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26화 (26/66)

26.

수영이 떠난 뒤 홀로 집에 남겨진 윤재는 천천히 현관에서 거실로 돌아왔다.

잠시 동안이나마 손님을 맞이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가 둘러본 집안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익숙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베란다의 빨래걸이에 널려 있는 양말과 수건들, 근처의 테이블 위에 펼쳐진 채로 놓여 있는 스케치북, 잘 접혀진 신문과 전단지가 쌓여 있는 폐품 상자.

좁은 거실을 잠시 동안 가만히 둘러보던 윤재의 시선 끝에 문득 조금 전 수영이 사용했던 머그컵이 들어왔다. 바닥까지 깨끗이 비워져 있는 그것은 얼마 전 시장을 지나던 길에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발견하고 구매한 것으로, 평소에는 가끔씩 이곳을 찾는 준석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천천히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빈 머그컵을 손에 든 윤재가 조금 전 수영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런 감정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제 더는.

그것은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전한 사실도 아니었다.

윤재는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무서웠다.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이 어느 샌가 빛바랜 기억에서 색을 입힌 현실로 되살아나려 하는 것이. 때때로 수영과 함께 있으면 마치 오래 전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때가 있어서 그것이 무서웠다. 그가 곁에 있는 것에 또다시 익숙해져가는 것이.

잠시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서있던 윤재가 문득 들려온 초인종에 자연스레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혹시 수영이 뭔가를 잊고 간 건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든 그는 잠시 후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과 동시에 필요 이상으로 몸에 싣고 있던 힘을 빼냈다.

“말씀 좀 전하러 왔습니다.”

새벽녘에 귀가한 뒤 한창 잠에 빠져들라 치면 이렇듯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으로 인해 잠에서 깨는 일이 많은 윤재는 평소 습관화되어 있는 ‘죄송합니다.’라는 짧은 대답으로 상대방을 돌려보냈다. 지어진지 오래된 이 빌라는 최근에 지어진 고급 건물들과 달리 입구에 보안벽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탓에 평소에도 잡상인들의 출입이 잦았다. 이런 갑작스런 초인종 소리에 잠을 깰 때마다 한숨이 나고 때론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것은 몇 번 주의를 준다고 해서 깨끗이 근절될 문제가 아니었다.

‘!’

머그컵을 손에 든 채 주방으로 향하려던 윤재가 문득 또다시 들려온 초인종 소리를 듣고 발을 멈추었다. 아까 전 하이힐의 굽 소리가 위로 향하는가 싶었는데 아직 이 층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그는 다시 한 번 초인종 소리가 이어진 뒤에야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어 누구냐고 물었다.

“나.”

또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제 막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준석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윤재가 곧바로 현관으로 향한 뒤 잠겨 있는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예상하고 있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점퍼 안에 니트, 그 아래 검은색 코듀로이 팬츠를 받쳐 입고 있는 준석은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이 워낙 많아 크리스마스이브까지도 야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더니 정말로 야근을 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야? 얼굴 보니까 잠을 못 잔 것 같은데...”

“너 어제부터 계속 전화를 안 받길래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그 말을 들은 뒤에야 자신이 어제 약속에 핸드폰을 놓고 나간 사실을 떠올린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고서 대답했다.

“어제 핸드폰을 두고 나갔어.”

“아침에 해도 안 받던데?”

순순히 외박을 했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윤재가 적당히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말로 대답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외박을 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어젯밤의 외박에 수영이 연관되어 있는 만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준석에게 말하는 것이 망설여진 윤재였다.

다행히 준석은 꼬치꼬치 물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얼굴에 나오는 피로한 기색 그대로 적어도 지금 그에게는 자세한 무언가를 파고들만한 기력이나 집중력이 없는 듯 했다.

“집으로 전화하지 그랬어.”

“그럴까 하다가 아예 그냥 직접 들르는 게 낫겠다 싶어서.”

“피곤해 보이는데.”

“아냐, 좀 전까지 자서 별로 피곤하지는 않은데... 그보다 너 오늘 가게 문 열 거지? 그러면 장봐놔야 하지 않아?”

준석의 질문을 받고 고개를 돌린 윤재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열두 시 오십 분.

평소 장을 봐온 시간보다는 많이 이르지만 시간이 부족한 것보다는 남는 쪽이 낫다는 것이 평소 윤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인 만큼 이제 슬슬 움직여도 괜찮을 듯 했다.

“너도 같이 가려고?”

“응. 어차피 저녁 식사하러 집에 갈 때까지 시간도 남으니까.”

“오늘 집에 가?”

본가에서 나와 따로 자취 생활을 하고 있는 준석은 타이트한 일정에 시달리느라 평소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에는 자주 들르지 못하고 있었다. 늘 아들 걱정이 많으신 그의 모친이 가끔씩 준석의 집을 찾아 밑반찬을 가져다놓으시거나 청소를 해주시는 모양이었지만, 독립적인 성향의 준석은 그와 같은 모친 방문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듯 보였다.

“평소 주말에 안 가니까 모처럼 휴일에나 잠깐 얼굴 내비치려고.”

“명색이 사회인이 돼서 크리스마스인데 초대된 모임도 하나 없는 거야? 가엾게.”

농담 섞인 윤재의 말에 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누구 얘기 하는 거야? 이래봬도 난 초대받은 자릴 두 개나 거절했다고. 사내자식들만 바글거리는 자리에 가봐야 술이나 퍼먹고 여자나 불러서 놀 거 아냐? 애초에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천박하게 놀라고 만들어진 날이 아니야.”

“넌 무교잖아.”

“종교가 뭐든 내 생각은 그렇다고. 아무튼 장 보러 갈 거면 나가자. 밖에 차 세워놨어.”

“그래? 그럼... 아. 잠깐, 옷 좀 갈아입고.”

“왜? 지금 입고 있는 그대로 나가면 되잖아. 그 분홍 니트 색깔 예쁜데. 처음 보는 건데 너한테 잘 어울린다.”

어젯밤의 성호와 같은 말을 하는 준석을 향해 스치듯 미소를 지어 보인 윤재는 어쨌든 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가겠다는 말로 준석을 먼저 내려 보냈다.

쏴아-

줄곧 손에 들고 있던 머그컵을 물로 씻어내는 짧은 시간 동안 문득 조금 전 들었던 수영의 말을 떠올린 윤재가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혼자 여기서 지내면 쓸쓸하지 않아?’

의식적으로 쓸쓸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모친이 병원에 입원한 뒤로 이곳에서 홀로 지내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사실은 그보다도 일로 지쳐 들어와 그대로 잠이 드는 일이 많은 상황에서 그와 같은 생각을 할 여유 자체가 없었다.

바쁜 부모님 아래 외동아들로 태어난 윤재에게 있어선 혼자 있는 건 너무도 익숙한 일이었다. 그에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까 전 수영으로부터 그와 같은 직접적인 질문을 받은 순간 윤재는 잠시나마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었다. 너무도 익숙해서 자연스러운 일상의 하나로 받아들였던 사실을 그제야 분명히 현실로 인식했던 거였다.

수영은 그런 남자였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감정에 따른 직설적인 대화방식을 추구하는.

그래서 윤재는 수영에게 끌렸었다. 어디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은 듯한 그 자유로움에.

몇 년 만에 재회한 수영은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예전과 변해 있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부분도 남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중심으로 두고 있었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하려하지 않았다. 잔인할망정 거짓은 말하지 않는 남자는 건재했다.

귀찮은 것은 질색인 남자가 일부러 자신을 집으로 부축해 데려간 것이 윤재는 지금도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가 정작 불필요한 노력을 들여가며 집으로 데려간 자신에게 요구한 것이 대단한 무엇도 아닌, 고작 한 끼의 밥을 같이 먹는 것뿐이었다는 것도 윤재에겐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수영은 아는 입장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도움을 준 것뿐이라고 했지만,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윤재는 돌아온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기도 어려웠다.

잠시 싱크대 앞에 서서 하룻밤 새 일어난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윤재는 지금 아래에서 준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머릿속에 떠올리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

“여기 오이랑 양파 좀 주세요.”

“소쿠리에 담아놓은 거 통째로 주면 되지?”

“네.”

윤재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동안 그의 옆에 선 준석이 아주머니로부터 양파와 오이가 든 비닐봉지를 건네받았다. 이미 꽤나 무거워 보이는 짐을 양손 가득 들고 있는 준석을 스치듯 훑어본 채소가게 아주머니가 주름진 얼굴 위로 살짝 미소를 드리우고 말했다.

“윤재총각 친구야? 듬직하니 멋있네.”

문득 들려온 말에 슬쩍 준석을 돌아본 윤재가 이제 막 지갑에서 꺼내든 돈을 마주선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선이 가는 윤재와는 달리 다소 강한 인상을 하고 있는 준석은 특히나 중년의 여성들로부터 인기가 높아서 이렇게 종종 두 사람이 시장에 같이 올 때마다 얼굴을 마주한 아주머니들은 꼭 한 번씩 준석을 칭찬하는 말을 건네 오곤 했다. 아무래도 오랜 지기인 만큼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준석을 향한 칭찬에 대놓고 동조하지는 않아도 그와 같은 말을 들을 때의 윤재는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잠깐, 좀 쉬었다가 갈까?”

아까 전부터 윤재의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준석이 마침 지나치려던 옆의 분식점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배고파?”

“그 정도는 아닌데 좀 출출하긴 하다.”

준석의 대답을 듣고 발걸음을 돌린 윤재가 먼저 분식점 안으로 들어섰다.

시장까지 준석의 차를 타고 온데다 시간상 그리 오래 걷지 않았음에도 어제의 후유증 때문인지 자리에 앉자마자 윤재의 입에선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실은 ‘어이쿠’하는 소리가 나와야 했지만 준석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 아픈 티를 내고 싶지 않은 그는 줄곧 무릎에 느껴지고 있는 통증을 애써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고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윤재의 생각을 읽어내지 못할 준석은 아니었다.

“어제는 실컷 놀았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준석이 다른 한 손으로 수저를 놓으며 물었다.

“xxx공연은 진짜 좋았어. 생각한 것보다도 라이브 실력이 좋더라.”

“그렇다고 뛰거나 한 건 아니지?”

윤재의 다친 무릎에 최대한 충격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준석이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응. 뛰진 않았어. 그런데 앞에서 다들 춤추듯이 노니까 중간에 나도 막 뛰고 싶어지긴 하더라.”

다가온 아주머니에게 메뉴를 주문하기 전 눈짓으로 의견을 물어오는 준석을 향해 윤재가 ‘난 튀김.’라고 말했다.

주문서를 남긴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사라진 뒤 준석이 말을 이었다.

“너 아까부터 걷는 거 보니까 무릎이 아픈 거 같은데 많이 심한 거 아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였는데도 역시나 들키고 말았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은 윤재가 테이블 밑으로 조심스레 무릎을 만졌다. 집에서 나오기 전 파스를 붙여둔 덕분에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증의 전부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실 오늘 같은 날은 푹 쉬는 게 정답이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가게의 상황을 생각하면 오늘처럼 특별한 날은 더더욱 가게 문을 닫고 있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아무래도 어제 공연장에서 오래 서 있었더니 좀 무리가 간 것 같기는 한데 심하진 않아.”

“괜히 또 심해지기 전에 오늘 하루는 쉬는 게 낫지 않겠어?”

“쉬면 돈은 누가 벌고? 준석이 네가 벌어다 줄래?”

윤재의 농담 섞인 질문을 듣고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치워낸 준석이 그 사이 다가온 아주머니가 건네는 그릇을 받아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내가 벌어다 주면 얌전히 집안일만 할래?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고.”

“뭐야, 날 마누라로 삼기라도 하게?”

“못 삼을 건 뭐야. 안 그래도 너 취객들 상대하는 거 보면 아슬아슬해 죽겠는데 차라리 그 편이 마음은 더 편하겠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안 되는 대답을 듣고 애매한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고등학교 시절엔 종종 학교 근처의 분식점에 들어가 지금과 비슷한 메뉴로 적당히 끼니를 때우기도 했던 두 사람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준석은 떡볶이를, 윤재는 튀김을 주문하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윤재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고구마튀김이었다. 친구들은 퍽퍽해서 별로라고 했지만 윤재는 이상하게도 그 퍽퍽함이 좋았다. 최근에 스스로가 개발한 신 메뉴의 재료로 돼지고기와 고구마를 사용한 것 역시 그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더 먹을래?”

“아니.”

“그럼 나가자.”

속을 든든히 채우고 분식점을 나선 두 사람은 나머지 장을 보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중간 중간 준석의 시선이 자신의 다리로 향해지는 것을 느낀 윤재는 의식적으로 한층 더 다리에 힘을 실었다.

평소보다 여유를 두고 나온 만큼 느긋하게 계획에 있던 목록 하나하나를 장바구니에 넣은 윤재는 마지막으로 생선 몇 마리를 구입한 뒤 준석과 나란히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화분 좀 보고 가세요! 안에는 예쁜 꽃도 많아요~.”

양손 가득 짐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꽃집을 지나던 윤재가 문득 옆에서 들려온 주인아주머니의 외침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수없이 이 길을 지나며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아주머니는 윤재의 걸음이 제자리에 멈춘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얼굴 가득 화색을 띠우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잘생긴 오빠. 꽃 좀 보고 가세요. 크리스마스 선물용으로 포장도 예쁘게 해드려요.”

슬쩍 준석을 돌아본 윤재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눈짓을 보낸 뒤 다시 아주머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부쩍 집안의 공기가 건조해진 것을 느끼고 있던 그는 삭막한 분위기도 완화시킬 겸 좋은 냄새가 나는 화분을 사서 놔둘까 하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던 차였다.

“좋은 냄새 나는 화분은 뭐가 있나요?”

“좋은 냄새를 찾는 손님들께는... 레몬밤이 제일 잘 나가요. 이름대로 향긋한 레몬향이 나죠. 애플민트도 인기가 많고요. 공기 정화용으로는 좀 더 큰 식물을 키우는 게 나은데 다른 것도 좀 보여드릴까요?”

“네.”

짧게 대답한 윤재가 꽃집 안으로 들어서기 전 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준석을 돌아봤다.

“미안한데 화분 좀 보고 테니까 먼저 가서 차 시동걸어놓고 앉아 있을래?”

“알았어.”

짧게 대답한 준석이 곧장 차가 주차되어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대신 윤재에게로 다가왔다. 거리가 가깝게 좁혀지자마자 윤재의 앞으로 손을 뻗은 그는 들고 있는 짐을 달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어차피 주차장이 바로 이 앞이니까 내가 다 들고 갈게.”

“무거운데.”

“시간 끌면 더 무거우니까 빨리 주고 가서 고르기나 해.”

재촉하는 준석에게 떠밀리듯 짐을 맡긴 윤재는 곧바로 주차된 곳으로 향하는 준석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아주머니의 안내에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넓지 않은 가게 안은 당연하게도 온갖 종류의 식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처음엔 집에 가져다놓을 작은 화분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윤재는 몇 가지 식물들에 대해 설명해주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집뿐 아니라 <민들레>에도 몇 개의 화분을 사서 놔두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결국 고민 끝에 일단 오늘은 손에 들기 쉬운 작은 화분 몇 개만을 구입하기로 한 윤재는 나중에 다시 또 고르러 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주인아주머니의 추천에 따라 구매한 작은 화분들을 들고 꽃집을 나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 좋은 냄새 난다.”

바스락거리는 비닐을 든 채로 윤재가 조수석에 오르자 곧바로 선명한 레몬향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준석에 코끝에 닿아왔다.

“산뜻하지?”

“응, 좋네.”

“이건 네 거야.”

갑작스런 윤재의 말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은 준석이 윤재가 건네는 작은 화분을 받아들었다. 비닐봉지가 걷혀지자 한층 더 강한 레몬향이 코끝에 닿아왔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냐? 왜? 산타라도 되려고?”

농담 섞인 준석의 질문에 윤재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것도 선물 축에 끼워주면 나야 고맙지. 몇 천원 밖에 안 하는 건데.”

“돈보다는 마음 아니냐.”

짧게 대꾸한 준석이 차를 출발시켰다.

레몬밤 외에도 다른 몇 가지 화분이 풍기는 싱그러운 향으로 주변의 공기가 기분 좋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평소 식물에는 관심이 없는 준석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이처럼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기분을 낼 수 있다면 자신도 몇 가지 식물을 사서 집이나 회사 책상에 놓아둘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화분 고르는 동안 남자 네 명이 가게를 다녀가더라. 다들 여자 친구한테 줄 꽃 산다고. 오늘 같은 날은 꽃집도 장사할 맛 날 거야. 그래서 그런지 같이 있는 내내 아주머니 입이 귀에 걸려있더라.”

“뭐, 여자 친구한테 줄 선물이 꽃다발로 끝나면 저렴한 거지.”

“너는 오늘 같은 날에 어떤 선물 해줬었는데?”

“.......”

“응?”

윤재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준석이 앞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무난하게 액세서리를 선물하던가, 아니면 하루 펜션 예약해서 짧게 여행을 다녀오거나.”

준석의 대답을 들은 윤재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윤재가 기억하기로 준석이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여자 친구 없이 보낸 기간은 최근의 2년뿐이었다. 세희와 헤어지기 전까지 서너 명 정도의 여자 친구와 사귀었던 준석은 자신 쪽에서 먼저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그의 여자 친구까지 셋이서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윤재가 직접 그녀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여자 친구와 함께 있을 때의 준석은 꽤나 배려 깊고 신사적인 모습을 보이는 듯 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 세상이 온통 핑크빛으로 보인다고도 하던데.’

어째서일까, 그 순간 문득 윤재의 머릿속엔 몇 시간 전 수영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왜?”

옆에서 급격히 조용해진 윤재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준석이 혹시 다리가 많이 아픈 건가 하는 걱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이내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뜻밖의 질문이었다.

“혹시 넌 실감한 적 있어? 사랑을 하면 세상이 온통 핑크빛으로 보인다는 말...”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준석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차분히 현실로 돌아와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쓰게 웃었다. 방금 전 들은 질문에 대한 솔직한 답은 ‘아니.’였다. 지금까지 연애를 하는 동안 준석이 그처럼 완전한 행복에 젖었던 적은 단연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순간순간 달콤한 기분을 느꼈던 경험이야 무수히 존재했지만, 늘 가슴 한켠에 다른 누군가의 잔상을 품고 있었던 그에게 있어 눈앞의 연인과의 사랑으로 충만한 행복을 느꼈던 기억은 없었다. 더없이 달콤한 순간에조차 가슴 언저리는 시린 감각에 묶여 있었고, 그와 같은 ‘결핍’은 그 유일한 대상이 아닌 어느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것이었다. 절반의 절반조차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윤재를 향해 문득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준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뭐, 비슷한 기분이 들긴 하더라. 넌 경험한 적 없어? 어릴 때 첫 사랑이라던가.”

준석은 몇 년 전 윤재가 사랑에 빠져 있었던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윤재가 구체적으로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지만, 당시의 그는 준석의 눈에 있어 너무도 선명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조금 들떠서 웃거나 답지 않은 농담을 하거나 가끔씩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거나.

그런 윤재를 바라보는 준석의 마음은 행복한 동시에 씁쓸했었다. 윤재가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지금까지 쭉 답답할 만큼 성실한 길만을 걸어온 녀석이 비록 겉으로는 차분함을 가장하고 있어도 중간 중간 눈을 반짝이며 수줍어하거나 설레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동시에 준석은 윤재를 그렇게 웃게 하는 상대가 자신이 아님에 씁쓸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터였다. 윤재를 순수하게 죽마고우의 눈으로 볼 수 없게 된 것은.

상대는 어떤 여자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귀엽고 애교가 있는 타입일까, 아니면 윤재처럼 얌전하고 말수가 적은 타입일까. 혹은 고집스럽고 질투심이 강한 타입일까.

그러나 그와 같은 의문의 시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과 동시에 빛을 잃어버린 윤재는 이후 그 시절처럼 반짝거리는 모습을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모르겠어.”

윤재는 그런 경험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이것이 가장 솔직한 그의 대답이라는 것을 준석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의 윤재는 자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자신이 얼마나 반짝거리고 있었는지를.

“준석아.”

갑자기 이름을 불린 준석이 앞의 신호에 따라 차를 세우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윤재는 자신의 무릎위에 비닐에 쌓인 채로 놓여 있는 화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냥 남들처럼 살 수 있을까?”

“.......”

“핑크빛은 아니더라도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그렇게.”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온 질문을 받은 준석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간을 좁혔다. 평소의 윤재가 스스로 좀처럼 이와 같은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지금 분명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최근 들어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당장 그가 보기에 윤재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모친의 바람으로 인해 몇 번인가 원치 않는 자리에 나가 선을 보고 거기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경험한 윤재로서는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는 것에 충분히 회의를 느낄 만도 하다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치 그렇다는 대답을 원하는 마음에서 던져진 듯한 질문을 받은 준석은 순순히 그 마음에 응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임마. 너는 뭐 외계인이냐? 너도 남들 하는 건 다 할 수 있어. 사랑이든 뭐든 말해. 남이 안 해준다고 하면 나라도 해줄 테니까 언제든지 와. 대신 중간에 도망가기 없기다. 내 키스는 엄청 진하거든.”

농담과 같은 준석의 말에 윤재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윤재는 꿈에도 알지 못할 터였다. 지금 준석이 건넨 말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그나저나 어제 공연 어땠는지 자세히 얘기 좀 해봐. 나도 그 밴드 보컬 목소리 좋아하는데 실제로 듣기엔 어땠어?”

“좋았어.”

“에이, 나이가 몇인데 그렇게 단순하게밖에 표현 못하냐? 좀 더 제대로 좀 설명해봐.”

“음... 일단 굉장히 허스키하고 또 낮고...”

지적을 당한 윤재가 최대한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로 열심히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작은 화분에서 피어나는 향긋한 레몬향이 좁은 차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여전히 좋은 데에 사네.”

옆에서 들려온 친구-민석의 말에 이제 막 지인에게 답신 문자를 보낸 수영이 고개를 들었다. 적극적으로 술자리에 어울리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 민석의 차를 빌려 집에 도착한 그는 평소보다 많은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침착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엄청 마시던데.”

차에서 내릴 채비를 하는 수영을 향해 민석이 물었다. 수영과 고등학교 동창생인 그는 오늘 모임에서 만난 지인들 중 평소 수영과 가장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친구였다.

“별로.”

구구절절 속마음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수영은 일단 먼저 조수석에서 내린 뒤 바래다줘서 고맙다는 인사만으로 민석을 보냈다. 역시 꽤나 많은 양의 술을 마신 탓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그는 당장 몇 시간 뒤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억지로 발을 떼어 바로 앞 건물로 향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크리스마스의 특수성 때문인지 건물 주변에는 평상시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우연히 동시에 밀려든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 수영은 흘깃흘깃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적당히 무시하고서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를 덮었다. 평소 이렇게 취기를 느낄 정도로 술을 마시는 일이 흔치 않은 그는 지금 약간의 두통을 느끼고 있음에도 겉으로 볼 때만큼은 지극히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당장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술 냄새의 원흉으로 구석에 자리한 한 아저씨를 지목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쯤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수영과 달리 완전히 발개진 얼굴을 하고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서있던 수영은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목표한 층수에 다다르자 바로 긴 다리를 움직여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의 등 뒤로 이제 막 닫히는 문틈에서 술 취한 아저씨를 성토하는 누군가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가 곧 사라졌다.

도어 록을 해제하고 집안으로 들어선 수영은 일단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소파에 던지듯 놓은 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지만 한바탕 술자리에 어울리다 돌아온 만큼 자기 전 샤워를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 하에 욕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셔츠를 벗기 위해 가장 위에 채워져 있는 단추로 손을 가져가려던 중간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

일회용 칫솔이 뜯겨진 원래의 포장에 다시 감싸인 채 세면대 한켠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오늘 아침 윤재가 사용했던 것이었다. 아마도 근처에 휴지통이 없어 그냥 두고 간 것 같았다.

얼마 동안 미동 없이 서서 칫솔을 쳐다보던 수영이 한동안 멈춰 있던 손을 다시 움직여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토록 많은 술을 마셨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무엇이 변한 걸까. 몇 시간 전부터 가슴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꽉 막힌 감정이 아무래도 쉬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낮 시간 윤재의 집에서 봤던 그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 쓸쓸한 골목의 풍경이.

그러나 지금 수영의 머릿속에 그보다 한층 더 또렷이 각인되어 있는 건 덤덤하게 들려온 윤재의 한 마디였다.

윤재가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수영은 알고 있었다. 그 책임에서 자신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역시도.

내일부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윤재에 대한 생각도 서서히 지울 수 있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한 수영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치 독한 열병처럼 퍼져가는,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이 감정은 단순한 의지만으로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애초에 지금의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까 당신도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절 잊은 채로 그렇게 사시면 돼요.’

언젠가 들었던 윤재의 말을 떠올린 수영이 쓴 표정으로 희미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이내 팔을 뻗어 샤워기를 튼 그의 몸 위로 적당한 온도를 품은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수면제가 필요할 것 같다고, 수영은 세차게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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