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차가 막힌다고? 얼마나 걸릴 거 같은데? 아... 30분쯤?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장소는 알지? 응. 적당히 알아서 마시고 있을게.”
차가 막히는 바람에 약속 시간을 한참 지나서 도착할 거라는 상대의 연락을 받고 짧게 혀를 찬 연석이 앞에 서있는 바텐더에게 적당한 종류의 칵테일 중 하나를 골라 주문했다.
바(bar)-Moderato
이 근방에서 물 좋은 게이바로 제법 널리 알려져 있는 이곳은 평상시 연석이 자주 찾는 곳은 아니었지만 오늘 모처럼 만나기로 한 상대의 제안에 따라 정해진 약속 장소였다.
지금 연석이 기다리고 있는 상대는 두 달 전 에서 처음 만난 뒤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다섯 살 연상의 회사원으로, 다소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잠자리 스킬은 어느 정도 갖춘 남자였다. 남들보다 상대의 외모를 보는 기준이 까다로운 연석이 얼굴도 키도 만족할 만한 구석이 없는 그와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고 있는 건 결과적으로 최근 들어 만난 상대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낫다고 평가되는 잠자리궁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 주문하신 거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이제 막 완성된 살구색의 칵테일을 받아든 연석이 잠시 후 문득 가게 안으로 들어선 누군가를 발견하자마자 무척이나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바텐더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어서 오세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네.”
“혼자 오신 거예요?”
“응. 오늘은 조용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친근감 있게 말을 걸어오는 바텐더에게 짤막하게나마 일일이 대꾸하고서 자리에 앉은 건 연석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장호연.
이 근방에서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는 대규모 바(bar)의 오너라는 사실과 더불어 빼어난 외모로 인해 질투와 선망의 대상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남자.
언젠가 를 찾았을 때 우연히 멀리서 본 적이 있지만 제대로 통성명을 한 기억은 없는 상대를 잠시 관찰하듯 지켜보던 연석이 문득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호연에게서 주문을 받은 바텐더는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몇 미터 떨어져 있던 거리를 좁혀 홀로 앉아 있는 호연의 곁으로 다가간 연석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미소를 머금었다.
“잠깐 옆에 앉아도 될까요?”
직접적인 질문을 받은 뒤에야 연석의 존재를 인식하고 고개를 돌려온 호연은 낯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흥미 없다는 태도로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렸다. 허락은커녕 대꾸조차 할 마음이 없다는 듯 지독하게도 차가운 태도였다. 그간 남에게 대접받는 것이 당연한 위치에서 이와 같은 일이라면 이미 지겹도록 겪어온 그는 지금 자신을 향해 보이는 연석의 행동 역시 낡고 뻔한 수작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
깨끗이 무시를 당했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 연석은 어쨌든 더 이상 불필요한 질문을 반복하지 않고 멋대로 비어있는 호연의 옆 스툴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사실 이제껏 말 한 번 나눈 적 없는 상대에게 어째서 이렇게 당연하게 말을 걸 생각이 든 것인지 연석 본인조차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멀리서 보거나 소문으로만 접해온 호연과는 일말의 친분도 없는 것이 사실인데도 어째서인지 지금 그는 당장 옆에 앉아 있는 호연이 생판 모르는 남처럼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스스로의 의지보다 조금 전 나온 칵테일을 몇 모금 넘기고 나서 희미하게 돌기 시작한 술기운이 연석을 이 자리까지 데려온 것인지도 몰랐다.
“의 사장님이시죠?”
다시 이어진 연석의 질문에 호연은 이번에도 무시로 일관했다. 이런 장소에서 낯선 남자들로부터 헌팅을 당하는 일이야 이미 셀 수 없이 겪어온 그는 답이 뻔히 나오는 수작에 일일이 대응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경험 상 이런 태도로 대응할 경우 기분이 상하거나 뻘쭘해진 상대 중 열에 아홉은 깨끗이 포기하고 물러났었다.
“여기 주문하신 칵테일 나왔습니다.”
뒤늦게 다시 나타난 바텐더가 어느 샌가 자리를 옮긴 연석을 먼저 슬쩍 한 번 쳐다본 뒤 호연에게 칵테일 잔을 건넸다. 오랜만에 만난 호연과 대화를 나누고픈 기색이 역력한 그는 그러나 곧바로 멀찍이서 들려온 부름을 듣고서 호연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인 뒤 다시 등을 돌려 그쪽으로 향했다.
“혼자 술 마시기 심심하지 않아요? 약속 상대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동무를 해줄 수 있는데...”
“.......”
눈치 없이 계속 말을 걸어오는 상대에게 슬슬 짜증이 치밀기 시작한 호연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가라고. 지금 댁과 상대할 기분 아니니까...”
“우수영.”
“!”
“누군지 알고 있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줄곧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던 남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호연이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 누구야?”
수영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변해버린 상태에서 그의 이름이 난생 알지도 못하는 인간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호연은 불쾌함보다도 깊은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앞뒤 사정이야 어쨌든 조금 전 들은 말을 통해 눈앞의 낯선 남자가 수영을 알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가 수영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두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된 호연은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것 같은 표정을 애써 관리하고서 바로 앞 테이블 위에 놓아둔 담뱃갑으로 손을 뻗었다.
“그를 알고 있는 모양이지?”
꺼낸 담배 끝에 불을 붙인 호연이 침착한 목소리로 묻자 연석이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다짜고짜 반말을 해오는 호연의 태도에 조금은 놀란 것이 사실이었지만 확실히 그가 자신보다 연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연석은 일단 그 사실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그건 지금의 상황에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어쨌든 수영의 이름이 나오자 이제야 저 오만한 남자도 간신히 대화에 나설 마음이 들긴 한 모양이라고 내심 코웃음을 친 연석은 강한 상대의 기세에 눌리지 않도록 자신 역시 의식적으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잘 알고 있죠. 몇 년 동안을 만났으니까.”
연석의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호연이 길게 연기를 내뱉고 잔을 들었다.
지금 들려온 대답의 진실여부는 당장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너무도 태연한 상태의 태도를 통해 아마도 진실일 거라고 호연은 판단하고 있었다. 직업상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상대해온 그는 상대가 자신을 앞에 두고 진심을 말하는 지 거짓을 말하는 지 어느 정도 구별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린 판단 전부가 옳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지만.
“당신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어요. 그와 최근에 가장 가깝게 지내온 상대죠.”
거기까지 말하던 연석이 스치듯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호연의 시선에서 경계심과 호기심이 교차하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지금 눈앞의 상대로부터 깨끗이 무시를 당했던 상황을 떠올리고 다시 냉정히 마음을 다잡았다.
처음엔 별다른 의미 없이 호연에게 다가온 연석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에 등을 떠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평소 헌팅을 당하는 일은 있어도 좀처럼 직접 나서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던 그로선 스스로조차 의아하게 느껴질 만한 상황이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오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실 연석은 언젠가 한 번은 직접 호연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쭉 해왔었다. 물론 그가 호연을 상대로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의 감정은 아니었다. 자신과 간간이 섹스를 나눌 정도의 친분을 쌓고 있지만 딱 그 선까지만 허락했던 수영이 최근 관계를 맺어온 호연을 상대로는 꽤나 집중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일정의 거리를 두고 그 모습을 지켜봐온 연석으로선 아무래도 호연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거기에 정작 이렇게 코앞에서 마주한 호연은 과연 소문대로 굉장한 미남이어서 연석의 기분을 한층 더 가라앉게 만들고 있었다. 분명히 말해 호연의 뒷배경을 알거나 혹은 직접 그를 한 번만 만나본 사람이면 수영을 포함한 수많은 잘난 남자들이 어째서 호연에게 진지한 태도를 취하는지 싫어도 이해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 이건 열등감인지도 몰랐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분명 그게 맞을 터였다. 자신이 무엇 하나 이길 수 없는 대단한 조건을 두루 갖춘 인간을 앞에 두고 절로 느끼게 되는 이 더러운 기분은.
추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연석은 적어도 한 번은 이 잘나빠진 남자를 자신과 비슷한 위치로 끌어내려보고 싶었다.
“최근에도 그와 잘 지내고 있나요?”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호연이 잠시 텀을 두고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남한테 떠벌리고 다닐 생각 없어. 정 궁금하면 몇 년 지기인 그한테서 직접 듣지 그래?”
애초에 친절한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던 연석은 여전히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상대를 향해 스치듯 냉소를 지어보였다.
역시 장호연은 우수영과 많이 닮아 있다고 연석은 생각했다. 많은 것을 가진 위치에 서있다는 점에서부터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있는 성격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인간을 상대로는 가차 없는 태도를 보이는 면까지.
깨끗이 포기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결코 수영을 이길 수 없다고 연석은 생각해왔다. 침대 위에서 수영이 주는 쾌락은 마약과도 다를 게 없어서 이제껏 그와 만나오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운 모멸감을 느껴왔음에도 불구하고 연석은 끝내 스스로 수영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서로를 스테디한 관계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만큼 그와 만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다른 상대들과 몸을 섞어왔지만 그 중 단 한 번도 수영에게 안길 때만큼의 만족감을 얻은 적이 없었던 연석은 결과적으로 더 많은 상대와 관계를 가지면 가질수록 오히려 수영과의 섹스에 대한 갈증을 점점 더 간절히 느끼고 있었다. 이런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으니 추하게 끌려가는 것도 매달리는 것도 결국 자신 쪽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연석은 씁쓸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꼭 닮은 두 사람이라고 해도 장호연과의 관계에선 달랐다. 수영과 마찬가지로 대하기 어려운 타입의 남자라고 해도 당장 호연을 상대로 그 어떤 약점도 잡히지 않은 상태의 연석은 구태여 그에게 먼저 숙여서 들어갈 필요도, 그럴 마음도 전혀 없었다.
“어차피 그와 당신도 스테디한 관계는 아니죠?”
확신을 담아 그렇게 질문한 연석은 당장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 호연을 마주한 채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역시나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재차 들었다.
“그는 그런 관계를 싫어하더라고요. 당신 이전에 만났던 몇 명과도 적당한 시점에서 끝이 났었죠.”
“.......”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영과 간이 섹스 프렌드 정도의 관계를 이어오며 그의 바뀌는 상대를 지켜봐온 연석은 잠시 옛 기억을 회상하다 눈앞에서 굳어진 호연의 표정을 확인하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좀 전까지 자신을 아래로 내려다보던 상대를 자신의 페이스대로 끌어내는 건 생각보다도 더 큰 쾌감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그런 연석의 생각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린 것일까, 잠시 동안 연석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던 호연이 미간을 찌푸리고서 고개를 돌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개인사를 남에게 보고하는 취미 없어. 마찬가지로 굳이 그의 이전 연애사에 대해서 듣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이만 자리로 돌아가 주겠어?”
말의 형식은 권유지만 말투는 명령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끝까지 오만한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유유히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호연의 모습을 잠시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던 연석이 일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혹시 최근 들어 그의 태도가 조금은 이상하지 않던 가요?”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오지 않는 호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연석이 말을 이었다. 그의 눈동자엔 오기와 냉소의 감정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이걸 말하는 게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당신도 알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혹시나 당신도 괜히 처음의 나처럼 오해를 하지 않게요.”
“.......”
“얼마 전 수영의 집을 찾았다가 그 아래 주차장에서 마주쳤는데 말이죠, 그가 처음 보는 어떤 남자와 함께 있더군요.”
그때까지 똑바로 정면을 향하고 있던 호연의 고개가 자신 쪽으로 살며시 기울어진 걸 눈으로 확인한 연석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가벼운 사이는 아닌 것 같아 보였어요. 반 장난삼아 그 동행인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니까 곧바로 내 손을 치워내더라고요. 평소의 그 사람답지 않은 행동이라 많이 놀랐죠. 여태까지 아무렇지 않게 스와핑이나 난교도 즐겨온 남자가 키스를 한 것도 아니고 고작 어깨 좀 만졌다고 무서운 표정을 짓는데 이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 맞나 싶었어요. 진짜 어이가 없었죠.”
이야기를 듣는 호연의 표정이 확연히 굳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연석은 상황이 역전된 데에서 오는 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남자, 누구인지 혹시 알고 있어?”
줄곧 무시하는 태도를 고수하던 호연이 한참 만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오자 보일 듯 말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연석이 바테이블에 놓인 호연의 담뱃갑에서 멋대로 담배 한 대를 빼낸 뒤 마찬가지로 호연의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먼저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였다. 그런 연석의 행동이야 당연히 마음에 들 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듣고 싶은 답이 있는 입장의 호연은 굳이 중간에 제지하고 나서지 않았다.
잠시 동안 호연과 시선을 교환하던 연석이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 끝을 재떨이에 털며 말했다.
“본 건 그때 한 번뿐이라 정보는 없어요. 그 이후에 우수영씨와도 만난 적이 없고요. 당신과는 연락이 되나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호연은 그러나 최대한 동요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잦지는 않지만.”
사실은 잦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끊어졌다고 봐야 했지만 그런 속사정을 굳이 연석에게 말해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는 호연이었다. 아니, 필요성의 여부보다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지금까지 늘 선택하는 입장에 있었던 그는 특히나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점에서 괜한 소문이 퍼질 빌미를 스스로 제공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가요... 어쨌든 만나고는 있군요.”
최근 들어 쭉 수영과 만나지 않았던 만큼 지금 호연이 들려준 대답의 진실여부는 당장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그것이 사실이던 거짓이던 연석이 관여할 수 없는 문제인 건 매한가지였다.
“그 남자, 특이하게도 다리를 절더군요.”
“!”
“얼굴은 꽤 곱상한데 몸이 비쩍 마른 남자였어요. 어쨌든 내가 보기엔 딱히 수영이 흥미를 가질 만큼 대단한 외모는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또 모르죠. 의외로 침대 위에서 조이는 맛이 괜찮을지도.”
게이바라는 다소 프리한 장소인 만큼 남들 눈치를 살피지 않고 태연하게 성적인 이야기를 내뱉은 연석은 ‘다리를 저는 남자’라는 부분을 들은 직후부터 완전히 얼어붙어버린 호연의 얼굴을 잠시 관찰하듯 지켜보았다.
학벌이든 돈이든 외모든 넘칠 만큼 좋은 스펙을 갖추고 있는 호연으로서는 아무래도 지금 들려온 이야기들을 그대로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남자가 정작 다른 누군가에게 더없이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연석의 짐작은 실제로도 정확히 들어맞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크리스마스이브 날 우연히 수영의 부축을 받아 택시에 오르던 낯선 남자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호연은 아직 정리되지 않는 상황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의 정황 상 그 낯선 남자의 다리 상태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던 만큼 지금 연석에게 들은 이야기 안의 남자가 당시의 그 남자와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 들은 몇 가지 사항만으로도 이미 호연은 충분히 크게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 비쩍 마른 남자의 다리가 성치 않다는 사실보다 더 크게 호연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는 건 조금 전 연석이 들려준, 수영이 그 남자를 상대로 보인 태도에 대한 증언이었다.
대단할 것도 없는 그저 단순한 상황일 뿐이지만 아무래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짧은 순간일지언정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독점욕을 드러내는 수영이라니, 그런 건 농담으로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스치듯 상상하는 것조차 뇌에서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뭐, 어쨌든 내가 본 건 이게 다예요. 일단은 수영과 사귀고 있는 입장이니 알아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말씀드린 건데 괜한 제 오지랖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태연히 내뱉은 연석이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물론 애초에 오지랖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평소 대단한 소문을 끌고 다니는 이 오만한 남자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구경하고 싶었을 뿐.
기대치만큼의 반응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지금쯤 이 자존심 강한 남자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연석은 짧은 순간이나마 자신이 우위에 서있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 승리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십여 분 전 처음 마주했을 때만 해도 시종일관 무시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던 상대의 바짝 굳어진 얼굴은 연석에게 묘한 위안을 안겨다주고 있었다.
‘!’
문득 입구 쪽에서 들려온 제법 큰 발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연석은 이제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선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넓은 가게 안을 둘러보고 있는 남자는 지금까지 연석이 기다리고 있던 약속 상대였다.
“약속 상대가 와서 이만 가봐야겠네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호연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연석이 뒤늦게 자신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약속 상대에게 곧 가겠다는 손짓을 하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은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낸다니 조금 부럽네요. 내 전화는 좀처럼 안 받거든요. 태연하게 무시하는 거 보면 진짜 열 받아서 찾아가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드는데... 그래도 완전히 놓아지지가 않네요. 일단 얼굴이랑 거기가 미치게 내 취향이라서요.”
“.......”
현재의 연인-굳이 가까운 단어를 찾자면-을 앞에 두고 과감한 발언을 내뱉은 연석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시 그와 만나면 정연석이라는 남자가 눈물로 빌 테니 연락 좀 해달라고 했다고 전해주겠어요?”
직접적인 부탁을 받은 뒤에야 고개를 들어 연석을 쳐다본 호연이 이윽고 앞에 놓인 담뱃갑에서 새롭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며 물었다.
“당신이 보기엔 내가 전해줄 거 같아?”
“글쎄요... 아닐 것 같네요.”
“잘 아네. 그럼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마.”
짧게 연기를 내뱉고서 그렇게 말한 호연은 몇 분 사이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처음 연석이 이곳에서 봤을 때의 오만한 태도로 되돌아가 있었다. 과연 수영과 꼭 닮아 있는 남자다웠다.
단숨에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호연은 부름을 받고 다가온 바텐더에게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과 함께 나중에 또 보자는 짧은 인사를 건넸다. 이어 옆자리에 놓아둔 재킷을 집어 들고 입구를 향해 돌아선 그는 슬쩍 눈동자만을 굴려 아직 가까운 위치에 서있는 연석을 쳐다보았다.
“어쨌든 증언은 고맙게 받을게. 언제 한 번 내 가게로 와. 평소엔 비싸서 못 먹을 술들로 한턱 낼 테니까.”
비웃음 섞인 냉소를 머금고 그렇게 말한 호연은 연석의 곁을 스쳐 그대로 입구를 빠져나왔다.
연석과 마주하는 동안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던 호연의 얼굴은 차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사납게 일그러졌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을 터치 당했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에겐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느껴지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더없이 비참한 기분으로 몰아가고 있는 건 아까 전 연석이 들려주었던 이름 모를 남자와 관련된 몇 가지 증언들이었다.
수영에게 이별 통보를 당한 뒤 애써 태연한 척 중간 중간 안부전화를 거는 것으로 가느다란 그와의 끈을 붙잡아오고 있는 호연은 아무래도 지금까지 드러나 있는 정황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수영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누구와도 스테디한 관계를 맺지 않고 동시에 많은 사람과 관계를 가져왔던 그라면 이번에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터였다. 애초에 가벼운 말로 시작된 관계인만큼 그가 자신과 동시에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서 바람이니 어쩌니 하는 걸 물을 권리가 자신에게 없다는 걸 호연은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당장 보이는 상황만 따지자면 그것 역시 지금의 이 상황과 크게 다를 바는 없을 터였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하나의 차이점이 존재했다.
그저 여럿 중 하나일 뿐인 상대인가,
혹은 이제까지 유지해왔던 패턴을 순식간에 바꿔버릴 정도의 힘을 가진 상대인가.
지금 눈에 보이는 상황은 명백한 후자였고 바로 그 사실이 호연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난생 처음 진심으로 원하게 된 상대를 두고서 오직 자신만이 이 다루기 어려운 남자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어온 호연이었다. 만남 초 자신을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미래에는 결혼을 하겠다고 말한 수영의 입에서 오래 지나지 않은 어느 시기엔 결코 자신을 두고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꺼내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그였다. 과거의 경험을 자양분으로 이전에 상대해온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수영 역시 결국엔 자신에게 푹 빠지게 만들 자신이 호연에겐 있었다. 아주 충분히.
그런데 지금의 이 상황은 대체 뭔가. 스스로를 비웃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상황을 인정할수록 또 하나 둘 알아갈수록 머리를 짓누르는 생각은 복잡해져만 갔다. 지금까지 너무나도 당연하게 선택하고 거절하는 위치에 군림해 있었던 호연은 단 한 명, 진심으로 잃고 싶지 않은 대상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길 지경에 처한 이 상황에 분노를 넘어서 강한 치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장호연이 누군가에게 진다? 그런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반드시 빼앗아 올 것이었다. 행여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결코 다른 이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었다. 허울 좋게 여기저기서 나불거리는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한 양보’ 따윈 그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말이었다.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떠 앞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쳐다본 호연은 한참 만에 운전대를 잡고서 차를 출발시켰다.
어느 샌가 그의 얼굴은 평소의 냉정한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
또다시 무심히 스쳐가는 사람의 뒤에서 전단지를 든 손을 거둔 윤재는 차도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반대편 지하철 역 입구 근처에 서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성호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만 해도 낯선 행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부끄러움에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성호 역시 앞서 시작한 윤재와 마찬가지로 몇 번째 일이 반복되자 처음보다는 많이 적극적인 태도로 바뀌어져 있었다.
<민들레> 부근의 지하철역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작업은 오늘로서 네 번째.
윤재의 경험 상 전단지를 받아가는 사람은 열에 네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손을 떠나간 전단지 중 상당수는 몇 미터 벗어나지 못한 위치에 있는 휴지통이나 바닥에 그대로 버려지고 있었다.
자신의 가게 이름이 적인 전단지가 지나는 행인들 발에 무심히 짓밟히는 것도 싫었지만 동시에 괜한 쓰레기가 만들어져 바닥을 더럽히는 것도 원치 않는 윤재는 중간 중간 바닥에 버려지는 전단지를 직접 주워들어 개중에 깨끗한 것은 먼지를 털어내고서 다시 쓰고 더러워진 것은 근처의 휴지통이나 폐품함에 넣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쿠르릉-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오자 근처를 지나던 행인들의 발걸음이 눈에 띠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쯤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가 정확히 들어맞는 분위기였다.
전단지를 나눠주다 말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온 성호를 향해 이제 됐으니 그만 오라고 크게 손짓을 해보인 윤재는 아직 절반 이상 남아 있는 전단지를 백팩 안에 집어넣었다. 미리 우산을 가져온 만큼 좀 더 자리를 지키고 서서 나눠줄 수도 있었지만 비가 내리는 와중에 굳이 필요도 없는 전단지를 받아들고 갈 사람은 많지 않을 터였다.
잠시 후 입구로 올라온 성호에게 미리 가져온 우산 두 개 중 하나를 건넨 윤재는 그의 손에서 처음의 절반가량이 남아 있는 전단지를 건네받아 백팩 안에 집어넣었다.
“나눠주는 거 아직 쉽지 않지?”
우산을 펼치며 윤재가 묻자 이미 먼저 펼친 우산을 손에 들고 있는 성호가 쓴웃음을 머금고서 대답했다.
“일단 받기는 하는데 근처에서 자꾸 버리고 가네요.”
“원래 그렇지 뭐. 나도 전단지 받은 거 결국엔 버리게 되더라. 굳이 나눠주는 사람 근처에서 버리진 않지만.”
“사실은 저도 그래요. 휴지나 부채 같은 것도 귀찮아서 잘 안 받는데 그냥 종이는...”
또 한 차례 쿠르릉하고 들려온 커다란 천둥소리에 말을 멈춘 성호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어딘가 덩치 큰 곰이 몸을 사리는 것과 같은 그의 모습에 속으로 미소를 머금은 윤재는 전단지가 든 가방을 대신 들겠다는 성호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다리가 조금 불편할 뿐인 20대의 건강한 남자의 몸으로 이 정도 무게쯤은 거뜬히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그였다.
아까 전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세 번째 커다란 천둥소리가 들려온 뒤 급격히 굵어졌다. 미리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행인들은 저마다 뭔가를 머리에 올리고서 달리기 시작했고 그중 일부는 4천 원짜리 비닐우산이라도 사기 위해 근처의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 겨울 내내 눈은 지겹도록 왔는데 비는 오랜만인 것 같아요. 아까 집에서 나오기 전에 일기예보 보니까 오늘은 겨울비 치고 많이 내릴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러면 얼마 전에 내린 눈이 아직 안 녹았으니까 오늘밤이나 내일 아침쯤 바닥이 꽁꽁 얼겠네. 돌아가면 가게 주변을 한 번 더 쓸어놔야겠다.”
윤재는 늘 어느 상황에서든 일부터 떠올리는 경향이 있었다. 성호가 기억하기로도 쉬는 시간 윤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중 상당수는 일과 관련된 것으로, 가장 크게는 음식에 관한 것과 가게 운영에 관한 두 가지로 나뉘고 있었다.
언젠가 준석에게 전해 듣기로 회사에 다닐 당시에도 윤재는 내려오는 일이 끝나면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할 정도로 직장 내에서 공인된 일벌레였다고 했다. 이제껏 봐온 윤재의 모습을 보면 충분히 그랬을 거라고 성호는 그 말을 전해 들었던 당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사장님은 쉬는 날에도 일하실 것 같아요.”
문득 들려온 성호의 말에 윤재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다.
굵어진 빗줄기가 우산 천장에 쏟아지며 발생하고 있는 소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메우고 있었다.
“나도 쉬는 날엔 놀아.”
“뭘 하고 노시는 데요?”
“tv도 보고...”
“tv는 어떤 채널을 주로 보세요? 영화?”
“아니, 주로 보는 건 시사나 교양 채널... 체르노빌 사건에 대한 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이 나오는 다큐 같은 게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거 같아.”
“영화도 영화 나름이죠. 재미없는 건 진짜 욕 나오게 재미없고 재미있는 건 진짜 입 벌어지게 재미있고요. 참, 전에 제가 말씀드린 영화 한 번 보세요. 그거 보면 사장님도 백퍼센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실 거예요. 제가 진짜 장담한다니까요? 아직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으니까 가능하면 다운받지 말고 큰 스크린으로 직접 보시는 게...”
“그 영화, 며칠 전에 극장에서 봤어.”
“!”
예상치 못한 윤재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성호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오, 보셨어요? 어떠셨어요?”
“응, 재미있었어. 소문대로 CG도 수준이 높더라. 내용도 좋았고.”
“그쵸? 그렇다니까요! 제 친구놈들 중엔 그것만 극장에서 네 번이나 본 녀석도 있어요. 근데 극장은 혼자 가신 거예요?”
“...아니.”
“그럼 혹시 데이트?”
노골적으로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성호를 쳐다본 윤재가 살짝 한 번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아니야. 그냥 좀 아는 사람...”
친구도 직장동료도 연인도 아닌 남자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고서 잠시 그와의 관계를 정의할 단어를 찾던 윤재가 일단 가장 솔직한 대답을 내놓자 그 대답을 들은 성호가 여전히 음흉한 표정을 지은 채 질문을 이어갔다.
“에이- 보통은 그냥 아는 사람이랑 극장까지 안 가잖아요. 만나서 같이 밥도 먹었죠?”
“...응.”
“재미있었어요?”
“.......”
“.......”
“그냥... 나쁘지는 않았어.”
대답 뒤 어딘가 묘하게 생각에 잠긴 듯한 윤재의 반응을 살피고서 얼마 전의 휴일 틀림없이 그가 누군가의 주선 아래 소개팅이라도 한 걸 거라고 확신한 성호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그 상대야 당연히 또래의 젊은 아가씨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였다.
저 멀리 굵게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로 가까워지고 있는 <민들레>의 위치를 확인한 윤재가 한층 걸음에 속도를 올리자 덩달아 다리에 힘을 실은 성호가 잠시 끊어졌던 대화를 이어나갔다.
“저기요... 전에 사장님이 저한테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잖아요. 연애를 하다가 언젠가 끝을 보는 게 무서운지도 모르겠다고요.”
갑자기 들려온 성호의 말을 듣고 무심코 발을 멈춘 윤재가 가만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제넘은 말인 거 알지만 솔직히 저는요. 사장님이 예전에 사장님한테 상처를 준 그 나쁜 여자는 이젠 깨끗이 잊어버리고 이번에 만나시는 분과 잘 되셨으면 좋겠어요.”
“...왜 내가 지금 누구와 만나고 있다고 생각해?”
너무나 당연하게 단정 짓는 성호의 태도에 의문을 느낀 윤재가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성호가 대답했다.
“남자의 직감이랄까요.”
“.......”
허무할 만큼 단순한 성호의 대답을 듣고 나서 피식 웃음소리를 낸 윤재가 다시 질퍽거리는 길 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자의 직감이란 건 그냥 엉터리 아냐?”
“아니에요. 이래봬도 제 직감은 여자의 직감 못지않거든요. 아무튼 저는 사장님이 용기를 내서 꼭 좋은 분과 만나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 하면 좀 징그러울지 모르겠지만...”
잠시 중간에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던 성호가 한층 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장님은 사랑받기 충분한 분이세요. 그냥 보고 있으면 저절로 행복을 바라게 돼요.”
우산 아래에서 슬쩍 시선을 던져오는 윤재를 얼마간 가만히 쳐다보던 성호가 이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아... 괜히 부끄럽네요. 지금까지 사겨온 여자 친구들한테도 이런 말 한 적 없는데... 아무튼 저도 그렇고 준석 형님도 그렇고 사장님 좋아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힘내세요. 사장님 화이팅!”
뜬금없는 응원을 받은 윤재가 피식 웃었다.
“그래, 뭔지 모르겠지만 응원 받았으니까 앞으로 전단지도 더 열심히 돌릴게. 근데 준석 형님은 또 뭐야?”
“아, 준석 형님이요? 일단 저보다 연상이시니까요. 버릇없게 준석씨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그럼 나도 준석이랑 동갑이니까 윤재 형님이겠네. 생일은 준석이보다 내가 더 빨라.”
“사장님은 그냥 사장님이에요. 아무래도 사장님은 이미지 상 뒤에 형님 붙이기가 좀...”
“...내 이미지가 어떤데?”
“사장님 이미지는... 어... 그러니까... 아, 벌써 다 도착했네요. 이 앞에 눈은 얼기 전에 제가 치울게요.”
잠가뒀던 문이 열리자마자 회피하듯 후다닥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성호의 뒷모습을 잠시 눈으로 쫓던 윤재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성호가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란 게 대체 어떤 것일지 잠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그는 슬쩍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뒤 슬슬 오픈 준비를 하기 위해 젖은 우산을 접어 입구에 세워두고 자신도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