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32화 (32/66)

32.

구정을 목전에 둔 재래시장은 종일 추운 바람이 몰아치는 차가운 날씨에도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평소 이 시간대면 한산했던 식당가부터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특히 제사 음식에 쓰이는 식재료를 팔고 있는 가판대 앞에는 당장 서있을 자리가 없어 한꺼번에 밀려든 손님들이 어쩔 수 없이 줄을 서는 진풍경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늘 손님이 없는 현실을 한탄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던 채소 가게 주인 할머니는 모처럼만에 맞이한 호황에 한시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주름진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 윤재 총각 왔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손님이 많네요.”

앞의 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간신히 주인 할머니와 마주한 윤재가 평상시대로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지금 윤재가 서있는 곳에 자리한 채소가게는 평상시 그가 장사에 필요한 식재료를 꾸준히 구매해온 거래처 중 한곳으로, 그로 인해 이곳의 주인인 할머니와 윤재는 일정의 돈독한 친분을 쌓아오고 있었다.

“어휴, 최근에 손님이 하도 없어서 미리 사둔 채소들 다 썩어 버릴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명절이 다가와서 다행이네. 사람 사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나봐.”

그렇게 말하며 씨익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은 할머니는 ‘이것들도 다 파셔야죠.’라는 윤재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짧은 안부를 주고받은 뒤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신중히 채소를 훑어보기 시작한 윤재의 곁으로 다가온 할머니가 늘 그렇듯 가판대에 놓인 채소들을 들어 보이며 간략한 설명에 나섰다.

“여기 이 감자가 어제 새로 들어온 거야. 먼저 있던 건 싹이 나기 시작해서 치웠어. 고추는 이쪽 게 더 싱싱하고. 전에 사간 청양고추는 어땠어? 많이 매웠어?”

“네. 이전에 사갔던 것들보다는 많이 매웠어요. 평소랑 똑같이 넣으니까 손님들이 맵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평소 사용하던 거의 반 정도만 넣고 있어요.”

“그래, 그 편이 돈도 절약되지. 오늘은 뭘 사러 왔어? 내가 직접 골라줄까?”

“일단은 양파랑 무랑 파요. 보니까 감자 상태가 좋은 것 같은데 이것도 좀 사갈게요.”

“그래, 감자는 이쪽 바구니에 있는 게 더 싱싱하고 좋아. 원래는 어제 막 들어온 거라 옆의 거보다 더 비싸게 받아야 하는데 윤재 총각이니까 내 똑같이 받을게.”

“고맙습니다. 아, 이건 시래기인가요?”

“그거? 응. 시래기. 그것도 줄까?”

“네. 이것도 좀 담아주세요. 이거 보니까 오랜만에 구수한 시래기 된장국 만들어서 먹고 싶어지네요.”

윤재의 말에 할머니가 껄껄 웃음소리를 냈다.

“처음엔 어떻게 음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걱정을 하더니만 몇 달 새 완전히 익숙해졌네 그려. 내 척 보기에도 윤재 총각은 손이 여물어서 음식을 잘 할 거 같았어. 전에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 우리 아들은 그림도 참 잘 그린다고. 내 보기에 손으로 하는 건 다 잘 할 거 같아.”

계속 이어지는 할머니의 칭찬세례에 조금 민망한 기분이 된 윤재는 당장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어색한 미소만을 머금었다. 어느 샌가 이곳 시장 안에서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식당을 꾸려 가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효자’로 자신의 존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을 알게 된 그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쑥스러움을 넘어서 다소 민망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인데 그 일로 인해 조금씩 자신의 존재가 미화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아무래도 이전처럼 편하게 장을 볼 수가 없었다. 가판대를 지날 때마다 자신을 알아보고 칭찬을 해오는 아주머니들로부터 힘내라는 응원을 듣게 되는 것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것도 다 정겨운 시장 사람들의 인심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이 점점 차가워졌다.

늘 그렇듯 꼼꼼한 선별을 거쳐 필요한 식재료를 모두 구매해 가게로 돌아온 윤재는 뜻밖에 가게 문 앞에 서있는 성호를 발견하고 한층 걸음에 속도를 올렸다.

“어. 왜 벌써 왔어? 아직 시간 안 됐잖아.”

윤재를 발견하자마자 꾸벅 목례부터 한 성호가 얼마 동안 차가운 바람을 맞고 서 있었는지 빨갛게 변한 콧잔등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어제 제 사정으로 하루 쉰 게 너무 죄송해서 오늘은 좀 빨리 왔어요.”

셔터를 올리기 위해 점퍼 주머니 안에서 자물쇠 열쇠를 꺼낸 윤재의 손에서 낚아채듯 열쇠를 건네받은 성호는 곧바로 능숙하게 자물쇠를 딴 뒤 셔터를 올리고 가게 문을 열었다.

익숙한 가게 안을 습관적으로 크게 한 번 둘러보고 홀을 지나쳐 주방 안으로 들어선 윤재는 장을 봐온 식재료들을 먼저 테이블에 놓은 뒤 점퍼를 벗었다. 이어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걷는 것으로 적당히 일할 채비를 마친 그는 그 사이 뒤에서 계속 서랍을 뒤적이고 있는 성호를 돌아보았다.

“왜?”

“제 앞치마가 안 보여서요.”

“!”

성호의 말을 들은 것과 동시에 어제의 일을 떠올린 윤재가 곧바로 다른 선반의 서랍을 열어 앞치마를 꺼냈다. 평소 성호가 사용해온 앞치마는 늘 퇴근하기 전 그가 정리해왔었지만 어제는 성호가 아닌 윤재가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가 사용하는 서랍에 들어가 있었다.

생선을 손질하기 위해 도마와 칼을 꺼낸 윤재가 그의 옆에서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있는 성호의 모습을 잠시 그대로 지켜보았다.

최근 사이 부쩍 살이 찐 탓일까, 어제 수영이 허리에 둘렀을 때는 여분이 많이 남았던 끈이 지금 성호의 허리에 둘러지자 아주 짧은 매듭만을 남겼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 폭식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한 성호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비교해 적어도 10킬로그램 이상은 몸이 불어난 듯 했다.

익숙하게 지정석에 의자를 놓고 앉아 양푼을 앞에 두고 감자 껍질을 벗기기 시작한 성호가 멀찍이 싱크대 앞에 서서 생선을 손질을 하고 있는 윤재의 뒷모습을 슬쩍 쳐다봤다.

엷은 민트색의 스웨터에 검은색 코듀로이 바지를 받쳐 입고 있는 윤재는 늘 그렇듯 보온성과 편의성을 앞세운 옷차림을 선보이고 있었다. 소재 면으로 볼 때 다소 부피가 큰 옷차림이었지만 그럼에도 심하게 호리호리한 그의 체격은 그 안에서 완전히 감춰지지 않고 있었다. 걷혀진 소매 아래로 뻗어있는 가느다란 팔이 자연스레 성호로 하여금 윤재에게 자신의 살을 떼어 갖다 붙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괜찮으셔?”

문득 들려온 질문에 잠시 동안 멍하니 윤재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성호가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교통사고이긴 한데 다행히 가벼운 접촉사고였어요. 병원에서 검사해 보니까 뼈에 이상도 없었고요. 그래도 많이 놀라신 것 같아서 하룻밤 옆에서 같이 잔 뒤에 아침에 올라왔어요.”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는 윤재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져 있었다. 하룻밤 사이 부친을 교통사고로 잃고 자신 역시도 교통사고로 인해 영영 회복되지 않는 커다란 후유증을 얻게 된 그로서는 지금 들은 이야기가 단순히 지나가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많이 나아졌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 한동안 당시의 상황이 재현되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던 그는 지금도 거리를 이동하다 빠른 속도로 바로 옆을 스쳐가는 차나 오토바이를 볼 때면 무심코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추는 일이 많았다.

“어제는 혼자서 가게 보시느라 많이 바쁘셨죠? 죄송해요.”

“어쩔 수 없었잖아. 괜찮아.”

“그래도 서빙이랑 요리 혼자서 다 하시려면 많이 힘드셨을 텐데... 급하게 제 친구 놈이라도 대신 보낼 걸 그랬어요. 제 사정 때문에 사장님께 폐를 끼친 게 고속버스 안에서도 계속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진심으로 많이 미안해하는 성호의 표정을 눈으로 확인한 윤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정말 괜찮으니까 마음 쓰지 마. 어제는 다행히 도와준 분이 있어서 큰 문제없이 잘 마무리 했어.”

“...도와준 분이요? 누구요?”

감자 껍질을 벗기던 손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온 성호를 슬쩍 쳐다본 윤재가 짧은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가끔 여기에 혼자 오시는 남자 분.”

“아~ 혹시 그 대머리 아저씨요?”

곧바로 머릿속에 한 중년의 남자를 떠올린 성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윤재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정황 상 그냥 그렇다고 묻어두고 지나쳐도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양심적으로 기껏 도와준 사람의 노력을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것에 미안한 기분이 든 그는 성호의 오해를 풀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키가 크고 젊은 남자 분.”

윤재의 말을 듣고 잠시 허공에 시선을 던진 성호가 곧바로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서 ‘아아.’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는 곧 납득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수영 대리님이요? 그 손님이 직접 일을 도와주셨다고요?”

이름에 이어 직함까지 알고 있는 성호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낸 윤재가 ‘전에 명함을 받았어요.’라는 말을 듣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짧게 대답하고 등을 돌린 윤재가 다시 생선을 손질하기 시작하자 잠시 그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이 가게에서 수영을 만난 뒤로 몇 번인가 형식상 그와 인사를 나눴던 성호는 얼마 전 크리스마스이브 날 술에 취한 윤재를 집에 바래다주겠다고 스스로 나서는 수영의 태도를 보며 그가 겉보기와 달리 꽤나 자상한 성격의 남자인 모양이라고 혼자 생각했었다. 그 전에 이미 수영이 가게에서 추태를 보이는 진상손님을 쫓아준 일도 있었던 만큼 그 방향으로 향하는 성호의 평가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이라 어딘가 벽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알고 보면 마음이 따뜻한 그 사람에겐 그와 같은 외모가 플러스 못지않게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하고 성호는 약간의 안타까운 감정을 담아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찾은 의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성호는 멀쩡한 수영을 두고 괜한 안쓰러움을 느꼈던 스스로가 그저 헛 다리를 짚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친분을 쌓은 의 바텐더인 유민은 종종 그곳을 찾는 수영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고 했고, 그런 그가 들려주는 수영에 대한 이야기는 성호가 처음 수영을 보고 느꼈던 분위기와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유민으로부터 전해들은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 성호가 파악한 수영은 평상시 겉으로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타입으로, 귀찮은 일에는 손도 대지 않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남자였다. 단순히 열거한 조건만 보면 주변에 사람은커녕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 같은 타입이지만 유민의 목격담에 따르면 이제껏 수영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연스레 많은 사람들 사이에 중심이 되는 모습을 보여 온 듯 했다. 다소 차갑긴 해도 솔직한 데다 어딘가 시원스러운 그의 성격이 지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고 있는 듯 하다고 개인적 의견을 말한 유민은 동시에 수영의 외모에 대한 칭찬도 빠뜨리지 않았다.

하긴, 어차피 세상은 그런 거였다. 일단 외모만 끝내주게 잘나면 착하면 착한대로 성격이 나쁘면 나쁜 대로 각기 다른 매력이라며 칭송받는 게 어느 샌가 일반화되어 있는 전체적 사회 분위기였다. 그 증거로 종종 <민들레>를 찾는 수영을 보며 겉보기와 달리 마음이 따스한 사람인 듯 하다고 생각했던 성호 역시도 정작 그와 전혀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해서 수영에 대해 실망의 감정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대신 몇 가지 새로운 의문점이 생기긴 했지만.

“그 손님, 사장님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

갑작스럽게 들려온 성호의 말에 무심코 생선을 손질하던 손을 멈춘 윤재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해온 윤재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서 열심히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는 성호가 말을 이었다.

“얼마 전 바(bar)에 갔다가 그 손님을 아는 바텐더 분한테서 직접 들었는데요... 그 손님, 아주 친한 사람 아니면 절대 남의 일엔 안 나서는 사람이래요. 귀찮은 일에 엮이는 걸 굉장히 싫어해서요.”

“.......”

“그런데 그 손님, 사장님 일엔 적극적으로 나섰잖아요. 사장님과는 친한 사이도 아닌데 말이에요.”

“.......”

“사실 크리스마스이브 날 바(bar)에서 취한 사장님을 보고 먼저 다가온 것도 그 분이었어요. 그래서 전 원래 그 손님이 겉보기와 달리 되게 정의감에 불타는 타입인가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이 얘길 했더니 바텐더 분이 막 웃으시더라고요. 진짜 한참을요. 지금까지 들은 얘기 중에 제일 재미있다고 하면서요. 좀 무안했어요.”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든 성호가 그제야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재를 발견하고 스치듯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하거나 관심 있지 않으면 보통 그렇게까지 나서지 않잖아요. 솔직히 저만 해도 사장님과 잘 모르는 사이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거예요. 그러니까... 겉보기엔 좀 많이 다른 타입이지만 조금씩 가까워지면 두 분 의외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일단은 그냥 제 생각이지만요.”

마지막엔 살짝 쑥스러운 듯 말끝을 흐린 성호가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자 곧 사각사각 감자의 껍질이 벗겨지는 소리가 적막한 주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몸을 돌려 싱크대를 마주하고 선 윤재도 다시 칼을 손에 쥐었다. 중간에 방치해두었던 생선의 배를 갈라 신중히 내장을 손질하기 시작한 그는 그러나 조금 전 들었던 성호의 말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성호의 말이 전부 옳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가 한 말 중 상당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수영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성격이라는 것도, 그런 그가 자신과 관련된 귀찮은 일을 몇 번이나 스스로 나서서 떠맡았다는 것도. 정의감은커녕 애초에 귀찮은 일엔 손도 대지 않는 타입인 그가 몇 번이나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에 나섰다는 것이 그저 단순한 동정에서 나올 만한 행동이 아니라는 건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여기 이쪽에 있는 감자도 다 같이 손질할까요?”

문득 들려온 성호의 질문에 잠시 동안 이어지던 생각을 멈춘 윤재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그건 내일 쓸 거야. 다른 채소는 특별히 손질할 게 없으니까 홀 청소 좀 해줄래?”

“예엡-!”

힘차게 대답한 뒤 주변에 떨어져 있는 감자 껍질을 주워 양푼에 담기 시작한 성호를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윤재는 이내 가벼운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려 잠시 손에서 놓았던 생선 손질을 계속해 나갔다.

*

“우와-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에요. 윤재씨.”

반갑게 윤재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인사를 건네 온 건 아주 오랜만에 <민들레>를 찾은 혜리로, 오늘의 그녀는 혼자서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회사동료들의 뒤를 이어 가게 안으로 들어선 혜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장 먼저 가게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친구와 단 둘이서 찾은 것을 마지막으로 두 달 가까이 이곳에 발길을 뚝 끊었던 그녀는 반가움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성호와 함께 서둘러 대규모 손님이 앉을 만한 넓은 자리를 만든 뒤 주문서를 들고 일행 앞으로 다가간 윤재는 이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는 남자가 지나친 것을 끝으로 잠잠해진 입구에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어째서인지 곧 안으로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곳에서의 회식자리에 빠지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던 만큼 약간의 의아한 기분을 안은 윤재는 마치 그런 자신의 머릿속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하듯 성호가 일행에게 던진 질문을 듣고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우수영 대리님이 안 보이시네요.”

아까 전 윤재에게 말했듯 수영으로부터 직접 명함을 건네받은 성호는 수영의 이름뿐 아니라 그가 다니는 회사의 이름과 직함까지도 알고 있었다.

“우대리님은 오늘 선약 때문에 회식에서 빠지셨어요.”

“아...”

아까 전 주방에서 잠시 수영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던 성호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제 하루 자신을 대신해 윤재를 도왔던 수영에게 직접적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인사를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한 뒤 물수건과 컵을 가지러 주방 입구로 향했다.

“사실 오늘 회식 장소는 다수결로 정했는데 전 여기를 밀었어요. 윤재씨.”

연분홍의 예쁜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건 혜리가 옆에 서있는 윤재에게 애교 있는 목소리로 말하자 곧 그녀와 마주한 위치에 앉은 한 동료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나도 여기로 오자고 했어요. 난 이 집 과메기무침이 그렇게 좋더라고.”

“나도 여기 추천했어요~.”

마치 칭찬이라도 듣길 바라는 듯한 남자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윤재는 그 사이 곁으로 다가와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기 시작한 성호를 쳐다봤다.

“상훈씨는 다른 데 밀었지? 민우씨도.”

“여기엔 또 누가 오자고 했지?”

“저요.”

“아, 그래 성미씨도 여기 찌개가 좋다고 했지. 근데 아직 이기기엔 숫자가 안 맞는데...”

“우대리님도 <민들레>를 추천하셨어요.”

문득 들려온 혜리의 말에 줄곧 주문서를 손에 든 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윤재의 눈이 살며시 커졌다.

그때까지 다수결의 승리자를 머릿속으로 추리는 작업을 하던 몇몇 사람이 그제야 상황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대리는 참석도 못하면서 그냥 의견만 내고 간 거야?”

“아까 <낙원 갈비>랑 동점이 나와서 결론이 안 났잖아요. 그래서 성미씨랑 제가 먼저 사무실을 나서려고 하시는 진욱씨랑 우대리님한테도 여쭤봤어요. 진욱씨는 아무 데나 괜찮지 않냐고 했고 우대리님은 <민들레>에 한 표 던지셨고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우대리님의 한 표가 더해져서 여기로 결정된 거죠.”

거기까지 말하던 혜리가 문득 윤재에게 시선을 던지고 미소를 머금었다.

“윤재씨, 지금 여기에 한 표 던진 사람들 이름이랑 얼굴 확인하셨죠? 나중에 이 사람들 또 오면 꼭 한 젓가락씩 서비스 해주셔야 되요~.”

“혜리씨, 아무 남자한테 그렇게 애교 부리면 어떡해? 여기 좀 봐. 영호씨 표정이 어두워졌다고.”

“두 사람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풋풋한 커플이라고 우리들 앞에서 자랑하는 거야 뭐야. 연애는 다른 데 가서 조용히 둘이 하세요.”

장난 섞인 누군가의 말에 곧 자리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한바탕 떠들썩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려온 수영의 이야기에 잠시 동안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재는 옆에 앉아 있는 혜리가 일행을 대표해 씩씩한 목소리로 주문을 하러 나서자 곧 펜을 든 손을 움직여 주문서에 체크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

“말씀 좀 전하러 왔습니다.”

주말이든 평일이든 낮 시간 동안이면 지겹도록 들어온 말에 ‘죄송합니다.’라는 짧은 대답으로 응수한 윤재는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점차 멀어진 뒤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구수한 냄새가 가득한 주방 안은 보글보글 끓는 소리로 가득했다. 지금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는 것은 시래기 된장국으로, 그것은 윤재가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요리들 중 하나였다. 중심이 되는 재료라고 해봐야 타이틀대로 시래기와 된장뿐이었지만 그 외에 달리 특별한 재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모친이 담아둔 된장 자체가 워낙 좋은 맛과 향을 지닌 덕분에 일단 그것만 넣으면 국이든 찌개든 웬만해선 기본 이상의 맛은 나오고 있었다.

구수한 시래기 된장국에 이제 막 완성된 따끈한 밥을 말아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윤재는 양치 후 개운한 기분으로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거실에 놓아둔 작은 화분들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평상시 아무리 피곤하고 귀찮아도 잊지 않고 필요한 만큼 제때에 물을 줘온 덕분에 거실 안을 채우고 있는 화분들은 모두가 싱싱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틀 뒤 병원에 갈 때 제일 예쁜 놈으로 하나 골라서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렬로 늘어서 있는 화분을 세세히 훑어보던 윤재는 문득 또다시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전 죄송하다는 말로 보낸 교회 사람이 동을 착각해 다시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잠시 침묵을 지킨 그는 이번에는 연거푸 두 번 초인종 소리가 들려오자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나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나.”

짧은 텀을 두고 들려온 건 수영의 목소리였다.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맞이한 윤재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현관 앞에서 자리를 지키다 잠시 후 또다시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그제서야 멈춰 있던 다리를 움직였다.

문을 열자 곧 높은 곳에 위치한 수영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네.”

인사도 없이 멍하니 시선만을 보내오는 윤재를 향해 그렇게 말을 건넨 수영이 직접 문을 닫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휴일에 어울리지 않게 수트를 갖춰 입고 있는 그는 커다란 손을 목 언저리로 가져가 단정하게 매어져 있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뒤 가장 위의 단추 두 개를 차례로 풀었다.

“들어가도 되지?”

이미 들어와 놓고 새삼스럽게 질문을 던진 수영은 대답 대신 현관 앞에서 비켜선 윤재를 스쳐 거실로 향했다.

“어쩐 일이에요?”

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를 귀에 담은 채 이제 막 소파에 엉덩이를 내려놓은 수영이 입을 열었다.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렀어. 너 오늘 쉬는 날이잖아.”

돌아온 수영의 대답에 윤재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아무래도 수영은 격주 토요일에 쉰다는 자신의 말을 들은 이후로 철저하게 날짜 계산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연락도 없이 찾아오면 곤란해요.”

거실 한 쪽에 선 채로 윤재가 진지하게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수영이 곧바로 대꾸해왔다.

“그럼 앞으로는 순서를 지켜서 연락부터 하고 올게. 핸드폰 번호 좀 알려줘.”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과 자연스레 연락처를 교환해 온 수영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고작 전화번호 하나 따내는 데에.

그러나 당연하게도 윤재는 순순히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이야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던 수영은 실망하거나 초조해 하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뭐 앞으로도 이렇게 불쑥불쑥 방문할 수밖에 없겠네. 잘 생각해 보면 일상의 지루함을 깨는 서프라이즈 이벤트도 되고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불쑥불쑥 찾아올 기세의 수영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윤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영에게 연락처를 알려주는 것에는 당연히 저항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깜짝 방문이 이어지는 것을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까진 운이 좋아 단 둘이 마주쳤지만 만에 하나 지인과 함께 있을 때에 수영의 방문을 받는다면 역시나 곤혹스러운 상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나은 선택지를 고르기로 한 윤재가 근처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수영이 또박또박 불러주는 번호를 누른 윤재는 곧 들려오기 시작한 수영의 벨소리를 듣고 다시 한 번 통화버튼을 눌러 연결을 해지했다.

액정에 찍힌 번호를 확인한 수영이 핸드폰을 재킷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보통 상대와 연락처를 교환하는 것을 시작으로 관계를 맺어온 그에게 있어서 이렇게 만난 지 한참 만에 번호를 교환하는 상황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것이었다.

“밥 먹었어?”

오후 3시를 가리키는 벽시계를 흘끗 쳐다보며 수영이 묻자 윤재가 ‘네.’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럼 나갈까?”

갑작스런 제안에 놀란 윤재가 곧바로 ‘아뇨’라는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연 찰나 수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니면 집에서 시간을 보내도 좋고. 그동안 네가 그린 그림 구경하고 싶었거든. 전에 본 골목길 그림이 꽤나 인상 깊어서 지금도 기억이 나.”

그렇게 말하며 베란다 앞에 놓인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간 수영은 그 위에 놓인, 스케치만 되어 있는 그림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하얀 종이 위에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 것은 바다였다. 언젠가 윤재와 함께 가서 봤던 풍경과 꼭 닮아 있는.

남들은 그냥 무의미하게 스쳐 넘기는 장면조차 그는 또렷이 눈동자에 각인시키고 있었던 것일까. 그 날 추운 해변을 거닐며 윤재가 보고 느꼈던 광경이 어땠는지 수영은 지금 자신의 손에 쥐어진 그림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지하게 그림을 살피던 수영이 스치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윤재가 더 이상 쓸쓸한 골목길의 풍경만을 그리지 않도록, 앞으로 그가 더 다양한 것들을 기억하고 그릴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자. 밖에 날씨도 좋아.”

“.......”

“온종일 집에만 있기엔 아까운 날씨야.”

묘하게 진지해진 수영의 목소리가 진심으로 와 닿은 걸까, 잠시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던 윤재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옆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간단히 외출준비를 한 뒤 수영과 함께 건물을 나선 윤재는 계단을 내려와 몇 발자국을 옮기던 중간 문득 뺨에 와 닿은 차가운 느낌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 막 하늘에서 미약한 눈송이가 나풀나풀 내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옆에 선 수영을 쳐다본 윤재가 물기가 남은 뺨을 손등으로 비비며 말했다.

“날씨... 좋다고 했잖아요.”

“아까까진 좋았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대답한 수영은 자신이 먼저 근처에 세워둔 차 앞으로 향하며 시동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문득 들려온 윤재의 질문에 운전석 문을 열고 그를 돌아본 수영이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영화 좋아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