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31화 (31/66)

31.

예상치 못한 수영의 말에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호연이 이내 태연함을 가장하고서 손에 들고 있던 담배 끝을 재떨이에 털었다.

처음에는 그저 당혹감만을 느끼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지금 들려온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해 감에 따라 서서히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한 호연은 그러나 당장 그와 같은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스스로를 컨트롤하고 있었다.

“같이 못 갈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지금 안고 있는 복잡한 감정들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를 내서 질문을 던진 호연이 한 차례 깨끗이 재를 털어낸 담배를 다시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지금의 그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호연과 잠시 동안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던 수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나온 그의 말은 진지함을 넘어 단호했다.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

조금 전 수영으로부터 같이 여행을 가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급격히 페이스가 흔들리기 시작한 호연은 그것을 넘어서는 한 마디를 귀에 담은 지금,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수영과의 관계가 꽤나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고 틀림없이 믿어온 호연으로서는 아무래도 지금의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서로를 애인이라기보다 섹스 파트너에 가깝게 인식하고 출발을 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꾸준히 이어져온 만남의 과정에서 만족스런 잠자리를 통해 충분히 서로간의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켜왔다고 믿어온 호연은 상대인 수영 역시 자신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왔었다.

애초에 수영은 말했었다. 누가 먼저가 되던 한 사람의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 깨끗이 관계를 정리하자고. 물론 그 말에 호연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었다. 그 역시 지금까지 다른 파트너들과 그런 심플한 관계를 맺어왔었던 게 사실이었고, 그 중 대부분은 자신 쪽에서 먼저 상대에게 이별을 고했었던 터라 수영과의 관계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호연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는 입장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수영과 얼마의 관계가 이어지든 결과적으로 먼저 이별 얘기를 꺼내는 건 자신이 될 거라고 호연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그 때만 해도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우수영이라는 남자를 상대로 이 정도로까지 진심이 되리라고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일단 한 번 차오르는 감정을 눌러 죽인 호연이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어째서 지금의 이 상황이 만들어진 건지 그에겐 곧바로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조금 갑작스러운데...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돼?”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머금고서 호연이 묻자 잠시 텀을 두고 수영이 대답을 해왔다.

“별다른 이유는 없어.”

납득되지 않는 수영의 대답을 듣고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은 호연이 다시 한 번, 이번에는 확신을 품고 질문을 던졌다.

“혹시 새로운 상대라도 생긴 거야?”

틀림없는 정답일 텐데 정작 마주한 수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잠시 후 수영의 입에서 나온 대답을 듣는 순간, 호연의 표정이 일순 차갑게 얼어붙었다.

지금 들려온 대답이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을 품고 있는 호연은 자신을 상대로 태연히 거짓을 말하고 있는 수영에게 분노보다도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정도로 진심인 거였다.

지인들로부터 전해 듣기로 이제껏 누구와 사귀던 아무렇지 않게 밝혀왔던 그가 일부러 그 존재를 숨기며 감쌀 만큼.

크리스마스이브라는 특별한 날, 자신과의 선약을 내팽개치고 누군가를 부축해 바(bar)를 떠나던 수영의 모습을 떠올린 호연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시에는 그저 스쳐가는 기분 나쁜 기억으로만 여기려 했지만 이제는 그 예감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호연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심정적으로는 아무리 믿고 싶지 않아도 명확한 정황이 포착된 상황에서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 날 수영의 부축을 받았던 분홍색 니트를 입은 남자의 존재를 확인시켜준 휴학생이 유민에게 말했다고 했다. 수영이 가끔씩 자신이 일하는 주점에 홀로 찾아온다고.

안 그래도 주변에 지인이 넘쳐나는 남자가 굳이 혼자서 궁상맞게 주점을 찾는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정황 상 모든 것은 분명했다. 다만 이제까지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써 귀와 눈을 닫고 스스로를 바보로 둔갑시키고 있었을 뿐.

지금 들려온 수영의 대답을 통해 자신의 짐작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확인한 호연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새삼스럽네. 어차피 우리들은 처음부터 뭘 정리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관계로 시작했잖아. 안 그래?”

여유로운 얼굴로 그렇게 질문을 던진 호연은 그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수영의 넓은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고 말을 이었다.

“특별한 상대가 생긴 것도 아니면 그냥 이대로 편하게 지내.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억지로 안아달라거나 하지 않아. 이래봬도 잠자리 상대가 부족하진 않거든. 그러니 앞으로도 언제든 편할 때... 뭐, 친구나 직장 상사 욕이라도 하고 싶을 땐 여기로 찾아와. 술친구로서 말 상대를 해줄 테니까. 어차피 서로 진지하게 사귄 것도 아닌데 어색한 분위기로 완전히 관계를 끊고 말고 하는 것도 촌스럽지 않아? 나도 그렇지만 당신도 그런 거에 구애받는 타입은 아니잖아?”

얼굴 위엔 웃음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지금 호연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당분간은 형태를 바꿔서라도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다급한 마음이 지금의 호연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 완전히 끝이 나버려 두 번 다시 얼굴을 보지 않게 되는 상황만은 반드시 막고 싶은 그였다. 당장은 그것만 막아서 어떻게든 평범하게 관계를 이어간다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 다시 수영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자신이 호연에게는 있었다.

성가신 장기전을 각오할 만큼 호연은 수영에게 진심이었다. 아무래도 뜻대로 되지 않는 상대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매력적인 연하의 남자를 호연은 이렇게 허무하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기서 추하게 헤어지지 않겠다고 매달릴 생각도 그에게는 없었다.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수영은 알겠다는 한 마디로 깨끗이 자신을 놓아주었을 것을 알고 있는 호연은 그렇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자신만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문득 머릿속으로 이제껏 자신이 버렸던 상대들도 지금 자신이 품고 있는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 호연은 그 순간 문득 들려온 노크소리에 자연스레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와.”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열린 문틈으로 유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늘 그렇듯 단정한 유니폼 차림을 하고 있는 그는 먼저 수영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한 뒤 천천히 호연에게 다가왔다.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

“...어머니가?”

“네, 사장님과 만나 하실 얘기가 있다고 하셔서 일단 VIP룸으로 안내해드렸습니다.”

이어진 유민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 호연이 입구로 향하기 전 수영을 돌아봤다. 아직 수영과의 얘기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차라리 좋은 타이밍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혹시 술 대신 따로 마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유민이가 가져다줄 거야. 나도 최대한 빨리 얘길 마치고 올 테니까. 아니면 그 사이 바테이블로 자리를 옮겨서...”

호연의 말이 채 끝나기 전 긴 다리를 펴고 일어난 수영이 살짝 허리를 숙여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이만 갈게.”

“아, 그래. 퇴근 후에 왔으니 피곤하겠지. 그럼 아까 얘긴...”

“평범한 술친구라면 난 상관없어. 대신 앞으로 여기에 오게 되면 계산은 확실히 할 거야.”

냉정한 수영의 대답을 들은 호연의 기분은 복잡했다. 기쁘다고는 결코 할 수 없었지만 그나마 가느다란 끈이라도 남아 있게 된 것에 그는 다행스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호연은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대체 인간 장호연이 어디까지 불쌍해질 수 있는 것인지, 지금의 그는 이제까지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쓰디쓴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갈게.”

“...나중에 연락할게.”

입구를 나서기 직전 문득 고개를 돌려 호연을 쳐다본 수영은 아무런 대꾸 없이 곧 두 사람의 곁을 스쳐 방을 나섰다.

수영의 발자국이 점차 멀어지다 완전히 사라진 뒤 기다렸다는 듯 가늘게 한숨을 내쉰 호연이 천천히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줄곧 억지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얼굴 근육이 금방이라도 경련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저기... 수영씨와는...”

조금 전 수영의 입에서 들려온 술친구 어쩌고 하는 말을 듣고 난 뒤로 조금 놀란 상태에 있는 유민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잠시 미간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떼어낸 호연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순식간에 매서워진 호연의 표정을 확인한 유민은 조금 전 자신이 들은 것이 그냥 지나치는 말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덩달아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죄송합니다.”

호연과는 알고 지낸 기간이 긴 만큼 평소 단둘이 있을 때면 다소 깊은 사생활 얘기도 편하게 나눴던 터라 지금도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꺼냈던 유민은 뒤늦게서야 자신의 실수를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방금 전 수영과 몇 마디를 나눌 때의 호연이 너무도 태연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미처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 그의 가장 큰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안내해.”

당장은 모친과의 만남에만 집중하기로 한 호연이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고 유민에게 말했다. 의식적으로 억눌러진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한 톤을 유지하고 있었다.

“네, 이쪽으로...”

“......”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한 호연을 슬쩍 쳐다본 유민이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해요.”

유민의 말을 들은 호연이 순간적으로 입가를 비틀었다.

“짜증나니까 닥치라고, 꼭 말로 해야 알아듣겠어?”

날카로운 호연의 말에 한층 더 굳어진 표정이 된 유민은 이후 긴 복도를 이동하는 동안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호연의 히스테리에 시달리게 될 것 같다는 확신을 품은 그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유유히 이곳을 빠져나간 수영이 뒤늦게 원망스러워지는 그였다.

*

호연과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운전대를 잡고 있는 수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몇날 며칠에 걸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나온 신중한 결론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연과의 관계에 완전히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수영이 이제까지 만나온 사람들을 통틀어 호연은 눈에 보이는 스펙과 육체적 궁합 면에서 가장 높은 포지션을 차지할 정도로 만족스런 상대였던 만큼 직접적으로 그에게 돌아설 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말을 꺼내는 것에 수영은 아무래도 일정의 망설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끝내 신중하게 내린 결심대로 상황을 진행시킨 수영은 그와 같은 스스로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지 않았다.

최근 들어 윤재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되짚어 생각하기 시작한 뒤부터 수영은 드물게도 한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호연을 포함해 어느 누구와도 잠자리를 갖지 않았었다. 사실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단순히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새삼 분명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최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던 호연과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는 내내 조금도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에서 결국 호연과 자신을 연결해 온 건 단순히 ‘섹스’라는 이름의 미약한 고리뿐이었다는 것을.

윤재와 다시 만나 조금씩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어느 시점에서부터 수영은 이제껏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조금 전 를 찾았던 것이 그 생각들을 정리한 끝에 나온 하나의 결과물이었다. 이제 와서 섹스 파트너를 끊어낸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가 갑자기 깨끗해진다는 생각은 물론 하지 않는 수영이었다. 다만 그는 이것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제 막 하나의 과정을 거친 수영은 예상대로 깨끗하게 수긍하는 태도를 취해 온 호연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이미 질리도록 반복해온 상황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으로 하여금 이처럼 성가신 감정을 갖게끔 만든 것이 누군지 물론 수영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찾아와 익숙한 골목 한 켠에 차를 세운 수영은 평소보다 많은 차들이 서있는 주변을 훑듯이 둘러보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내리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차에서 확인한 시간은 12시 33분이었다.

딸랑-

작은 종소리를 울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 수영은 어쩐 일인지 평소와 달리 제법 많은 테이블이 채워져 있는 광경을 먼저 눈으로 확인하고 적당히 비어 있는 자리로 향했다.

“어서 오...”

종소리를 듣고 주방 밖으로 나온 윤재가 수영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 ‘그 일’을 겪었던 것이 영향을 준 것일까, 슬쩍 수영의 시선을 피하는 그의 얼굴엔 당혹감과 동시에 미묘한 감정의 흔적이 담겨져 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민망함에 가까울 듯한.

평소라면 당연히 성호가 주문을 받을 상황에서 어째서인지 그를 대신해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오는 윤재를 가만히 지켜본 수영이 문득 홀 구석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고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 여기 좀 빨리 갖다 줘요!”

호통에 가까운 남자의 재촉에 ‘죄송합니다!’라고 급하게 사과를 건넨 윤재는 곧 가져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서둘러 수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주문서를 든 윤재의 얼굴에서 다급한 감정을 읽어낸 수영이 주문에 앞서 질문부터 했다.

“성호인가 하는 알바생은 어디 갔어?”

“성호는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하루 쉬기로 했어요.”

윤재의 대답을 들은 수영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필 오늘처럼 사람이 밀려드는 날에 혼자 일하고 있는 윤재의 상황을 알게 된 그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모처럼의 호황을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쁘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소주 한 병이랑 생태찌개로 줘.”

“네. 그런데 지금 주문이 밀려서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난 별로 급하지 않으니까 먼저 주문받은 거 다 서빙하고 난 뒤에 천천히 갖다 줘도 돼.”

“죄송해요. 최대한 빨리 가지고 올게요.”

주문서에 빠르게 체크를 한 뒤 다시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하는 윤재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수영은 곧 고개를 돌려 구석 선반 가장 윗 칸에 놓여 있는 낡은 tv에 시선을 던졌다. 화면에 비춰지고 있는 것은 세간에서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로, 그 바로 앞자리에는 나이든 부부가 앉아 있었다. 평상시 수영이 이곳을 찾을 때마다 늘 꺼져 있던 tv를 일부러 켠 것은 아무래도 그 두 사람인 듯 했다.

차에서 서류가방을 들고 올지의 여부를 저울질 하며 무의미한 시선을 tv 화면에 고정하고 있던 수영이 문득 구석에서 들려온 외침을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골뱅이무침 한 접시 추가해달라고 했는데 멀었어요?”

“딱 5분만 더 기다리다 안 나오면 지금 먹은 것도 계산 안하고 나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어디 손님을 기다리게 하고 있어?”

하필 알바생이 빠진 날에 손님이 밀려들다니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여기저기서 재촉하는 말들이 나올 때마다 주방에서 ‘금방 가져갈게요!’라는 윤재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혼자서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고 음식을 만들려니 힘에 부칠 만도 했다. 평상시 숫자의 손님을 맞았다면 혼자서도 큰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었겠지만 분명히 말해 오늘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방 안에서 볶고 튀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다 잠시 후 급하게 밖으로 나온 윤재가 커다란 쟁반을 손에 든 채 가장 많은 손님이 차지하고 앉아 있는 창가 쪽의 테이블로 향했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부터 건넨 뒤 아직까지도 보글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냄비를 테이블로 옮긴 그는 그 와중에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재촉에 일일이 답하고서 다시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까지 서서히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는 분위기 속에서 덩달아 초조한 기분이 된 수영이 문득 구석 쪽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외침에 미간을 좁혔다.

“여기 빨리 좀 갖다 줘요! 너무 늦네!”

손님들의 재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윤재의 입장도 이해하고 있는 수영이 결국 불편한 마음으로 지키고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다른 손님들의 테이블을 지나쳐 주방 안으로 들어선 그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뭔가를 접시에 옮겨 담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느라 수영이 아주 가까이 다가온 뒤에야 그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윤재가 순간적으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빨리 만들어서 가져갈게요.”

“재촉하려고 온 거 아냐.”

짧게 대꾸한 수영이 잔뜩 어질러져 있는 주방 안을 빠르게 한 번 둘러보곤 이윽고 소매의 단추를 풀어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수영의 행동에 놀란 표정을 지은 윤재가 그 사이 또다시 밖에서 들려온 재촉소리에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간간히 수영에게 향하고 있었다.

“앞치마 어디 있어?”

“!”

소매를 걷어붙이는 것을 보고 급한 대로 잠시 서빙을 도와주려는 건가 생각하고 있던 윤재는 뜻밖에 제대로 도울 기세인 수영을 놀라움 반 난처함 반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수영에게 가게 일을 맡기는 것에 불편한 마음이 든 윤재가 망설이자 이번에는 밖에서가 아닌 바로 앞에서 재촉소리가 들려왔다.

“시간 없으니 빨리 줘. 나도 언제까지 기다리기 싫으니까 잠깐 좀 도우려는 것뿐이야.”

넥타이를 풀며 그렇게 말하는 수영의 얼굴을 잠시 가만히 올려다보던 윤재가 아무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인정하고 근처 서랍 안에서 평소 성호가 사용해온 앞치마를 꺼내 수영에게 건넸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 회사원의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수영은 곧 받아든 짙은 남색의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뒤 이제 막 완성된 안주가 담긴 접시를 쟁반에 옮겨 담으며 물었다.

“이거 어디로 가져가면 돼?”

“그건... 잠시만요.”

재빨리 테이블 한 쪽에 붙어 있는 주문서를 훑어본 윤재가 지금 수영의 손에 들려 있는 음식이 서빙되어야 할 테이블 번호와 위치를 알려주었다.

윤재에게서 건네받은 주문서를 직접 살펴 다시 한 번 위치를 확인한 수영은 곧바로 쟁반을 들고 주방을 나섰다. 모처럼 손님들로 들어찬 홀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대화소리가 섞여 많이 시끄러운 상태였다.

“아, 빨리 좀 갖다달라니...”

취기가 도는지 발갛게 변한 얼굴로 소리를 친 남자가 문득 곁으로 다가와 선 수영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만만한 인상의 윤재를 보고 난 뒤부터 줄곧 안하무인의 태도를 취해온 그는 체격에서부터 압도하는 수영의 존재를 앞에 두고서 스리슬쩍 얌전하게 태도를 바꾸었다. 입고 있는 옷차림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볼 때 아무래도 수영이 이곳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아닌 듯 하다고 속으로 판단한 그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를 테이블 중앙 자리로 옮기는 수영의 모습을 관찰하듯 살피다 문득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수영의 손목으로, 정확하게는 그 손목에 채워져 있는 고가 브랜드의 시계였다.

조용히 서빙을 마치고 남자에게서 등을 돌린 수영은 자신을 향해 오는 손님들의 시선을 무심히 지나쳐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갈 거 또 없어?”

“주문서 위에 올려둔 접시, 거기에 적힌 자리로 가져다주시면 돼요.”

열심히 프라이팬에 뭔가를 볶고 있던 윤재가 잠시 손을 멈추고 말하자 곧바로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자리에 놓인 접시를 쟁반에 옮겨 담은 수영이 가져갈 테이블 번호를 신속히 확인하고 다시 주방을 나섰다.

설마 퇴근 후에 이런 노동을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수영은 몇 차례나 바쁘게 홀과 주방을 오가며 밀려 있던 주문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날카로운 목소리로 잔뜩 짜증을 부리던 손님들의 대부분은 윤재를 대신해 수영이 서빙을 맡은 뒤부터 눈에 띠게 얌전해진 태도를 취했다. 일단 187센티의 장신이라는 점부터가 그들에겐 적지 않은 위협으로 작용하는 듯 했지만 그보다 당장 그들의 기세를 억누르고 있는 것은 손님들 앞에 음식을 내놓는 수영의 지극히도 사무적인 태도였다. 접객용 미소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한 얼굴을 하고서 쟁반에 놓여있던 접시를 테이블에 모두 내려놓은 수영은 일반적인 종업원들이 습관처럼 말하는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도 없이 휑하니 등을 돌려 다시 주방으로 사라졌다. 본인에게 일부러 차가운 태도를 취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수영의 외모 자체가 워낙 차가운 냄새를 풍기다 보니 자연스레 그와 마주한 손님들은 위축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냉정히 말해 수영은 윤재와는 다른 의미로 서비스업에 맞지 않는 남자였다.

“이건 제가 옮길게요.”

주방 안으로 들어선 수영이 이제 막 완성된 찌개를 쟁반에 담아 자신의 곁을 스쳐 홀로 향하는 윤재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정신없이 음식을 만드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윤재는 줄곧 더운 주방에 있었던 탓에 살짝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문받은 순서대로 하다 보니 늦어지게 됐다고 먼저 짧게 설명을 한 윤재가 정중하게 사과를 건네고서 끓고 있는 냄비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줄곧 불만스런 표정을 지은 채로 앉아있던 뚱뚱한 남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태연히 입구로 향하는 남자를 뒤따른 윤재가 갑자기 발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상대와 시선을 마주했다. 혼자서 마른안주와 소주 두 병을 해치운 남자의 입엔 붉은 고추장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봐, 나 아까 분명히 말했어. 5분만 기다리고 안 나오면 앞의 것도 계산 안 하고 그냥 갈 거라고. 그러니까 그런 줄 알아.”

“손님!”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남자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윤재가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주문 받은 음식을 늦게 내어간 건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먹은 것까지 계산을 하지 않고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손님. 그럼 지금 나온 건 계산 안 하셔도 괜찮으니 먼저 드신 것만 계산해주세요.”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퉁명스런 한 마디를 내뱉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던 남자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뒤를 쫓아와 팔을 붙잡는 윤재를 돌아보았다.

“놔. 난 분명 예고했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빨리빨리 하라고. 아저씨.”

윤재의 손을 뿌리친 남자가 서서히 걸음의 속도를 올리다가 이내 뛰기 시작하자 윤재도 그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사고가 난 뒤로는 혹여 다친 무릎에 무리가 갈까 싶어 의식적으로 달리는 것을 자제해 왔지만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서 돈을 떼일 수 없다는 생각에 다소 무리해서 서둘러 다리를 움직이던 윤재는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 못해 통증을 느끼고 속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앞서 달아난 남자는 점차 그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가게로 돌아가.”

“!”

문득 가까워진 발소리와 함께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순식간에 자신의 곁을 스쳐 앞서 달아난 남자를 쫓기 시작한 수영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돈은 내가 받아 올 테니까 넌 가서 손님 보고 있어!”

달리던 중간 살짝 속도를 줄여 윤재를 돌아보고 그렇게 외친 수영이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향하고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남자를 붙잡기 위해 곧바로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100미터를 12초대에 끊었던 그였다. 최근엔 일로 바빠 운동을 하지 못한 데다 당장 불편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어 당시의 기록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해도 반쯤 취해 뒤뚱거리며 달리는 남자를 붙잡는 것은 그에게 있어 일도 아니었다.

잠시 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급격히 속도를 잃은 남자의 점퍼 자락을 낚아 챈 수영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둔한 몸을 하고 무리해서 달린 탓에 짧은 사이 체력이 방전되었는지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줄줄 흘러내리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계산 안 하고 도망가는 게 범죄인 건 알지?”

“학....하악....크흐....허윽....”

숨을 몰아쉬느라 대답할 겨를도 없는 남자가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수영의 팔을 붙잡고서 크게 어깨를 들썩였다. 혹시라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급하게 주위를 둘러본 남자는 지금 자신이 멈춰선 장소가 어스름한 골목 귀퉁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곳인데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대인지라 몇 번을 둘러봐도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계산하던 남자는 조금씩 호흡이 진정되자 일단 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팔로 스윽 닦아냈다.

“난 잘못 한 거 없어. 말은 바로 해야지. 잘못은 내가 아니라 손님을 한참동안 기다리게 한 그 가게 주인이라고.”

“기다리는 동안 그냥 얌전히만 있었어? 먼저 나온 다른 안주랑 술 먹었잖아.”

“그건... 그... 어쨌든 나는 아까 분명히 미리 예고했다고. 5분만 더 기다리다 안 나오면 앞에 먹은 것들도 계산 안 하고 갈 거라고 말이야. 애초에 손님을 기다리게 한 게 잘못 아냐?”

아까 전 윤재를 상대로 할 때까지만 해도 대단한 기세를 보였던 남자는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머리가 있는 상대를 마주한 지금 조금은 위축된 목소리로 항변에 나섰다.

그러나 얼토당토 않는 남자의 항변은 당연히 수영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남자의 멱살을 쥔 손에 좀 더 힘을 실은 수영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래? 그럼 나도 지금부터 셋 세고 네 얼굴에 주먹 날릴 거야. 미리 예고했으니까 문제없지?”

“뭐? 자... 잠깐만-!”

주먹을 쥔 손을 들어 올리는 수영의 진지한 행동에 급격히 놀란 표정을 지은 남자가 재빨리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싸구려 가짜 가죽으로 보이는 지갑 안에서 급하게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낸 그는 곧바로 그것을 수영의 앞에 내밀었다. 당장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서 굳이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나름 현명한 판단을 내린 그는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최대한 좋게 일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당장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나 혹은 폭력 사건의 증인이 되어줄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이 늦은 시간에 어스름한 골목에서 괜히 몸이라도 다치면 전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자신이라는 걸 남자는 알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좀 취해서... 원래는 만 팔 천원인데 거스름돈은 안 받을게요. 정말 미안합니다.”

“.......”

금방이라도 날아갈 기세로 단단히 말아 쥐어져 있던 주먹을 펴 앞에 내밀어진 지폐를 받아 든 수영이 곧바로 남자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악-!”

짧은 비명을 지르며 지저분한 바닥에 허물어진 남자가 걷어차인 정강이를 양손으로 감싼 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 수영이 꽤나 강한 힘을 실어 찼던 만큼 지금 남자가 느끼고 있는 통증의 강도는 상당할 터였다.

마음 같아선 괜한 힘을 낭비하게 만든 대가로 몇 대 정도는 시원하게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일단 <민들레>의 손님으로 왔던 인간인 만큼 혹시라도 오늘의 일로 인해 윤재에게 피해가 갈 가능성은 만들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수영은 이쯤에서 한 발 물러서기로 결정했다.

잔뜩 쫄아서 슬금슬금 자신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눈앞의 남자는 사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약자에겐 한없이 강하고 강자에겐 한없이 약한.

태생적으로 늘 강자의 입장에 서서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온 수영의 눈에 비친 그는 그저 상대할 가치도 없는 하찮은 속물일 뿐이었지만 이런 속물이라도 약자들을 상대로는 얼마든지 강자의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자신도 모범적인 삶을 살아오진 않은 만큼 지금 여기서 정의나 도덕의 잣대를 들먹여 가며 눈앞의 남자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수영이었다. 그는 다만 남자가 비겁한 행동을 저지른 상대가 하필이면 윤재라는 사실이 더없이 불쾌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아까 전 성치 않은 걸음으로 어떻게든 남자의 뒤를 쫓으려 했던 윤재의 필사적인 뒷모습을 본 수영은 일시에 가슴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었다.

그 때 그가 본 것은 현실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지만 실상 족쇄가 되는 다리를 가진 윤재는 달아나는 이를 쫓아 붙잡을 수도, 자신을 잡으러 쫓아오는 이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었다. 마치 날개가 꺾여버린 가련한 새처럼. 그것이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그가 속해 있는 냉엄한 현실이었다.

몇 마디의 강한 경고로 남자를 보내주고 다시 가게로 돌아온 수영은 그 사이에도 열심히 음식을 나르고 있는 윤재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곧바로 수영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온 윤재가 수영이 슬쩍 흔들어 보인 지폐 두 장을 쳐다보곤 스치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앞으로 더 많은 손님이 오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난 슬슬 가볼게.”

밤이 깊어져 감에 따라 눈에 띠게 한산해진 가게 안을 둘러본 수영이 허리에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풀며 말했다.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각은 이제 막 새벽 두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평소대로 아침 여섯시 반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려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겨우 네 시간 남짓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휴일이라면 영업이 끝날 때까지 곁을 지켜줄 수 있겠지만 당장 몇 시간 뒤 출근한 뒤 하루 내내 실수 없이 일을 하려면 최소한의 수면은 취해둬야 했다.

집어 든 재킷을 팔에 걸치고 입구로 향하던 수영이 문득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짧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선 윤재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기, 아까 주문한 생태찌개는...”

“다음에 오면 그때 줘.”

“...네.”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한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말을 이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덕분에 큰 문제없이 해결이 된 것 같아요.”

“...앞으로는 이런 상황이 오면 급하게라도 누구 한 명 구해서 써.”

“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몇 시간 동안 줄곧 정신없이 움직인 탓일까, 지친 기색이 역력한 윤재의 얼굴을 잠시 진지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수영이 어느 순간 문득 언젠가 들었던 제이의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았어?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눈이 가는 사람.’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니, 간신히 제대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았다는 사실을.

“갈게. 잘 정리해서 들어가.”

카운터 앞에 선 윤재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가게를 나선 수영은 곧장 멀지 않은 곳에 세워둔 차로 향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딘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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