재를 내려 한손으로 그의 몸을 지탱한 채 벽에 기대도록 만든 수영은 억지로라도 윤재를 깨우려하던 중간 문득 뭔가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었다. 동시에 ‘어쩌면’이기도 했다.
윤재의 점퍼 안에서 지갑을 찾아 꺼낸 수영이 곧바로 그것을 펼쳐 가장 앞에 끼워져 있는 윤재의 주민등록증에 시선을 던졌다. 오래 전에 찍은 듯 지금보다 많이 앳되어 보이는 사진 속 윤재의 얼굴을 가장 먼저 확인한 그가 잠시 그대로 미동 없이 침묵을 지켰다.
조금 바래있는 사진 속 윤재의 얼굴을 수영은 알고 있었다. 이 당시 윤재의 모습을. 현실적으로는 불과 몇 년 전일뿐이지만 몇 년 사이 분위기가 많이 변한 탓일까, 사진 속의 윤재는 지금보다 열 살 이상은 어린 것처럼 보였다.
잠시 동안 진지한 표정으로 윤재의 증명사진을 쳐다보던 수영이 이윽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사진 옆에 적힌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했다. 이어 도어록에 조금 전 확인한 생일을 월일 그대로 입력해 누른 그는 곧바로 불일치를 뜻하는 기계음이 들려온 것과 동시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실패로 깨끗이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수영이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생일의 월일을 일월로 바꿔 누르자 뜻밖에 삐리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밀번호를 정한 것이 윤재인지 모친인지는 몰라도 결론적으로 허술한 번호의 조합이라는 건 명확했다.
제대로 된 보안을 위해 나중에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조언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윤재를 부축해 집안으로 들어선 수영은 곧바로 윤재를 그가 평소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방 안 침대 위에 눕혔다. 한나절 이상 비워져 있던 집안은 현관이고 방이고 할 것 없이 온통 싸늘한 공기로 채워져 있어서 일단 침대커버 아래 깔려 있는 전기장판의 스위치부터 켠 수영은 이어 방에서 나와 거실 벽에 붙어 있는 보일러의 전원을 넣었다.
천천히 둘러본 거실은 이전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미혼 남자 혼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모양새였다. 깨끗한 측면만 놓고 보면 비슷하지만 정리를 해서라기보다 아예 생활감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수영의 집과는 전혀 다른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슬슬 밝아오기 시작한 베란다 창 너머의 풍경을 스치듯 눈에 담고서 자연스레 손목을 걷은 수영은 이제 막 다섯 시 삼십 분을 지나고 있는 시각을 확인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의 생활 패턴 상 원래대로라면 한창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인 터라 눈을 뜨고 있어도 다소의 몽롱한 기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늘 출근 뒤 가질 오전 미팅에서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맡기로 예정되어 있는 만큼 적어도 그 일이 무사히 마무리 되는 시점까지는 평소보다 높은 집중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지만 지금의 컨디션 상태로는 예정된 일정을 실수 없이 무사히 소화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수영은 침대 맡에 걸터앉은 채 얌전히 잠들어 있는 윤재를 내려다보았다. 누구는 단순히 술자리에 분위기가 좋아서, 또 누구는 취했을 때의 기분이 좋아서 술을 마신다고 하지만 이렇게 취하자마자 바로 잠들어버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술은 그저 수면제 대용의 역할 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수영은 그럼에도 어째서 윤재가 평소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신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 진지한 의구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피로한 눈가를 손으로 가볍게 매만지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방 한켠에 놓인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형광등이 켜지지 않은 방 안은 창밖에서 들어오는 새벽녘의 어스름한 빛만으로 밝혀지고 있는 탓에 책장에 꽂힌 책의 제목을 읽는 데에는 평상시보다 좀 더 집중된 시력이 필요했다.
유명한 소설부터 컴퓨터 관련 서적들, 요리책에 이어 미술과 관련된 책들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 제목을 차례로 훑어보던 수영이 문득 가장자리에 꽂혀 있는 두꺼운 책을 발견하고 그리로 손을 뻗었다.
수영의 손에 잡혀 책장 밖으로 빼내진 것은 앨범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 무척이나 촌스러운 표지의.
딱딱한 재질의 표지를 넘기자 제일 먼저 나온 것은 으레 그렇듯 발가벗은 사내아이의 돌 사진이었다. 물론 이 사진 속의 사내아이가 이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윤재일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얌전히 잠들어 있는 윤재의 모습을 확인한 뒤 펼쳐 든 앨범을 들고 거실로 나온 수영은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아 다시 앨범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사실은 출근 전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두는 것이 나중을 위한 현명한 선택일 터였지만, 그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모처럼 윤재의 앨범을 손에 넣게 된 기회를 허투루 날릴 생각은 없는 그였다.
부모님이 많이 바쁘셨던 탓인지 외동아들임에도 뜻밖에 사진의 수는 많지 않아서 단 몇 페이지 만에 사진 속의 윤재는 갓난아기에서 청소년으로 훌쩍 성장해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는 윤재는 지금보다 훨씬 앳되어 보였지만 오히려 한층 더 단단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저 그 나이 또래의 소년처럼 웃는 얼굴은 그저 즐거워 보였고 그 위로는 아주 엷은 그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나 당시에도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던 듯 다른 친구들과 달리 혼자서 헐렁한 교복차림을 하고 있는 윤재는 아마도 누군가가 웃으라고 한 말에 억지로 따른 듯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채 어정쩡한 자세로 찍혀 있었다.
한눈에도 순진한 모범생과 같은 분위기를 품고 있는 사진 속의 윤재는 고등학교 시절 당시 수영이 어울렸던 친구들이 괴롭혔던 동급생과 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아마 윤재가 자신이 다녔던 학교의 학생이었다면 비슷하게 당했을 거라고 수영은 앨범의 페이지를 넘기며 생각했다.
‘!’
그나마 가장 많은 사진을 남겼던 고등학교 시절의 윤재에 이어 대학생이 된 윤재의 모습을 차례로 확인하던 수영의 시선이 한참이나 어느 한 페이지의 끝에 붙어 있는 사진에 머물러 있었다.
사진 속의 윤재가 입고 있는 엷은 민트색 티셔츠가 묘하게 눈에 익었다.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사진을 본 순간 신기할 정도로 또렷이 기억이 되살아났다. 몇 년 전 자신과 짧게 만나던 당시의 윤재가 입었던 옷이라는 것을 수영은 금세 기억해냈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티셔츠 한 장을 기억하고 있는 건 그 날의 일이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수영은 기억하고 있었다. 자상한 연상의 남자의 가면을 덮어쓰고 순진한 윤재를 유혹한 끝에 반강제적으로 그를 안았던 날의 일을.
가족이 모두 비운 집안에 윤재를 불러들여 자신의 방 침대 위에 그를 눕혔던 수영은 망설이고 두려워하는 윤재에게 괜찮다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해 건네고는 미약한 저항이 실린 그의 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아프다며 우는 윤재를 괜찮다는 말로 수없이 달래면서. 그때 조심스레 벗겼던 티셔츠가 바로 사진 속의 윤재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한참 동안 한 곳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거둔 수영이 천천히 다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대학교 시절의 윤재는 외견 상 지금과 그리 크게 다른 점은 없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눈에 띠게 앳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어느 경치 좋은 계곡에서 찍은 사진, 친구들과 섞여 웃고 있는 사진, 유람선 위에서 어색한 브이자로 손가락을 펼치고 찍은 사진, 이어 나온 사진 속의 윤재는 단정한 회사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윤재의 과거를 엿보는 묘한 심정으로 집중해서 페이지를 넘겨가던 수영이 다음 페이지의 첫 사진을 눈에 들여놓은 것과 동시에 무심코 움직임을 멈췄다.
대학교 졸업식으로 보이는 사진 속 윤재가 학사모를 쓴 채 부모님 사이에서 웃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부친은 윤재와 닮은 얼굴로 선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어 찍힌 몇 장의 사진 속에서 부자는 꼭 닮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어느 사진이던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중년 남자는 윤재만큼이나 순하고 좋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아마 윤재가 앞으로 나이가 들면 이런 얼굴이 될 거라고 자연스레 상상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문득 수영의 머릿속에 아주 오래 전 들었던 윤재의 한 마디가 잔상처럼 떠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 말을 건네던 당시 윤재는 울지 않았다. 그저 더없이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뿐.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너무도 처연한 얼굴이었다.
“.......”
오래 전의 기억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리던 수영이 한참 만에 앨범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간절히 들 만큼 돌아가신 윤재의 부친의 얼굴을 보고난 지금 그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물론 죄책감이었다.
당시의 윤재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수영은 제대로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당연했다. 윤재 역시 이전에 자신을 거쳐 간 사람들처럼 그저 잠시 어울리다 버릴 상대에 불과했으니까. 그래서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고도 화를 내지도, 울며 붙잡지도 않는 그를 보며 뜻밖에 쿨한 점이 마음에 든다는 짧은 생각만을 떠올렸던 수영은 그나마의 짧은 기억마저도 머지않아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렇게 윤재는 그의 기억 속에서 한참이나 사장되어 있던 존재였다.
당연하게도 그때의 수영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질려버린 장난감처럼 아무렇지 않게 버렸던 남자를 상대로 자신이 이렇게까지 진심이 될 거라고는.
윤재는 그런 남자였다. 깊이 알면 알수록 진지하게 대할 수밖에는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수영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가져왔던 것들을 하나 둘씩 포기해가며 최대한으로 정직한 모습으로 그를 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은 높은 위치에 앉아 있는 자가 오만한 얼굴로 베푸는 배려가 아니라 마주 바라보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기본으로 안고 가야 하는 의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수영은 단순히 윤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는 윤재가 오래 전 처음 봤을 때처럼 다시 행복하게 웃기를 바랐다. 지금까지 누구와 만나든 중요한 건 오직 자신이었을 뿐, 어떤 대단한 상대라도 그 사람의 행복까지 신경써본 적은 없었던 그는 지금에야 여기저기 거리에서 들려오는 흔해빠진 유행가 가사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앨범을 다시 원래의 제자리로 되돌리고 침대 맡으로 다가선 수영이 잠시 동안 잠이 든 윤재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 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헝클어진 채 뺨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손등에 닿는 뺨의 온도는 조금 뜨거웠다. 보일러에 문제가 있는 건지 전원을 켜고 나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거실과 방안엔 서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지만, 조금 전 수영이 손으로 만져본 결과 다행히 커버 아래 깔려 있는 전기장판은 제법 괜찮은 성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로가 급격히 밀려오고 있는 차에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윤재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단순히 자신도 곁에서 푹 자고 싶은 마음에서든 혹은 무방비 상태로 잠든 윤재를 억지로 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든.
그러나 회사까지의 거리를 감안할 때 출근까지 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수영은 두 가지의 욕구를 과감히 버리고 천천히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달리 어느새 창밖에서 새어 들어온 빛으로 제법 밝아진 방안을 수영이 천천히 둘러보았다.
방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모두가 오래 사용한 듯 보이는 물건들뿐이었다. 책장과 책상, 커튼과 벽에 걸려 있는 액자까지. 평소 열심히 읽고 있는지 책상 위에는 모서리가 살짝 닳아 있는 요리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지금은 책장 한켠을 채우고 있을 뿐인 컴퓨터 관련 서적들도 한 때 필요했을 때는 모서리가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을 윤재였다.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 슬슬 나갈 채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수영이 몸을 일으켰다. 넥타이와 재킷은 차에 두고 왔으니 당장 이곳에서 따로 출근준비를 할 것은 없었다.
“으...”
“!”
문득 들려온 낮은 신음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수영이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윤재를 내려다보았다.
숙취로 인한 두통으로 잠시 동안 그대로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뜬 윤재가 뜻밖에 시야에 들어온 광경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마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민들레>에서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하고 있는 그로서는 어째서 자신이 이 익숙한 공간에 있는 것인지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보다도 더 그를 당혹시키고 있는 건 태연하게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수영의 존재였다.
“그렇게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 하지 마.”
자신을 향한 윤재의 얼어붙은 시선을 말없이 마주하던 수영이 문득 침묵을 깨고서 말했다.
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온 뒤에도 좀처럼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던 윤재는 또다시 느껴진 두통에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꿈이라기엔 너무도 선명한 통증이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침대 한 켠에 일정의 무게가 실리는 것을 느낀 윤재가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떠 어느 샌가 자신의 곁에 앉아 있는 수영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고 있는 수영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하고 또 진지했다.
“왜... 여기에...”
정황상 수영이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건 따로 물어볼 것도 없이 분명한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 대해 의문을 느낀 윤재가 이마를 덮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물었다.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혼자서 다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그는 우선 가장 높은 확률의 가능성 하나를 떠올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혹시 성호가... 연락을 한 건가요?”
술자리엔 단 둘뿐이었으니 따로 의심할 사람도 없었다.
“성호는 그냥 문자로 주소만 알려달라고 한 것뿐이야. 직접 오겠다고 한 건 나고.”
“.......”
돌아온 대답에 놀라움을 느끼면서도 어쨌든 이것으로 지금의 이 상황까지의 과정을 대략 파악하게 된 윤재는 일단 한 차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신이 원하던 원치 않았던 결과적으로 수영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인 만큼 그에게 인사를 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째서 수영이 한창 자고 있을 새벽 시간에 굳이 무리해 가며 스스로 도움을 주려 나선 것인지 그 속내를 읽어내는 것이 주저되었다. 보통의 상대였다면 그냥 과도한 친절함 정도의 선에서 넘길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윤재가 알고 있는 수영은 애초에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
갑작스런 수영의 질문을 받고 고개를 든 윤재가 더없이 진지한 수영의 표정을 확인하고 무심코 이불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실었다.
“술도 잘 못 마시면서 갑자기 무슨 일이야?”
질문보다 추궁에 가까운 수영의 말에 윤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질문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며칠 전 해준과 만났던 일이었지만 윤재는 지금 이 상황에서 구태여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 날 들었던 얘기를 하나하나 소리 내어 말해봤자 자신만 비참해질 뿐이라고, 어차피 수영과 자신은 그런 관계가 아니니 그냥 지나가는 얘기로 흘러 넘기면 끝날 일이라고 윤재는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오해가 불러일으킨 것이니 오해가 사라지면 자연히 모두가 해결될 일이었다.
잠시 동안 익숙한 방안 어딘가를 의미 없이 바라보던 윤재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술이 남아 있길래... 버리기 아까워서 좀 마신 것뿐이에요.”
“.......”
“어쨌든 또 이렇게... 당신에게 도움을 받았네요. 죄송해요.”
“사과 듣자고 한 일 아니야. 고맙다는 인사도 필요 없어.”
수영의 말을 듣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윤재가 문득 쓴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성호가 말이에요... 당신과 내가...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문득 들려온 윤재의 말에 수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까... 서로가 노력하면 어쩌면 정말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 차가 있으니까 친구라도 말을 놓지는 않겠지만요.”
나직하게 이어지는 윤재의 말을 가만히 귀에 담고 있던 수영이 미간을 찌푸리고서 말했다.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어차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
그때까지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수영이 긴 몸을 일으키고서 윤재를 내려다봤다.
“난 너하고 친구는 안 해.”
“...어째서요?”
“싫으니까.”
“.......”
“그래도 굳이 네가 정말로 그 편이 좋다고 하면 친구부터 시작할 수는 있어. 하지만 그런대도 네가 생각하는 평범한 친구는 아닐 거야.”
친구부터 시작이라니 스스로 말해놓고도 헛웃음이 나오는 수영이었다. 연애부터 시작도 귀찮아서 원나잇 섹스를 출발점에 놓았던 그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고대 문학서적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친구라는 게 별 거 있나요. 그냥 지금까지처럼 지내면 되는 거잖아요. 가끔씩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고...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잖아요. 어차피 친구라는 건 지금과 그리 다를 것도...”
거기까지 말하던 윤재가 갑자기 위에서 만들어진 그림자를 확인하고 일순 숨을 멈췄다.
곧 커다란 손에 양쪽 손목을 붙잡힌 채 강제로 다시 침대에 눕혀진 그는 상당한 무게를 싣고 덮쳐온 수영의 아래서 내려오는 시선을 마주했다.
“널 상대로 아랫도리를 세우는 친구라도 상관없어?”
목덜미에 느껴진 뜨거운 입김에 무심코 어깨를 움츠린 윤재가 이어지는 말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
“네가 누구와 만나면 그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가만히 두고는 안 볼 거야. 그런 욕심 많은 친구라도 괜찮다면 좋아, 친구부터 시작해도.”
“.......”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재의 손목을 놓아주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댄 수영이 쓰게 웃었다. 당장 몇 시간 뒤 있을 중요한 미팅에서 프레젠테이션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지금 그의 신경은 당장 윤재와의 일에만 온통 집중되어 있었다. 문득 담배 생각이 났지만 그조차도 곧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제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한 방안엔 얼마간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이제 슬슬 일어나 나갈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수영도, 침대에 앉은 채 조용히 방안 구석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는 윤재도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어지던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 건 수영의 목소리였다.
“우리... 정식으로 만나자.”
들려온 말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윤재의 얼어붙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수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에 말했지. 이도 저도 아닌 관계는 이제 끝내겠다고.”
“.......”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사귀고 싶어. 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