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주말의 영화관은 역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 한껏 멋을 부리고 나온 커플들은 팔짱을 끼든 손을 잡든 딱 붙어 깨소금 내가 진동하는 둘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고, 절대다수를 이루는 커플을 제외하고는 주말 나들이를 나온 가족 혹은 젊은 여자들끼리 짝을 이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장 둘러보기에 남자만으로 이뤄진 조합은 아주 드문드문하게 발견되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말해 지금과 같이 주말 낮에 남자를 동행으로 두고서 영화관을 찾은 것은 수영에게 있어서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이제껏 그가 사람들과 만나온 장소는 대개가 술집이었고 이후에 이어지는 코스는 호텔이나 좀 더 마음이 맞을 경우 둘 중 한 사람의 집이었다. 사이에 섹스가 없는 평범한 지인들과 만날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일반적으로 식사 후 술을 마시고 헤어지는 것이 정해져 있는 패턴이었던 만큼 평상시 그가 약속을 잡는 시간은 대개가 해가 기울어진 뒤였다.
술과 대화 혹은 술과 대화와 섹스.
회사원이 되기 전엔 활동범위를 제법 넓게 가졌었지만 점차 피로가 누적되어 가는 생활 패턴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최근엔 바(bar)를 찾는 횟수마저 자체적으로 줄여나가고 있는 수영이었다. 어쨌든 습관적으로 밤 시간을 위주로 활동해온 수영에게 있어 이처럼 환한 주말 낮에 하필 사람도 많은 영화관을 찾은 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리 확인해드릴게요. 왼쪽으로 가시면 나오는 D관의 2열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미리 예매를 하지 않은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리 좋지 못한 자리의 티켓을 끊은 수영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윤재에게 향했다.
주말 낮 시간이라 연인들이 점령한 영화관 한 켠에 홀로 서있던 윤재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중간 문득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수영을 발견하고 줄곧 제자리에 멈춰 있던 발을 뗐다.
수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와중에도 유독 키가 큰 수영의 존재는 한눈에 윤재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수영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건 비단 키 뿐만은 아니어서 지금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감탄 섞인 시선이 곧장 윤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수영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눈에 띠는 외모인데다 결혼식장에 다녀온 그대로의 단정한 수트 차림을 하고 있는 그가 주위의 시선을 끌고 있는 건 차라리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자리가 별로야. 시간은 10분 뒤고.”
수영에게서 두 장의 티켓 중 한 장을 건네받은 윤재가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10분 뒤 두 사람이 보게 될 영화는 헐리우드산 액션물로, 액션은 그나마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장르였다.
수영에게서 선택권을 넘겨받고서 얼마 전 성호로부터 재미있다는 찬사를 듣고 내심 한 번은 보고 싶어 했던 영화의 제목을 말했던 윤재는 모처럼 만에 영화관을 찾은 지금 조금은 생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2년 전 회사생활을 할 때까지만 해도 주말이면 가끔씩 준석이나 친한 직장 동료와 만나 외식을 하거나 화제가 되는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기도 했던 그는 한순간에 일어난 큰 교통사고로 인해 다리에 장애를 안게 된 이후 은연중에 바깥활동을 자제해왔었다. 특별히 다리를 저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스스로 의연하게 마음을 가지려고 해도 여기저기서 따라붙는 시선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그런 시선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지만.
시간에 맞춰 지정석에 착석한 두 사람은 광고가 흘러나오는 동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을 묵묵히 귀에 담은 채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곧 불이 꺼지고 어둠에 잠기자 줄곧 근처에서 들려오던 연인들의 웃음소리도 멎었다.
피를 흩뿌리는 긴박한 추격전으로 시작된 영화는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었다. 꽤나 많은 액수를 투입해 제작한 사실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중간 중간 꾸준히 등장하는 정교한 CG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의 퀄리티를 자랑하고 있었고, 때에 맞춰 나오는 효과음들도 긴박한 영화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주고 있었다. 종일 깨고 부수는 액션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성호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장면이 펼쳐진 시점에서 윤재는 눈의 깜빡임마저 잊은 채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려하지만 조금은 잔인한 장면에 다다르자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내는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중간에 문득 등장인물의 심각한 상처 부위가 바짝 클로즈업 된 장면에선 윤재도 슬쩍 눈을 감았지만 두 시간 반에 걸쳐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그는 모범적인 자세를 유지한 채 스크린에서 거의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처럼 영화에 집중하는 윤재의 모습을 제작자가 봤다면 무척이나 흡족해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와... 진짜 대박이다.”
“재밌지?”
“응. 재미도 재민데 돈 진짜 많이 들인 거 같다. 사람들이 칭찬할 만 하네. 며칠 있다가 영화 볼 거라고 하니까 내가 아는 동생도 이거 꼭 보라고 하더라고.”
“난 사실 오늘이 세 번째 보는 건데 볼 때마다 새로워. 그래도 못 보는 장면은 계속 못 보겠어.”
“중간에 좀 징그러운 장면이 많이 나오긴 하더라. 그래도 액션은 진짜 제대로였던 거 같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향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저마다 일행에게 각자 느낀 감상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윤재의 귀에 들려오는 내용의 상당수는 좋은 평가로 윤재 역시 그들의 의견에 상당부분 공감하고 있었다.
엔딩 크레딧의 절반쯤이 올라갔을 때 문득 옆에서 일어나는 기척을 느낀 윤재가 고개를 돌렸다.
영화를 보는 동안 주체하기 힘들 만큼 긴 다리를 몇 번인가 움직이며 자세를 고쳤던 수영이 긴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괜찮았어?”
감상을 물어오는 수영에게 ‘볼거리가 화려하네요.’라고 솔직한 감상을 말한 윤재는 그쯤에서 자신도 몸을 일으켰다.
몇 분 전만 해도 꽉 채워져 있던 주변은 어느 샌가 한산하게 변해 있었지만 아직 몇몇 사람들은 자리를 지킨 채 영화가 남긴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재미있었어요?”
선택권을 부여받고서 직접 영화를 고른 입장에서 윤재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와 나란히 출구를 빠져나온 수영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어. 특수효과에 신경을 써서 그런지 피가 뿌려지는 장면들도 진짜 같아서 볼 만 했고.”
짧게 대답한 수영이 슬쩍 소매를 걷어서 시간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슬슬 출출한데 밥 먹으러 가자.”
사실 식사보다는 술과 담배가 더 당기고 있었지만 윤재의 형편없는 주량을 알고 있는 수영은 일찌감치 그와 같은 욕구를 접었다. 취한 윤재를 부축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윤재가 취한 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는 그였다.
평소 기본적으로 별 무리 없이 술잔을 주고받을 정도의 주량을 갖추고 있는 지인들과 주로 관계를 가져온 그는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몇몇 자주 찾는 바(bar)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술을 파는 곳 외에 달리 누군가와 함께 건전하게 시간을 보낼 만한 장소는 잘 알지 못했다.
저녁 식사를 하기에 괜찮은 음식점 몇 곳을 후보로 떠올리던 수영이 문득 들려온 ‘저기...’라는 윤재의 말을 듣고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녁은 제가 살게요.”
“!”
예상치 못한 윤재의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수영이 이내 스치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동등한 남자 대 남자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먹는 것이 아무래도 불편하게 여겨지는 모양이라고 내심 윤재의 생각을 짐작해낸 그는 잠시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던 몇몇 음식점 후보들을 일단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전에 성호를 대신해서 도와주신 것도 있고...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편하게 말하세요.”
성실한 성격상 역시나 그 날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가하고 생각한 수영은 일단 이제 막 영화관 건물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주위를 크게 한번 둘러봤다. 아까부터 내린 눈이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어서 바닥엔 점점 많은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해가 진 뒤로 급격히 온도가 떨어진 탓에 몇 시간 사이 바람은 매서울 만큼 차갑게 변해 있었다.
코트의 깃을 세우고서 천천히 팔짱을 낀 수영이 차도 너머로 보이는 한 식당을 발견하고 윤재를 쳐다봤다.
“저기로 갈까.”
가게 유리벽에 붙어져 있는 메뉴는 제법 다양했고 가격도 4천원에서 만 원 선으로 비교적 저렴했다.
사실 수영이 조금 전까지 머릿속에 후보로 두고 있던 음식점들은 저 앞에 보이는 식당보다야 훨씬 근사하고 유명한 곳들이었지만, 윤재가 지갑을 열겠다고 나선 상황에서 그 비싼 장소를 추천할 정도로 수영은 뻔뻔하지 않았다. 현재 윤재가 운영하는 가게의 영업 실태를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수영으로선 자연스럽게 저녁 메뉴를 정하는 데 있어 검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비싼 데로 가도 돼요.”
모처럼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사례를 하겠다고 나선 윤재가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며칠 전 성호가 한 말들을 통해 그간 자신이 몇 번이나 수영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된 윤재는 언제든 기회가 닿으면 그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수영이 자신은 빚을 지고 못 사는 성격이라고 말했듯 윤재 역시 그 부분에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 특별히 가리는 거 없으니까 네가 먹고 싶은 걸로 골라.”
영화관에서에 이어 다시 한 번 수영에게서 선택권을 넘겨받은 윤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주 좋은 곳에서 식사 대접을 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지만 그간 수영의 도움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못해도 기본적인 성의는 보이고 싶은 그였다.
아무래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윤재를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수영이 문득 혼자서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방향엔 아까 전 그가 언급했던 낡은 식당이 있었다.
“그냥 저기로 가자.”
“아뇨, 좀 더 좋은...”
“저기도 좋아. 어, 신호등 바뀌었다.”
제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먼저 출발하고 조금 늦게 횡단보도로 내려선 수영이 몇 걸음을 뗄 때쯤 문득 그의 뒤에서 끼익-하고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수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횡단보도를 지나쳐 제 갈 길을 가는 차 너머에 서 있는 윤재를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저런 미친 새끼 같으니라고!”
“좀 빨리 가겠다고 사람 죽이겠네! 가다 사고나 나서 뒈져라!”
신호등은 명백한 녹색 불이었다. 그건 즉 조금 전 지나친 차량이 멋대로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려다 자칫 사고를 낼 뻔한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놀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부지런히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윤재를 수영은 잠시 동안 얼어붙은 얼굴을 하고서 쳐다보았다.
“빨리 가요. 신호 금방 바뀌겠어요.”
깜빡거리는 녹색 불을 확인한 윤재가 급하게 재촉했다.
그제야 지금 자신이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수영은 곧바로 윤재와 함께 남은 횡단보도를 마저 건넜다.
“어디 다친 데 없어? 부딪친 곳은?”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윤재를 돌아본 수영이 그렇게 묻자 윤재가 ‘아무데도 안 부딪쳤어요.’라고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는 바람에 미처 다른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했지만 서서히 머릿속이 정리되어감에 따라 뒤늦게 아까 전 신호위반을 한 차 주인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수영이었다. 만약 좀 전의 운전자가 눈앞에 있다면 죽도록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괜찮아요?”
문득 들려온 질문에 경직된 표정을 유지한 채 걸음을 옮기던 수영이 스치듯 윤재를 돌아보았다.
“좀 놀라서 그래... 괜찮아.”
이윽고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서 긴 한숨을 내쉰 수영은 그러나 분명 아직까지도 좀 전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 신호위반을 한 차와 부딪칠 뻔한 일은 자신 역시도 경험한 적이 있는 수영이었지만 정작 자신이 대상이 되었던 당시의 기억은 그저 정황에 관한 것뿐으로 그 당시 자신이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비단 자신뿐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함께 걸었던 여자가 실제로 오토바이에 한쪽 다리를 심하게 부딪쳤을 때도 조금 전처럼 놀라지는 않았던 수영이었다.
순식간에 식욕이 싹 달아나버렸지만 어쨌든 조금 전의 결심대로 윤재와 함께 낡은 식당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수영은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잠시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훑어보곤 개중에 가장 무난해 보이는 된장찌개 백반을 골랐다.
“더 비싼 걸로 시키셔도 돼요. 아니면 다른 걸 좀 추가할까요?”
수영이 이 주변에 많고 많은 음식점들 가운데 유독 잘 눈에 띠지도 않는 소박한 식당을 선택한 것을 두고 자신의 지갑 사정을 생각한 배려일 거라고 판단하고 있는 윤재가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한동안 이어진 불황으로 인해 가게 운영 사정이 많이 어려웠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최근 들어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한 이후로 조금씩 손님이 늘어나고 있는 덕분에 다행히 약간이나마 여유는 생긴 상태였다.
그러나 윤재의 제안에도 추가주문은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대답한 수영은 뒤늦게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옆 의자에 내려놓은 뒤 수트 재킷도 벗어 그 위에 놓았다. 상의를 벗자 드러난 그의 어깨가 잘 다려진 셔츠 한 장에 감싸인 채로 멋진 선을 이루고 있었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각자의 앞에 놓아진 뒤 거의 동시에 수저를 든 두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손님도 몇 없는 평범한 식당. 테이블에 놓인 건 평범한 음식. 특별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황금 같은 주말을 투자해 보낸 시간은 너무도 평범했고, 좀 더 정확히 말해 수영에게 있어선 엉뚱하다는 표현이 더 들어맞을 만한 일정의 연속이었다. 벌써 몇 시간째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지 모른다. 술도 없었다.
그러나 차라리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의 건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수영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보잘 것 없는 낡은 식당 안에 앉아 그저 그런 맛을 내고 있는 음식을 형식적으로 입에 나르고 있지만 지금 그와 마주한 자리에는 윤재가 앉아 있었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목으로 넘기고 있는 윤재는 다행히 아무렇지 않은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 전 횡단보도에서 자칫 차에 부딪칠 뻔 한 일을 겪은 만큼 분명 적지 않게 놀랐을 거라는 수영의 짐작을 보기 좋게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주인아주머니가 틀어놓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딱딱한 멘트를 반쯤 흘려 귀에 담던 수영이 문득 자신에게 향해진 윤재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맛없으세요?”
평소보다 느려진 자신의 식사 속도가 윤재에겐 그런 의미로 해석된 모양이라고 생각한 수영이 살짝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뭐 좀 생각하면서 먹느라. 그건 어때, 맛있어?”
되돌아온 질문에 슬쩍 자신의 뚝배기를 내려다본 윤재가 ‘그냥...’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웬만해선 좋게 좋게 대답하는 그의 입에서 저런 애매한 말이 나왔다면 아마도 맛이 꽤나 별로인 모양이라고 수영은 해석했다. 사람 많은 주말에 영화관 근처라는 좋은 위치에서 이 정도로 파리가 날리는 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쉽게 칭찬해줄 수 없는 형편없는 음식 맛 때문인 듯 했다.
맛의 여부는 둘째 치고 어쨌거나 윤재가 사겠다고 한 저녁을 남기기도 뭐하다는 생각에 다시 젓가락을 쥔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 수영은 눈치껏 윤재와 속도를 맞춰 식사를 이어갔다.
“잘 먹었어.”
느긋한 페이스로 식사를 마치고서 나란히 식당을 나선 수영의 인사를 받고서 슬쩍 그를 쳐다본 윤재가 천천히 지갑을 접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맛... 별로였죠.”
“그냥 먹을 만 했어.”
“다른 데로 갈 걸 그랬어요.”
“내가 가자고 한 거잖아. 내 잘못이야.”
스치듯 미소를 머금고 그렇게 말한 수영이 문득 귀에 익은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재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오늘 늦은 밤과 새벽 사이 일시 귀국한 대학동기를 포함해 친한 친구 넷이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해둔 상태의 수영은 저녁쯤 최종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겠다는 친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잠깐 전화 좀 받을게.”
예상대로의 발신자를 확인한 수영이 윤재에게 짧게 양해를 구하고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응. 말해.”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한 수영에게서 눈치껏 몸을 돌린 윤재가 근처 편의점 앞에 서있는 한 커플을 발견하고 그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확하게는 편의점 앞의 인형 뽑는 기계 앞에 서있는 한 남자가 옆에서 뭔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여자 친구의 지시에 따라 신중하게 레버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 아깝다.”
“이제 그만하자.”
“한 번만 더 해봐. 이번엔 진짜 될 거 같아.”
“벌써 6천원 날렸어. 내가 가다가 그냥 예쁜 인형으로 하나 사줄게. 가자.”
“아... 진짜 이번에 될 거 같은데...”
“빨리 가자~”
아쉬워하는 여자 친구를 달래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한 남자의 뒷모습을 잠시 가만히 쳐다보던 윤재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반대편을 돌아본 채 통화를 하고 있는 수영이 중간 중간 구두 끝으로 눈 쌓인 바닥을 툭툭 차고 있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내용으로 짐작컨대 뭔가 구체적으로 의견을 조율하고 있는 듯 했다.
통화에 집중하고 있는 수영의 곁을 떠나 조금 전 커플이 차지하고 있었던 인형 뽑기 기계 앞에 선 윤재가 재킷과 바지 주머니를 뒤적인 끝에 나온 두 개의 오백 원짜리 동전 중 하나를 투입구에 집어넣었다.
작은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집중해서 레버를 움직인 윤재는 좋은 흐름으로 움직이던 크레인이 마지막으로 아무 것도 집어 들지 못한 채 올라오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헛수고야. 어차피 이런 건 다 상술이니까.”
어느 샌가 통화를 마치고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수영을 흘끗 돌아본 윤재는 그러나 꿋꿋이 두 번째 동전을 투입시키고 레버를 잡았다.
윤재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크레인을 잠시 지켜보다 재킷 안에서 꺼내든 담배 끝에 불을 붙인 수영이 문득 툭-하고 들려온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 없게도 출구에 떨어져 있는 곰 인형을 윤재가 태연한 얼굴로 집어 들고 있었다.
어떻게 뽑은 거냐고 시선으로 묻는 수영을 슬쩍 쳐다본 윤재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인형을 내려다봤다.
“대학시절에 인형 뽑기가 취미인 친구를 따라서 심심풀이로 해봤었어요. 처음엔 계속 실패만 했는데 하다 보니까 조금씩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
덤덤한 윤재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잠시 가만히 손에 들고만 있던 담배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설마 정말로 인형이 뽑혀 나올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던 수영은 예상치 못한 윤재의 특기를 눈으로 확인한 지금 마치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거, 가질 거야?”
한 차례 길게 연기를 내뱉은 수영이 물었다.
그 사이 윤재가 다시 한 번 슬쩍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곰 인형을 내려다봤다.
부들부들한 엷은 황토색의 털을 가진 곰의 배에는 ‘I LOVE YOU’라는 글귀가 새겨진 하트모양의 방석 같은 게 붙여져 있었다. 당장 겉으로 보기에 배를 누르면 ‘알라뷰~’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지만 굳이 그와 같은 시도는 하고 싶지 않은 윤재였다.
“필요하세요?”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영에게 형식적인 질문을 던진 윤재는 뜻밖에도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손을 확인하고 살며시 눈을 크게 떴다.
순간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어진 윤재가 잠시 그대로 서있는 사이 짧아진 담배꽁초를 꺾어 근처 비닐봉투에 던져 넣은 수영이 다시 손을 뻗어 와 윤재의 손에 들려 있는 인형을 가져갔다.
“가져도 돼?”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묘하게 진지한 목소리의 질문을 받은 윤재가 아무런 대답 없이 눈만 깜빡였다. 그로선 지금 자신이 들은 질문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받을게.”
이어져 들려온 말에 간신히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인 윤재는 손에 든 인형의 배를 누르는 수영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수영도 윤재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던 모양이었지만 두 사람의 예상과 달리 인형의 배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기대가 깨어지자 피식 작게 웃음소리를 낸 수영이 ‘추운데 어디 가서 커피라도 마실까.’라고 말했다.
고급 수트 위에 긴 검은 코트라는 멋진 옷차림을 한 채 한 손에 곰 인형을 손에 들고 있는 그는 지나는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는 시선을 받고 있었다.
“누구와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에요?”
조금 전 드문드문 들려왔던 수영의 통화 내용을 떠올린 윤재가 그렇게 묻자 추운 바람을 막기 위해 바짝 세운 코트 깃을 붙잡은 수영이 입을 열었다.
“그냥 친구 놈들이야.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자리라서 가능하면 참석할 생각이긴 하지만 네가 늦게까지 어울려주겠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전화를 걸어서 취소할 거야.”
“.......”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수영을 마주한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어느 순간 희미하게 미간을 좁히고서 말했다.
“...중간에 혼자서 술 마신 거 아니죠?”
예상치 못한 윤재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크게 웃음을 터뜨린 수영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큭큭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무슨 상관이야.”
여전히 웃음기가 섞여 있는 목소리로 가볍게 대꾸한 수영이 아무래도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조금 전 윤재의 진지한 표정을 다시 떠올리고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은 수영도 자각하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자신의 기분이 조금 떠있는 상태라는 걸.
아까 전 통화를 막 끝낸 시점에서 윤재가 어울리지 않게 인형 뽑기를 시도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조금 놀랐던 그는 이내 레버를 조정하는데 집중하는 윤재를 보며 문득 귀엽다는 생각을 떠올렸었다.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수수하게만 보일 뿐인 김윤재는 그러나 보이는 것처럼 그저 수수하기만 한 남자는 아니었다. 무슨 일에든 항상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로 임하는 그는 때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또 응원을 보내고 싶게 만들기도 했지만 또 어떨 땐 바로 조금 전처럼 엉뚱한 상황을 만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끔 만들기도 했다.
그간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부정해온 것들을 간신히 스스로 인정하기로 한 이후로 수영은 윤재를 상대로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어느 정도 솔직하게 행동으로 표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서 일해야 돼요. 이틀 뒤 병원에 가려면 미리 밑반찬도 만들어야 하고... 그 전에 처리할 집안일도 있어요.”
여전히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윤재의 말을 듣고서 살짝 고개를 끄덕인 수영은 그 이상 고집스럽게 제안을 이어가지 않고 깨끗이 뒤로 물러났다.
“가자. 바래다줄게.”
수영이 먼저 한 걸음을 뗀 것을 시작으로 윤재도 한참 전에 수영이 차를 세워두었던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두가 한 번씩 돌아볼 정도의 멋진 차림을 하고서 어울리지 않는 곰 인형을 손에 든 남자와 그의 옆에서 절뚝거리며 걷는 남자.
어딘가 동떨어진 듯 보이는 두 사람은 스치는 행인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나란히 북적거리는 주말의 거리를 걸었다.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아직까지도 멈추지 않은 채 느릿한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