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알겠다는 짧은 답신을 확인한 뒤 핸드폰을 제자리에 되돌린 수영이 앞창에 시선을 던졌다.
택시를 탄 뒤 자택 부근의 주소를 부른 그는 예상대로 평상시보다 많이 밀리는 도로의 상황을 눈에 담고서 미간을 좁혔다. 지금의 이 상태면 자택까지 도착하는 데 평소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은 소요될 터였다.
수영이 자택 부근의 주소를 부른 건 물론 윤재의 집 주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윤재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 준 적이 있지만 구체적인 주소까지는 알지 못하는 그는 잠시나마 윤재를 억지로 깨워 그에게서 주소를 들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굳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도, 특별히 급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한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윤재를 일부러 깨울 필요는 없다는 자체적??판단 때문이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수영이 자신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윤재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취기로 인한 열로 평소 하얗기만 하던 윤재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처음 얼마간은 혼자서 피식거리거나 잘 파악되지 않는 말을 낮게 웅얼거리기도 했던 그는 어느 샌가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동료분이신가요? 완전히 뻗으셨네요.”
문득 들려온 기사 아저씨의 말에 잠시 동안 윤재의 속눈썹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앞으로 옮긴 수영이 쓴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동료로 보이나요?”
“아, 아닌가요? 두 분 다 말끔한 옷차림을 하고 계셔서 회사동료 관계인 줄 알았어요. 요 근방에서 태우는 손님은 대개 그런 분들이 많거든요. 회식 뒤에 다 같이 얼큰하게 취한 회사 직원 분들이요.”
택시기사의 말을 들은 수영이 ‘그런가요.’라고 적당히 대꾸를 해주었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런 오해를 받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회사를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를 찾은 자신은 틀림없는 수트 차림이었고 윤재 역시 오늘은 회사 출근 복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법한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세 살의 나이차도 있지만 분위기적으로 차이가 큰 자신과 윤재는 제삼자의 눈으로 볼 때 친구보다는 회사 동료관계로 보일 확률이 높을 거라는 것을 수영은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다.
“손님은 말짱해 보이시는데 동료분만 엄청 마셨나 봐요. 혼자서 이렇게 완전히 취해버리다니 말입니다. 나중에 일어나면 괜한 신세를 지게 됐다고 미안해하시겠어요.”
조금 전 에서 마신 술의 양으로 치면 수영이 마신 양이 훨씬 많았다. 타고난 체질상 티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아까 전 정우 일행과 함께 하며 그가 혼자 마신 술만 해도 양이 꽤 됐다. 그것도 윤재가 마신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높은 도수의 술로.
“이 친구는 술이 많이 약해서요.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푹 곯아떨어졌네요.”
“그런가요. 왠지 귀엽네요. 저도 사회생활 처음 시작했을 땐 그랬죠. 아, 전 별로 귀엽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하하.”
기사 아저씨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줄곧 들려오고 있는 교통방송의 소리를 배경으로 한 차례 좁은 택시 안을 가득 채웠다.
결혼한 뒤부터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가정사를 꺼내기 시작한 그는 한참동안이나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주제로 거의 혼자서 대화를 이어갔다. 뒷좌석에 앉은 수영은 그다지 대화에 임할 마음이 없는 상태였지만, 그간 수많은 고객을 상대해오며 지루한 시간을 메우는 요령을 터득한 듯 보이는 택시기사는 혼자서도 문제없이 대화를 이끌어갔다. 정치 이야기에서 크게 화를 내다가 문득 화제를 바꾸어 이번에 중학교에 올라간 둘째 아들의 성적이 꽤나 잘 나왔다는 자랑을 한창 늘어놓던 그는 마침내 차가 교통체증을 뚫고 행선지에 도착한 뒤에야 수십 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수고하세요.”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고 택시 뒷좌석 문을 닫은 수영은 윤재를 부축한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현관문을 열었다. 곧 익숙한 냄새와 풍경이 그를 맞이했다.
부축하는 내내 말랐다고 해도 성인 남자인 윤재의 무게를 상당부분 지탱해온 수영은 침실 안으로 들어서서 윤재를 침대에 눕힌 뒤 그제야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줄곧 느슨하게 풀려 있던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내고서 근처의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은 그는 외투를 벗기 전 넓은 침대에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 윤재의 모습을 잠시 그대로 지켜보았다.
의식이 있을 때의 윤재가 늘 자신을 향한 경계심을 습관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수영은 더없이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윤재를 바라보는 지금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문득 윤재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언젠가 이와 같은 모습을 정면에서 바라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떠올린 수영은 기시감과 함께 조금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의식이 있는 상태의 윤재라면 결코 자신에게 이와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지 않을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천천히 누워 있는 윤재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런 손길로 그가 걸치고 있는 재킷을 벗겨낸 수영은 취기에 웅얼거리며 몸을 뒤집는 윤재를 다시 천장을 보도록 자세를 바꿔주었다. 이제껏 이 넓은 침대에 눕힌 상대와는 틀림없이 섹스를 해온 그는 그러나 지금 이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만큼은 처음부터 순수하게 재울 목적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애초에 술 취한 상대를 먹어치우는 취미도 없었지만, 만약 그런 취미가 있었다고 해도 결국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무방비로 잠든 윤재를 상대로 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이처럼 잠들어 있는 윤재를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던 수영이 천천히 긴 팔을 뻗어 조심스레 손등으로 윤재의 뺨을 쓸어내렸다. 당장 보기에도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듯 그의 손등에 닿아온 건 조금 높은 체온이었다.
윤재의 뺨에 대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낸 수영이 일순 입가를 비틀었다.
‘무슨 흉내를 내고 있는 건가.’
자기 자신이 아무런 기대 없이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인간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수영은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충동에 의한 행동을 저질러 놓은 지금 뒤늦게 냉정한 이성을 되찾고서 스스로를 비웃고 있었다. 자신은 자선사업가도 아니며 그렇다고 친절한 단골손님 흉내를 낼 마음도 없었다. 무방비한 상대를 데려와서 침대에 눕혀 놓고 기껏 한다는 게 네다섯 살 어린아이들 대하듯 뺨이나 쓸어내리는 행동이라니 그 간지러움에 급격히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의 난폭한 공격에 뒷구멍으로 피를 줄줄 흘려냈던 자들이 지금의 이 장면을 본다면 재미없는 장난은 그만 하라며 비웃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설령 그와 같은 비웃음을 당한다고 해도 수영은 당장 이 이상 윤재에게 손을 댈 마음은 없었다. 지금 윤재를 향해 품고 있는 감정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굳이 비겁한 방법을 동원해 가면서까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며 길게 한숨을 내쉰 수영은 반듯이 누워 있는 윤재의 몸 위로 촉감 좋은 이불을 덮어준 뒤 곧바로 불을 끄고 침실을 나왔다.
*
나른한 몸의 곳곳이 삐걱거리는 통증을 호소했다. 정확히는 무릎 부위와 머리가.
노곤한 상태에서 눈을 뜬 윤재는 낯선 냄새를 인식한 것에 이어 낯선 천장을 시야에 들인 뒤 그 상태로 몇 초간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
이곳이 알지 못하는 장소라는 것을 분명히 파악한 것과 동시에 윤재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본 그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모두가 낯선 것들뿐이었다.
두터운 원목으로 만들어진 킹사이즈의 침대,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 몇 가지 종류의 가구들, 넓은 창을 완전히 덮고 있는 블라인드, 하얀 벽에 걸려 있는 작은 시계.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모르는 장소인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한 윤재가 곧바로 침대 아래로 내려서다 문득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가까스로 옆의 벽을 짚어 버텼다. 눈을 뜬 순간부터 통증이 느껴지던 무릎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간 탓에 하마터면 그대로 쓰러질 뻔한 그였다.
아무래도 어제 하루 차를 이용하지 않고 오랫동안 걸은 것이 무릎에 무리를 준 듯했다. 가능하면 무리해서 걷지 말라는 주치의의 당부가 뒤늦게 머릿속에 떠오른 윤재는 어쨌든 아픈 무릎에 애써 힘을 실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나중으로 돌리고서라도 당장 이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히 파악해야만 했다.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침실 밖으로 나온 윤재가 문득 멀찍이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듯 드문드문 이어지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그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남자의 것이었다.
“오후는 캔슬이지만 저녁때엔 참석할 거야. 혹시 그 사이 장소 변경이 있으면 따로 연락해줘. 특별한 문제만 없으면 참석할 테니까... 알아, 석현이한테 부탁해놓은 것도 받아야 하니까 일단은 잠깐 들리기라도 할 거야. 뭐, 그건 큰 문제만 없으면...”
문득 등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뒤를 돌아본 수영이 방문 앞에 서있는 윤재의 모습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말을 멈췄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저녁땐 참석할게. 이따가 봐.”
조금 서둘러 통화를 끝낸 수영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근처에 있는 책상에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회사에서 가져온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터라 전원이 들어와 있는 컴퓨터 옆에는 몇 가지 서류들이 조금 흐트러진 채로 쌓여 있었다.
잠시 윤재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둔 수영이 책상에 기대앉아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일어났어?”
“.......”
어딘가 혼란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침묵을 지킨 윤재가 한참만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왜 제가 여기에 있는 거죠?”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질문을 받은 수영이 곧바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 아르바이트생... 이름이 성호라고 했던가. 성호한테서 멋대로 널 인계받았어. 얼마 전에 너를 집까지 바래다 준 적이 있다고 말하고서. 사실은 집 근처까지가 정확한 말이지만.”
“...당신도 그 가게에 있었던 건가요?”
“그래.”
이런 걸 단순한 우연이라고 넘길 수 있는 것인지 조금 혼란스러워진 윤재가 미간을 좁힌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째서 절 여기로 데려왔죠? 절 안다고 해도 당신의 입장에선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됐잖아요?”
진지한 의문이 담겨 있는 윤재의 질문을 받은 수영이 일순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생각이 아닌 충동에 의한 행동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굳이 그 부분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성호가 어떡해야 할지를 두고 곤란해 하길래 널 아는 입장에서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야.”
“성호에겐 절 어떻게 안다고 말한 거예요?”
접근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수영이 예전의 일을 성호에게 말한 게 아닐까 하는 우려를 내비치고 있는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들려온 수영의 대답을 듣고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너와 잤다고.”
“!”
거기서 짧게 말을 끊은 수영이 이내 희미하게 입가를 비틀고서 말을 이었다.
“는 말 안했어. 그걸 남한테 알려서 굳이 이득볼 일도 없고.”
이어진 말을 들은 뒤에도 쉽사리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는 윤재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그냥 지나던 길에 우연히 널 보고 멋대로 데려온 것뿐이니까. 그게 전부야. 물론 네가 자는 동안 난 너한테 아무 짓도 안했고.”
수영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는 윤재였다. 일어나서 살핀 옷매무새도 흐트러진 부분이 없었고, 몸의 은밀한 부분에서 느껴지는 통증이나 위화감도 없었다. 애초에 수영이 그럴 생각으로 자신을 데려왔다면 아무 행동도 없이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 리는 없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되어서 몸을 사리는 처녀 같은 행동을 보이고 싶은 추호도 마음은 없는 윤재는 잠시나마 그런 방향으로 수영을 의심한 스스로를 비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몇 년 전 그렇게 냉정히 돌아섰던 수영이 이제 와서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리가 없었다.
“이만 갈게요. 본의 아니게 신세를 졌네요. 나중에 가게에 오시면 식사를...”
전체적 상황을 파악한 윤재가 이쯤에서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고픈 마음으로 말을 꺼내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수영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벌써 이런데 배고프지 않아?”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윤재가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배가 고픈 건지 아니면 숙취의 후유증에 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금 당장 속이 굉장히 쓰린 상태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불편한 상황에서 순순히 사실을 말할 생각은 없는 윤재는 잠시 텀을 두고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밥 먹고 가.”
“!”
갑작스런 제안에 놀란 표정을 짓는 윤재를 잠시 동안 말없이 쳐다보던 수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근처에 내려놓고서 줄곧 책상에 걸치듯이 대고 있던 엉덩이를 떼어냈다. 윤재의 곁을 스쳐 지나는 그가 가볍게 하품을 했다. 소파에서 잠을 청한 뒤 불편한 잠자리에 결국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깬 그는 그 뒤로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는 이 시간까지 꼬박 몇 시간 동안 회사에서 들고 온 서류를 붙들고 있었던 터라 이제야 뒤늦게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저녁에는 제법 큼직한 연말 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만큼 미리 조금은 자두는 편이 좋았지만, 지금의 수영은 수면보다 앞서 식욕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어젯밤 술을 마신 뒤로 위에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상태인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화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주방으로 향하는 수영의 뒷모습을 잠시 서서 바라보던 윤재가 어쩔 수 없이 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해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무릎에서 통증을 느끼고 있는 윤재의 미간이 간헐적으로 좁혀졌다.
주방으로 들어선 수영은 곧바로 가스레인지에 불을 넣었다. 위에 올려진 냄비 안에 있는 정체가 무엇인지는 잠시 후 주위에 퍼져나가기 시작한 냄새로 얼핏 파악이 가능했다. 익숙한 냄새를 통해 아마도 콩나물국일 거라고 윤재는 짐작했다.
“저는 생각 없어요. 별로 식욕도 없고요.”
“없어도 먹어. 한바탕 술이 들어간 위에는 뭐라도 집어넣는 게 좋아. 오늘도 가게 문 열 거 아냐?”
“.......”
“아니면 잠깐 자비를 베푼다고 생각해. 나도 가끔은 혼자 먹기 싫을 때가 있으니까.”
이어진 수영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속으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지 자비라는 말까지 나올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수영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닐 테지만. 자신이 원하던 원치 않았던 결과적으로 수영의 신세를 지게 된 것은 사실인 만큼 겨우 같이 밥을 먹자는 정도의 소소한 제안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도 윤재는 내키지 않았다. 거기에 지금 당장 속이 쓰린 상태인 것도 사실이었다.
“...도울 건 없나요?”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들을 접시에 옮기지 않고 통째로 식탁으로 옮기는 수영을 보며 윤재가 물었다.
“없어. 그냥 앉아 있어. 어차피 차릴 만한 것도 별로 없으니까.”
그 말 그대로 식탁에 올라온 밑반찬은 멸치볶음과 콩자반, 오이소박이의 세 종류뿐이었다.
그래도 밥은 새로 지어놨는지 비싸 보이는 도자기 밥그릇에 담겨 나온 쌀밥은 딱 좋은 상태의 기름기와 빛깔을 품고 있었다.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냄비 안의 국을 국그릇에 옮겨 담는 수영의 모습은 어딘가 묘하게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딱 봐도 요리와는 전혀 인연이 없을 듯한 남자이지만 실제의 상황과는 별개로 미남은 어딜 가나 그림이 되는 법인 듯 했다. 윤재가 가게에서 봐온 것과 달리 모처럼 집에서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는 수영은 지금 머리의 세팅도 전혀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지금의 수영을 보는 윤재의 얼굴에서는 평상시와 달리 그다지 경계심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밤새 무방비한 상태로 있었음에도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상황이 자연스레 그로 하여금 경계를 풀게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국과 밥, 세 가지 밑반찬이 전부인 조촐한 식탁.
“먹어.”
간단히 상을 차리고 자리에 앉은 수영이 자신이 먼저 국그릇에 숟가락을 담그며 말했다.
몇 숟가락 국을 떠서 입으로 옮기는 수영의 모습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윤재도 조금 늦게 숟가락을 들어 국그릇에 담갔다.
맑은 빛 국물에 콩나물과 파가 섞여 있는 국은 굉장히 심플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윤재가 몇 숟가락을 떠서 먹어 본 결과 맛도 외형만큼이나 깔끔했다. 아마도 소금만으로 간을 한 듯 보였다.
“싱겁지 않아?”
“...원래 좀 싱겁게 먹는 편이어서 괜찮아요.”
“그래?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네.”
입에 맞는다고까지는 하지 않았는데요-라는 말을 눌러 삼킨 윤재가 적막한 공기를 깨고 말을 이었다.
“평소 집에서 직접 요리도 하나보네요.”
윤재의 말을 들은 것과 동시에 고개를 든 수영이 이내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그래 보여?”
“.......”
말 대신 표정으로 ‘아니요’라고 말하는 윤재를 슬쩍 쳐다보고서 다시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한 수영이 말을 이었다.
“콩나물국은 해장용으로 몇 번 끓인 적이 있어. 일단 다른 국보다 끓이기가 편하니까. 그 외의 요리라곤 쌀 씻고 버튼 누르는 거랑 라면 끓이는 정도랄까. 그 이상으로 손이 가는 건 그냥 나가서 사먹고.”
수영의 대답을 들은 윤재는 속으로 ‘역시’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지금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국은 수영이 그나마 끓일 수 있는 하나뿐인 메뉴인 셈이었다. 조금 전 눈앞의 남자가 능숙하게 요리를 하는 장면을 잠시나마 상상했던 윤재는 지금의 이 심심한 국물 맛이 의도된 것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고요한 주방을 채우는 것이라곤 간간이 들리는 식기 소리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식사 중에는 대화를 하지 않는 게 예의라는 교육을 받아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당장 두 사람이 대화로 이어갈 화제가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공기에서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술은 왜 그렇게 취할 때까지 마신 거야?”
문득 들려온 질문에 고개를 든 윤재가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채로 대답했다.
“처음 마시는 술이었는데 별로 쓴 맛이 나지 않아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성호도 이 정도 술은 주스나 마찬가지라고 말해서 크게 긴장하지 않고 마시다 보니까 어느새 조금씩 취하더라고요.”
“취하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던데. 개가 돼서 날뛰는 것도 문제지만 만취해서 필름 끊기는 것도 위험한 거 알아? 특히 자신한테.”
어젯밤 윤재의 허리를 손으로 만지고 있던 남자를 머릿속에 떠올린 수영이 진지해진 목소리로 묻자 잠시 텀을 두고 윤재가 대답했다.
“다행히 이제까지 소매치기 당한 적은 없었어요. 평소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마신 적도 없지만요.”
소매치기보다 강간이 더 걱정된다는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수영이 그 대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가족도 연인도, 하다못해 친구도 아닌 자신이 이렇듯 진지한 걱정으로 조언을 하고 있는 이 상황은. 윤재의 입장에선 괜한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들만도 했지만 어쨌든 수영은 짧게라도 한 번은 주의를 주고 넘어가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긴 시간을 들여 느긋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그 사이 빈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기는 윤재를 쳐다보았다.
“그냥 둬. 설거지는 내가 나중에 할 거니까.”
“그냥 지금 제가 할게요. 그게 마음이 편해요.”
하룻밤 침대를 빌리고 밥까지 얻어먹은 상태에서 뒤처리도 없이 그냥 돌아가는 것은 평소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는 윤재에게 있어 더없이 불편한 일이었다.
결국 고집대로 몇 개 되지 않는 식기를 깨끗이 씻어놓고 몸을 돌린 윤재가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영을 발견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몇 분전 몸을 돌려 서재로 향하는가 싶던 수영이 언제부터인가 의자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먹었어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다리 아프잖아. 차로 바래다줄게.”
어떻게 아느냐고 눈으로 묻는 윤재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수영이 대답했다.
“아까 보니까 걸을 때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데. 안 그래도 어제 성호가 나한테 널 무리하게 걷게 만든 것 같으니 좀 주의해서 봐달라고 부탁했었어.”
수영의 대답을 들은 윤재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제 와서의 이야기지만 확실히 수영은 예리한 구석이 있어 대하기 쉽지 않은 상대라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나갈 거니까 간단히 세수하고 와. 일회용 칫솔도 꺼내놨어. 난 그동안 외출 준비 좀 할게. 욕실은 나가서 오른쪽에 붙어 있어.”
그렇게 말한 수영이 몸을 일으켜 주방을 나섰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밤새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머리를 식힐 겸 새벽 3시쯤 택시를 잡아타고 에 가서 자신의 차를 가져왔었다. 가장 큰 목적은 차 뒷좌석에 놓여 있던 서류가방이었지만.
수영이 어디론가 향하고 난 뒤 홀로 주방에 남겨진 윤재는 잠시 가만히 서서 뭔가를 생각하다 천천히 발을 뗐다.
‘으...’
역시 무릎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제 저녁 공연장에서부터 줄곧 서있었던 데다 지하철을 타는 중간 많은 걸음을 걸었던 탓일 터였다.
‘오늘도 가게 문을 열어야 하는데...’
현실적인 걱정을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윤재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주방을 나서 욕실로 향했다. 그 사이 그의 입에선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긴 한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여기서 내릴게요.”
전에 내렸던 부근에서 내리겠다는 윤재의 말에 수영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집이 어디야?”
“...이 근처에요.”
“그러니까 어디냐고?”
묘하게 끈질기게 물어오는 수영을 조금 당혹스런 표정으로 쳐다본 윤재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집까지 못 걸어 갈까봐 그래요? 다리가 조금 아픈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는...”
“그 문제가 아니라...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차나 한 잔 얻어먹고 가려고.”
“!”
생각지 못한 수영의 말을 들은 윤재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도 수영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윤재였다. 지금 들은 게 혹시 개그프로에 나오는 신종 유행 개그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진지하게 들 정도였다.
그런 윤재의 복잡한 머릿속을 짐작해낸 것일까, 스치듯 미소를 머금은 수영이 운전대를 쥐고 있는 쪽의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정오네. 슬슬 집에 들어가서 씻고 가게 열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나도 저녁엔 약속이 있거든. 그 전에 들를 곳도 있고.”
“.......”
“차 한 잔만 내줘. 마시고 곧 갈 테니까.”
목적은 차(茶)가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의 차원에서 윤재가 살고 있는 집을 한 번은 보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물론 수영은 그 속내를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역시나 싫은지 좀처럼 대답하지 않는 윤재에게 시선을 던진 수영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그 역시 지금 여기에서 물러설 마음은 없었다. 여차 하면 저녁 약속도 캔슬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였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간 수영이 문득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까지 대체 무엇에 기준을 두고서 일상을 포기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진 그였다. 오늘만 하더라도 그는 가장 중요한 저녁 모임을 뺀 두 개의 자리를 일찌감치 취소해놓은 상태였다.
“정 내키지 않으면 이대로 카페라도 갈까. 한강 근처에 제법 분위기가 괜찮은 카페를 아는데 거기로...”
그렇게 말하며 차를 출발시키려하는 수영의 팔을 윤재가 급하게 붙잡았다. 집을 공개하는 것은 원치 않는 그였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불필요한 시간을 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스턴트커피밖에 없어요.”
“상관없어.”
“...정말로 그것만 마시고 갈 거죠?”
“말했잖아. 나도 오늘은 하루 종일 바쁘다고.”
특유의 시니컬한 말투로 대답한 수영이 옆에서 긴 한숨을 내쉬는 윤재를 잠시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숙취로 인해 너무 많이 잔 탓일까, 윤재의 얼굴에선 비정상적인 노곤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저 앞에서 우회전해서 골목으로 들어가야 해요.”
체념 섞인 윤재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곧바로 운전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실었다. 이렇듯 뭔가를 끈질기게 요구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 그는 어째서인지 지금 평소의 그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어젯밤 에서 윤재를 데리고 나온 시점에서 크게 흐트러진 이성이 지금까지도 흐트러진 상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재의 안내에 따라 낡은 빌라 앞에 적당히 차를 멈춰 세운 수영이 먼저 내린 윤재에 이어 자신도 운전석에서 내렸다.
“몇 층이야?”
“3층이요.”
집안은 수영의 생각보다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건물 외형이 워낙 낡은 탓에 내부 역시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수영은 윤재의 권유에 따라 좁은 거실 한 켠에 놓여 있는 싸구려 소파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커피를 끓여 오겠다고 주방으로 향하는 윤재의 걸음이 확실히 평소보다 많이 절뚝거리는 것을 확인한 수영이 미간을 좁혔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
자신의 집과 비교하면 5분의 1도 되지 않는 좁은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던 수영이 문득 베란다 문 근처에 놓인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확히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스케치북에.
주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몇 걸음을 옮겨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허름한 골목의 풍경.
가로등의 불빛을 받은 어스름한 골목은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가로등 옆에 주차되어 있는 차 위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인적이 사라진 골목길 구석엔 작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반쯤 내민 채 그려져 있었다.
잠시 스케치북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긴 수영은 닫힌 베란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확인하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예상대로 눈앞의 풍경은 조금 전에 본, 스케치북에 담긴 골목길의 전경과 꼭 닮아 있었다.
홀로 이 자리를 지키며 바라본 풍경은 윤재의 눈에 이렇게나 쓸쓸하게 비쳤던 것일까. 그가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늘 어스름한 새벽녘이었을 터였다. 지나는 행인 한 사람 찾기도 어려운. 그와 같은 고요한 광경을 윤재는 이 자리에서 몇 번이나 보았을까.
잠시 후 주방에서 나오는 윤재의 기척을 느끼고서 몸을 돌린 수영이 손에 든 스케치북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잘 그리네.”
“...그냥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옮긴 것뿐이에요.”
그렇게 대답하며 수영의 곁으로 다가온 윤재가 작은 쟁반에 담겨 있던 머그컵을 근처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평소 회사에서 가끔씩 마셔 와서 꽤나 익숙한 인스턴트커피 향을 먼저 코로 접한 수영은 아직 뜨거운 김을 내고 있는 커피를 스치듯 쳐다본 뒤 근처의 소파에 천천히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지은 지 오래된 낡은 빌라의 천장은 낮아서 장신인 그가 서있으면 꽉 차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가게 문 닫고 돌아오면 몇 시쯤 돼?”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고개를 든 윤재가 곧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시 가까이쯤 되는 것 같아요.”
“잠은 그때부터 자는 거야?”
“귀가한 뒤에 바로 잘 때도 있지만 가끔씩 잠이 오지 않을 때는 tv를 보거나 하죠.”
“아니면 그림을 그리거나?”
수영이 테이블에 놓인 스케치북을 쳐다보며 묻자 윤재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취미로 그린다고 보기에 조금 전 수영이 본 그림은 무척이나 괜찮은 느낌을 주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레 윤재가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걸 안타깝게 생각하게 만들 정도의 실력이었다.
어느 정도 식은 커피를 몇 모금 목안으로 흘려 넘긴 수영이 베란다 앞에 서있는 윤재를 쳐다보았다. 잠시 동안 베란다의 유리창 너머로 근처를 지나는 행인을 바라보고 있던 윤재가 뒤늦게 수영의 시선을 알아채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왔다.
“혼자 여기서 지내면 쓸쓸하지 않아?”
어째서 불쑥 그 질문이 나왔는지는 말을 뱉은 수영조차 알 수 없었다.
뜻밖의 질문을 들은 윤재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나와 헤어진 뒤로 누군가와 사귄 적은 있을 거 아냐?”
정확히는 헤어진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버림받은 것이었지만 수영은 ‘헤어졌다’는 에두른 표현을 사용했다. 윤재도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고 나서지는 않았다.
“누군가와 있는 편이 혼자보다는 낫잖아.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 세상이 온통 핑크빛으로 보인다고도 하던데.”
이어지는 수영의 말을 들은 윤재는 당장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수영을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어 천천히 베란다 너머의 풍경으로 옮긴 그는 잠시 후 보일 듯 말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 전 수영이 보았던 스케치북 안의 풍경만큼이나 쓸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이제 그런 감정은... 믿지 않아요.”
한참 만에 들려온 윤재의 대답을 들은 순간 수영은 무언가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 막 입안으로 흘려 넘긴 커피의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주변을 채우고 있는 사물의 색이 일시에 빛을 잃고 희뿌옇게 바래진 것만 같았다.
“그만 갈게. 커피, 잘 마셨어.”
이후 무의미한 대화를 좀 더 이어가다가 적당한 타이밍에서 시간을 확인하고 긴 몸을 일으킨 수영은 좁은 현관에서 윤재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문을 나섰다. 곧바로 계단을 내려와 빌라 입구를 빠져나온 그는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 승용차에 시동을 걸고 운전석에 오른 뒤 히터도 틀지 않은 채 시트에 깊이 등을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하, 대체 뭘 하는 건지.’
입가를 비튼 수영이 커다란 손을 들어 천천히 얼굴을 덮었다.
아까 전 들었던 한 마디가 각인처럼 귓가에 박혀와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을 가볍게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차가 허름한 골목을 떠난 건 그 후로 몇 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