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뒤늦게 나타난 주인이 누런 개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뒤 근처의 구멍가게에서 음료수를 사서 나온 윤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영에게 콜라 캔을 건넸다. 실컷 개를 만진 손으로 뭔가를 먹을 수 없어 근처의 수돗가에서 한 차례 씻은 그의 손이 추위로 인해 살짝 발갛게 변해 있었다.
“개 좋아해?”
문득 들려온 수영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그에게 시선을 던진 윤재가 손에 든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열며 대답했다.
“어릴 적 지방에서 살 때 집 마당에서 개를 키웠었어요. 아까 본 개처럼 누런 녀석이었는데 형제가 없는 저한텐 그 개가 친구이기도 하고 형제이기도 했죠. 몇 년 뒤에 누가 줄을 끊고 녀석을 훔쳐갔을 땐 며칠을 꼬박 울었었어요. 텅 빈 앞마당을 볼 때마다 녀석이 생각나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일부러 녀석이 있었던 자리는 안 보려고 곧장 문만 보고 달렸죠.”
어린 윤재가 책가방을 맨 채 급하게 현관으로 향하는 모습을 잠시 상상한 수영이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이어 그는 자연스레 얼마 전 길가에서 죽은 떠돌이 개를 거둬 근처 야산에 묻어주던 윤재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째서 당시 윤재가 망설이는 기색 없이 그런 행동에 나섰는지 수영은 이제야 간신히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사귀었던 당시에도 수영은 윤재를 알지 못했고 굳이 그에 대해 알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었다. 윤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과거엔 어땠었는지, 또 무엇을 원하는지 하는 것들은 당시의 수영에겐 특별한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는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서먹한 관계가 된 지금에 와서야 윤재에 대해 하나 둘씩 새롭게 알아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느껴졌던 소소한 것들이 어째서인지 지금은 예전처럼 쉽사리 넘겨지지가 않았다.
저 멀리 서서히 석양의 붉은 빛이 내려앉기 시작한 해변을 배경으로 손을 꼭 잡은 연인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시종일관 불어오는 바람에 연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도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들은 마치 이 세상에 자신들 둘 만이 있는 것 같은 달콤한 행복감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슬슬 돌아갈까.”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는 수영이 곁에 선 윤재를 바라보고서 말했다. 줄곧 강한 바람을 맞았던 윤재의 뺨이 조금 발갛게 변해 있었다. 한낮에는 햇볕이 있어서 그나마 나았지만 서서히 온도가 떨어지는 시간이 된 지금 당장 그가 입고 있는 두께의 점퍼로는 추위를 이겨내기 힘들 듯 했다.
내일 또다시 가게 일을 해야 하는 윤재의 입장을 알고 있는 수영은 모처럼 여기까지 온 만큼 좀 더 해변을 걷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접어두고 한참 전에 차를 세워둔 곳을 향해 먼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로 돌아가는 길에도 윤재는 해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언젠가 그림으로 옮길 풍경을 눈동자에 각인이라도 시키듯 연신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정리하지도 않은 채 멀찍이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그의 점퍼 안에는 아직 약간의 배터리가 남아 있는 핸드폰이 들어 있었지만 윤재는 사진이 아닌 눈으로 지금의 이 풍경을 기억하길 원했다.
제법 긴 거리를 걸어 마침내 처음 차를 세워두었던 장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먼저 수영이 차에 시동을 건 뒤 차례로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올랐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은 불과 몇 분 전과 비교해 눈에 띠게 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점심때를 훌쩍 넘겨 도착한 뒤 식사와 산책으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 샌가 기울기 시작한 해는 이제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신호로 햇빛이 사라진 주변은 갖가지 조명들이 뒤섞인 화려한 빛들로 새롭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차가 출발한 뒤 한동안 차안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차창 너머로 스쳐가는 어스름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윤재는 옆에 앉아 있는 수영을 의식해 좀처럼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수영 역시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보통의 이 상황이면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대충 아무 음악이라도 틀었을 수영은 당장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지금의 이 상황을 방치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수영은 의식적으로 이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던 몇 시간 동안의 일들을 차례로 떠올리고 있는 그는 지금 최근 며칠 동안 자신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존재가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까지 누구와 만나든 그 상대에게 온전히 정신을 집중한 적이 없었던 그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장에 두 사람 사이엔 직접적인 말도 시선도 오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수영은 분명 지금 이 순간 머릿속으로마저 순수하게 윤재 한 사람만을 상대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볼 때 가게주인과 손님이라는 어설픈 이름으로 간신히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두 사람이 나눌 대화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속해 있는 세상은 각각 너무나도 달라서 특히나 아주 평범하게 살아온 윤재의 입장에선 수영이 속해 있는 화려한 상류의 세상을 짐작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성격에서 직업, 출생배경을 비롯해 관계를 이어가는 지인들의 성향까지 두 사람은 너무나도 다른 것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노는 무리들과 농담처럼 이어갔던 성(性)적인 화제를 당연히 윤재를 상대로 꺼낼 수는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는 수영이었다. 그렇다고 직업적인 이야기를 하자니 그다지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흔하게 대두되는 연예 가십거리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사람 모두 흥미를 갖지 않는 분야였다.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특별히 오고갈 화제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이어지는 이 어색한 침묵을 수영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단 몇 뼘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윤재가 자신을 의식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살짝 경직된 공기를 통해 그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
문득 한참을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서 윤재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줄곧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윤재는 몇 초간 벨소리가 이어진 뒤 점퍼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 뜬 이름은 준석이었다.
옆에 앉아 있는 수영이 의식되어 잠시 받을지의 여부를 두고 고민을 하던 윤재가 벨소리가 꽤 길게 이어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다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준석의 목소리에서 약간 의아해하는 듯한 느낌이 묻어났다.
“응, 아니. 밖에 나와 있어서...”
[밖이야?]
“응.”
[나 지금 너네 집 가는 중인데... 언제 오는데?]
“잠깐, 오는 중이라고? 아...”
갑작스런 준석의 얘기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윤재가 스치듯 옆의 수영을 쳐다봤다.
평소 늘 휴일이라고 해도 특별한 약속 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냈던 터라 이와 같은 준석의 방문은 사실 갑작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이제 곧 갈 거야. 괜찮으니까 와. 응... 아니, 괜찮아. 아... 정말? 응, 좋아해. 그거. 맛있겠다.”
가만히 옆에서 들려오는 통화내용을 듣고 있던 수영이 문득 작게 들려온 웃음소리에 곧바로 미간을 좁혔다. 가까운 위치에 앉아 있는 만큼 통화 상대의 목소리도, 상대가 말하는 내용도 고스란히 그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으로 짐작컨대 상대는 아마도 친구인 듯 했지만 어쨌든 그 상대에게 더없이 편안한 말투와 웃음을 내보이는 윤재의 태도가 수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뒤에 보자는 말로 통화를 끝낸 윤재가 다시 핸드폰을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다 문득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다시 전화해서 오늘은 무리라고 말해.”
“!”
명령에 가까운 수영의 말에 곧장 미간을 좁힌 윤재가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가는 길이잖아요. 이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쓰든 제 마음이에요.”
평소답지 않게 단호한 말투를 사용하는 윤재를 스치듯 쳐다본 수영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윤재 치고는 강한 발언이었지만 당장 운전대를 쥐고 있는 수영에게 있어 그와 같은 말은 도리어 미약한 수준의 도발로 인식될 뿐이었다.
“오늘 나와의 일정은 아직 다 안 끝났어. 지금부터 서울 근교를 돌아 드라이브를 할 거야. 넉넉하게 잡아 두 시간은 걸릴 거고. 그 친구한테 두 시간을 기다리라고 하던가 아니면 나중에 다시 약속을 잡자고 말해.”
여전히 명령에 가까운 수영의 말에 핸드폰을 쥐고 있는 윤재의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수영이 제멋대로인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그는 그야말로 일부러 화를 돋우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보였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마치 다른 사람처럼 온화한 말투를 사용했던 그는 몇 분 사이 눈에 띠게 날카로워진 공기를 두르고 있었다. 방금 전 있었던 준석과의 통화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분명하다는 정도는 윤재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변화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요.”
윤재의 말에 수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그저 운전에만 집중할 뿐이었고, 잠시 후 하릴 없이 앞의 창을 바라보던 윤재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울로 향하는 안내판을 그냥 지나친 차는 이내 갈라지는 다른 방향의 길로 들어섰다. 보이는 차량이 눈에 띠게 줄자 차의 속력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수영은 더 이상 말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당장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듯 지금 그의 기분은 급격히 가라앉아가고 있는 상태였다. 바로 몇 분 전 누군가를 향한 윤재의 다정한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은 뒤로.
스스로 어이없게도 수영은 지금 짜증과 함께 더없이 불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자신과 함께 있는 상대가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으로 인해 느끼는 소외감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상처를 만큼 수영은 감수성이 풍부한 남자가 아니었고, 이와 같은 일이라면 그간 일상생활에서 수 없이 겪어오기도 했던 그였다. 그러니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불쾌감은 ‘상황’이 아닌 ‘상대’로 인한 것임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윤재를 상대로 해서는 이성의 레일을 벗어나 감정에 휘둘리는 자신의 모습을 수영은 어찌할 수 없는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차창으로 이제 막 지나간 표지판을 눈으로 확인하고 미간을 좁혔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차는 차츰 짙어지는 어둠을 뚫고 서울에서 멀어지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아직인가요.”
문득 들려온 윤재의 말에 줄곧 앞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수영이 슬쩍 조수석에 시선을 던졌다. 지금 들려온 질문을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느냐는 의미로 받아들인 그는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아직도 제게 질리지 않았나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수영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수영이 말했었다. 흥미가 떨어지면 알아서 떠날 테니 그때까지만 어울려달라고. 너무도 제멋대로인 말이었지만 어차피 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윤재는 깊은 의미를 두지 않고 체념하듯 그 말을 받아들였었다. 그리고 그 후로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어째서인지 수영은 조금도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수영이 얼마 간 가게를 찾아오지 않을 때마다 혼자서 ‘이제 끝이 난 걸까.’라는 생각을 했었던 윤재는 그러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불쑥불쑥 수영이 나타날 때마다 알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었다. 분명 수영은 스스로가 말한 ‘그 때’가 되면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떠날 터였다. 사귀는 관계도 뭣도 아닌 자신에게 일부러 굳이 너에게 질렸다는 말을 전해올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윤재는 그런 조용한 이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던 순간을 시작으로 어제도, 오늘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데 이상했다. 그와 자신은 그저 손님과 가게 주인일 뿐인 관계일 텐데 어째서인지 수영은 서서히 그 관계를 넘어뜨리는 행동을 보여 오고 있었다. 마치 비어 있는 자신의 어딘가를 발견하고 그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듯이. 적당히 어울리다 보면 머지않아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던 끝은 계속해서 뒤로만 미뤄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됐다. 처음부터 수영은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는 이미 예전에 끝난 관계였다. 금세 끝날 거라고 쉽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그와의 새로운 관계가 서서히 다른 형태로 변해가려 하고 있는 것을 이대로 모르는 척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잠시 고개를 숙인 채로 낡은 청바지에 감싸인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던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고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기다려서 되지 않는다면 이제 자신이 움직여야 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윤재는 이 엉성하고 비정상적인 관계를 마무리 지을 만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수영의 흥미를 일시에 지워낼 만한 방법을.
“...우리... 잘까요?”
“!”
뜻밖의 윤재의 말을 들은 수영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상태 그대로 일순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한동안은 말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채로 일체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단 그는 그러나 잠시 후 윤재가 그 말을 꺼낸 의도를 나름대로 짐작한 뒤 곧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하, 뭐야. 한 번 자고 나면 너를 향한 내 흥미가 곧바로 식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정확한 요점을 짚고 있는 수영의 질문에 윤재는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물론 그 침묵이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영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수영은 화가 났다. 지금 들은 질문이 허무맹랑한 생각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만큼 그는 뻔뻔하지 않았다. 실제로 한동안 관심을 기울였던 상대와 몇 번 잠자리를 가진 뒤 곧 흥미가 사라져 이별을 통보했던 경험이야 수두룩했으니까. 윤재 역시 그 많은 상대들 중 한 명일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들려온 말 역시 이성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순순히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이제...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은가요.”
“...충분? 뭐가?”
“저랑 둘이서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드라이브를 하는 게 당신은 정말로 즐겁나요? 이런 건 굳이 제가 아니라도 누구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당신 주변엔 충분히 많은 사람이 있잖아요.”
“내가 지금 여기서 즐겁다고 대답하면 앞으로도 얌전히 납득하고 어울릴 거야?”
“아뇨, 전 이제 그만 두고 싶어요. 언제 끝이 올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휘둘리는 거, 이제 그만두고 싶어요.”
“아, 그래서 나한테 몸 한 번 던져주고 깨끗이 관계를 끝내겠다?”
“.......”
“전에는 나와 키스하는 게 싫어서 혀까지 깨문 주제에 이제는 순순히 나한테 안기겠다고?”
수영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윤재를 안고 싶은 마음은 평소에도 갖고 있던 것이었다. 실제 수영은 그를 안는 장면을 몇 번이나 머릿속에 떠올리기도 했었다. 심지어는 다른 상대를 신나게 찔러 올리며 윤재의 얼굴을 떠올린 적도 있었다. 그러니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수영은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지금의 이야기를 받아들였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윤재는 이제까지 수영이 안아 온 다른 상대들처럼 순수하게 섹스를 하고 싶어서 먼저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지금 수영과의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비정상적인 관계를 끝낼 수단으로 섹스라는 선택지를 과감하게 입에 올린 것뿐이었다. 누구보다 정갈하고 성실한 성격의 윤재가 스스로 나서서 잠자리를 갖자는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그동안의 그가 혼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지 수영으로선 제대로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앞창을 바라본 채로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끝낼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지금 이런 관계가 이상하다는 건.”
“.......”
윤재의 말 대로였다. 사실은 수영 역시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과 윤재의 관계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이제 와 친구 놀이를 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게 주인과 손님이라는 어설픈 지인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대로 끝을 내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깨끗하고 옳은 길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
한참 만에 들려온 수영의 말에 줄곧 앞으로 향하고 있던 윤재가 그제야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끝내자. 이런 관계는.”
“.......”
“그런데 아마 네가 바라는 대로는 안 될 거야.”
알 수 없는 수영의 말에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윤재가 곧바로 이어진 말을 듣고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나한테 안기겠다고 한 말, 진심이지?”
“.......”
묘하게 공격적으로 나오는 수영의 태도에 조금 경직된 표정을 지은 윤재가 말을 대신해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것을 대답으로 받아들인 수영이 말을 이었다.
“중간에 울면서 도망갈 생각하지 마. 너한테 이런 취급까지 당한 이상 나도 봐줄 생각은 없으니까.”
한 번 따먹을 목적으로 열심히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인간 취급을 당한 것에 대한 불쾌감이 지금 이 순간 수영의 심기를 잔뜩 뒤틀리게 만들고 있었다. 몇 번의 잠자리를 가진 후 상대에 대한 흥미가 식어버리는 패턴이라면 분명 수없이 경험해온 것이 맞지만, 적어도 재회한 윤재를 상대로 해서만큼은 단 한 번도 그와 같은 목적을 품지 않았다고 수영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정작 상대인 윤재는 그런 사실을 알지도, 믿지도 않을 터였지만.
“지금부터 내 집으로 갈 거야. 아쉽지만 드라이브는 다음에 제대로 해.”
수영의 입에서 분명하게 나온 ‘내 집’이라는 단어에 윤재는 새삼 이제야 앞으로 이어질 일들을 분명한 현실로서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가 먼저 말을 꺼낸 만큼 이제 와서 없었던 일로 하자는 말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잠시 뒤 수영과 벗은 채 이어질 것을 상상하면 역시나 긴장이 되기 시작하는 그였다. 윤재에게 있어 이것은 지금의 이 불편한 관계를 끝내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었다. 스스로가 선택한 만큼 결과가 어떻게 되든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었다.
“늦기 전에 그 친구에게 전화해 줘.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자고.”
명령인지 조언인지 모를 수영의 말에 윤재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까 전 준석과 통화를 마친 뒤로 어느새 십 여분 여가 흘러가 있었다.
지금쯤 신나게 차를 몰고 집으로 오고 있을 준석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린 윤재는 더없이 무거운 마음을 안은 채 통화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짧게 이어지다가 곧 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응, 나.”
[어, 왜?]
“어디까지 왔어?”
[동서울 톨게이트 지금 막 지났어.]
지방에 내려갔다 오는 길이라더니 이제 갓 서울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윤재의 입장에선 차라리 다행이었다.
중간 중간 수영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윤재가 애써 최대한 밝은 목소리를 만들어 말했다.
“미안한데 오늘 만나기로 한 거, 다음으로 미루자.”
[...왜? 무슨 일 있어?]
전화 너머로 짧은 텀을 두고 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런 이야기에 의아함을 느끼는 말투였다.
“아니, 별 일은 아니고... 갑자기 중요한 일이 좀 생겨서. 나중에 말해줄게.”
[안 좋은 일은 아니지?]
“그런 거 아냐.”
조금 걱정스럽게 변했던 목소리는 다행히 곧 수긍을 의미하는 짧은 한숨으로 변했다. 그럼 내일 전화하겠다는 준석에게 알겠다고 짧게 대답한 윤재는 피곤할 테니 어서 집에 가서 쉬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길지 않은 통화를 끝냈다.
윤재의 옆에서 운전대를 잡은 채 조용히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수영이 액셀을 밟았다.
저 멀리로 한참 동안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던 도시의 불빛들이 다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차창으로 줄지어 펼쳐지는 건물들은 모두가 멋진 외관을 자랑하는 고급 맨션이었고 간간이 보이는 차들은 대개가 유명한 외제차들이었다. 비단 건물과 차뿐 아니라 잘 닦여 있는 길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옷차림 역시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러워서 지금 차창 너머로 낯선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윤재는 새삼 옆에 앉아 있는 수영이 자신과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또렷이 자각하고 있었다.
이 세련된 골목을 윤재는 알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취한 채 본의 아니게 수영의 신세를 졌었던 그는 그 다음 날 수영의 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쳐왔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 그 때의 윤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자신이 또다시 이 거리를 지나치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준석과 통화를 마친 뒤부터 윤재는 줄곧 차창에 향하고 있는 시선을 떼어내지 않았다. 수영과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그는 두려웠다. 이제 곧 수영과 깊은 곳으로 이어지게 될 거라는 사실이 뒤늦게 윤재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수영이 자신에게 보이고 있는 흥미는 단 한 번의 잠자리면 곧 식어버릴 거라고 윤재는 이 순간에도 틀림없이 믿고 있었다. 이런 말라빠진 보잘 것 없는 몸 따위 집착할 가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이 차갑게 돌아설 거라고. 오래 전 자신을 상대로 느꼈던 지루함을 이제 와 새삼 다시 깨닫게 되면 그는 요 몇 달 간의 일들을 두고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비웃을 지도 몰랐다.
자신이 완력으로 그를 밀어낼 수 없다면 그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윤재는 생각했다. 이런 이상한 관계는 이제 이쯤에서 끝내고 싶었다. 혹시라도 헛된 감정이 생겨나기 전에.
길었던 주행을 끝낸 차가 넓은 지하주차장 한 자리에 세워진 뒤 윤재는 먼저 운전석의 문을 열고 내리는 수영을 쳐다보았다. 이곳까지 온 이상 도망칠 생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역시나 긴장이 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수영과 안 좋게 헤어진 이후로 누구와도 섹스를 한 적이 없는 윤재는 잠시 후 관계 시 동반될 고통에 견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영이 주도하는 섹스가 얼마나 거칠고 격렬한지는 오래 전이지만 이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잠시 자리를 지킨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윤재가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문 앞에 수영이 서 있었다.
내리라는 직접적인 재촉 없이 잠자코 기다리고 서 있는 수영을 슬쩍 쳐다본 윤재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머릿속을 정리한 뒤 조수석에서 내렸다.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 짓지 마. 말을 꺼낸 건 너잖아.”
고요한 지하주차장 안을 울리는 두 사람 분의 발자국 소리를 배경으로 나직한 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라도 그만 둘래?”
이어져 들려온 수영의 질문에 윤재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것으로 이 불안정한 관계를 끝낼 수 있다면 희생이라고 할 것도 없다고 윤재는 생각했다. 수영은 곧 자신의 자리를 찾아 갈 것이었다. 자신 역시도.
‘!’
묘한 침묵 속에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은 잠시 후 문득 탕-하고 들려온 차문이 닫히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주차되어 있는 고급 승용차들 사이로 한 남자가 서둘러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수영이 곧바로 미간을 좁혔다. 틀림없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은 연석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려오다시피 해서 두 사람의 앞에 멈춰 선 연석이 흐트러진 숨소리를 낸 채로 잠시 숙이고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수영에게 먼저 향했다가 그의 옆에 서있는 윤재에게 옮겨졌다.
마치 물건을 관찰하기라도 하는 듯한 시선으로 윤재를 위에서 아래로 슥 한 번 훑어본 연석이 수영에게 시선을 옮기고 입을 열었다.
“일로 바빠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하더니 역시 그 말은 그냥 날 따돌리기 위한 거짓말이었나 보네.”
최근 들어 몇 번이나 수영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취했지만 모조리 거절을 당했던 연석은 지금 간신히 화를 억누르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소문으로 듣기에 언제부터인가 자주 들르던 바(bar)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시작한 수영은 이제 완전히 그쪽으로는 발길을 딱 끊은 듯 했다. 그것을 두고 내심 일이 바빠 그럴 시간이 없는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었던 연석은 모처럼 얼굴이나 잠깐 볼까 하는 생각으로 약속도 없이 이곳을 찾은 지금 그와 같은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장호연이라면 자신이 감히 싸움조차 걸 수 없는 상대라고 깨끗이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당장 눈앞에 서있는 낯선 남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일단 낡은 청바지 위에 점퍼차림으로 행색부터가 초라한 남자는 나름 예리한 연석의 눈으로 보기에 그저 그런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부류의 인간으로 판단되고 있었다. 자신이 고작 이런 남자에게 밀려 거절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연석은 마치 시궁창에 처박히기라도 한 듯한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야, 이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네.”
애써 흥분을 가라앉힌 연석이 슬그머니 윤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묻자 곧바로 곁으로 다가온 수영이 잠시 윤재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연석의 손을 붙잡아 뿌리치듯 놓았다.
지금 수영이 이전에 본 적 없는 매서운 분위기를 품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한 연석이 잠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뭐...야. 살짝 건드린 정도를 갖고 그렇게 화낼 필요 없잖아.”
“가.”
“...뭐?”
“방해하지 말고 가라고.”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없는 단호한 명령이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던 연석은 당시 함께 있었던 파트너와 셋이서 즐겨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던 것과 180도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지금의 수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반쯤 얼이 빠져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 멈춰 있던 다리를 움직여 멀리 떨어진 엘리베이터를 향해 나란히 걷기 시작한 두 사람의 뒷모습이 연석의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낯선 남자는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고, 곁에서 걷고 있는 수영은 간간이 스치듯 그 남자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뭐라고 딱히 표현이 되지 않는 기묘한 분위기였다.
점차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연석의 표정이 서서히 차갑게 굳어져갔다. 이제껏 수영과 3년이 넘도록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오는 동안 조금 전처럼 진지한 모습을 처음으로 접한 그는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최근 들어 스테디 비슷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도 평상시와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던 수영인 만큼 지금 연석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3p는 고사하고 손이 닿는 것조차도 허락 못 하겠다는 건가...’
어느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두 사람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린 연석이 코끝으로 웃었다. 마치 굳어버린 것처럼 그대로 자리를 지킨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잠시 후 누군가의 차량이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간신히 현실로 돌아와 한참 동안 멈춰 있던 다리를 움직였다. 그 사이에도 조금 전 보았던 수영의 표정이 그의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씨발.”
낮게 욕설을 내뱉은 연석이 거칠게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가 운전대를 잡은 것과 동시에 곧바로 출발한 차는 이내 넓은 지하주차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